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1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젖 뗀 아이가 머무는 곳

시편 131편은 세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노래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독특한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 곁에 있는 젖 뗀 아이의 모습입니다.

아이는 젖을 뗐습니다. 이전에는 어머니에게서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을 더는 같은 방식으로 얻지 않지만, 여전히 어머니 곁에 머뭅니다. 시인은 바로 이 모습에서 자기 영혼이 도달한 평안을 발견합니다.

이 노래의 표제는 「오름의 노래. 다윗의」입니다. 오름의 노래는 시편 120~134편에 모여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와 관련하여 읽어 온 노래들입니다. 실제로 각각의 노래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불렸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노래의 첫마디는 「제 마음은 높아지지 않았고」입니다. 사람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지만, 그 마음까지 높아져서는 안 됩니다. 이 대비가 의도된 언어유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름의 노래 안에서 이 고백이 놓인 자리는 의미심장합니다.

시편은 세 단계로 움직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들을 고백합니다(1절). 이어 자신이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설명합니다(2절). 마지막에는 그 개인적인 경험을 온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으로 바꿉니다(3절).

이 노래는 인간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에서 시작하여,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읽는 시간 14분소단락 4131편 본문 읽기 →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

시편 131:1 본문 →

오름의 노래. 다윗의. 여호와야훼여, 제 마음은 높아지지 않았고, 제 눈은 치켜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큰일들과 제게 너무 벅찬 일들에 나서지 않았습니다.시편 131:1 · 본디새김

시인은 세 번의 부정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이 세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시작하여 눈으로,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판단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신을 실제보다 높은 자리에 놓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눈이 치켜들리는 것은 그러한 마음이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높은 눈은 종종 교만과 연결됩니다(잠언 6:17; 21:4).

그다음에는 행동이 나옵니다. 「제게 너무 벅찬 일들에 나서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에서 ‘나서다(⁨הָלַךְ⁩)’에 해당하는 동사는 본래 걷거나 돌아다니는 행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으며 행동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의 높아짐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결국 자신이 차지하려는 자리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과정을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큰일들과 제게 너무 벅찬 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능력과 권한을 넘어서는 큰일에 관여하려는 야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일과 신비까지 파악하거나 통제하려는 태도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자기 판단과 능력 아래 두려는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큰일을 맡거나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이 주어졌고, 그의 생애에는 수많은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7:18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자신과 자기 집안이 누구이기에 이처럼 큰 약속을 받았는지 묻는 장면은, 큰 책임을 맡는 것과 자신의 작음을 아는 것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다음 시편 132편에서도 다윗이 여호와야훼의 거처를 찾으려고 애쓴 일이 기억됩니다(132:1-5).

겸손은 큰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큰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루는 주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고백을 사람들에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여호와야훼여」 하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겸손을 인정받으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다음 절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지혜로운 현자나 강한 군주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제게 너무 벅찬 일들」은 니플라오트 밈메니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니플라오트는 놀랍거나 비범하여 인간의 능력과 이해를 넘어서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읽기를 이해하는 데는 욥기 42:3과 시편 139:6이 도움이 됩니다. 두 본문에서도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놀라운 일과 지식이 언급됩니다. 그러나 시편 131편의 앞뒤 문맥에는 교만한 마음과 눈, 지나친 행동이 함께 나타나므로, 이 구절을 단순히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지적 탐구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젖 뗀 아이의 평안

시편 131:2 본문 →

참으로 저는 어머니 곁에 있는 젖 뗀 아이처럼 제 영혼을 가라앉히고 잠잠하게 했습니다. 제 안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시편 13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131편의 중심입니다.

두 동사는 모두 시인 자신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평안이 저절로 찾아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차분하게 하고 침묵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영혼’은 인간의 몸과 분리된 비물질적 부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명, 자신, 욕구와 갈망을 지닌 존재 전체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단순히 생각을 멈추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원하고, 걱정하고, 붙들려 하고, 만족을 요구하는 자기 자신을 가라앉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내면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왜 하필 젖 뗀 아이를 선택했을까요?

젖 뗀 아이는 갓난아기와 다릅니다

이 비유에서 결정적인 말은 ‘아이’보다 ‘젖 뗀’이라는 표현입니다.

갓난아기에게 어머니의 젖은 직접적인 생존의 수단입니다. 배가 고프면 젖을 요구합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일도 젖을 먹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젖을 뗀 아이는 이전과 다른 관계에 들어섭니다. 젖을 먹던 방식은 끝났지만, 어머니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선택한 장면은 젖을 뗀 뒤에도 어머니 곁에 평안히 머무는 모습입니다. 젖을 떼는 과정에는 익숙했던 만족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젖을 얻지 않는 순간에도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어머니가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즉시 얻는 일과 어머니 곁에 머무는 일을 구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어머니의 품은 단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이것이 시인이 자기 영혼에 빗대는 평안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언제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확신과 같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당장 얻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본문은 하나님이 젖을 떼게 하시는 어머니처럼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거두어 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설명은 비유에서 더 나아간 해석입니다. 시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자신이 자기 영혼을 가라앉혔다는 사실과, 그 상태가 어머니 곁의 젖 뗀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평안은 반드시 모든 욕구가 충족된 뒤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의지하는 관계 안에 머물 수 있을 때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시인이 자기 영혼을 아이처럼 대하는 이유

2절의 마지막 문장 「제 안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는 첫 번째 비유를 거의 되풀이합니다. 그런데 원문의 표현은 조금 특이합니다.

앞에서는 아이가 「어머니 곁에」 있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그 어머니 위에’라는 공간적 표현입니다. 어머니의 몸에 기대거나 안겨 있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같은 전치사가 시인 자신에게 사용됩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제 안의」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의 정확한 공간적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문의 의미를 지나치게 구체적인 신체 자세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 자체의 효과는 뚜렷합니다.

먼저 시인은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영혼을 그 아이와 나란히 놓습니다.

마치 자기 안의 갈망과 불안을 하나의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제 영혼을 가라앉히고 잠잠하게 했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풍부해집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에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없애거나 무감각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돌보며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낯선 태도가 아닙니다. 시편 42:5, 11과 43:5에서도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해 낙심하는 이유를 묻고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때때로 자기 영혼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편 131편은 그 대화가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자신의 불안에 새로운 논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을 찾아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영혼이 더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얻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도록 가라앉힙니다.

여기서 조용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침묵과 다릅니다.

바로 앞의 시편 130편에서 기도자는 깊은 곳에서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간청하고,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여호와야훼를 기다립니다. 그 울부짖음과 시편 131편의 고요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두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응답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절박하게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영혼을 잠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울부짖을 수도 있고, 잠잠히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참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임 로는 형태만 보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이라는 조건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맹세에 사용되는 강한 확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에 해당하는 말은 네페쉬입니다. 「어머니 곁에」의 히브리어는 알레이 임모이고, 「제 안의」로 옮긴 말은 알라이로 문자적으로 ‘내 위에’라는 형태입니다.

한 사람의 평안이 이스라엘의 기다림으로

시편 131:3 본문 →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려라. 지금부터 영원까지.시편 131:3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제 마음」, 「제 눈」, 「제 영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부르는 대상은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시인이 자기 영혼을 잠잠하게 한 경험은 혼자만 간직할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태도를 온 공동체가 함께 익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은 자신처럼 마음을 낮추라거나 젖 뗀 아이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앞의 두 절을 해석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시인의 평안은 자신의 내면을 잘 다스리는 능력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가라앉힌 다음, 이스라엘에게도 각자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향하고 있던 대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대상은 여호와야훼입니다.

「바라며 기다려라」(⁨יָחַל⁩)에 해당하는 동사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향해 기대와 소망을 두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 기다림에는 두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모든 답이나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인정과, 그렇더라도 앞으로의 일을 맡길 수 있는 분이 있다는 신뢰입니다.

그래서 3절은 1절의 겸손과 2절의 평안을 하나로 묶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전부를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여호와야훼를 기다릴 수 있나요?

3절은 기다리라는 명령만 남기고,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놓인 자리에서 바로 앞 시편 130편의 마지막을 기억하면 그 근거가 드러납니다.

시편 130:7-8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고 권하면서, 여호와야훼께 인애와 풍성한 속량이 있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죄악에서 속량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31:3은 그 권면의 핵심 표현을 다시 사용합니다. 앞 시편이 기다림의 근거가 되는 여호와야훼의 인애와 속량을 말한다면, 이 시편은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보여 준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기다림이 단순한 체념이 되지 않게 합니다. 그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것이라면,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조용히 있으라고만 말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야훼를 향해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기다림의 근거가 자신의 무력함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1편에서 여호와야훼가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처음에 여호와야훼를 부르고 마지막에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노래의 처음과 끝을 붙들고 있습니다.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의 평안이 어떤 관계를 전제하듯, 이스라엘의 기다림에도 그들이 의지하는 분과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금부터 영원까지」는 이 기다림이 일시적인 위기를 넘기는 동안만 필요한 태도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당장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앞으로 이어지는 모든 시간 속에서 여호와야훼를 향한 소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관계 자체가 특정한 문제의 해결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젖 뗀 아이가 여전히 머무는 곳

시편 131:1–3 본문 →

시편 131편에는 승리의 환호도 없고, 기적의 이야기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아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무엇을 얻거나 잃었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짧은 시편은 특정한 상황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자체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첫째 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둘째 절에서는 그런 한계 앞에서도 자기 영혼이 끝없이 동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셋째 절에서는 그 평안이 향해야 할 대상을 여호와야훼라고 밝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일을 해내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편 131편에서 성숙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독립하여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젖을 뗐으면서도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입니다.

물론 이것이 질문을 멈추거나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 전체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묻고 고통의 이유를 따지며 구원을 요구하는 기도들이 가득합니다. 시편 131편 역시 그런 기도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시편은 인간의 질문과 요구가 끝없이 커질 때, 그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 줍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대상을 붙들되, 그분께서 반드시 자신의 뜻과 시간에 맞추어 행동하셔야 한다는 요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겸손은 여기서 신뢰와 만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움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의 시작이 됩니다.

시인은 그저 자신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자기 영혼을 가라앉혔다고 말한 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라고 권합니다. 그 짧은 고백 가운데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어머니 곁의 어린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이전에 받던 것을 더는 같은 방식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떠나거나, 어머니의 품이 쓸모없어졌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그 곁에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신뢰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기 때문에 잠잠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결정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의지할 분이 있음을 알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젖을 떼는 것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젖을 얻지 않아도 어머니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시인은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자기 영혼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서 눈을 들어 이스라엘을 부릅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바라며 기다려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 기다림이 어떤 모습인지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말을 보탤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조용히 머무는 젖 뗀 아이가 이미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