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46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시편 146편은 기쁨에 찬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찬양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한 뒤, 「귀족들을 의지하지 마라」는 뜻밖의 경고를 꺼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노래에서 왜 갑자기 귀족들을 믿지 말라는 말이 나올까요?
이 시편이 다루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구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귀족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권력자의 판결을 기다릴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의 도움을 바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기대가 왜 한계에 부딪히는지 보여줍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숨이 끊어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편의 경고와 찬양은 서로 다른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신실하게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믿는 것입니다. 시편 146편은 인간과 하나님을 바로 이 두 가지 기준에서 비교합니다.
시편 145편이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했다면, 146편은 그 고백을 인간의 통치자들과 직접 비교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말이 실제 삶의 신뢰와 희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 것입니다.
시편 146편은 시편집의 마지막 다섯 편을 여는 노래입니다. 146–150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같은 외침으로 끝납니다. ‘할렐루(הָלַל)야’는 히브리어 할렐루 야흐(יָהּ)에서 온 표현으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야흐’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줄인 형태이며, ‘할렐루’는 여러 사람에게 찬양을 명령하는 말입니다.
먼저 공동체를 향한 ‘할렐루야’가 울립니다. 이어 시인은 자기 영혼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여러 사람에게 귀족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목소리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말하던 시인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으로 확장됩니다.
이 노래의 흐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1. 1–2절: 자신에게 찬양을 명령하고 평생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2. 3–4절: 인간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그것에 궁극적인 신뢰를 두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3. 5–9절: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체적인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4. 10절: 이 모든 근거를 하나님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
특히 3–4절과 5–10절 사이의 대조가 시편 전체를 이끕니다. 사람의 계획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함을 지키십니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이 대조를 통해 찬양이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숨은 끝나지만 하나님의 신실함은 끝나지 않는다
1–2절: 자신의 영혼에게 내리는 명령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시편 146:1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영혼’은 문맥에 따라 목숨, 생명, 사람 자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몸과 분리된 어떤 부분만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를 향해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42:5, 11과 43:5에도 시인이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낙심한 영혼에게 하나님을 바라라고 권합니다. 시편 146편에서 시인은 낙심을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한다는 점에서 찬양이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에만 달린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 내가 사는 동안 내 하나님께 찬양 노래를 부르겠다.시편 146:2 · 본디새김
두 문장의 시간 표현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전체를 찬양의 시간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인간의 숨이 떠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인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귀족들만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역시 유한합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시간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는 끝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끝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3절: 귀족들이 구원을 줄 수 없는 이유
귀족들을 의지하지 마라. 구원을 줄 수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마라.시편 146:3 · 본디새김
‘귀족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유력자나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도움을 기대할 만한 권력 있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귀족들이 특별히 악해서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3절의 경고를 4절이 설명하는데, 그 설명은 귀족들의 부패나 악행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고를 모든 통치자가 악하다거나 인간의 도움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이 문제 삼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 최종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구원’은 위험이나 압박에서 벗어나도록 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권력자는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올바른 재판을 내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억압을 중지시킬 수도 있습니다. 구약은 실제로 왕들에게 이런 책임을 요구합니다(시편 72:1–4).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는 권력자라도 구원의 궁극적인 보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4절: 왕도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그의 숨이 떠나면 그는 자기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 그의 생각들은 사라진다.시편 146:4 · 본디새김
그에게는 숨이 있습니다. 그 숨이 떠납니다. 그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3절의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에는 벤 아담, 곧 ‘인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4절의 ‘흙’에는 아다마가 사용됩니다. ‘아담’과 ‘아다마’ 사이의 말소리와 의미의 연결은 창세기 2:7과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으며, 죄를 범한 뒤에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땅에서 온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 위에 서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 앞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토노타브(עֶשְׁתֹּנָה)는 그의 생각, 구상, 계획을 가리키는 드문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날 그의 계획들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생각’이라는 번역은 인간의 내적인 사고를 강조합니다. ‘계획’이라는 번역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실현하려던 일들이 끝난다는 의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는 어느 하나만 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앞절에서 왜 인간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을 고려하면, 사람이 약속하고 계획한 일들을 끝까지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가령 한 권력자가 불의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더라도 그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핵심은 죽은 사람의 의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인간 존재에 관한 교리를 이 구절 하나에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권력과 계획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단지 사람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경고에서 곧바로 행복에 대한 선언으로 전환합니다.
5절: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야곱의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시편 146:5 · 본디새김
3절에서는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는 무엇을 도움으로 삼고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지 말합니다.
시인은 신뢰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신뢰의 대상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행복하다’는 시편 1:1의 ‘행복하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지금 기분이 좋다는 뜻보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복된 상태에 있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시편 146편에서는 여호와야훼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야곱의 하나님’일까요?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오래된 호칭입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던 중,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함께하시며 그를 지키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8:13–15). 그때 야곱은 왕도 아니었고, 안정된 정착지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떠나 길 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 희망을 두라고 권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권세를 통해서만 알려진 분이 아니십니다. 길 위에 있던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 연결이 시편의 저자가 반드시 창세기 28장의 특정 사건만을 의도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이 기억해 온 하나님의 역사와 약속을 불러옵니다.
6절: 창조하신 하나님은 신실함을 지키신다
그는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든 이이며, 영원히 신실함을 지키고,시편 146:6 · 본디새김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창조된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서도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여호와야훼의 창조로 말미암았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흙을 포함한 온 세계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창조주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은 죽음 앞에서 끝나지만, 하나님의 신실함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신실함’은 진실, 참됨,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지킨다’는 동사가 그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참된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문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만든 이’, ‘신실함을 지키는 이’, ‘정의를 행하는 이’, ‘빵을 주는 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 연결됩니다. 창조주의 정체성과 정의를 행하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행동이 하나의 긴 흐름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실함을 지키시며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이 향하는 자리에는 뜻밖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7–9절은 시편 146편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비교했습니다. 이제 추상적인 설명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행동들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정의를 행하십니다. 빵을 주십니다. 풀어 주십니다. 눈을 여십니다. 일으키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지키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이 행동들의 대상은 대개 사회적·신체적 어려움이나 취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이 목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는지도 보여줍니다.
7절: 정의를 행하고 빵을 주시는 하나님
억눌린 이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준다. 여호와야훼는 묶인 이들을 풀어 준다.시편 146:7 · 본디새김
‘억눌린 이들’은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정의’는 판결, 재판, 정의로운 질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단지 억눌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억눌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로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를 억누르는 부당한 관계와 상황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구약에서 정의는 종종 재판과 통치의 책임으로 나타납니다(신명기 16:18–20, 시편 72:1–4). 시편 146편은 바로 그런 정의를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선언합니다.
다음에는 굶주린 이들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풍요와 번영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빵’이라는 구체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정의로운 재판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굶주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일과 실제로 살아갈 것을 제공하는 일이 하나님의 신실한 다스림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묶인 이들’은 결박당하거나 구속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정치적·사회적 구금이나 실제적인 속박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구절은 어떤 종류의 구속인지 구체적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억눌린 사람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이 필요하며, 묶인 사람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서로 다른 고통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을 향해 행동합니다.
이 시편은 그 신실함을 재판과 식탁과 결박이 풀리는 자리에서 보여줍니다.
8절: 보지 못하는 사람과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여호와야훼는 눈먼 이들의 눈을 연다. 여호와야훼는 몸이 굽은 이들을 일으킨다. 여호와야훼는 의로운 이들을 사랑한다.시편 146: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짧은 문장 세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여호와야훼는’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눈먼 사람이 어떻게 보게 되는지, 몸이 굽은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모든 행동의 주체가 여호와야훼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연다’는 닫혀 있던 것을 열거나 눈을 뜨게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실제 시력과 관련된 장면에도 쓰이고, 보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되는 상황에도 사용됩니다. 이 구절 역시 신체적인 시력의 회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지만, 본문 자체가 특정한 치유 사건을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은 몸이 굽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앞의 시편 145:14와 같은 고백입니다. ‘일으킨다’는 굽거나 기울어진 것을 곧게 세우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고개와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다시 곧게 일으키십니다.
이것을 반드시 신체적 장애의 치유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거운 짐과 압박 아래 짓눌린 사람을 일으키시는 모습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굽은 사람이라는 본문의 구체적인 이미지 자체를 없애고 단순히 마음이 낙심한 사람으로만 바꾸어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장은 앞의 둘과 조금 다릅니다.
눈먼 이들과 몸이 굽은 이들은 곤경에 처한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의로운 이들’은 그들의 삶이 지닌 도덕적 성격에 따라 묘사됩니다. 시인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모두 의롭다고 말하지도 않고, 의로운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인간이 높은 지위나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걸으며 그분의 뜻에 충실한 삶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서 힘과 지위를 확보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9절: 거류민, 고아, 과부
여호와야훼는 거류민들을 지킨다.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지만, 악인들의 길을 뒤틀어 놓는다.시편 146:9 · 본디새김
구약에서 이 세 집단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정적인 관계나 지위가 취약해지기 쉬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율법에서 ‘거류민’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외부 출신 거주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태어난 곳의 친족 관계나 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아는 부모, 특히 당시 사회에서 법적·경제적 보호를 제공하던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가리키는 맥락이 많습니다. 과부 역시 남편의 죽음으로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보호가 약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이들을 반복해서 보호 대상으로 언급합니다. 출애굽기 22:21–24에서는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18–19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거류민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24:17–22에서는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과 생계를 위한 몫이 돌아가도록 명령합니다.
이스라엘이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바로 그런 이들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명령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과 무관한 사회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동체의 생활 속에 반영하도록 요구하는 규범입니다.
거류민에게는 그가 머무는 곳에서 보호가 필요합니다. 고아와 과부에게는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줄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한 취약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대조가 등장합니다.
‘뒤틀어 놓는다’는 구부러뜨리거나 비뚤어지게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문맥에서는 악인들의 길, 곧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행위를 어그러뜨리고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몸이 굽은 사람을 곧게 일으키십니다. 9절에서는 악인들의 길을 뒤틀어 놓으십니다. 서로 다른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지만, 시적인 이미지에는 분명한 대비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는 자리에서 악인의 길을 뒤틀어 놓는 행동이 등장할까요?
억눌린 사람에게 정의가 행해지려면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뜻이 제한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보호가 취약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그들을 해치는 행동을 그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길을 어그러뜨리는 일은 앞에서 말한 보호와 정의에 대립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통치에는 악을 제어하는 책임도 포함됩니다.
다만 본문은 모든 고난이 즉시 해결되고 모든 악인이 당장 실패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시는지를 찬양합니다. 구체적인 사건들이 언제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시인의 선언이 지닌 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동사들이 보여주는 것
7–9절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라는 추상적인 설명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보여주는 동사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7절 후반부터 9절 전반까지 ‘여호와야훼는’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짧은 구절들이 거듭 울리면서 찬양에 독특한 리듬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행동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는 시편의 방식과 연결됩니다.
7–9절은 하나님이 약한 이들을 도우시는 여러 사례를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다스림이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무너뜨리는 힘에 맞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불의, 굶주림, 속박, 신체적 한계, 사회적 보호의 부재, 악인의 행위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자리에서 여호와야훼가 행동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정치적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스림을 찬양하는 사람은 인간의 통치가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정말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한다면, 그는 억눌린 사람에게 정의를 행하고 굶주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통치가 이런 책임을 이행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궁극적인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선한 통치 역시 유한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동사들은 구약의 여러 본문과 이어집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출애굽기 2:23–25) 이집트의 압제에서 건져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3:7–10). 두 본문이 표현과 주제를 공유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시편 146편이 출애굽의 특정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10:17–19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거류민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며, 이스라엘 백성도 거류민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사야 35:5–6에서는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실 때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이사야 42:7에서는 어둠과 갇힘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명의 일부로 눈먼 이들의 눈을 여는 일이 등장하며, 이사야 61:1–2에서는 포로와 묶인 사람들이 해방되는 일이 선포됩니다. 시편 146편과 이사야의 표현이 서로 문학적으로 직접 의존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편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찬양의 형태로 진술하고, 이사야의 본문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구원의 약속과 사명을 선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설명할 때 눈먼 이들이 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일을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 7:22). 이것은 시편 146편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이사야의 구원 약속들을 중심으로 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여호와야훼 자신이 정의와 돌봄과 구원을 행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영원히 왕으로 다스릴 것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은 대대로 다스릴 것이다. 할렐루야.시편 146:10 · 본디새김
인간의 통치자는 죽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보다 오래 존재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정의와 돌봄이 그분의 영원한 다스림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2절에서는 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사람의 생각들이 ‘그날’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히’ 신실함을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시며 ‘대대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시간은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 끝에 갇히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온 세계의 창조주로 찬양한 뒤 갑자기 ‘시온’을 부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을 가리키는 중요한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장소와 그분의 백성이 예배하는 중심지로 자주 등장합니다(시편 48:1–3, 132:13–14).
따라서 ‘시온아, 네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를 이스라엘의 예배와 언약의 역사 속에 연결합니다.
이 두 사실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시온에서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은 시온에만 갇힌 분이 아니시며,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잊으신 분도 아니십니다. 시편 중간에서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했다면, 마지막에는 시온이라는 공동체를 향해 그 하나님이 대대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개인의 희망은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할렐루야’가 울립니다. 처음의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초청이었습니다. 마지막의 ‘할렐루야’는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들은 뒤 다시 울리는 외침입니다.
굽은 몸을 일으키시는 왕
시편 146편은 가장 높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귀족들은 높은 자리에 있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는 온 세계를 지으신 분이면서도 억눌린 사람과 굶주린 사람, 묶인 사람과 눈먼 사람,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믿음은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듭니다. 하나는 사람이 끝까지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사람이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8절의 「여호와야훼는 몸이 굽은 이들을 일으킨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 아래에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붙들고 일으켜 줄 손길입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여호와야훼의 행동을 봅니다.
사람의 숨은 떠나고 그가 품었던 생각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영원히 신실함을 지키십니다.
시편 146편이 찬양하는 왕은 자신의 높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분이 아니라, 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왕이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 앞에서 노래는 마지막 외침으로 돌아갑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