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8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식탁에서 이스라엘의 평화까지

시편 128편은 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얻은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시작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평화의 기도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집 안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내는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같고, 자녀들은 식탁 둘레에 자라는 어린 올리브나무 같습니다. 특별한 기적이나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일하고, 먹고,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삶을 가리키며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 복은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인은 가정의 행복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시온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의 번영을 말하며,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의 평화를 구합니다.

한 가정의 식탁과 이스라엘의 평화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시편 128편이 말하는 복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이 시편에서 복은 개인이 원하는 것을 많이 소유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노동을 누리고, 가족과 생명을 나누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화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복의 출발점에는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삶이 있습니다.

시편은 네 단계로 전개됩니다. 1절에서는 복된 사람을 소개하고, 2절에서는 그 사람의 손과 노동을 바라봅니다. 3–4절에서는 시선이 집 안의 식탁으로 옮겨 갑니다. 마지막 5–6절에서는 그 집의 울타리를 넘어 시온과 예루살렘, 이스라엘 전체와 다음 세대까지 시야가 넓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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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복되다 — 경외와 삶의 방향

시편 128:1 본문 →

오름의 노래.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이는 누구나 복되다.시편 128:1 · 본디새김

시편은 놀랍도록 폭넓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이 복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걷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특정한 왕이나 제사장, 부유한 사람이나 특별한 업적을 이룬 사람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시인은 화려한 궁전이나 막대한 재산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사람과 평범한 가정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도 여호와야훼의 복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첫 절에서부터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경외한다는 히브리어 낱말은 두려워한다는 뜻을 지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분을 경외하고 존중하며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경외한다는 말 뒤에 곧바로 「그의 길을 걷는」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길을 걷는 행동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길을 걷는다는 표현은 실제 도로를 이동하는 행동뿐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선택을 나타냅니다. 신명기 10:12–13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걷고, 그를 사랑하며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따라서 시편 128편에서 경외는 단순한 종교적 감정이나 예배의 한순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시인은 먼저 복을 얻는 비결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복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을 자기 삶의 한 부분에만 모셔 두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먹고 가족과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그분의 길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복된 삶은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에서 출발하지 않고, 누구의 길을 따라 살아가느냐에서 출발합니다.

이제 시인은 그런 사람이 경험하는 첫 번째 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일하고, 그 결과로 얻은 음식을 먹고 있을 뿐입니다.

네 두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네가 먹을 때 —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복

시편 128:2 본문 →

네 두 손으로 수고해 얻은 것을 네가 먹을 때, 너는 복되고 잘될 것이다.시편 128:2 · 본디새김

「네 두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을 「네가」 먹습니다.

시인은 수고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수고의 열매를 실제로 누리는 사람도 바로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일하면 그 대가를 얻고, 그 대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당연해 보이는 일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보여 줍니다.

신명기 28:30에서는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모습 가운데, 사람이 집을 지어도 거기에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28:33에서는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땅의 소출과 수고의 열매를 먹게 되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이사야 65:21–22에서는 회복된 삶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집을 지어 그 안에 살고, 포도원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지은 집에 살거나 자신이 심은 것을 먹는 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을 자신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열심히 일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과 그 결과가 부당하게 분리되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은 자기 손으로 일하지만 그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를 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대가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나 압제 때문에 자신이 가꾼 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과 반대되는 삶을 복된 모습으로 그립니다. 자신의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그 열매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데 쓰이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먹을 때」라는 표현에서 시인은 단순히 재산을 소유하거나 수확물을 쌓아 두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실제로 먹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소유와 누림은 서로 다릅니다.

많은 것을 쌓아 두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먹으며 삶의 만족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서 5:18–19에서도 사람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몫이자 선물로 묘사됩니다. 인간의 수고를 무조건 헛되다고 선언하는 대신,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일 자체가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에서도 노동은 저주의 표시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복 안에서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는 활동으로 등장합니다.

앞선 시편 127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일하심을 떠난 인간의 수고가 헛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128편에서는 자신의 두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을 먹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두 시편은 노동에 관하여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노동이 모든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노동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지를 보여 줍니다.

노동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바로 그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리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한 사람이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식탁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8:1–6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복을 성읍과 들, 태의 열매와 땅의 소산,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 걸쳐 묘사합니다. 시편 128편의 복 역시 노동과 가정, 자녀와 공동체의 삶을 함께 아우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 집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

시편 128:3 본문 →

네 아내는 네 집 안쪽에서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같고, 네 아들들은 네 식탁 둘레에서 올리브나무 묘목들 같다.시편 128:3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한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얻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사람의 집 안으로 들어가 가족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아내와 자녀를 서로 다른 나무에 비유했을까요?

두 나무는 모두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중요한 식물이었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와 포도주를 제공하고, 올리브나무는 열매와 기름을 제공합니다. 둘 다 생활의 풍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나무가 보여 주는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 맺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아들들은 이미 다 자란 올리브나무가 아니라 묘목들로 묘사됩니다.

집 안쪽의 열매 맺는 포도나무

원문의 「집 안쪽」(⁨יְרֵכָה⁩)은 집의 안쪽이나 깊숙한 부분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아내를 집 안의 깊은 자리와 연결하여 묘사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표현을 아내가 반드시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가정 안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할 활동 범위를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집 안에서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는 비유를 통해 가정에 생명과 풍요가 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물론 이 이미지는 당시 가정생활에서 아내와 어머니가 차지하던 역할을 반영합니다. 이어서 자녀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출산과 생식의 풍성함도 비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의 풍성함을 자녀를 많이 낳는 능력 하나로만 환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아내를 단순히 자녀를 낳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 식물이 살아 있으며,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풍성함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도 포도나무는 종종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4:25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평안을 설명하며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미가 4:4 역시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평화의 약속으로 제시합니다. 시편 128편의 포도나무 역시 이러한 풍요와 생명의 이미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집 바깥의 밭이나 포도원에서만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집 안쪽이라는 가장 가까운 생활의 공간에서 그것을 바라봅니다. 가정의 복은 밖에서 얻어 오는 재산의 크기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집 안에 생명과 풍요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복입니다.

식탁 둘레의 어린 올리브나무들

원문의 「올리브나무 묘목들」(⁨שְׁתִל⁩)은 올리브나무의 어린 묘목들이나 심겨 자라는 어린나무들을 가리킵니다.

왜 다 자란 올리브나무가 아니라 묘목들일까요?

어린나무는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자라 굵은 줄기를 이루고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묘목은 미래의 가능성을 이미 품고 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오래 살아가며 열매를 맺는 식물입니다. 시인이 자녀들을 올리브나무 묘목에 비유한 것은 지금의 어린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자라날 생명과 이어질 세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묘목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식탁 둘레에 있습니다. 시인은 어린 올리브나무들이 실제로 집 안의 식탁 주변에 심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식탁 둘레에 함께 있는 모습을 어린나무들이 자라나는 광경에 빗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의 곁에는 열매 맺는 포도나무에 비유되는 아내가 있고, 식탁 둘레에는 어린 올리브나무처럼 자라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미지의 중심에는 식탁이 있습니다.

식탁은 음식을 먹는 자리이지만, 가족이 함께 모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2절에서는 한 사람이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먹었습니다. 3절에 이르면 그 먹는 자리가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넓어집니다.

여기서 복의 의미가 소유에서 관계로 확장됩니다. 음식을 충분히 먹는 것도 복이지만, 그 음식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있는 것도 복입니다.

게다가 시인이 보여 주는 가족은 완성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시편이 그리는 복은 모든 성장이 끝나고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생명이 자라고 열매를 맺으며 서로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미지 안에는 현재와 미래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지금 열매를 맺고 있고, 올리브나무 묘목들은 앞으로 자라날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을 때 당시 사회의 시선을 구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인은 가정의 남성 구성원에게 말을 건네며 아내와 아들들을 그의 가정에 주어진 복으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반영합니다.

그렇다고 이 시편을 모든 사람의 복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배우자나 자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삶이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한 가정의 풍경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가족 구성이 주어진다고 약속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 특정한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보라, 참으로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다 — 복의 근원을 다시 밝히다

시편 128:4 본문 →

보라,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남자는 참으로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다.시편 128: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번에 묶습니다.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은 누구나 복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 복이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4절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1절과 4절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1절의 「복되다」는 어떤 사람의 복된 상태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4절의 「복을 받을 것이다」(⁨בָּרַךְ⁩)는 수동형 동사입니다.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데서 나아가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이 차이는 5절을 준비합니다. 4절에서는 복을 받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는 그 복을 주시는 분의 이름이 직접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시인은 복된 사람의 모습을 먼저 그려 놓고, 그 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히려 합니다.

시인은 가정의 풍경을 보여 준 뒤 그것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보라」라는 말로 독자가 그 장면을 다시 바라보도록 요청합니다. 자신의 수고로 얻은 음식을 먹고, 가족이 식탁 둘레에 모여 있으며, 어린 자녀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화려하지 않은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특별한 성공이라고 부르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안에 담긴 가치를 놓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자신의 노동을 누릴 수 있으며, 가족과 생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풍요가 여호와야훼의 복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하나님을 경외하면 반드시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배우자와 여러 자녀를 얻고, 오래 살며 손자들까지 보게 된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러한 복을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묘사하지만, 모든 의인이 언제나 같은 형편을 경험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편이 끝났다면, 이 노래는 한 가정의 행복을 축하하는 시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시선을 돌립니다. 집 안의 식탁에서 시온을 향해 눈을 듭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73편은 악인들이 번영하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의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욥기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큰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시편 128편이 복된 삶의 모습을 그린다는 사실과 모든 삶의 결과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기를 — 한 가정의 복과 예루살렘의 번영

시편 128:5 본문 →

여호와야훼가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기를. 네가 사는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아라.시편 128:5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한 사람과 그의 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갑자기 시온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시온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소와 연결됩니다. 시편 132:13–14는 여호와야훼가 시온을 택하시고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온에서」라는 표현은 단순히 축복이 흘러오는 지리적 방향을 가리키는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신앙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이전 절들과 형태가 다릅니다.

1–4절은 복된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선언하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5절부터는 복을 빌어 주는 축원이 시작됩니다. 시인은 이제 한 사람을 바라보며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된 삶을 설명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시인은 앞에서 묘사한 복이 모든 경건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결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복이 실제로 주어지기를 여호와야훼께 구하는 방향으로 노래를 이끕니다.

그런데 시인이 바라는 복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집안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식탁에서 시작한 복이 이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집니다.

왜 한 가정의 복을 이야기하다가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라고 할까요?

시인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려면 그 가정이 속한 공동체 역시 평안해야 합니다. 도시가 전쟁과 폭력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며, 생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한 가정의 평화가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공동체가 안정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 그 안의 가정들도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관계를 직접 설명하는 대신, 집 안의 식탁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으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보여 줍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의 번영을 소유하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예루살렘의 번영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시각적인 구경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그 도시가 좋은 상태를 누리는 모습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개인의 복을 예루살렘과 떼어 놓지 않고, 그 도시의 번영을 자신의 기쁨으로 누리는 삶을 바라봅니다.

시편 128편은 예루살렘의 번영을 바라보는 시간을 「네가 사는 모든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잠깐의 번영이 아닙니다. 시인은 일생 동안 그 도시의 좋은 모습을 보며 살아가는 복을 구합니다.

처음에는 오늘 자기 손으로 얻은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평생에 걸쳐 공동체의 번영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복의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22:6–9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며, 여호와야훼의 집을 위해 그 도시의 복을 구합니다. 시편 128편 역시 예루살렘의 번영을 개인의 삶과 연결합니다. 예레미야 29:7에서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성읍의 평화를 구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성읍이 평안해야 그들도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과 시편 128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가정의 안녕이 공동체의 안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본디새김은 마지막 두 절을 축원으로 옮깁니다. 이것은 복을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 결과로 생각하기보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시기를 바라는 선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네 아들들의 아들들을 보아라 —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평화

시편 128:6 본문 →

네 아들들의 아들들을 보아라. 이스라엘 위에 평화가 있기를.시편 128:6 · 본디새김

시인은 마지막에 다시 자녀들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3절의 자녀들과는 모습이 다릅니다.

3절에서 아들들은 식탁 둘레에 있는 어린 올리브나무 묘목들이었습니다. 이제 6절에서 시인은 그 아들들에게도 아들들이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긴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식탁 둘레에 앉아 있던 어린 자녀들이 성장하고, 그들에게도 자녀가 생깁니다. 한 가정의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린나무는 지금 당장 완성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생명을 이어 갑니다. 시인이 3절에서 어린 올리브나무들을 보여 준 뒤 마지막에 손자 세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은, 가정의 복이 한순간의 풍요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5절에서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아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네 아들들의 아들들을 보아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5절 후반과 6절은 모두 「그리고 보아라」라는 뜻의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두 가지를 나란히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번영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음 세대의 생명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대상이지만, 시편 안에서는 같은 축복의 흐름에 놓입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한 사람이 오늘 잘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공동체의 번영을 보며, 자기 자녀들의 자녀들까지 볼 수 있는 삶입니다.

이것은 장수의 복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단순히 오래 사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생명이 이어지고, 공동체가 번영하는 모습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5절의 「네가 사는 모든 날」과 6절의 「네 아들들의 아들들」이 서로 대응합니다. 하나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생애 전체를 바라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생애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삶을 바라봅니다. 시인은 현재의 식탁에서 시작하여 한 사람의 평생을 지나 다음 세대까지 시선을 넓힙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가족의 번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많은 자녀와 손자들을 보게 되더라도, 그들이 살아갈 공동체에 평화가 없다면 그 복은 얼마나 온전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 계속되고, 불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며,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다음 세대의 삶 역시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다음 세대가 이어지는 것을 축복하면서 그들이 살아갈 이스라엘 전체의 평화를 함께 구합니다.

복은 한 가정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의 생명을 축복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평화까지 함께 바라는 일입니다.

시인은 한 사람의 식탁에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누리는 기쁨과 공동체 전체의 평화가 하나의 축복 안에 놓인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 위에 평화가 있기를」은 시편 125:5의 마지막 축복과 동일합니다. 시편 125편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백성이 악한 지배와 굽은 길의 위협 가운데서도 보호받기를 바라며 이스라엘의 평화를 구했습니다. 시편 128편에서는 한 가정의 풍요와 다음 세대의 생명을 축복한 뒤 이스라엘의 평화를 구합니다. 두 시편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의 평화를 바라봅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의 식탁

시편 128:1–6 본문 →

이 시편에서 처음과 끝을 이어 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1절은 그 삶이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4절은 그 복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복을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이 흐름을 보면 복은 인간이 자신의 경건함을 통해 획득하는 재산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현대의 독자는 복을 종종 개인의 재산, 지위, 건강, 가족의 성공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128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한 사람의 복을 평가하는 시야가 훨씬 넓어집니다.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뿐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공동체에도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우리에게 누가 더 많은 복을 받았는지 비교하라고 요청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을 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서 노동의 열매와 가족의 풍요, 공동체의 평화를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복으로 받아들입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삶은 일상의 활동을 떠나 특별한 종교적 공간에만 머무르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자리에도, 가족과 음식을 나누는 식탁에도, 도시의 번영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그 경외가 연결됩니다.

사람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한다고 해서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두 손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열매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랑으로만 여기지 않고, 누릴 수 있게 된 복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가족을 자신의 소유나 성공의 증거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바라봅니다.

여호와야훼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복이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편 128편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도,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부자도, 놀라운 일을 성취한 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수고하여 얻은 음식을 먹는 식탁이 있습니다. 집 안에는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같은 아내가 있고, 그 식탁 둘레에는 어린 올리브나무처럼 자라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집에서 시선을 들어 시온과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가족이 평안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아갈 도시도 번영해야 하고, 자녀들의 자녀들이 살아갈 이스라엘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식탁 둘레의 어린 올리브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묘목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자라서 다음 세대로 생명을 이어 갈 것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네 아들들의 아들들을 보아라. 이스라엘 위에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한 사람의 일생을 넘어서는 축복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손에서 시작했던 복이 식탁으로, 가족으로, 도시로,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시편 128편은 그렇게 작은 식탁 하나를 보여 주면서, 그 식탁을 둘러싼 생명이 자라고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