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6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기쁨을 기억하며 눈물로 씨를 뿌릴 때
시편 126편에는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미 큰일을 하셨고, 사람들은 웃었으며, 다른 민족들까지 그 놀라운 일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그들은 다시 여호와야훼께 자신들의 형편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회복되었는데, 왜 다시 회복을 구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더 이상 회복을 기다릴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간 기쁨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의 삶에는 여전히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하셨다는 고백과 다시 도와 달라는 간구가 한 사람의 입에서 함께 나올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기쁨을 부정하지도 않고, 현재의 눈물을 감추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둘을 연결합니다. 한때 웃음으로 가득했던 입은 다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의 외침으로 돌아올 날을 바라봅니다.
이 시편은 세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이미 경험한 회복을 돌아봅니다. 4절에서는 아직 필요한 회복을 간구합니다. 5–6절에서는 눈물로 시작한 수고가 기쁨으로 끝나는 장면을 그립니다.
우리는 꿈꾸는 이들 같았다 — 믿기 어려운 현실이 된 구원
오름의 노래. 여호와야훼가 시온의 형편을 회복시켰을 때, 우리는 꿈꾸는 이들 같았다.시편 126:1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들이 어떻게 고난을 겪었는지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회복이 일어났을 때의 놀라움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때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도 믿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마음은 그 현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이 말하는 회복의 경험이 그러합니다. 문맥의 초점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꾸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회복되었을까요?
「시온의 형편을 회복시켰을 때」라는 표현은 포로들의 귀환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시온의 처지나 형편이 되돌려지는 회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포로 귀환의 경험을 배경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본문이 표현하는 회복은 그보다 넓은 의미를 담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의 형편을 바꾸셨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회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기보다, 그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놀라웠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미래에 무엇이 이루어질지 상상하는 사람들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들의 예상보다 큰 일을 경험한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행하신 일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여전히 꿈처럼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곧 웃음으로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케홀밈은 「꿈꾸는 사람들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꿈이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 주는 계시인지, 잠속에서 보는 꿈인지 자세히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시온의 형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바트 치욘은 포로들의 귀환으로도, 시온의 형편이 되돌려지는 회복으로도 읽힙니다. 포로 귀환으로 읽는 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에 끌려갔던 유다 사람들이 돌아온 사건은 시온의 회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에스라 1:1–4에는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편 126편은 키루스도, 바벨론도, 포로들의 귀환 행렬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특정한 귀환 시점에 결부시켜 그때 기록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히브리어 문장을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읽어,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회복하실 때 우리가 꿈꾸는 사람들 같을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공동체가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큰일을 하셨고 자신들이 기뻤다고 회고하는 점을 고려하면, 1–3절을 지나간 구원의 기억으로 읽는 데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먼저 말한 큰일 — 구원이 공동체의 고백이 되다
그때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기쁨의 외침으로 가득 찼다. 그때 민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말했다. 「여호와야훼가 이들에게 큰일을 했다.」시편 126:2 · 본디새김
꿈꾸는 사람들 같았다는 표현은 이제 구체적인 반응으로 바뀝니다.
회복의 기쁨은 단순히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는 감정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입을 채우고, 공동체 전체가 소리 내어 표현하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기쁨을 설명하기 전에, 뜻밖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다른 민족들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구원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인정받는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그 일의 놀라움을 알아봅니다. 시인은 그 민족들이 여호와야훼를 믿게 되었다거나 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 역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을 여호와야훼의 큰일이라고 말합니다.
바깥에서도 알아볼 만큼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이스라엘이 응답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우리에게 큰일을 했다. 우리는 기뻤다.시편 126:3 · 본디새김
다른 민족들은 「여호와야훼가 이들에게 큰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우리에게 큰일을 했다」고 응답합니다. 달라진 것은 「이들에게」와 「우리에게」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사건을 인정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건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외부의 관찰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호와야훼가 큰일을 하셨다고 말하고, 그 결과 자신들이 기뻤다고 고백합니다. 이 기쁨은 자신들이 성취한 결과를 자랑하는 기쁨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행하신 일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편의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기쁨의 외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다시 회복을 구하는 기도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도는 출애굽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8:8–11에서 모세는 이트로에게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들려주고, 이트로는 그 구원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여호와야훼를 찬양합니다. 두 본문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밖에서도 인정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시편 126편에서는 그 흐름이 더욱 압축되어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의 한마디에 이스라엘의 고백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이미 회복하셨는데,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 — 네게브의 물길
여호와야훼여, 저희의 형편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네게브의 물길처럼.시편 126: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126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회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 자신들의 형편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1절의 「되돌리실 때」(שׁוּב)와 4절의 「되돌려 주십시오」는 같은 어근 「돌아가다·되돌리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첫 번째는 이미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포로 귀환이나 공동체의 큰 회복이 이미 일어났지만, 백성의 실제 생활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난이 남아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구원 경험을 회상하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더 큰 회복을 요청하는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두 읽기 모두 본문의 흐름에 부합합니다. 공통점은 과거의 회복이 실제였음에도 현재의 회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 현실에서 여호와야훼께 기도합니다.
네게브는 유다 남쪽의 건조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에는 평소 물이 거의 흐르지 않다가 비가 내리면 물이 급격히 흘러드는 골짜기와 물길이 있습니다. 물이 없을 때 그곳은 메마른 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물이 흘러들면, 얼마 전까지 말라 있던 길을 따라 물이 세차게 흐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회복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은 형편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물이 흐르지 않던 곳에 물이 다시 흐르듯, 지금의 막막한 상황 자체가 달라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마른 물길에는 이미 물이 지나갈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은 물길 자체의 힘이 아닙니다. 물이 흘러들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은 이미 공동체의 회복을 경험했고, 그 회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형편을 자기 힘만으로 다시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새로운 회복을 일으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기억은 그들의 기도를 가능하게 하지만, 기억 자체가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시인은 또 다른 자연의 장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이번에는 물길이 아니라 밭입니다. 그리고 그 밭에는 웃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아피킴은 물이 흐르는 하상이나 물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할 때는 언제나 물이 풍부한 강보다는 메마른 땅의 물길에 물이 다시 흐르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에서도 귀환과 회복이 모든 어려움의 즉각적인 종료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스라 3:12–13에서는 성전 기초가 놓이는 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기뻐 외치지만, 이전 성전을 기억하는 이들은 크게 웁니다. 느헤미야 1:3에서는 돌아온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과 예루살렘 성벽의 훼손이 언급됩니다. 시편 126편을 이 사건들 가운데 어느 한 시점에 정확히 배치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미 회복이 시작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회복을 구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 35:6–10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는 회복의 광경이 펼쳐지고, 여호와야훼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며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편 126편의 네게브 물길과 기쁨의 귀환은 이사야의 이러한 회복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예언서의 여러 본문이 앞으로 이루어질 회복의 모습을 선포한다면, 이 시편은 이미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고난 속에서 다시 기도하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 — 아직 보이지 않는 수확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이들은 기뻐 외치며 거둘 것이다.시편 126:5 · 본디새김
4절의 네게브 물길에서는 메마른 곳에 물이 흘러드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5절에서는 사람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두 이미지는 모두 회복을 가리키지만, 시간의 흐름은 다릅니다.
네게브의 물길은 비가 내린 뒤 급격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면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날 곧바로 곡식 단을 거둘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린 뒤에는 시간이 흘러야 하며, 그동안 씨가 땅속에서 자라는 과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왜 울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파종은 미래의 수확을 기대하며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이 눈물을 흘린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눈물의 원인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가뭄이나 흉작으로 씨앗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고, 오랜 고난 속에서 미래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손에 있는 곡식을 먹지 않고 씨앗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 절박함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들을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행위와 눈물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회복의 기쁨을 경험한 공동체가 아직도 회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뻐했던 기억이 있지만 현재의 삶은 여전히 고단합니다. 시인은 그 현실을 눈물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그들은 울면서도 씨를 뿌립니다.
눈물은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씨를 뿌리는 행동이 그들의 눈물을 곧바로 없애 주는 것도 아닙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농부는 수확이 아직 보이지 않는 땅에 씨를 뿌립니다. 지금 손에 있는 것은 씨앗뿐입니다. 그 씨앗이 실제로 열매를 맺으려면 자신이 즉시 확인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종은 미래를 향한 행동입니다.
물론 농부가 씨를 뿌린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풍성한 수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노력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일반적인 성공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공동체의 회복을 기도하는 자리에서, 눈물의 시간이 영원한 결말이 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농사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파종의 눈물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사람들이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둡니다. 시인은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의 삶과 그 끝에서 누리는 기쁨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그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펼쳐 보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농업에서는 비와 기후, 병충해 등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들이 수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8:22의 창조 질서에 관한 말씀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이 있는 동안 씨 뿌림과 거둠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개별 농부의 모든 수확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거두는 질서 자체가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생명의 지속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울며 나가는 사람과 곡식 단을 들고 돌아오는 사람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계속 걸어가는 이는 자기 곡식 단을 들고 기뻐 외치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시편 126:6 · 본디새김
5절이 씨 뿌리기와 수확을 한 문장으로 대조했다면, 6절은 그 모습을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그려 냅니다.
한 사람이 집을 떠나 밭으로 갑니다. 그의 손에는 씨앗이 들려 있고, 그는 울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곡식 단을 들고 있고, 기뻐 외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시편의 마지막에 놓인 작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출발과 귀환, 눈물과 기쁨, 씨앗과 곡식 단이 서로 대응합니다. 본문은 출발과 귀환을 서로 대응시키면서, 마지막 귀환에 강한 확신을 부여합니다.
출발할 때 손에 들린 것은 앞으로 뿌릴 씨앗입니다. 돌아올 때 손에 들린 것은 이미 자라서 거둔 곡식입니다. 씨앗과 곡식 단은 같은 농사의 시작과 끝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웠고, 얼마나 자랐으며, 어떤 날씨를 견뎠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농부가 출발할 때와 돌아올 때의 변화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출발할 때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기뻐 외칩니다.
여기서 시편의 처음과 마지막이 연결됩니다.
2절에서는 회복을 경험한 공동체의 혀가 기쁨의 외침으로 가득했습니다. 5절에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기뻐 외치며 거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도 농부는 기뻐 외치며 돌아옵니다. 이 세 곳에 쓰인 핵심 표현은 「기쁨의 외침·환호」(רִנָּה)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기쁨의 외침은 이미 일어난 구원의 반응이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수확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소리가 됩니다.
시인은 미래의 기쁨을 아무 근거 없이 상상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주셨던 기쁨의 언어로 아직 오지 않은 날을 노래합니다.
5절에서는 「씨를 뿌리는 이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공동체 전체의 경험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한 사람이 씨앗을 들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으로 장면이 좁혀집니다.
처음에는 시온 전체의 회복이 이야기되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그 일을 바라보고, 이스라엘 전체가 웃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는 것은 씨앗을 들고 걸어가는 한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회복이 한 사람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시온의 회복은 단지 도시의 이름이 회복되거나 공동체의 지위가 달라지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수확한 곡식을 들고 돌아오는 삶과 연결됩니다. 큰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마침내 평범한 사람들의 손과 발, 눈물과 기쁨이 있는 일상에까지 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계속 걸어가는」에 해당하는 할로크 옐레크는 같은 동사 어근을 되풀이해 나아가는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의 보 야보 역시 동사를 되풀이하며 돌아오는 일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어에는 이렇게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을 정형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씨앗을 나타내는 원문에는 메셰크 하자라라는 드문 표현이 사용됩니다. 정확한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 가져가는 씨앗의 분량이나 씨앗을 가지고 나가는 행동과 관련된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표현만으로 특별히 비싼 씨앗이나 마지막 남은 식량을 뜻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31:12에서도 돌아온 사람들이 시온의 높은 곳에서 기뻐 외치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풍성함을 누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회복은 단지 한 장소로 돌아오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생명이 다시 풍성해지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미 큰일을 하신 하나님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구하다
시편 126편이 특별한 까닭은 과거의 기쁨과 현재의 눈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과거의 기쁨을 인정한다고 해서 현재의 고통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고통을 인정한다고 해서 과거에 여호와야훼께서 행하신 큰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은 이 둘을 함께 붙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한 후에도 다시 어려움을 만나는 일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시편 126편은 그런 상황을 신앙의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구원을 실제로 경험한 공동체가 지금 다시 회복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더 노력하고 버티라고 명령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개인의 의지력보다 앞서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회복시키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하며, 지금도 그분께 회복을 간구합니다. 눈물 자체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서 회복의 근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이미 회복하신 하나님께 왜 다시 회복을 구하는가요?
그분이 이전에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큰일은 단지 지나간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아직 메마른 현재를 하나님께 내어놓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마지막에 씨앗을 들고 밭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을 남깁니다.
그 사람은 울고 있습니다.
아직 곡식 단은 없습니다. 아직 수확의 기쁨도 없습니다. 손에 들린 것은 씨앗뿐이며, 그에게는 밭을 향해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씨앗을 들고 울며 나갔던 그가, 마침내 곡식 단을 들고 기뻐 외치며 돌아옵니다.
시편 126편의 마지막 장면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울면서 나가고, 또 한 번은 기뻐 외치며 돌아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