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9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나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알다
누군가 나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위로일까요, 두려움일까요?
내가 한 말뿐 아니라 말하려던 것까지 알고, 내가 걸어온 길뿐 아니라 아직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생각까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139편은 바로 이 양면적인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 당신은 저를 샅샅이 살피셨고 저를 아십니다」(1절)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잘 아시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십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 함께 계시며,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보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시편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찬양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하나님, 당신이 악인을 죽이신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식과 창조를 노래하던 사람이 갑자기 악인의 죽음을 소망하고, 원수들을 향한 강한 미움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께 「저를 샅샅이 살피시고 제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23절)라고 자신을 살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지막 기도가 시편 전체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샅샅이 살피셨다고 고백한 사람이 왜 다시 자신을 살펴 달라고 요청합니까?
시편 139편은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기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에 놀라고, 마지막에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발견합니다.
내가 말하기 전부터 아시는 하나님
당신은 제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제 생각을 헤아리십니다. 제가 다니고 눕는 것을 키질하듯 살피셨고, 제 모든 길을 익히 아십니다.시편 139:2–3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지식을 설명하면서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앉고 일어서는 일, 다니고 눕는 일처럼 지극히 평범한 행동부터 이야기합니다. 앉는 것과 일어서는 것, 다니는 것과 눕는 것은 서로 반대되거나 대조되는 일상의 움직임입니다. 이런 표현은 두 가지 행동만을 말하기보다 그 사이에 포함된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시인이 활동할 때도, 쉬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아십니다.
3절의 「키질하듯 살피셨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זָרָה)는 곡식을 흩거나 키질하는 동작과 관련됩니다. 키질할 때 곡식을 공중으로 날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듯,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시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시인의 행방을 알고 계신다는 말보다 깊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행동에 담긴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하게 된 이유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그 안의 생각까지 헤아리신다고 고백합니다.
제 혀에 아직 말 한마디가 없는데도, 참으로, 여호와야훼, 당신은 그 말을 온전히 아십니다.시편 139:4 · 본디새김
여기서는 시간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말을 해야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인간보다 조금 더 많은 정보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시는 방식 자체가 인간의 앎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뜻밖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당신은 뒤와 앞에서 저를 에워싸셨고, 제 위에 당신의 손바닥을 얹으셨습니다.시편 139:5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서 「에워싸셨고」(צוּר)에 해당하는 말은 둘러싸거나 에워싸는 의미를 가집니다. 문맥에 따라 보호하는 울타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지만, 움직일 여지를 없애는 포위의 느낌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처음부터 편안한 보호의 장면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손이 보호하는 손인지,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손인지, 이 구절만으로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뒤따르는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앎과 임재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경외심을 일으키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 앎은 제가 이해하기에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저는 거기에 이를 수 없습니다.시편 139: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시인을 완전히 아시지만, 시인은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관계는 비대칭적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깊이 나를 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아시는지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을 이처럼 아시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사무엘상 16:7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이 외모를 보지만 자신은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시는 방식이 외적인 모습이나 사회적 평가에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시편 139편은 이 주제를 한 사람의 기도로 풀어냅니다.
세상 끝에 가도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당신의 영을 떠나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의 얼굴을 피해 제가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시편 139:7 · 본디새김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가 아닙니다.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 앎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 묻습니다. 「당신의 영」과 「당신의 얼굴」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병행적인 언어입니다. 특히 「얼굴」은 단순히 외형적인 얼굴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람과 관계하시는 임재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세상의 가장 먼 곳들로 이동합니다.
하늘과 스올 — 높이와 깊이의 끝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이 계시고, 스올에 잠자리를 펴도 바로 거기에 당신이 계십니다.시편 139:8 · 본디새김
하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반대로 스올은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이해되던 가장 깊은 곳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높은 거처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올은 일반적으로 죽음과 무력함, 살아 있는 세계와의 단절을 연상시키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스올조차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못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삶이나 부활에 관한 완성된 교리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이곳에서 사후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것은 공간적인 극단을 통한 표현입니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을 모두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새벽의 날개와 바다 끝 — 거리의 끝
제가 새벽의 날개를 들어 올려 바다 끝에 머문다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의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의 오른손이 저를 붙드실 것입니다.시편 139:9–10 · 본디새김
이번에는 높낮이가 아니라 수평적인 거리가 등장합니다.
「새벽의 날개」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새벽빛이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질러 퍼지는 모습을 날개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새벽의 날개를 타고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바다 끝」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땅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다 끝은 서쪽으로 펼쳐진 먼 세계를 연상시킬 수 있습니다. 새벽이 동쪽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새벽의 날개와 바다 끝이라는 표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거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10절의 「거기에서도 당신의 손이 저를 이끄시고」에서 앞서 등장한 하나님의 손이 다시 나타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손바닥이 시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시인이 하나님께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단순한 포위의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더라도 자신을 이끌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이해됩니다. 시인은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장소를 찾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떤 곳에서도 자신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빛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저는 말했습니다. 「분명 어둠이 나를 짓누르고, 내 둘레의 빛이 밤이 될 것이다.」시편 139:11 · 본디새김
이제 시인은 마지막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공간적인 거리로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둠 속에서는 어떨까요? 사람은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서로 가까이 있어도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어둠은 시인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감출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장벽입니다.
11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둠이 시인을 덮치거나 압도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어둠이 자신을 감추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어둠 속에서 위협받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 숨으려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절은 어느 쪽의 상황에도 적용되는 사실을 말합니다.
어둠조차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 어둠이나 빛이나 같습니다.시편 139:12 · 본디새김
주목해야 할 말은 「당신께는」입니다.
시인은 어둠이 실제로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밤은 여전히 밤이고, 어둠은 여전히 어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어둠이 인간에게처럼 시야를 가리는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분이 멀리까지 이동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각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그분의 앎과 임재는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둠 속에서도 아시는 이유를 자신의 출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에서는 「어둠이 나를 짓누른다」에 해당하는 동사의 뜻과, 뒤따르는 밤과 빛의 관계에 관해 여러 읽기가 가능합니다. 칠십인역은 어둠이 시인을 짓밟는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내가 나 자신을 알기 전부터 나를 보신 하나님
당신이 제 콩팥을 지으셨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짜 맞추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39:13 · 본디새김
13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갑자기 창조에 관한 새로운 주제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하나님께는 어둠조차 어둡지 않다고 고백한 이유를 더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시인을 알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단순히 알고 계셨던 것만이 아닙니다. 시인을 지으셨습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지식과 임재를 창조 행위에 연결합니다.
콩팥을 지으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히브리어에서 콩팥은 단순히 신체 기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 여호와야훼는 마음을 살피고 내면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제 콩팥을 지으셨고」라는 표현에는 사람의 몸속 깊은 곳, 곧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단순히 외형적인 육체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머무는 깊은 곳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어지는 「짜 맞추셨다」(סָכַךְ)는 표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원문의 동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제작 기술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은 태아 형성의 생물학적 절차를 설명하기보다, 그 은밀한 과정에도 하나님이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미지는 욥기 10:8–11에서도 나타납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빚으시고, 살과 피부로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엮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두 시인이 이 사실을 말하는 정서는 다릅니다. 욥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시는지 탄식합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사합니다.
같은 창조 신앙이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다른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려울 만큼 놀라운 존재
제가 두려울 만큼 남다르게 되었으므로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하신 일들은 놀라우며, 제 영혼은 그것을 잘 압니다.시편 139: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인간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감사의 궁극적인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두려울 만큼」은 경외심을 일으키는 놀라움을 표현하고, 「남다르게 되었다」는 표현에는 보통의 인간적 이해를 넘어서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정교하고 특별한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놀라운 세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하늘과 땅, 별과 바다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를 발견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그분이 하신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수놓아진 사람
제가 은밀한 곳에서 만들어지고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수놓아질 때에도, 제 뼈대는 당신께 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시편 139:15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두 가지 이미지를 겹쳐 놓습니다.
하나는 「은밀한 곳」입니다. 문맥상 어머니의 태중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의 몸이 형성되는 과정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땅의 가장 깊은 곳」입니다. 이 표현은 앞에 등장한 스올이나 세상의 깊은 영역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시인이 문자 그대로 땅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태중이라는 감추어진 공간을 땅의 깊은 곳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수놓아질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רָקַם)는 여러 색실을 사용하여 무늬를 짜거나 수놓는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의 작품이 세밀하게 만들어지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제작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인간이 아무런 결함이나 고통도 없는 완벽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인간의 모든 신체적 상태를 평가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형성의 과정도 하나님께 숨겨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은밀한 곳이 하나님께는 감추어진 곳이 아닙니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나와 하나님의 책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저를 당신의 눈이 보셨습니다. 빚어진 날들이 모두 당신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루는 그에게 속합니다.시편 139:16 · 본디새김
이 절은 시편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גֹּלֶם)는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기 이전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그보다 더 먼 과거로 돌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거나 표현할 능력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책과 기록된 날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기억과 앎, 그분 앞에서 인간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마지막 구절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었다」는 부정의 의미로도, 「그에게 하나가 있었다」는 소유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긍정적인 소유 관계를 반영해 「그 가운데 하루는 그에게 속합니다」라고 옮겼습니다. 두 읽기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한 사람의 모든 선택과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예정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께 처음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시간 이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볼 때, 자기 삶의 시작은 단순히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첫 순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이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와 앎 안에서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는 하나님 앞에 책이 있다는 이미지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는 하나님의 책에서 이름을 지우는 문제가 등장하고, 시편 56:8에서는 시인의 눈물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다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16절 마지막 구절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 자음 표기와 전통적인 낭독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며, 칠십인역은 부정의 방향으로 옮깁니다. 본문의 다른 부분과 연결하면, 날들이 아직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창세기 2:7에서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그 창조의 손길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람이 형성되는 장면으로 확장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먼 과거에 끝난 사건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 그리고 깨어나는 사람
하나님, 당신의 생각들이 제게 얼마나 귀한지요.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것들을 세어 보아도 모래보다 많습니다. 깨어나 보니 저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시편 139:17–18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첫 단락을 마쳤습니다. 이제 그 놀라움이 감사와 경이로움으로 발전합니다.
17절의 「생각들」은 해석상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레에카(רֵעַ)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생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에서는 이 표현이 「당신의 친구들」로 옮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노래하는 것으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귀함과 많음을 노래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본디새김의 「생각들이」라는 읽기를 따르면,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앎에 관한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아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끝까지 셀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조용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깨어나 보니 저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앞서 등장한 일상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앉고 일어서는 일, 다니고 눕는 일을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잠든 동안에도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을 때만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가 잠들고 깨어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생각을 다 셀 수는 없지만, 그 놀라운 앎의 대상인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 고요한 장면에서 시편이 끝난다면, 매우 아름다운 찬양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갑자기 악인과 피 흘리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깨어나다」는 말이 실제 잠에서 일어나는 경험인지,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죽음 이후의 부활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미움
하나님, 당신이 악인을 죽이신다면 좋겠습니다. 남의 피를 흘리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시편 139:19 · 본디새김
앞부분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 때문에, 이 구절은 시편의 흐름을 방해하는 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생략하면 시편 139편이 마지막에 어디로 향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을 악인과 자신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그는 폭력을 행하는 자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악인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들이 시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남의 피를 흘리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악이 단순한 개인적 불쾌감이나 사소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폭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악한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악한 꾀를 품고 당신을 거론하며, 당신의 적들은 당신을 헛되이 내세웠습니다.시편 139:20 · 본디새김
이 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어렵습니다. 특히 누가 무엇을 들어 올리거나 헛되이 사용하는지에 관한 문장 구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악하게 거론하고 헛되이 내세운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그들의 악은 폭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까지 악한 목적에 끌어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20:7). 다만 이 시편의 악인들이 실제로 어떤 종교적 행위나 거짓 맹세를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입장을 더욱 강하게 표현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가 미워하지 않습니까? 당신께 맞서 일어나는 자들을 제가 역겨워하지 않습니까? 저는 더할 수 없는 미움으로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제 원수가 되었습니다.시편 139:21–22 · 본디새김
이 말은 오늘의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악을 미워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단순히 악을 싫어하는 건강한 도덕적 감정이라고 바꾸어 설명하면 본문의 날카로움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이 구절을 곧바로 모든 신자가 자신과 신앙적으로 대립하는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읽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명령이 아니라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태도를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원수와 자신의 원수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신앙적 열심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의 분노는 정당한 악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 안에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나 잘못된 판단이 섞여 있을 가능성까지 이 구절이 제거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분노를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원수로 판단할 수도 있고, 자신이 느끼는 미움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실제로 이러한 오류를 범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알려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가 이 문제를 가볍게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강하게 고백한 다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살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자신의 미움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마지막 결론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시는데 왜 다시 살펴 달라고 기도하는가?
하나님, 저를 샅샅이 살피시고 제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저를 시험하시고 제 불안한 생각들을 알아 주십시오.시편 139:23 · 본디새김
시편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지휘자를 위하여. 다윗의 것. 시편. 여호와야훼, 당신은 저를 샅샅이 살피셨고 저를 아십니다.시편 139:1 · 본디새김
23절에서는 같은 말이 기도로 돌아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살피다」(חָקַר)와 「알다」(יָדַע), 같은 핵심 동사들이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완료된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살피셨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행동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살피시고 알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처음 문장을 다시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을 시작할 때 시인은 하나님의 앎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앎 앞에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더욱이 마지막 기도에서는 하나님이 살펴보셔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합니다. 「제 마음」과 「제 불안한 생각들」입니다. 「불안한 생각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רְעַף)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생각이나 염려를 나타냅니다. 시편 94:19에서도 이와 관련된 표현이 많은 염려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앞서 표현한 강한 미움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충성이 자신의 마음을 검토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시험하시도록 내어 놓습니다.
이 기도를 반드시 앞선 미움에 대한 회개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원수들을 미워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기도는 적어도 자신의 내면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완전히 판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펴보시도록 요청합니다.
고통의 길과 영원한 길
제 안에 고통의 길이 있는지 보시고, 저를 영원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시편 139:24 · 본디새김
여기서 「고통의 길」의 의미는 해석이 갈립니다. 고통이나 슬픔을 일으키는 길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르는 길로, 또 칠십인역처럼 「불법의 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어휘의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문맥에서 그 길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과 대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제 안에」입니다.
그는 세상에 악한 길이 있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에 그런 길이 있는지 보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악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검토받아야 할 사람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저를 영원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영원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은 긴 시간이나 지속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영원한 길」은 끝없이 지속되는 길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제시하신 바른 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6:16에서는 옛적 길들을 살피고 좋은 길이 어디인지 알아 그 길로 걸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이 표현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의 삶에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시편 전체의 또 다른 반복이 드러납니다. 3절에서 시인은 「제 모든 길을 익히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4절에서는 「저를 영원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아십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길을 아신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이끌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앎은 인간의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판단과 감정까지 하나님께 내어 놓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고통의 길」의 히브리어 데레크 오체브는 고통이나 슬픔을 일으키는 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잘못된 길을 뜻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오체브」를 우상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자리를 「불법의 길」이라는 뜻으로 옮기며, 이는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안에 악한 길이 있는지 살펴 달라고 간구한다는 이해와 가깝습니다. 예레미야 17:9–10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여호와야훼가 그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4:12–13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드러나며, 하나님 앞에 감추어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편 139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앎과 인간의 내면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는 연결입니다.
나를 아시는 분께 나를 보여 달라고
시편 139편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해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그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처나 불안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은 내가 숨기고 싶은 생각까지 그분께 알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생각,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동기도 하나님 앞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서 그가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우주의 비밀도, 자신의 미래에 관한 모든 정보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그 마음을 자신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것을 드러내시고 바른 길로 이끄실 수 있다고 믿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판단을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은 처음과 거의 같은 말로 돌아오지만, 그 말의 방향은 달라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 앎 앞에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 저를 샅샅이 살피시고 제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을 덧붙입니다. 「제 안에 고통의 길이 있는지 보시고, 저를 영원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시인은 자신이 걸어야 할 모든 길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시편 139편은 자신을 완전히 아는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맡기는 사람의 기도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