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50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모든 찬양이 마지막에 이르는 곳

시편은 어떤 말로 끝나야 할까요?

시편에는 억울한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있고, 원수를 향한 분노가 있으며, 죄를 고백하는 탄식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도 있습니다. 왕의 승리를 노래하는 시가 있고, 무너진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우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 긴 노래들의 마지막에 시편 150편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편에는 설명할 만한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특별한 고난도, 기도의 응답도, 구원의 이야기도 서술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노래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한 가지 말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로 시작한 노래에 뿔나팔과 현악기, 소고와 춤, 피리와 제금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모든 악기가 울린 뒤 시인은 마침내 「숨 쉬는 모든 것이 야를 찬양하기를. 할렐루야」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악기들의 소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기보다 더 근본적인 것, 곧 숨 쉬는 생명을 향한 부름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여러 악기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그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게 하는 생명은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긴 시편집을 마무리하면서 시인은 찬양을 완성하는 가장 훌륭한 악기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부릅니다.

시편 150편은 단 여섯 절이지만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은 찬양이 울려 퍼지는 장소를, 2절은 찬양의 이유와 그 크기를 밝힙니다. 3–5절은 찬양의 소리와 몸짓을 차례로 불러냅니다. 마지막 6절에서는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찬양의 공간이 열리고,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어 찬양의 소리가 풍성해지고, 마지막에는 찬양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 존재들이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 넓어집니다.

그사이 ‘찬양하라’는 명령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여러 사람을 향해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말에 ‘그를’이라는 목적어가 붙은 형태가 반복되면서 노래의 리듬을 만듭니다. 시인은 새로운 설명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같은 행동을 다양한 장소와 이유와 방식으로 되풀이하여 요청합니다.

마치 음악에서 하나의 주제가 반복되면서 여러 악기가 더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이 시편 전체를 이끕니다. 이 때문에 시편 150편은 단순히 찬양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읽는 사람 자신을 찬양의 자리로 부르는 노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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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소에서 권능의 궁창까지

시편 150:1 본문 →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하라.시편 150:1 · 본디새김

시편은 두 장소를 나란히 제시합니다.

‘성소’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거룩한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예배와 제사가 이루어지는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소를 상징했으며, 찬양과 감사가 드려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소’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만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곧이어 여러 악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땅의 예배 장소인 성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두 읽기 가운데 하나만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권능의 궁창’은 시야를 크게 넓힙니다. 이 표현은 궁창 자체가 하나님과 같은 권능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하늘의 영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소를 땅의 성전으로 읽는다면, 시인은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펼쳐지는 하늘까지 찬양의 공간을 넓히는 셈입니다. 성소를 하늘의 거룩한 처소로 읽는다면, 두 표현은 하나님이 계신 높은 영역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병행이 됩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인간이 정한 하나의 공간에만 갇히지 않는다는 점은 유지됩니다.

시편 148편은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시편 150편은 그 넓어진 시야를 이어받되, 더 이상 창조물의 종류를 일일이 나열하지 않습니다. 대신 찬양이 울려 퍼질 공간을 열어 놓습니다.

시편에는 성전을 향한 그리움도 있었고, 성전이 무너지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갈망과 그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탄식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편집의 마지막 노래가 하나님을 찬양할 장소를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이것을 모든 역사적 상실이 이미 해결되었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150편은 그런 해결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긴 기도와 탄식을 지나 시편의 마지막에서 독자가 바라보도록 요청받는 대상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왜 찬양해야 할까요?

조금 더 깊이

하늘 성소로 읽는 근거로, 시편 11:4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성전과 하늘의 왕좌가 함께 언급되고, 시편 102:19에서도 하나님이 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궁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키아(⁨רָקִיעַ⁩)는 창세기 1:6–8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의 펼쳐진 영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시편 19:1에서는 궁창이 하나님의 손이 이루신 일을 알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위대함

시편 150:2 본문 →

그가 행한 위력 있는 일들 때문에 그를 찬양하라. 그의 넘치는 위대함에 걸맞게 그를 찬양하라.시편 150:2 · 본디새김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위대함입니다. 두 표현은 비슷해 보이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때문에

‘그가 행한 위력 있는 일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성품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힘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일들을 가리킵니다.

출애굽의 구원과 광야에서의 인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 원수에게서의 구출, 창조 세계를 유지하시는 능력,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을 돌보시는 행동들이 시편의 여러 곳에서 찬양되었습니다. 시편 150편은 이런 사건들을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수없이 고백해 온 하나님의 행동들을 하나의 표현으로 모읍니다.

그러나 이 ‘위력 있는 일들’을 인간에게 기분 좋은 사건들로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는 구원과 돌봄뿐 아니라 악에 대한 심판과 원수의 패배도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으로 찬양됩니다. 바로 앞의 시편 149편도 그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에 걸맞게

두 번째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개별적인 일들보다 하나님 자신의 위대함이 강조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함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며 그에 걸맞게 찬양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함에 걸맞게 찬양할 수 있을까요?

시편 145:3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위대함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면, 거기에 완전히 상응하는 찬양의 크기도 사람이 계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2절을 찬양의 음량이나 연주 규모가 하나님의 위대함에 비례해야 한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작게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는 찬양은 쉽게 막연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별적인 사건만 바라보면 그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 자신의 위대함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그분을 찬양할 이유를 알려 주고, 하나님의 위대함은 그 찬양이 어느 한 사건에 갇히지 않도록 시야를 넓힙니다.

시인은 이제 설명을 멈추고 악기들을 불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위력 있는 일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부로타브(⁨גְּבוּרָה⁩)는 그의 강력한 행위들, 능력 있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넘치는 위대함에 걸맞게’의 히브리어 케로브 구들로(⁨רֹב⁩)는 ‘그의 위대함의 풍성함에 따라’라는 뜻에 가깝고, 앞의 전치사 케는 어떤 기준이나 정도에 상응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나팔에서 제금까지

시편 150:3–5 본문 →

3절: 뿔나팔과 현악기가 함께 울리다

뿔나팔을 부는 소리로 그를 찬양하라. 하프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하라.시편 150:3 · 본디새김

첫 번째로 등장하는 악기는 동물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뿔나팔은 전쟁이나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될 수 있었고, 공동체를 소집하거나 왕의 즉위를 알리는 소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악기는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도구를 넘어,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뿔나팔 다음에 하프와 수금을 부릅니다. 두 낱말은 서로 다른 현악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각각의 정확한 형태와 구조를 오늘날의 특정 악기와 완전히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뿔나팔의 강렬한 울림과 현악기의 다양한 음색이 이어집니다. 시인은 어느 악기가 다른 악기보다 하나님께 더 적합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4절: 음악은 사람의 몸까지 움직인다

소고와 춤으로 그를 찬양하라. 현악기의 줄과 피리로 그를 찬양하라.시편 150:4 · 본디새김

소고는 손으로 치는 작은 북 형태의 악기를 가리킵니다. 춤은 악기가 아니지만, 음악과 함께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행동입니다.

홍해에서 구원받은 뒤 미리암은 소고를 들고 나왔고, 여자들은 소고를 들고 춤추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출애굽기 15:20). 이처럼 소고와 춤은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와 기쁨의 표현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시편 150편에서 이 둘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찬양이 입술과 악기의 소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시인의 관심은 어떤 춤 동작이 올바른지 규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에 사람의 몸이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현악기의 줄과 피리’가 나옵니다. 창세기 초반에 인간의 문화와 기술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 악기 연주가, 시편의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만들고 익혀 온 음악적 능력이 창조주를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5절: 우렁차게 울리는 제금

소리 울리는 제금으로 그를 찬양하라. 우렁차게 울리는 제금으로 그를 찬양하라.시편 150:5 · 본디새김

제금은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두 번 모두 같은 낱말이 사용되고, 차이는 그 뒤에 붙은 수식어에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리가 울리거나 들리는 성격을, 두 번째는 우렁차게 외치거나 환호하는 소리를 강조합니다.

뿔나팔에서 시작하여 현악기와 소고, 춤과 피리를 거쳐 마침내 제금의 강렬한 울림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찬양의 소리가 점점 풍성해지고 절정에 이르는 듯한 시적 효과를 만듭니다.

다만 실제 연주에서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었는지, 마지막에 모든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고대 예배 음악의 정확한 연주 지시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어떤 악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형태의 예배가 더 거룩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뿔나팔은 불어서 소리를 내고, 현악기는 줄을 울립니다. 소고와 제금은 두드리거나 부딪쳐 소리를 내며, 춤은 사람의 몸을 움직입니다. 이 다양한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함에 걸맞게 찬양하라는 2절의 요청과 연결됩니다.

그 위대함은 하나의 악기나 하나의 소리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시편 150편에서 여러 악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소리가 하나의 대상,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악기를 하나 더 추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악기를 연주하는 존재들의 생명 자체를 향해 마지막 부름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 성을 도는 제사장들의 뿔나팔 소리가 등장하고, 열왕기상 1:39에서는 솔로몬이 왕이 될 때 뿔나팔이 울리며, 시편 47:5–6에서도 하나님이 왕으로 높임받으시는 장면과 뿔나팔 소리가 연결됩니다. 하프와 수금은 히브리어 네벨(⁨נֶבֶל⁩)과 킨노르(⁨כִּנּוֹר⁩)를 구별하여 옮긴 것이지만, 현대적인 하프와 동일한 구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사기 11:34에서도 입다의 딸이 소고를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맞이합니다. ‘현악기의 줄’에 해당하는 민님(⁨מֵן⁩)은 줄 또는 현악기 종류와 연결되는 표현으로, ‘피리’에 해당하는 우가브(⁨עוּגָב⁩)는 관악기의 일종으로 이해되지만 정확한 형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4:21에서 유발이 현악기와 관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소개될 때 이 우가브라는 악기 이름이 등장합니다. 제금은 두 번 모두 첼라첼림(⁨צְלָצַל⁩)이라는 낱말이어서, 반드시 서로 다른 구조의 두 종류 제금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종류의 악기를 서로 다른 소리의 특징으로 묘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숨 쉬는 모든 것이 찬양하기를

시편 150:6 본문 →

숨 쉬는 모든 것이 야를 찬양하기를. 할렐루야.시편 150: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150편뿐 아니라 시편집 전체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모든 숨 쉬는 존재를 향한 부름

‘숨 쉬는 모든 것(⁨נְשָׁמָה⁩)’의 숨은 호흡, 생명의 숨결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의 내면적인 영혼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좁혀 읽기 어렵습니다. 살아 숨 쉬는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요청으로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편 148편에서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시편 150편의 ‘숨 쉬는 모든 것’은 인간을 넘어 살아 있는 피조물 전체로 넓게 읽을 충분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동안 찬양은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악기를 사용하여 드리는 행동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는 악기의 종류도, 음악의 기술도, 사람의 사회적 지위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 남습니다.

숨 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든 생물이 실제로 인간과 같은 언어와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148편이 해와 달과 산과 나무에게 찬양하라고 부른 것처럼, 여기서도 시적인 표현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찬양으로 부릅니다.

숨과 찬양의 관계

이 마지막 문장은 앞의 악기 목록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뿔나팔은 숨을 불어 넣어 소리를 냅니다. 피리도 사람의 호흡으로 연주합니다. 노래 역시 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현악기와 타악기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내지만,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 역시 살아 숨 쉬는 존재입니다.

악기는 찬양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를 연주하는 존재의 생명은 그보다 근본적입니다.

시편의 마지막에서 시선은 인간이 만든 악기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만들지 못한 생명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찬양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그분을 찬양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에서 주어진 숨이 찬양의 소리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야를 찬양하기를’과 ‘할렐루야’

마지막 절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문법적으로 구별되는 두 표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의 ‘야를 찬양하기를’은 ‘숨 쉬는 모든 것’과 호응하는 형태로, 앞으로 찬양할 것이라는 진술이나 찬양하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절들의 명령이 이 마지막 문장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따라 ‘찬양하기를’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다음 나오는 ‘할렐루야’는 여러 사람에게 ‘야를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야’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야훼의 짧은 형태입니다.

먼저 모든 숨 쉬는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설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독자 자신을 향한 명령으로 돌아옵니다. 시편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할렐루야’라는 말 앞에 서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숨 쉬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 한네샤마입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명의 숨’의 ‘숨’이 시편 150:6의 네샤마와 같고, 창세기 7:22에서는 마른땅에 살던 생명들이 홍수로 죽는 장면에서 생명의 숨에 관한 표현이 사용되어 호흡이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육상 생물들과도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 관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숨이라는 공통된 언어를 통해 중요한 신학적 연결이 생깁니다. 시편 104:29–30은 하나님이 숨을 거두시면 생명들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보내시면 생명들이 창조된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이 하나님의 공급에 의존한다는 주제는 연결됩니다. 시편 148편이 해와 달, 별과 산까지 불렀다면, 시편 150편은 그 넓은 창조 세계 가운데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을 마지막에 호명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지 않은 피조물의 찬양을 배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법으로는, 앞 표현은 테할렐 야흐로 ‘테할렐’이 삼인칭 여성 단수 형태여서 ‘숨 쉬는 모든 것’과 호응하고, 뒤의 할렐루 야흐는 복수 명령형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숨소리

시편 150:1–6 본문 →

시편집의 첫머리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다음에는 다윗의 고난과 구원, 죄의 고백, 왕권에 관한 약속과 위기, 예루살렘의 영광과 파괴, 개인과 공동체의 탄식,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는 감사가 시편집을 채웁니다. 특히 시편 88편은 희망의 분명한 전환 없이 어둠 속에서 끝납니다.

그러므로 시편 150편이 마지막에 놓였다고 해서 앞의 고통들이 모두 잘못된 감정이었거나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시편집이 그런 탄식과 질문을 삭제하지 않은 채 마지막에 찬양을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시편의 찬양은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시편집이 마지막에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모든 질문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그 모든 질문을 가지고도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입니다.

뿔나팔이 울리고, 하프와 수금이 소리를 냈습니다. 소고와 춤이 이어졌으며, 현악기와 피리가 찬양에 참여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제금이 우렁차게 울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마지막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모든 악기를 부른 뒤 시인은 살아 있는 존재들을 부릅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명은 사람이 하는 말로 찬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살아 숨 쉬는 존재들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주셨다면, 시편의 마지막은 그 숨을 가진 존재가 창조주를 찬양하기를 바라는 노래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는 인간의 모든 삶이 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 죄와 용서, 두려움과 신뢰, 패배와 구원, 탄식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시편집은 그 모든 경험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보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 목소리들을 하나의 찬양으로 부릅니다.

숨 쉬는 모든 것이 야를 찬양하기를.

시편의 마지막 말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찬양하라고 부를 뿐입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