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기초가 무너져도 하늘에는 왕좌가 있다

시편 11편은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도망치라고 권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새야, 너희 산으로 달아나라.」는 권고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들이 이미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얹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마음이 곧은 사람들을 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지탱하던 기초들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라는 말은 어리석게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의 충고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단호하게 「나는 여호와야훼에게 피신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신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실제로 위험한 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일까요? 아무리 위험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므로 몸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요?

시편을 끝까지 읽으면 그것보다 깊은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실제로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땅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하늘의 왕좌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편은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눈에 보이는 질서가 무너지고 악인들이 힘을 얻는 상황에서, 무엇을 가장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요?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11편 본문 읽기 →

도망치라는 말에 담긴 두려움

시편 11:1–3 본문 →

지휘자를 위하여. 다윗의 것. 나는 여호와야훼에게 피신했다. 너희는 어찌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가? 「새야, 너희 산으로 달아나라.」시편 11:1 · 본디새김

시인은 먼저 자신이 어디에 피신했는지 밝힙니다.

그곳은 특정한 산이나 요새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 간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고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시편 10편에서는 하나님이 왜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는지 질문하며 그분께 행동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편에서는 그런 간구보다, 위협 앞에서 어떤 말을 믿고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전면에 놓입니다.

새처럼 달아나라는 말

이 표현이 전달하는 장면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위험에 처한 새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산으로 날아가듯, 시인에게도 지금 있는 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전쟁과 추격 상황에서 산악 지형은 숨거나 추격을 피하기에 유리한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산의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도망치라는 충고가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권고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아라, 악인들이 활을 당기며 어둠 속에서 마음이 곧은 이들을 쏘려고 제 화살을 시위에 얹었기 때문이다.」시편 11:2 · 본디새김

악인들이 언젠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격할 준비가 거의 끝난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들이 ‘어둠 속에서’ 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서는 공격자를 보거나 위험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공격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정면으로 맞서는 전투보다 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숨어 있으며,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격 대상은 ‘마음이 곧은 이들’입니다. 그들이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공격받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곧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기초들이 무너지면

충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초들이 무너지면, 의인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편 11:3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기초들’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건물의 물리적 기초를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앞에서 악인들이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공격하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사회를 지탱하는 정의와 질서의 토대를 비유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사람들의 권리가 보호되고, 악한 행동이 제지되는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자신을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이 질문에는 단순히 위험하다는 판단뿐 아니라, 의로운 행동이 더 이상 어떤 결과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담겨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3절까지 충고의 일부로 읽으면, 충고하는 사람들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악인들은 이미 공격할 준비를 마쳤고, 의로운 사람을 지켜 줄 질서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충고에 대해 예상 밖의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사실은 활을 당기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전혀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달아나라’라는 동사는 기록된 자음에 따르면 복수 명령형 누두지만, 전통적인 읽기에서는 단수 여성 명령형 누디로 읽습니다. 이어지는 ‘너희 산’에는 복수 소유 표현이 사용되고, ‘새’는 단수로 나타나므로 말의 대상과 수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이 「새야, 너희 산으로 달아나라」라고 옮긴 것은 이러한 어색함을 완전히 없애지 않은 번역입니다. 사무엘상 23:14에서는 다윗이 광야의 산지 요새들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19:11–12에서는 미갈의 도움으로 집에서 탈출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반드시 여호와야훼에 대한 신뢰와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편 11편이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표제에는 ‘다윗의 것’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특정한 장소나 사건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3절의 마지막 동사 파알은 완료형이므로, 본디새김처럼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수사적 질문뿐 아니라 ‘의인이 무엇을 이루었는가’ 또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앞으로 가능한 행동이 없다는 절망을, 후자는 지금까지 의인이 해 온 일이 무력해졌다는 탄식을 강조합니다. 또한 2–3절 전체가 도망치라고 권하는 사람들의 말인지, 3절부터 시인 자신의 판단이 다시 시작되는지 원문에 인용부호가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3절까지 충고의 일부로 읽으면 활과 화살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에서 시작하여, 정의의 토대마저 무너진 상황으로 논리가 확대되기 때문에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땅에서는 기초가 무너지지만, 하늘에는 왕좌가 있다

시편 11:4 본문 →

여호와야훼는 자기의 거룩한 궁전에 있다.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하늘에 있다. 그의 눈은 바라보고, 그의 눈꺼풀은 사람들을 시험한다.시편 11:4 · 본디새김

앞의 질문에 대한 시인의 첫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에는 명령도 없고 간구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선언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예측이 아닙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계시는지 기억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궁전과 하늘의 왕좌

‘거룩한 궁전’이 예루살렘의 지상 성전을 가리키는지, 하늘의 거룩한 처소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곧바로 ‘여호와야훼의 왕좌는 하늘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문맥에서는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권이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때 왕좌는 단순히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왕좌는 통치하고 판결하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앞의 3절에서 기초가 무너졌다는 말은 세상을 지탱하던 질서가 붕괴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왕좌에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땅에서는 의로운 사람을 보호해야 할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왕으로 계십니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제도와 하나님의 통치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해야 할 질서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악한 사람들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하나님의 의로움이나 통치권 자체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확신은 땅의 기초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기초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왕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인의 응답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과 다릅니다. 그는 위험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의 위험이 세상의 모든 현실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높은 왕좌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면, 땅에서 숨어 활을 당기는 악인들을 정말 보고 계실까요?

바로 다음 문장이 그 질문에 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궁전’으로 옮긴 히브리어 헤칼은 궁전이나 성전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입니다. 왕의 거처를 뜻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거룩한 궁전’이라고 옮긴 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하는 번역입니다.

어둠 속의 화살과 하늘에서 바라보는 눈

시편 11:5 본문 →

4절 끝의 「그의 눈은 바라보고, 그의 눈꺼풀은 사람들을 시험한다」는 짧은 문장은 앞에서 묘사한 위험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입니다.

악인들은 어둠 속에서 공격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눈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공격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시야 밖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에게는 악인의 공격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위험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위험을 보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눈꺼풀’까지 언급하는가

‘눈’과 ‘눈꺼풀’을 나란히 사용하는 것은 낯선 표현입니다. 사람은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할 때 눈을 가늘게 뜨거나 눈꺼풀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표현도 단순히 무엇이 있는지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분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를 빌려 하나님의 살피심을 표현한 시적 언어입니다.

‘시험한다(⁨בָּחַן⁩)’는 동사는 살피고 시험하여 그 성격이나 상태를 확인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겉모습을 보는 것보다 깊은 분별을 나타냅니다.

시편 11편에서 하나님의 시선은 외부에서 일어난 일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뿐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살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5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호와야훼는 의인을 시험한다. 그의 마음은 악인과 폭력을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시편 11:5 · 본디새김

의인도 시험받는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의로운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왜 그들을 시험하시는가요? 시험이 반드시 처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것은 사람의 실제 모습을 살피고 분별하신다는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 어떤 사람이 겪는 시련과도 연결될 수 있지만, 이 절 자체가 모든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이 의인에게 주신 시험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이미 의로운 사람들이 악인들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바로 그 의인을 시험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피심 아래 있다는 사실이 곧 위협으로부터 즉시 벗어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분별하실까요? 5절은 악인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냅니다. ‘폭력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시편 11편에서 문제는 단순히 폭력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폭력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해를 끼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 자체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단순히 판결을 정확하게 내리는 능력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사랑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가 하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그분의 판단은 자신의 성품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절의 ‘의로운 일들을 사랑한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7:3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의 마음을 시험하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도 여호와야훼는 마음을 살피고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폭력’으로 옮긴 낱말은 폭력과 불의를 나타내는 단어로, 창세기 6:11에서 홍수 이전의 땅에 폭력이 가득했다고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악인이 다른 사람에게 쏘려던 화살, 악인에게 내려오는 심판

시편 11:6 본문 →

그는 악인들 위에 덫들을 비처럼 내릴 것이다. 불과 유황과 타는 듯한 바람이 그들의 잔에 담길 몫이다.시편 11:6 · 본디새김

이 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갑자기 강렬한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악인들이 활을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화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악인들 위에 무언가가 비처럼 쏟아집니다.

지상에서 은밀하게 공격을 준비하던 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덫인가, 숯불인가

원문의 이 낱말은 ‘덫들’ 또는 ‘올무들’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뒤에 불과 유황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표현을 타는 숯불이나 불붙은 것들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덫들이라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악인들을 향해 덫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매우 독특한 이미지가 됩니다. 땅에서 약한 사람들을 노리던 악인들이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위험 가운데 놓이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불붙은 숯불과 유황이 악인들에게 쏟아지는 장면이 되므로, 이어지는 불의 심판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절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9:24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과 유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시편이 특정한 성읍의 멸망을 직접 예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알려진 심판의 언어를 사용하여 악인들이 맞게 될 운명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잔에 담길 몫

왜 심판을 잔에 담긴 몫이라고 표현할까요? 고대의 식사나 잔치에서 사람마다 음식을 나누어 받고 잔을 받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잔은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나 운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시편 11편에서는 악인들에게 주어지는 몫이 불과 유황과 타는 듯한 바람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몫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악인들이 의로운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활을 당기고 있었으며, 의인은 어디로 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의 끝에 가까워지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악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심판이 이미 실행되었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몫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아래에서 선언합니다.

이것은 원수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말과 다릅니다. 아직 활을 당긴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활을 당긴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파힘이 사용됩니다. 이 형태를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 파흐의 복수로 이해하면 ‘덫들’ 또는 ‘올무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칠십인역도 이 표현을 덫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파기다스로 옮깁니다. 잔의 이미지와 관련해, 시편 16:5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몫이자 잔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곳에서 잔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복된 삶의 몫과 연결됩니다. 반면 시편 75: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에 있는 잔을 악인들이 마셔야 하는 심판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신다

시편 11:7 본문 →

여호와야훼는 의롭고,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곧은 이들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시편 11:7 · 본디새김

시편은 왜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살피시는지 마지막에 이르러 밝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관하여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십니다.

‘의로운 일들(⁨צְדָקָה⁩)’은 의로움을 나타내는 명사의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의로움이라는 성품뿐 아니라 구체적인 의로운 행동들이라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5절에서 악인은 폭력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폭력에 마음이 기울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십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누가 당장 힘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화가 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폭력을 사랑하는 악인과 대립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시편의 마지막 문장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가

「곧은 이들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는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처음의 위협적인 장면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듭니다.

처음에는 악인들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곧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얼굴’은 문맥에 따라 어떤 사람의 임재나 그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단순히 눈·코·입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임재와 호의를 경험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편의 마지막 절에는 문법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곧은 이’를 집합적으로 이해하면 ‘곧은 이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반면 ‘그의 얼굴’을 보는 행위의 주어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곧은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부터 두 방향의 이해가 전해져 왔으며, 형태만으로 어느 쪽이 의도된 의미인지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시인은 자신을 위협하던 악인들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로 시선을 옮깁니다. 처음에는 악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4절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눈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시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분의 얼굴이 곧은 이들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살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곧은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시편의 핵심적인 흐름은 유지됩니다. 악인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상황에서도, 곧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외면당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시인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는 장면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후 세계나 부활의 순간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위협을 받고 있는 시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의로움을 바라보며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야샤르 예헤주 파네모입니다. 여기서 ‘곧은’에 해당하는 야샤르는 단수 형태인데, ‘볼 것이다’에 해당하는 예헤주는 복수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관해서는,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얼굴을 백성에게 비추시는 일이 은혜와 평화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시편 27:8–9에서는 시인이 여호와야훼의 얼굴을 찾으며, 그분이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기를 간구합니다.

무너지는 기초보다 깊은 토대

시편 11:1–7 본문 →

시편 11편에는 서로 대응하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초가 무너지는 땅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왕좌가 굳게 서 있는 하늘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도망치라는 충고를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자리를 지켜야 할까요?

본문은 그런 원칙을 세우지 않습니다.

시인은 「나는 여호와야훼에게 피신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선택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다른 장소로 이동했는지, 그 자리에 남았는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근거로 위험한 장소에서 도망치는 행위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어떤 장소로 이동하는가 하는 문제와, 궁극적으로 누구를 의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구별됩니다. 시인의 반응은 단순히 산이라는 피난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보호와 공의로운 통치를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판단에 저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충고하는 사람들의 판단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보기에 그 판단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여전히 왕좌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피신한다는 것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의로움과 통치도 함께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편 11편은 무모한 행동을 권하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이 인간의 판단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왕좌에 계신다는 사실을 세상의 불의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악인들의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폭력을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신뢰는 정의가 무너지는 현실에 무관심해지는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불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단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단순히 지금 누가 강한가를 결정하는 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시험하시고, 폭력을 미워하시며,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피신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원수보다 더 강한 보호자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공의롭게 판단하고, 자신의 권한을 의롭게 행사하시는 통치자입니다.

시편 11편의 결말에는 위험이 완전히 끝났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악인들이 활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시인이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시편 11편은 마지막까지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행동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의인이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지 말합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올 화살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의 위험을 알지만, 이제 그 위험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악인들이 활을 당기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기초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호와야훼의 왕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시는 분의 시야에는, 어둠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의로운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