잠언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9장 · 지혜를 찾으라는 권면
두 여자의 초대와 문 안에 감추어진 것
잠언 9장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두 여자 모두 자기 집이 있고, 성읍의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들이 초대하는 대상도 같고, 사용하는 말도 같습니다. 「미숙한 이는 누구든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한 여자는 지혜이고, 다른 여자는 어리석음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일은 쉬워 보입니다. 지혜는 옳은 것을 가르치고, 어리석음은 그릇된 것을 가르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언 9장은 그렇게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음도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그녀 역시 즐거움을 약속하고, 자신에게 오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여자의 초대는 겉모습부터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형식을 취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야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 장이 묻는 것은 단순히 어느 길이 옳은지 아느냐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모두 자신에게 오라고 부를 때, 무엇을 근거로 그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초대 사이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비웃는 사람이 책망을 받았을 때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는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잔치와 관계없는 교훈처럼 보이지만, 바로 여기에 어느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지혜는 먼저 집을 짓고 식탁을 차렸다
지혜가 자기 집을 지었다. 자기 기둥 일곱 개를 깎았다.잠언 9:1 · 본디새김
잠언 8장에서 지혜는 성읍의 길목에 서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9장에서도 사람들을 부르지만, 이번에는 먼저 자신의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지혜의 초대가 단순히 몇 마디 좋은 말을 들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혜는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들여 함께 식사하려 합니다.
그 집에는 일곱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일곱 기둥은 지혜의 집이 넉넉하고 견고하게 마련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지혜는 사람들을 아무 준비 없이 불러 모으지 않습니다.
자기 짐승을 잡고 자기 포도주를 섞었으며, 자기 상도 차렸다.잠언 9:2 · 본디새김
고기와 포도주가 있는 식사는 일상적인 끼니보다 풍성한 잔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준비하고 상을 차렸다는 표현은 손님을 맞을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가 사람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은 손님들이 가져와야 할 음식이 아닙니다. 지혜 자신이 마련한 음식입니다. 이 점에서 지혜의 집은 교육의 장소이면서 환대의 장소입니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격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준비한 식탁에 와서 먹으라고 말합니다. 지혜를 얻는 일이 처음부터 인간의 독립적인 성취로만 제시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시녀들을 보내고, 성읍의 높은 곳 꼭대기에서 외쳤다.잠언 9:3 · 본디새김
지혜는 손님이 우연히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시녀들을 보내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높은 곳에서 직접 외칩니다. 지혜의 초대에는 준비와 적극적인 부름이 함께 있습니다.
지혜는 얻기 어려울 만큼 귀하지만,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초대를 받을 사람들은 뜻밖에도 아직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건축에서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물이며, 규모와 견고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완전함이나 충만함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기둥들이 일곱 가지 덕목이나 지혜의 일곱 단계를 각각 상징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잠언은 기둥의 이름을 알려 주지도 않고, 그 의미를 따로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포도주를 섞었다」는 말은 포도주를 다른 재료와 혼합하여 준비하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본문만으로 무엇을 얼마나 섞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혜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떠나야 하는가
「미숙한 이는 누구든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분별이 모자란 이에게 지혜가 말했다.잠언 9:4 · 본디새김
지혜는 이미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별하여 초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별이 모자란 사람을 부릅니다. 그곳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뛰어남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직 배워야 할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자기 쪽으로 오라고 합니다.
이 초대에는 움직임이 요구됩니다.
길을 가던 사람은 지혜의 집에 들어가려면 자신이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지혜가 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더라도, 초대받은 사람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면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포도주를 마셔라.」잠언 9:5 · 본디새김
음식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남이 먹는 것을 구경하거나 음식에 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배가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를 배우는 일도 좋은 말을 듣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일부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먹고 마시라는 초대에 곧바로 다음 명령을 덧붙입니다.
「미숙한 이들을 떠나라. 살아라. 분별의 길로 곧게 나아가라.」잠언 9:6 · 본디새김
여기에는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 이즈부 프타임은 미숙한 이들을 떠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미숙한 사람들의 무리나 그들과 함께하는 생활방식을 떠나라는 권고가 됩니다. 반면 미숙함 자체를 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의 미숙한 태도를 버리고 지혜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지혜의 초대가 단지 즐거운 식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지혜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따르던 어떤 삶의 방식을 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살아라」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 「분별의 길로 곧게 나아가라」라고 명령합니다. 생명과 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잠언에서 생명은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길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지혜가 손님을 불러 먹이는 목적은 그들이 영원히 식탁에 머물게 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분별의 길을 걸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갑자기 책망과 훈계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똑같은 책망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선물이 된다
「비웃는 이를 훈계하는 이는 스스로 수치를 얻고, 악한 이를 책망하는 이는 스스로 흠을 입는다.」잠언 9: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지혜가 미숙한 사람들을 누구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사람을 훈계하면 오히려 훈계하는 사람이 수치를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 답은 미숙한 사람과 비웃는 사람의 차이에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아직 충분히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판단력이 부족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지만, 배움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반면 비웃는 사람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말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잠언 1:22에서도 비웃는 사람들은 비웃는 일을 즐기며,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식을 미워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비웃음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배우기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비웃는 이가 너를 미워하지 않도록 그를 책망하지 말아라. 지혜로운 이를 책망하여라. 그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잠언 9:8 · 본디새김
똑같이 책망을 받아도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지를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하는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말하는지를 보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지혜로워집니다.
「지혜로운 이에게 주어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다. 의로운 이에게 알려 주어라. 그가 배움을 더할 것이다.」잠언 9:9 · 본디새김
지혜로운 사람도 더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도 배움을 더해야 합니다. 따라서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움은 완성된 상태라기보다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여전히 배울 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계속 자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는 것은 처음부터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9:8의 「그를 책망하지 말아라」를 잘못된 사람은 결코 바로잡으려 하지 말라는 절대적인 금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책망을 받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훈계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완강하게 조롱하는 사람에게 계속 같은 방식으로 책망하는 것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 갈등과 적대감만 키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분별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은 그 차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이며, 거룩한 이를 아는 것이 분별이다.」잠언 9:1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잠언 1:7을 떠올리게 합니다. 잠언은 처음부터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여러 장에 걸쳐 지혜로운 삶과 어리석은 삶을 보여 준 뒤, 1–9장의 긴 가르침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그 모든 가르침의 근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바로 앞 단락의 비웃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비웃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쉽게 수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고 교정받을 수 있는 태도입니다.
「거룩한 이를 아는 것」은 무슨 뜻인가
「거룩한 이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도심(קָדוֹשׁ)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형태만 놓고 보면 「거룩한 이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앞 행의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복수형은 하나님을 높여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두 행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서로 대응합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 표현을 복수의 거룩한 존재들과 관련된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앞 행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해석의 문제가 됩니다.
잠언 30:3에도 거룩한 이에 대한 앎을 언급하는 유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용례만으로 9:10의 복수형이 가리키는 대상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상으로는 앞 행의 여호와야훼와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히브리어 형태가 갖는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언제나 단순한 정보 습득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인정하고, 그에 맞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하느냐가 인간의 판단과 태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나를 통해 네 날들이 늘어나고, 네게 삶의 햇수가 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9:11 · 본디새김
여기의 「나를 통해」는 지혜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9:7부터 이어지는 가르침 전체가 지혜의 직접 발언인지, 중간에 교훈을 전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들어왔는지는 본문에 명시적인 전환 표시가 없어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신중한 판단과 절제, 올바른 관계는 실제로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오래 살고, 일찍 죽은 사람은 지혜롭지 못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삶의 일반적인 질서와 그 안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을 가르치는 지혜 문학입니다. 모든 개인의 수명을 정확히 예측하는 규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지혜롭다면 너 자신을 위해 지혜로운 것이고, 네가 비웃는다면 너 혼자 짊어질 것이다.」잠언 9:1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 8:15–16에서 왕과 통치자들이 지혜로 다스린다고 했던 것처럼, 지혜로운 선택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9:12가 강조하는 것은 선택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입니다.
누군가가 지혜를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보여 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잠언은 이제 독자가 어느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마지막 장면을 펼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모습은 신명기 30:15–20의 말씀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복, 죽음과 재앙이 놓여 있다고 말하며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생명은 단순히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굳게 붙드는 삶과 연결됩니다. 잠언 9장 역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나란히 보여 주지만, 두 길을 추상적인 원칙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길에 집을 세우고, 그 집의 주인이 손님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리석음은 지혜의 모습을 흉내 낸다
어리석음은 소란스러운 여자였다. 미숙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잠언 9:13 · 본디새김
지혜의 집이 등장한 뒤, 이제 어리석음의 집이 등장합니다.
지혜는 집을 짓고, 기둥을 깎고, 음식을 준비하고, 시녀들을 보냈습니다. 반면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그런 준비가 묘사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소란스럽다고 소개됩니다.
「소란스러운」은 시끄럽고 떠들썩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잠언 7:11에서 낯선 여자를 묘사할 때에도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잠언 7장의 여자는 큰 목소리와 적극적인 유혹으로 한 젊은이를 사로잡았습니다. 잠언 9장은 그러한 유혹의 모습을 어리석음이라는 인물 안에 다시 모아 놓습니다.
지혜는 분별이 모자란 사람을 부르지만, 자신에게 가르쳐 줄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음도 똑같이 분별이 모자란 사람을 부르지만, 자신도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분별은 없습니다.
자기 집 문간에서, 성읍의 높은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잠언 9:14 · 본디새김
지혜는 손님을 위해 바쁘게 준비했습니다. 어리석음은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게으름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의 대비는 분명합니다. 지혜는 자신이 준비한 것을 먼저 제시하지만,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혜와 같은 성읍의 높은 곳에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초대는 사람들이 찾아갈 수 없는 외진 장소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길을 지나가는 이들, 자기 길을 곧게 가는 이들을 부르려는 것이었다.잠언 9:15 · 본디새김
그녀는 이미 잘못된 길을 헤매는 사람들만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길을 곧게 가는 사람들도 부릅니다. 어리석음의 유혹은 길을 잃은 사람만을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은 반드시 더 나쁜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며 발길을 돌리게 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외치는 말이 등장합니다.
「미숙한 이는 누구든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분별이 모자란 이에게 그 여자가 말했다.잠언 9:16 · 본디새김
이 말은 지혜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9:4와 9:16의 히브리어 초대 문구는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의 초대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리석음의 초대를 듣습니다. 그런데 초대의 첫 문장만으로는 둘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돌아선 다음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반드시 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의 차이를 충분히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훔친 물이 왜 더 달게 느껴지는가
어리석음이 내놓는 잔치의 내용은 단 한 구절로 소개됩니다.
「훔친 물은 달고, 몰래 먹는 빵은 맛있다.」잠언 9:17 · 본디새김
지혜는 자신이 마련한 것을 손님에게 제공합니다. 어리석음은 훔친 것과 몰래 먹는 것을 권합니다.
어리석음은 음식 자체가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물이 더 깨끗하다거나 빵이 더 풍성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평범한 물이라도 훔쳐 마시면 더 달게 느껴지고, 평범한 빵이라도 남몰래 먹으면 더 맛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예리하게 포착한 표현입니다.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 남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만 특별한 즐거움을 누린다는 느낌이 그 대상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무엇이 옳은지에 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선택이 삶을 어디로 이끄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달고 맛있다고 합니다.
잠언 9:17의 「훔친 물」은 금지된 성적 관계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 9장의 어리석음은 특정한 성적 유혹만을 가리키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녀는 어리석음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금지된 성적 관계를 포함하여, 잘못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여러 종류의 유혹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잔치에서는 손님이 초대받아 먹습니다. 손님은 훔칠 필요도 없고, 몰래 숨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혜가 제공하는 기쁨은 떳떳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어리석음이 제안하는 기쁨은 감추어야 한다는 사실에 의존합니다.
이 차이는 즐거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9장은 지혜의 집에도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문제는 즐거움을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즐거움을 달콤하게 만드는가에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사람들에게 맛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어디에서 왔으며, 먹은 다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어리석음의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5:15–18에서는 자기 우물의 물을 마시고 자신의 샘을 즐거워하라는 표현을 통해 부부의 신실한 관계를 가르칩니다. 그 문맥에서 물은 사랑과 성적 관계를 비유하는 이미지입니다. 특히 앞서 잠언 7장에서 은밀한 만남을 권하던 여자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훔친 물」과 금지된 성적 관계의 연결은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손님은 자신이 어디에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죽은 이들의 혼령이 있다는 것을, 그 여자가 초대한 이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잠언 9:18 · 본디새김
잠언 9장은 이 한 구절로 끝납니다.
어리석음의 집에 들어간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먹었는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알지 못한 것만을 알려 줍니다.
앞에서 어리석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9:13). 그런데 이제 그녀의 집을 찾아온 사람 역시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들어온 집에 누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 집에는 죽은 이들의 혼령이 있습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이 사후 세계의 구체적인 구조를 설명하거나, 특정한 사후 심판의 장소를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음의 집이 생명의 장소가 아니라 죽음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여자가 초대한 이들」이라는 표현은 앞서 지혜가 손님들을 초대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여자 모두 사람들을 부릅니다. 하지만 지혜가 부른 사람들은 생명으로 나아가고, 어리석음이 부른 사람들은 스올 깊은 곳에 있습니다.
왜 어리석음의 집은 처음부터 죽음의 집이라고 밝히지 않았을까
본문은 9:13에서 어리석음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집 안에 죽은 이들의 혼령이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야 알려 줍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독자가 유혹의 과정을 따라가게 합니다.
어리석음은 처음부터 죽음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달콤한 것을 맛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9:15의 표현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어리석음은 자기 길을 곧게 가는 사람들까지 불러들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스올을 향해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원래 가던 길에서 벗어나 초대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어리석음은 사람에게 목적지를 보여 주지 않은 채, 그곳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달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초대 사이에 놓인 하나의 기준
잠언 9장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면, 앞부분에는 지혜의 초대가 있고 뒷부분에는 어리석음의 초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책망을 받는 사람의 태도에 관한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가 자신을 초대한다는 사실이나 그 말이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사실만으로는 어느 쪽이 지혜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목소리는 나에게 배우라고 합니까, 아니면 지금 느끼는 욕망을 따르라고만 합니까? 그 목소리는 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합니까, 아니면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말만 합니까? 그 목소리는 내가 걸어갈 길을 보여 줍니까, 아니면 당장 맛있게 느껴질 것만 이야기합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비웃는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결국 비웃는 사람은 자기를 바로잡을 수 있는 목소리를 밀어내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목소리에 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근원에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일 수 있는 목소리들 속에서 올바른 길을 분별하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사람이 지혜로운 이유는 한 번도 잘못된 길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을 바로잡을 때 그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혜의 집은 열려 있습니다.
잠언 9장은 지혜의 집에서 실제로 어떤 손님들이 식사를 마쳤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의 집으로 향하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돌아섰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두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선택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합니다.
대신 두 집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한 집에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손님을 부르며 빵과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그 식탁에서 생명의 길이 시작됩니다.
다른 집에서는 훔친 물과 몰래 먹는 빵이 달콤하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문 안쪽에는 그 소리가 알려 주지 않은 손님들이 있습니다.
두 집 모두 사람을 부르지만, 한 집은 들어와서 살라고 하고, 다른 집은 달콤하다고만 말합니다.
잠언 9장은 그 차이를 독자에게 보여 준 뒤, 어느 집으로 발길을 돌릴 것인지 더 이상 대신 말해 주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