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47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별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
시편 147편에는 얼핏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세우십니다.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의 상처를 싸매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시인은 밤하늘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는 별들의 수를 세고, 그 모두를 이름으로 부른다」(4절).
왜 마음의 상처를 고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별들이 등장할까요?
하나님은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시고, 하늘의 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세어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사람의 눈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보이는 별들도 하나님께는 익명의 무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라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돌봄 밖으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별들을 세시는 하나님과 상처 입은 사람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닙니다.
이 노래는 계속해서 이런 뜻밖의 연결을 만듭니다. 하늘의 구름과 굶주린 까마귀 새끼가 연결되고, 전쟁에서 힘을 발휘하는 말과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대조됩니다. 성문을 튼튼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 도시의 평화와 먹을 것도 마련하십니다. 마지막에는 눈과 얼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법도와 연결됩니다.
시인은 창조 세계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신실하신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147편은 하나의 찬양이지만, 세 번 새롭게 시작되는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름은 1절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에게 찬양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기 때문이다. 찬양은 즐겁고 마땅하기 때문이다.시편 147:1 · 본디새김
이어서 2–6절에서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노래됩니다. 두 번째 부름은 7절의 「감사하며 여호와야훼에게 노래하라」입니다. 8–11절에서는 비와 풀, 짐승과 까마귀 새끼들이 등장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가 드러납니다. 세 번째 부름은 12절의 「예루살렘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입니다. 13–20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안전과 평화,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말씀,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 법도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흩어진 공동체의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모든 생명을 먹이시는 창조 세계로 시선을 넓힙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공동체가 받은 평화와 말씀을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오늘날 히브리어 본문의 147:1–11을 하나의 시편으로, 147:12–20을 또 하나의 시편으로 구분합니다. 12절의 찬양 요청이 독립된 노래의 시작으로 들릴 만큼 뚜렷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승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노래를 하나로 읽으면, 세 부분 사이에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이 드러납니다. 처음에 무너진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성문을 튼튼하게 하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중간에 모든 생명을 먹이시는 하나님은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가장 좋은 밀로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분별력과 신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1–3절: 도시의 회복과 마음의 회복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을 세우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은다.시편 147:2 · 본디새김
예루살렘을 세우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신다는 표현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배, 그리고 그 후의 귀환과 재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흩어진 사람들의 귀환이 찬양의 중요한 이유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도시를 세우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도시가 다시 세워지는 일은 건물과 성벽만 복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이 함께 살아갈 터전이 없다면 공동체의 회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장소의 회복과 사람의 회복을 함께 말합니다.
그런데 3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고, 그들의 상처를 싸맨다.시편 147:3 · 본디새김
도시는 돌을 쌓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너진 도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시인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듯 하나님을 치료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שָׁבַ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마음이 깨어지거나 산산이 부서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상처를 싸맨다’는 말은 상처 입은 부위를 붕대로 감아 치료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멀리서 회복을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상처에 손을 대고 싸매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집과 성전이 재건되어도 잃어버린 가족, 무너진 삶의 기반, 오랜 두려움과 슬픔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우신다는 것은 그곳에 살아갈 사람들의 부서진 마음까지 돌보신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세우고 모으시는 하나님이 고치고 싸매십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상처를 하나님은 어떻게 알고 돌보실 수 있을까요? 시인은 뜻밖에도 별들을 이야기합니다.
4–5절: 별들의 수는 세시지만 그의 분별력은 셀 수 없다
그는 별들의 수를 세고, 그 모두를 이름으로 부른다.시편 147:4 · 본디새김
별들은 사람의 눈에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그 수를 세실 뿐 아니라 모두를 이름으로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한 천문학적 지식을 뜻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수많은 별들을 알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시적 언어입니다.
이 장면은 2절의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은다’는 말과 의미 있게 호응합니다. 흩어져 있는 사람들과 하늘에 펼쳐진 별들은 모두 수많은 개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는 그들이 하나의 구별 없는 덩어리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각각의 이름을 별처럼 부르신다는 직접적인 진술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별 하나하나를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능력과 나란히 놓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5절에 이르면 표현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고 힘이 크다. 그의 분별력은 헤아릴 수 없다.시편 147:5 · 본디새김
4절은 하나님이 별들의 ‘수’를 세신다고 말했습니다. 5절은 하나님의 분별력에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에서 ‘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파르(מִסְפָּר)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를 아시지만, 하나님의 분별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분별력’은 이해력이나 통찰력,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고 상처를 치료하시는 일에는 단순히 강한 힘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어떻게 돌보고, 무엇을 바로잡으며, 어디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을 만큼 강하실 뿐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헤아리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십니다. 따라서 별들의 장면은 단순히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세심한 돌봄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6절: 누가 세워지고 누가 낮아지는가
여호와야훼는 겸손한 이들을 붙들어 주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춘다.시편 147:6 · 본디새김
‘겸손한 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빔(עָנָו)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가난하거나 고난으로 낮아진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단순히 성품이 겸손한 사람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 등장한 쫓겨난 사람들과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힘과 지위를 잃고 낮아진 사람들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대로 악인들은 땅바닥까지 낮아집니다. 여기서 ‘낮춘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좌절시키고 권세를 꺾으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은 단지 무너진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낮아진 사람들을 붙드시고 악인의 높아짐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25장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며 백성이 사로잡혀 가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후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성전 및 예루살렘의 재건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13절에 나오는 성문의 빗장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성벽과 성문 재건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구체적인 저자나 작성 시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노래가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봉헌식에서 불렸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별들은 하늘의 군대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40:26에서는 하나님이 별들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어 40:28에서는 하나님의 명철을 헤아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40:29에서는 그분이 피곤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힘없는 사람에게 힘을 더하신다고 말합니다. 별들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친 사람을 붙드시는 능력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편 147:3–6과 매우 가깝습니다.
까마귀 새끼의 울음과 전쟁마의 힘
7–9절: 하나님은 산의 풀과 어린 새의 먹이까지 마련하신다
감사하며 여호와야훼에게 노래하라.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에게 찬양 노래를 불러라.시편 147:7 · 본디새김
시인은 새롭게 찬양을 요청한 뒤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고, 땅을 위해 비를 마련하며, 산들에 풀이 돋게 한다.시편 147:8 · 본디새김
하늘에서 시작한 움직임이 땅에 내려오고, 땅에서는 풀이 자라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비는 농사와 가축의 생존에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신명기 11:10–15는 이스라엘 땅이 이집트처럼 관개에만 의지하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비가 내리고 풀이 자란다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생명이 유지되는 구체적인 조건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풀이 자라는 장면에서 곧바로 동물들의 먹이로 관심을 옮깁니다.
그는 짐승에게 그 먹이를 주고, 울어 대는 까마귀 새끼들에게도 준다.시편 147:9 · 본디새김
시인은 크고 아름다운 새나 사람에게 유익한 가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까마귀 새끼들이 먹이를 달라고 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까마귀 새끼들이 ‘부른다(קָרָא)’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앞의 시편 145편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말로 기도할 수 없는 새끼들이 울어 댑니다.
그 새끼들은 자신을 지킬 힘도 부족하고, 먹이를 구할 능력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은 하나님의 돌봄을 설명하는 시편의 노래 속에 자리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창조 세계는 거대하고 멀리 떨어진 별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작은 새끼가 먹이를 달라고 울어 대는 소리도 그 세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층 더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10–11절: 하나님은 어떤 힘을 기뻐하시는가
그는 말의 힘을 즐거워하지 않고, 사내의 두 다리를 기뻐하지 않는다.시편 147:10 · 본디새김
왜 갑자기 말의 힘과 사람의 다리가 등장할까요? 고대 세계에서 말은 특히 전쟁과 통치자의 군사력에 밀접하게 연결된 동물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강한 다리는 전쟁과 노동, 달리기 등에서 드러나는 신체적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표현을 인간이 자랑하는 힘과 능력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말은 강합니다. 성인 남자의 다리는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까마귀 새끼는 약하고 먹이를 구하며 울어 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능력을 싫어하신다거나 인간의 힘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거나 하나님의 호의를 확보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절이 진짜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를 두려워하는 이들, 자기의 신실한 사랑을 기다리는 이들을 기뻐한다.시편 147:11 · 본디새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두 절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말의 힘과 사람의 다리는 눈에 보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11절이 말하는 경외와 기다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이 없는 강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실한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 사랑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말은 달릴 수 있고, 사람의 다리는 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궁극적인 보증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울어 대는 새끼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그분의 신실한 사랑을 기다립니다. 둘은 같은 종류의 기다림은 아닙니다. 동물에게는 생존의 필요가 있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식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만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통해 강함의 기준을 뒤집습니다.
조금 더 깊이
까마귀는 레위기 11:15에서 이스라엘이 먹지 말아야 할 새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됩니다. 인간의 식탁에서 먹을 수 없는 새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돌봄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중심은 까마귀의 정결 여부보다 새끼들의 울음에 있습니다. 10절은 ‘말의 힘’과 ‘사내의 두 다리’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므로, 이 모든 표현을 오직 군사력만을 뜻하는 말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0절의 두 번째 ‘기뻐하지 않는다’와 11절의 ‘기뻐한다’에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신실한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인애와 변함없는 사랑,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실한 호의를 나타냅니다.
성벽이 튼튼해진 도시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하라.시편 147:12 · 본디새김
앞의 2절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우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회복의 대상이었던 도시가 이제 찬양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가 네 성문 빗장들을 튼튼하게 했고,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다.시편 147:13 · 본디새김
성문과 빗장은 고대 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시설이었습니다.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교역하며 재판과 공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적이 공격할 때는 도시의 취약한 부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문을 튼튼하게 하신다는 것은 도시에 안전한 생활의 조건이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문 자체보다 성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도시가 안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단입니다. 성벽 자체가 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는 네 영토를 평화롭게 하고, 가장 좋은 밀로 너를 배부르게 한다.시편 147:14 · 본디새김
성문이 튼튼해진 뒤에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나 주변 나라의 복종이 아닙니다.
평화와 먹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영토가 평화롭게 된다는 구체적인 문맥이므로 전쟁과 위협에서 벗어난 안정된 삶이 중심에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굶주림을 면할 만큼의 곡식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충분하고 좋은 먹을 것으로 배부르게 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성문, 자녀, 평화, 밀.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자녀들이 복을 누리며, 영토에는 평화가 있고, 식탁에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성문을 튼튼하게 하시는 목적은 도시를 전쟁에 더욱 강하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성문 안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의 힘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성문의 빗장처럼 안전을 지키는 수단을 무의미하게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힘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신 목적 아래 놓인 삶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도시를 유지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자연 세계로 눈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느헤미야 1:3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느헤미야 7:1–3에서는 성벽을 세우고 문짝을 단 뒤 성문을 관리하는 일이 기록됩니다. 시편은 이런 재건의 현실과 잘 어울립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온전함, 안전, 안녕과 같은 의미를 포함합니다. ‘가장 좋은 밀’은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밀의 기름진 부분’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곡식에 실제 지방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좋고 풍성한 부분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눈을 내리고 녹이시는 말씀
15절: 땅을 향해 달려가는 하나님의 말
그는 자기 말을 땅에 보내고, 그의 말은 아주 빠르게 달린다.시편 147:15 · 본디새김
‘말이 달린다’는 표현은 의인화된 시적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분의 뜻이 지체 없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147편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예로 선택된 것은 예상 밖에도 눈과 서리, 얼음입니다.
16–17절: 부드러운 눈과 견디기 어려운 추위
그는 눈을 양털처럼 내려 주고, 서리를 재처럼 흩뿌린다.시편 147:16 · 본디새김
그는 자기 얼음을 빵 조각처럼 던진다. 그의 추위 앞에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시편 147:17 · 본디새김
양털은 희고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재는 가볍게 흩어질 수 있는 물질입니다. 시인은 하늘에서 내려 땅을 덮는 눈과 서리의 모습을 일상적인 물건에 빗댑니다.
그런데 17절에 이르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부드럽게 내려앉는 눈에서 차갑고 단단한 얼음으로 장면이 변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추위 앞에 누가 버틸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의 힘 앞에서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눈과 얼음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추위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움직임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을 모든 기상 현상이 개별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상이나 벌로 보내졌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기상 재해의 도덕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에게 강력하고 때로 두려운 자연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추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18절: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물을 흐르게 한다
그는 자기 말을 보내어 그것들을 녹인다. 그가 자기 바람을 불게 하니 물이 흐른다.시편 147:18 · 본디새김
18절은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대신 장면을 바꿉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빠르게 달려갔다면, 18절에서는 그 말씀이 얼어붙은 것을 녹입니다.
굳어 있던 것이 풀리고 움직이지 않던 것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연 현상이 반복되는 원인을 현대적인 과학 언어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변화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찬양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 이르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십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세계가 형성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빛과 하늘과 땅의 생명들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창조를 서술합니다. 17절의 ‘빵 조각처럼’이라는 표현은 잘게 나뉜 조각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종류의 얼음이나 구체적인 기상 현상을 뜻하는지는 이 표현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18절의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므로 ‘바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직접적입니다. 이사야 55:10–11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고 싹이 나게 하듯, 하나님에게서 나가는 말씀도 그분의 뜻을 이루게 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147:15–19와 공유하는 이미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이사야 55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편 147편은 그 말씀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법도까지 알려 주신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온 땅에 보내시는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 말씀
그는 자기 말들을 야곱에게 알리고, 자기 규정과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린다.시편 147:19 · 본디새김
15절에서는 말씀이 땅으로 보내어져 달렸습니다. 18절에서는 그 말씀으로 얼음이 녹고 물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향하는 대상은 땅이 아니라 야곱입니다.
세 구절 모두 하나님의 ‘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반복을 따라가면 시인이 연결하는 두 세계가 드러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자연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알려 주시는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와 눈, 얼음과 바람이 움직이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사람들이 배우고 이해하고 따라야 할 규정과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19절은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시듯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무런 의식이나 응답 없이 움직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갈 관계를 허락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규정’과 ‘법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는 언약의 규범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관계, 공동체의 정의와 예배를 다루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와 돌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언약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알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책임을 받았다는 뜻일까요?
20절: 다른 민족에게는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는 다른 어느 민족에게도 이렇게 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 법도를 알지 못했다. 할렐루야.시편 147:20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말씀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하심과 충돌하는 것은 아닐까요?
20절의 ‘이렇게’는 바로 앞의 19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자신의 말씀을 알리시고 이스라엘에게 규정과 법도를 알려 주신 일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창조하지 않으셨다거나 돌보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과 같은 방식으로 규정과 법도를 알려 주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4:6–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정과 법도를 지키면 다른 민족들이 그 지혜와 분별력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받은 민족이지만, 그 법을 지키는 삶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특별한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했다는 특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과 연결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말씀을 받았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에는 본문 전승상의 작은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된 히브리어 자음은 ‘그의 말’이라는 단수 형태로 읽을 수 있지만, 마소라 본문의 읽기 전승은 ‘그의 말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지시합니다. 본디새김은 이 복수형을 따랐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말씀을 야곱에게 알리신다는 중심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더 넓은 전망이 나타납니다. 여러 민족이 시온으로 올라와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우고,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가며, 민족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시편 147편이 직접 그 미래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에서 시온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1:1–3에서도 말씀과 창조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이는 시편 147편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를 함께 이해하는 성경적 흐름 안에서 살펴볼 수 있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얼어붙은 땅에 다시 물이 흐를 때
시편 147편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했습니다. 공동체는 안전과 풍요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회복은 단지 잃어버린 상태를 되찾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롭게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에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거대한 건축물도, 화려한 하늘의 별들도 아닙니다.
눈과 서리와 얼음이 내려앉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추위 앞에서 누가 버틸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울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는 자기 말을 보내어 그것들을 녹인다.」
얼어붙었던 것이 녹고, 멈추어 있던 물이 다시 흐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보내어져 얼음을 녹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야곱에게 알려져 그 공동체가 살아갈 길을 가르칩니다.
얼음이 녹은 자리에 물이 흐르듯, 다시 세워진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튼튼해진 성문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풍성한 밀로 배부르게 되며, 자신들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시편은 그 모든 것을 받은 도시를 향해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