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0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시편 130편은 깊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깊이 내려와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가장 깊은 문제는 시인이 처한 어려운 형편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다가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야여, 당신이 죄악을 기억해 두신다면, 주여, 누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깊은 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 물을 법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악을 모두 기억하고 계신다면, 과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경외받으시도록 용서는 당신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죄를 모르시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이 시편 전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간청이었지만,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고백이 되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권면이 됩니다.

한 사람의 절박한 기도가 공동체 전체의 소망으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흐름 속에는 두 가지 인상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깊은 곳이고, 다른 하나는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깊이 내려와 있는지가 중요했지만, 나중에는 누구를 바라보며 기다리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130편 본문 읽기 →

깊은 곳에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 하나님께 닿기를 바라는 목소리

시편 130:1–2 본문 →

오름의 노래. 여호와야훼여, 깊은 곳에서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시편 130:1 · 본디새김

시편은 장소를 알려 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깊은 곳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깊은 물이나 심연을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 시인이 실제로 물속에 빠졌다는 뜻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깊은 물은 사람이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운 고난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편 69:2–3에서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물이 자신을 덮치는 이미지로 절박한 상황을 표현합니다. 시편 130편 역시 그러한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도움을 얻기 어렵고, 스스로 올라가기 힘든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그 깊은 곳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질병 때문인지, 외부의 압제 때문인지, 개인적인 실패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뒤이어 죄악에 관한 질문이 등장하므로 자신의 죄가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고난이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원인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말합니다.

여호와야훼를 불렀습니다.

아직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깊은 곳에서 빠져나왔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이 여호와야훼를 향해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만 나타납니다.

시인은 가장 깊은 자리에서도 여호와야훼를 부를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먼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여,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의 귀가 제 간청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빕니다.시편 130:2 · 본디새김

시인은 당장 자신의 형편을 바꾸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시인이 직접 구하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시는 일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여호와야훼께 닿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간청의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엇을 해결해 달라고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답은 다음 절에서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를 이야기하거나 어떤 재난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죄악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죄악을 기억해 두신다면 — 아무도 서 있을 수 없다는 발견

시편 130:3 본문 →

야여, 당신이 죄악을 기억해 두신다면, 주여, 누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 · 본디새김

시인은 「제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누가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질문으로 넓혀 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과장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모두 기억해 두시고 그에 따라 대하신다면, 아무도 그분 앞에서 자신이 온전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죄악」은 잘못과 불의, 죄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 죄의 결과나 그에 따르는 책임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죄악을 한두 가지 실수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목록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기억해 두신다면」은 샤마르(⁨שָׁמַר⁩)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동사는 지키다, 보존하다, 주의 깊게 살피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여기에서는 죄악을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고 간직하거나 계속 주목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계속 기억해 두신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의 죄를 모두 잊어버리셔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기억 능력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람에게 불리한 것으로 계속 간직하고 계시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서 있다」(⁨עָמַד⁩)는 표현은 여기서 단순히 신체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자세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며 그분의 판단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만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악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악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지으니 자신의 죄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같은 질문 앞에 놓여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아무도 설 수 없다고 말한 뒤 침묵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을 공정한 재판관으로 바라보는 이미지가 이 질문에 담겨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구체적인 재판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를 하나의 법정 절차로 지나치게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열왕기상 8:46에서 솔로몬이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내용과 연결됩니다. 전도서 7:20에서도 땅 위에 선을 행하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없다고 말합니다. 시편 130편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한 문장의 질문으로 압축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당신께 있습니다 — 용서가 경외를 낳는 역설

시편 130:4 본문 →

그러나 당신이 경외받으시도록 용서는 당신께 있습니다.시편 130:4 · 본디새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인간의 무죄함에서 하나님의 용서로 옮겨 갑니다.

「용서는 당신께 있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용서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시인은 용서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행이나 후회가 충분한지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는 여호와야훼께 있습니다.

왜 용서가 경외와 연결될까요?

우리는 흔히 경외를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른 방향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경외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간직하시고 누구도 그분 앞에 설 수 없다면, 죄인은 그분께 나아갈 희망을 갖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피해야 할 분으로만 남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감추거나 변명하는 대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단지 형벌을 피하려는 두려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설 수 없는 자리에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죄인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을 진지하게 다루시는 하나님께 용서가 있기 때문에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시인은 용서가 자신에게 즉시 주어졌다는 구체적인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식이 이루어졌는지, 누가 용서를 선언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음 절에서 기다림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기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당신이 경외받으시도록」은 목적 또는 결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사람들이 경외해야 할 의무와 단순히 병렬로 놓지 않습니다. 용서와 경외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만듭니다. 이러한 이해는 출애굽기 34:6–7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인애가 풍성하고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죄에 대한 책임을 무조건 없던 것으로 취급하시는 분으로도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와 의로움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시편 130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바라며 기다렸다 — 기다림의 근거

시편 130:5 본문 →

나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렸다. 내 영혼이 기다렸고, 나는 그의 말을 바라며 기다렸다.시편 130:5 · 본디새김

이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 말을 건네던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앞에서는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와 「그의 말」이라고 합니다.

기도가 고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기다렸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기다림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온 존재를 기울여 여호와야훼를 기다립니다.

여기서 「내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영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살아 있는 존재나 자기 자신,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시인 자신이 얼마나 깊이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지를 강조합니다. 시인은 입으로만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여호와야훼를 향해 기다림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막연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을 바라며 기다립니다.

여기에서 「그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예언자의 약속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계시를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 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고백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바라며 기다리는 말씀은 여호와야훼의 성품과 약속에 대한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 상황이 곧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을 붙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에 근거하여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 보내기와 다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그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바꿉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붙든 사람에게 기다림은 그 약속을 향해 살아가는 시간이 됩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다릴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용서가 있고, 그분의 말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붙드는 마지막 희망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선택하는 응답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시인은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지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4:6–7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인애와 용서를 드러내신 말씀은 이러한 기다림의 신학적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5절에는 카바(기다리다)와 야할(바라며 기다리다)에서 나온 동사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두 동사는 기다림과 기대를 나타내는 의미 영역을 공유합니다. 시인은 기다림을 나타내는 말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자신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보는지 표현합니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을 바라보는 사람

시편 130:6 본문 →

내 영혼은 주를 기다린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시편 130:6 · 본디새김

시인은 기다림을 설명하기 위해 파수꾼을 등장시킵니다.

밤새 성읍을 지키는 파수꾼에게는 아침이 특별합니다. 밤은 어둡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없고, 주변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경계하는 사람에게는 긴장과 피로가 쌓일 수 있습니다.

아침이 밝으면 주변을 더 분명히 볼 수 있고, 밤의 어둠도 물러갑니다. 그래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모습은 간절한 기다림을 표현하기에 적절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파수꾼처럼 아침을 기다린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기다립니다. 그 말을 한 번 더 합니다.

이 반복에는 시인이 전하려는 감정의 강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다림을 설명할 만한 적절한 비교 대상을 찾아냈지만, 그 비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파수꾼은 아침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간절히 바라거나 애써도 밤을 자신의 힘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경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지만, 아침이 밝는 시각을 스스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이 점에서 파수꾼의 기다림은 시인의 기다림과 닮았습니다. 시인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응답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명령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서는 안 됩니다. 파수꾼에게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응답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일정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비유의 중심은 기다리는 사람이 보여 주는 간절함과 방향입니다. 그는 아침을 바라보는 파수꾼처럼, 여호와야훼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억해 두신다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악을 끝까지 간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은 여호와야훼를 향한 기다림을 놓지 않습니다.

죄악을 간직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던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시편은 개인의 기다림을 넘어섭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했던 고백을 이스라엘 전체에게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기억해 두신다면」의 동사는 샤마르였습니다. 그런데 6절의 「파수꾼들」에 해당하는 쇼므림도 바로 그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키거나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계속 간직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고, 6절에서는 사람이 아침을 바라보며 경계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 반복을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로 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같은 어근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시인이 반드시 정교한 언어유희를 의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 안에서 두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의미 있는 대조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려라 — 한 사람의 기다림이 공동체의 소망으로

시편 130:7 본문 →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려라. 여호와야훼에게 인애가 있고, 그에게 속량이 풍성하기 때문이다.시편 130: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시편의 청중이 바뀝니다.

1–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 기도했습니다. 5–6절에서는 자신이 여호와야훼를 기다린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7절에서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시인은 공동체에게 새로운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던 바로 그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바라며 기다려라」(⁨יָחַל⁩)는 5절에서 시인이 자신의 기다림을 표현할 때 사용한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경험을 이스라엘 전체의 삶에 적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내가 기다렸으니 너희도 기다려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기다려야 할 이유를 여호와야훼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말이 등장합니다. 인애와 속량입니다.

먼저 「인애」는 단순한 친절이나 일시적인 호의를 넘어서는 말입니다.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신실한 사랑과 자비, 지속적인 헌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인애를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인애만 말하지 않습니다. 「속량」은 속량하거나 구해 내는 행위와 관련된 말입니다. 구약에서 속량은 종살이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어떤 대가를 통해 되찾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30편에서는 속량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대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특정한 속전이나 제의적 절차를 찾아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야훼께 속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이 단순히 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4절의 용서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앞에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죄악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용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그분께 속량이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용서는 당신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야훼에게 인애가 있고, 그에게 속량이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반복은 시인이 관심을 두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용서와 인애와 속량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야훼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취나 자격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보다, 여호와야훼께 얼마나 풍성한 속량이 있는지를 바라보도록 이스라엘을 초대합니다.

이 권면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시인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용서가 있고 속량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 그 속량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향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인애와 진실이 풍성한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선언은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고백하는 중요한 언어가 됩니다. 시편 130편 역시 바로 그 인애를 기다림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사건 역시 속량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신명기 7:8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속량하신 일이 언급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임메카(당신과 함께)와 임 여호와야훼(여호와야훼와 함께), 임모(그와 함께)가 서로 대응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속량할 것이다 — 기다림이 향하는 결말

시편 130:8 본문 →

그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할 것이다.시편 130:8 · 본디새김

시편은 이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깊은 곳도, 파수꾼도, 아침도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시편의 처음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시인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깊은 곳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시인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았는지 분명해집니다.

죄악에서의 속량입니다.

이것이 이 시편만의 특별한 방향입니다. 많은 탄식시에서 시인은 원수에게서 구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병과 고난에서 건져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시편 130편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여호와야훼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죄악의 일부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그의 모든 죄악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의」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공동체로 가리키는 단수형 표현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개인이 자신의 죄악을 생각했다면,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에서 이루어진 청중의 확장과 맞물립니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용서가 공동체 전체에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속량을 단순히 죄의 기록을 지우는 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속량은 죄악이 만들어 낸 속박과 그 결과에서 구해 내는 의미도 지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죄책의 용서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죄책과 죄의 결과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엄격히 구별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 속량이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인 역사적 시점이 언제인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시인이 확신하는 것은 그 일을 행하실 분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약속은 예레미야 31:31–34에 등장하는 새 언약의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0편의 「죄악을 기억해 두신다면」이라는 질문과 의미 있게 만나는 대목입니다. 다만 시편 130편이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직접 인용하거나 그 약속의 성취 시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본문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용서라는 공통된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또한 에스겔 36:25–27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시편 130편의 속량을 이 말씀과 함께 읽으면, 죄악에서의 구원이 단지 과거의 잘못을 없던 일로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일과 연결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편 130편 자체는 그 미래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기 때문에 기다린다

시편 130:1–8 본문 →

용서는 기다림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용서가 있음을 믿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응답을 이미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아무런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용서가 있고, 인애가 있으며, 속량이 풍성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보면 3절과 4절 사이의 짧은 전환이 시편 전체를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기억해 두신다면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가 있습니다.

시인은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노래를 끝내지 않습니다. 앞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마지막을 모든 문제가 해결된 장면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기다림이 남아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려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기다림을 명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렸던 목소리는 깊은 곳에서 홀로 부르짖는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기다림의 요청입니다. 그들은 아직 모든 죄악에서 속량받은 미래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속량하실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시인이 보여 준 파수꾼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파수꾼은 여전히 자기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침을 앞당기는 일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아침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시인도 그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하셔야 하는지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분을 기다립니다.

아직 아침이 밝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여호와야훼를 향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이제 그 기다림에 이스라엘 전체가 초대받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