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41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기도는 향처럼, 입술에는 파수를
시편 141편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가지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두 손을 들고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처럼 놓이기를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입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입에 파수를 두고,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야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앞선 시편 140편에서 시인은 독을 품은 원수들의 입술과 자신을 붙잡으려는 덫을 이야기했습니다. 시편 141편에도 악인들의 올무가 등장하지만, 기도의 초점은 조금 달라집니다.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보호받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는 더 깊은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악인의 유혹을 거절하면서도, 의로운 사람이 주는 아픈 충고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구원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 141편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보호는 밖에서 밀려오는 위험을 막는 일과, 자기 안에서 악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함께 포함합니다.
향이 되어 올라가는 기도
시편. 다윗의 것. 여호와야훼,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서둘러 제게 와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부를 때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편 141:1 · 본디새김
시편은 다급한 부르짖음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이 어떤 위기에 놓여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하는 말보다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요청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제가 당신을 불렀습니다」라는 고백과 「제가 당신을 부를 때」라는 표현도 이어집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고,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위험을 모두 피한 사람이 지나온 일을 회상하는 감사의 노래가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드리는 간구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제 기도가 당신 앞에 향으로 놓이기를, 제 두 손바닥을 드는 일이 저녁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141:2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성소의 예배와 연결합니다. 향은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피우던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0:7–8에 따르면 아론은 아침에 등잔을 손질할 때와 저녁에 등잔을 켤 때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9:38–42에서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시편 141편은 이러한 정기적인 예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실제로 성소 안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분명히 바라는 것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성소의 향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부였듯, 자신의 기도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손을 드는 행동은 기도하는 자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펴는 모습이 나타나고(열왕기상 8:22), 시편 28:2에서도 성소를 향해 손을 드는 기도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손을 드는 행동이 저녁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핵심은 기도가 제물에 비견된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손에 실제 향이나 제물이 들려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드리는 기도와 두 손을 드는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향과 제물처럼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성소의 제사가 불필요해졌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자신의 기도에 연결합니다.
향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예물이라면,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와야 할까? 시인은 바로 다음 절에서 자신의 입술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향으로 놓이기를」에 해당하는 표현은 단순히 향처럼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티콘(כּוּן)은 무엇이 굳게 세워지거나 마련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놓이기를 바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저녁 제물」의 히브리어는 민하(מִנְחָה)트 에레브입니다. 민하는 곡식 제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선물이나 예물이라는 넓은 의미도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한 곡식 제사의 세부 절차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입에 파수를 세우다
여호와야훼, 제 입에 파수를 두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십시오.시편 141:3 · 본디새김
입이 하나의 문으로 묘사됩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합니다. 문을 열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밖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입술을 그런 출입구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파수를 세워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파수」는 지키는 사람이나 경계를 서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마치 성벽의 문을 지키는 사람처럼 자신의 입술도 누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파수꾼의 역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는 자신의 말을 조심하겠다는 단순한 결심과는 다릅니다. 그는 스스로 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입을 지켜 주셔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자기 기도가 향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3절에서는 그 기도가 나오는 입을 지켜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향처럼 올라가는 말을 드리고 싶다면, 먼저 그 입에서 악한 말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드리는 기도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거룩한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문제는 입술보다 더 깊은 곳으로 옮겨갑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악한 행실을 일삼도록 제 마음을 악한 일로 기울이지 마십시오. 제가 그들의 진미를 먹지 않게 해 주십시오.시편 141:4 · 본디새김
「기울이지 마십시오」(נָטָ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일보다 깊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악을 향하고, 그 방향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악을 행하게 될 가능성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이 위험을 「진미」라는 뜻밖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악은 왜 맛있는 음식처럼 묘사되는가?
진미는 먹고 싶은 음식입니다.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특별한 음식입니다.
악은 언제나 노골적인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매력적인 제안으로 다가옵니다.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이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면 안전해질 수도 있고, 그들이 누리는 특별한 대접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인 잔치나 뇌물 사건을 묘사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의 이미지를 통해 악에 동참하는 일이 즐겁고 매력적인 경험으로 제시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잠언 23:1–3에서도 권력자의 식탁 앞에서 그가 주는 진미를 탐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맛있는 음식이 반드시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음식이 사람을 유혹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행실을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즐거움까지 거부할 수 있을지는 자신의 힘만으로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절에서 중요한 것은 악의 시작점입니다. 악한 행동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기울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누리는 즐거움에 익숙해진 다음, 그들과 같은 일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과정에 들어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입술은 사람의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는 문입니다. 그러나 입술만 지킨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자체가 악을 향해 기울어 있다면, 결국 말과 행동도 그 방향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입술의 문뿐 아니라 마음의 방향까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지만 악에 빠지지 않으려면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그 사실을 알려 주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주제는 잠언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잠언 4:23은 마음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사람과 동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워지지만, 어리석은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고 말합니다. 시편 141편은 이러한 지혜의 가르침을 기도의 언어로 바꿉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3:5–10에서도 혀의 파괴적인 힘과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람을 저주하는 모순이 강조됩니다. 시편 141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말과 사람을 향한 말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악인의 진미보다 의로운 사람의 꾸지람을
의로운 이가 저를 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선의입니다. 그가 저를 꾸짖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머리에 바르는 기름입니다. 제 머리가 그것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전히 그들의 악행에 맞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시편 141:5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진미를 먹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로운 사람이 자신을 치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자신을 치거나 꾸짖는 일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선호를 뒤집습니다. 악인이 주는 진미는 거절하고 싶지만, 의로운 사람이 주는 아픈 꾸지람은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
두 행동이 자신에게 미치는 결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진미는 당장은 즐겁지만 악에 동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의로운 사람의 꾸지람은 당장은 아프지만 자신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어떤 대접이 더 기분 좋은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꾸지람이 선의가 된다는 말
원문에서 「선의」(חֶסֶד)로 옮긴 말은 인애, 신실한 사랑, 관계 안에서 베풀어지는 선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의로운 사람이 자신을 치는 행동을 선의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를 치는 사람은 「의로운 이」입니다. 이 구절은 누구든 자신을 때리거나 모욕해도 그것을 무조건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선의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이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하는 책망입니다.
이 점에서 잠언 27:6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친구가 입힌 상처가 신실한 반면, 원수의 입맞춤은 넘친다고 말합니다. 친구의 꾸지람은 아플 수 있지만 유익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다정한 행동은 즐겁지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1편에서는 이 대비가 진미와 기름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머리에 바르는 기름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은 몸을 돌보고 손님을 환대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기쁨과 풍요를 표현하는 이미지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23:5에서도 하나님이 시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머리에 바르는 기름은 상처를 주는 물건이 아니라 좋은 대접과 기쁨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이미지를 꾸지람에 적용합니다. 자신을 바로잡는 책망이 머리에 바르는 기름처럼 귀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중요한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본디새김처럼 읽으면,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좋은 기름으로 받아들이고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됩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받아들이되, 죄인의 기름이 자신의 머리를 기름지게 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기름이 의로운 사람의 유익한 책망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기름이 악인이 제공하는 매력적인 대접을 가리키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강조됩니다. 두 해석 모두 앞 절의 진미와 연결되지만, 본문의 세부 의미는 달라집니다. 어느 하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시편이 보여 주는 선택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호의와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보다 자신을 올바르게 이끄는 말을 귀하게 여기려 합니다.
이것은 3절의 입술에 파수를 세워 달라는 기도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킵니다. 시인은 자기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에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합니다. 입술을 지키는 사람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올바르게 꾸짖을 때 그 말을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악에 물들지 않는 삶에는 거절해야 할 즐거움이 있고, 받아들여야 할 아픔이 있습니다.
5절의 마지막 문장 「제가 여전히 그들의 악행에 맞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에서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들의 악행에 맞서」라는 표현이 앞 문장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반대하는 기도가 계속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그들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도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악행에 맞서는 기도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이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와 악행을 반대하는 태도를 함께 유지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는 고침받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악 자체와 타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태도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도 바로잡혀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악에 맞서는 태도가 자기 확신에만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바위 아래로 떨어진 재판관들과 스올 앞의 뼈들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벼랑 아래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들을 것입니다. 제 말이 듣기에 좋기 때문입니다.시편 141:6 · 본디새김
이 절부터 시편은 갑자기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자신의 입술과 마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위 벼랑 아래로 내던져진 재판관들이 등장합니다.
「재판관들」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재판관들」입니다.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역할도 포함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특정한 법정의 판사들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의 재판관들이며, 왜 바위 벼랑 아래로 내던져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의 악한 사람들과 관련된 지도자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들의 신분이나 사건의 경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던져졌습니다」라는 표현도 실제로 바위 아래로 추락한 사건을 가리키는지, 권력을 잃고 몰락하는 모습을 묘사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절을 다윗의 특정한 도피 사건이나 어느 왕의 죽음과 직접 연결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더욱 어려운 것은 다음 문장입니다. 이미 내던져진 재판관들이 어떻게 말을 듣게 되는가?
재판관들이 몰락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재판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시인의 말을 듣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은」이라는 복수 주어가 정확히 누구인지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회개하거나 시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문장에 등장하는 「제 말」은 앞의 입술에 관한 기도와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입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시인이 이제 자신의 말이 듣기에 좋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자신의 언변을 자랑하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의 말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제 효과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분명한 결론을 서둘러 내리는 것보다, 본문이 남겨 놓은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올의 입구에 흩어진 뼈들
누군가 땅을 가르고 쪼개듯, 저희 뼈들이 스올의 입구에 흩어졌습니다.시편 141:7 · 본디새김
이 절 역시 매우 어려운 시적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들은 무언가를 쪼개고 갈라 놓는 행동을 나타내지만,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땅을 갈거나 흙덩이를 부수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나무를 쪼개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훨씬 분명하고도 섬뜩합니다.
뼈가 흩어졌다는 말은 죽음과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에서 사람의 시신과 뼈를 합당하게 수습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뼈가 사방에 흩어졌다는 표현은 생명의 상실뿐 아니라 심각한 훼손과 비참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실제 집단 학살이나 전쟁터의 시신을 묘사한 역사적 보고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적인 과장이나 죽음의 위협을 묘사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주로 「저」라는 단수 화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저희 뼈들」이라는 복수형이 나타납니다. 시인은 자신과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 시인과 어떤 관계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변화는 개인적인 기도가 공동체적인 고통을 포함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6절과 7절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권세 있는 지도자들이 몰락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다른 쪽에서는 뼈들이 스올의 입구에 흩어지는 비참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두 장면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 설명하려면 본문에 없는 많은 정보를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구절을 사건의 시간순 기록으로 재구성하기보다, 시인이 죽음과 몰락에 관한 극단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시인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표현한 뒤,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쏟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흩어진 뼈들 앞에서 하나님께 눈을 들다
여호와야훼, 주, 제 눈은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피했으니, 제 생명을 쏟아 버리지 마십시오.시편 141:8 · 본디새김
7절에서는 뼈들이 스올의 입구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눈이 향하는 곳을 말합니다.
시인은 두 손바닥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입과 입술을 지켜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음이 악으로 기울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머리가 의로운 사람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눈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몸의 여러 부분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죽음의 위협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위협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을 오직 그 위험에만 고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생명을 쏟아 버리지 마십시오
「쏟아 버리지」는 쏟아 내거나 비워 버리는 행동과 관련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물처럼 쏟아 버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명은 쉽게 다시 채울 수 있는 그릇이 아닙니다. 한 번 잃으면 사람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이미지는 죽음의 위험 앞에 놓인 시인의 절박함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는 생명을 지켜 달라는 요청에 앞서 「제가 당신께 피했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신뢰와 간구가 함께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이미 모든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피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체적인 위험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위험을 있는 그대로 아룁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위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현실 가운데서 생명을 지켜 주실 분께 도움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은 무엇일까? 마지막 두 절에서 다시 덫과 올무가 등장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
그들이 저를 잡으려고 놓은 덫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올무에서 저를 지켜 주십시오.시편 141:9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자신의 마음이 악으로 기울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실제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의 계략에서 보호받기를 간구합니다.
이 두 기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시인을 해치려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함께 악을 행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에도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밖에서 닥쳐오는 덫을 피하게 하는 일과, 안에서 악을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신이 악에 동참한다면, 시인이 처음에 드린 기도는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음을 지키려는 소망이 있더라도, 원수들이 실제로 그를 붙잡아 죽이려 한다면 외적인 구원도 절실합니다. 시인은 이 두 문제를 모두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짧은 소망을 표현합니다.
제가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이 함께 그의 그물들에 빠지기를 바랍니다.시편 141:10 · 본디새김
원수들은 시인을 잡기 위해 그물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그들이 그물에 빠지기를 바랍니다. 남을 붙잡기 위해 만든 함정이 도리어 그들을 붙잡는 것입니다.
다만 「그의 그물들」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단수 소유 접미사가 사용됩니다. 이를 악인들의 그물이라는 집합적인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특정한 한 사람에게 속한 그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소유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 문장의 「함께」와 「지나가는 동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악인들이 함께 그물에 빠지는 동안 시인은 그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마지막 장면은 매우 선명합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함정에 빠집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는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머물러서 원수들의 파멸을 지켜보거나, 그들을 직접 응징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붙잡으려는 덫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악인들이 그물에 빠지기를 바라는 소망에는 심판에 대한 바람도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온화한 기도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행동과 악인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악인들은 그물에 빠지고, 시인은 지나갑니다.
조금 더 깊이
보호의 두 방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이집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땅으로 이동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외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는 일과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일을 함께 포함합니다.
맺음 — 입술에는 파수를, 발걸음에는 길을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위험도 겪지 않게 하신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위험과 유혹 속에서도 그 사람이 악에 동참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일도 포함합니다. 시인은 악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는 행동입니다.
악에 저항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악으로 기울어질 가능성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시인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확신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그가 실제로 덫을 벗어났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바라는 기도로 끝납니다.
시편 141편은 두 손을 드는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손을 들어 기도하면서, 동시에 자기 입술에 파수를 세워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악인의 진미를 거절하고 싶어 하지만, 의로운 사람의 책망은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다시 길 위에 섭니다.
그곳에는 악한 사람들이 놓아 둔 덫과 올무가 있습니다. 어디에 그물이 숨겨져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을지 시인은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원수를 굴복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시는 가운데 「제가 지나가는 동안」이라는 기도처럼 그 길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악인들이 마련한 그물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미를 먹으며 함께 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든 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지나가고자 합니다.
시편 141편은 악한 세상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면서, 그 세상을 지나가는 동안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은, 그 기도가 자신의 입술과 마음과 발걸음까지 지켜 주기를 바라며 길을 나아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