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2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버림받음의 외침에서 온 세상의 찬양으로

시편 22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가운데 하나로 시작합니다.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런데 이 시의 끝에 이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야훼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씨족이 그 앞에 몸을 굽힙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외침조차 하나님께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 이야기가 땅끝과 다음 세대까지 퍼져 나갑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흔히 시편 22편을 고난에서 구원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시라고 설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시를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시인은 단지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하나님을 부릅니다. 조상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더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침묵까지 겪습니다.

그러다가 시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혼자 기뻐하는 대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시의 가장 깊은 변화는 고난받던 사람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았던 그의 외침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부르는 노래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앞의 시편 21편에서는 왕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했습니다. 시편 22편에서는 구원의 기쁨에 앞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길게 펼쳐집니다. 두 시를 나란히 읽으면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과 구원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시편 안에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편 22편은 그 긴장을 서둘러 해결하지 않습니다. 먼저 고통을 겪는 사람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려줍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922편 본문 읽기 →

「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버리셨습니까」라고 묻다

시편 22:1–3 본문 →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어찌 저의 구원에서, 저의 울부짖는 말에서 멀리 계십니까?시편 22:2 · 본디새김

첫 구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말은 「버리셨습니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하고 시인은 하나님을 두 번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묻지 않습니다. 자신이 관계를 맺어 온 바로 그 하나님을 부르면서, 왜 자신을 버리셨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 이 탄식의 아픔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응답받지 못하는 것과, 자신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분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셔야 할 이유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내뱉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이 실제로 그를 완전히 버리셨다는 객관적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현실을 하나님의 버림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절박한지는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어찌 저의 구원에서, 저의 울부짖는 말에서 멀리 계십니까?」는 그 고통의 핵심을 밝힙니다. 여기서 구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울부짖음은 이미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행동입니다. 시인에게 필요한 구원은 가까이 오지 않고, 자신의 외침에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울부짖는 말」(⁨שְׁאָגָה⁩)에 쓰인 히브리어 낱말은 사자의 포효처럼 큰 울음소리를 나타낼 때도 쓰입니다. 정돈된 기도문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지 못해 터져 나오는 울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부르짖는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저의 하나님, 제가 낮에 부르짖어도 당신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밤에도 제게 잠잠함이 없습니다.시편 22:3 · 본디새김

낮과 밤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고통이 잠깐의 사건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경험임을 보여 줍니다. 「제게 잠잠함이 없습니다」는 밤에도 쉬거나 잠잠해질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에게는 기도를 멈출 만한 평안도, 기도를 끝낼 만한 응답도 없습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겪는 현실을 믿음의 언어로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느끼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바로 그 하나님께 왜 멀리 계시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2편은 신약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가장 뚜렷하게 연결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27:46과 마가복음 15:34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부르짖으십니다. 이것은 시편의 언어를 직접 사용한 경우입니다. 그렇다고 시편의 모든 표현을 처음부터 십자가의 세부 장면을 예언한 암호처럼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22편은 본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구원을 간구하고, 응답을 경험한 뒤 회중 앞에서 찬양하는 시입니다. 신약은 그 고난의 언어와 구원의 흐름을 예수의 수난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시편 22편을 새롭게 읽게 하는 중요한 정경적 연결점입니다. 그러나 구약 본문의 독자적인 의미를 지우지는 않습니다.

조상들에게는 응답하셨는데, 왜 저에게는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시편 22:4–9 본문 →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시편 22:4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말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찬양 가운데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의 「앉다」(⁨יָשַׁב⁩)는 문맥에 따라 왕으로서 좌정하거나 다스리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찬양을 많이 부르면 하나님이 비로소 그곳에 나타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찬양해 온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곧바로 시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계시는데, 정작 시인은 그분의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는 이 긴장을 조상들의 경험으로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저희 조상들은 당신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이 신뢰했고, 당신은 그들을 건져 내셨습니다.시편 22:5 · 본디새김
그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벗어났습니다. 당신을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시편 22:6 · 본디새김

이 두 절에서는 「신뢰했습니다」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그들이 부르짖자 위험에서 벗어났고,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헛된 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3~25). 이후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며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이 더 날카로워집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과거 행동을 현재의 침묵과 나란히 놓습니다.

그러나 저는 벌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이며 백성에게 멸시받는 자입니다.시편 22:7 · 본디새김

「그러나」라는 말이 앞의 조상들과 현재의 시인을 갈라놓습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있습니다.

「벌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표현은 타인에게 짓밟히고 하찮게 취급받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아픈지를 말하기 전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합니다.

저를 보는 이들이 모두 저를 비웃습니다. 입술을 벌리고 머리를 흔듭니다.시편 22:8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에게 맡겨라. 그가 저자를 건져 내 보라지. 그가 저자를 구해 내 보라지. 그가 저자를 기뻐하니.」시편 22:9 · 본디새김

조롱하는 사람들은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믿음을 공격합니다. 「그가 저자를 기뻐하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면 직접 구해 보라는 비웃음입니다.

이 말에는 잔인한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정말 기뻐하신다면 왜 지금 구해 주지 않으시는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도 너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인이 겪는 고통은 이제 두 겹이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 침묵을 근거로 시인의 믿음 자체를 조롱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공개적으로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편 22편은 시편 3:3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고난받는 이를 두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그 조롱이 얼마나 깊이 사람을 무너뜨리는지를 더욱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시인은 그들의 말에 직접 맞서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관계를 떠올립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7:39~43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머리를 흔들고 하나님이 그를 구해 주시는지 보자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는 시편 22:8~9의 조롱과 뚜렷한 문학적 연결을 가집니다.

태에서부터 저를 지키신 분이 지금도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2:10–12 본문 →

참으로 당신은 저를 태에서 끌어내셨고,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저를 신뢰하게 하셨습니다.시편 22:10 · 본디새김
저는 태에서부터 당신께 내맡겨졌습니다.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시편 22:1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조상들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어느 날이나, 어려운 일을 겪고 구원받았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태어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를 태에서 끌어내셨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출생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해합니다. 그가 세상에 나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입니다.

이어서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저를 신뢰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이었던 시절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붙들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뢰를 일으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다음에는 「태에서부터 당신께 내맡겨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셨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다는 사실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는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언어도 없었던 때부터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억은 앞의 탄식을 더욱 절박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태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이 지금은 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지키신 하나님이라면, 지금도 자신을 지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십시오. 고난이 가까이 있고, 돕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시편 22:12 · 본디새김

고난은 가까이 있는데 하나님은 멀리 계십니다.

시인은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기를 구합니다. 물론 그에게 실제적인 구원은 절실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겪는 고통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외부의 수단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자신을 돌보신 분이며, 그 관계 자체가 시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가까이 다가올 때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가까이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짐승처럼 둘러싼 적들, 흙먼지로 돌아가는 몸

시편 22:13–19 본문 →

많은 수소가 저를 에워쌌습니다. 바산의 힘센 소들이 저를 둘러쌌습니다.시편 22:13 · 본디새김
그들이 저를 향해 입을 벌렸습니다. 찢어 대며 울부짖는 사자처럼.시편 22:14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을 조롱하던 사람들은 이제 무서운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수소, 사자, 개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짐승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입을 벌리는 모습은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을 그립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을 벌레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힘센 수소들과 사자들이 그 작은 존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공격하는 쪽은 강하고 많습니다. 공격받는 쪽은 약하고 혼자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적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저는 물처럼 쏟아졌고, 제 뼈는 모두 서로 벌어졌습니다. 제 심장은 밀랍처럼 되어, 제 내장 속에서 녹았습니다.시편 22:15 · 본디새김

몸을 이루는 것들이 하나씩 제 모습을 잃습니다.

물처럼 쏟아진다는 말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뼈가 서로 벌어진다는 표현은 몸을 지탱하는 구조가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나타냅니다. 심장이 밀랍처럼 녹는다는 것은 내면의 생명력과 용기마저 사라지는 듯한 상태를 그립니다.

제 힘은 질그릇 조각처럼 말랐고, 제 혀는 턱에 달라붙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죽음의 흙먼지에 놓으십니다.시편 22:16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물처럼 쏟아지고 심장이 녹았습니다. 이제는 바짝 말라 버린 질그릇 조각이 됩니다. 두 이미지는 서로 다른 신체 경험을 묘사하면서도, 시인에게 남은 생명력이 거의 없다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입니다.

「죽음의 흙먼지」라는 표현은 창세기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으며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이 이미 그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적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데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 가까이에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확정적인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시인이 어떤 죄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직접 항의하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든 일에서 멀리 떨어진 관찰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궁극적인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에 가까워진 현실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개들이 저를 에워쌌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무리가 저를 둘러쌌습니다. 사자처럼, 제 손과 제 발.시편 22:17 · 본디새김

마지막 문장 「사자처럼, 제 손과 제 발」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손과 발에 일어났는지 문장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마소라 본문은 「사자처럼」으로, 칠십인역은 「그들이 내 손과 발을 팠다」로 읽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핵심 장면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적들에게 완전히 에워싸였고, 자신의 몸마저 공격받거나 공격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제 뼈를 모두 셉니다. 그들은 바라보며 저를 지켜봅니다.시편 22:18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뼈들이 벌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뼈들을 모두 셀 수 있다고 합니다. 심하게 쇠약해져 뼈가 드러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고, 온몸의 고통을 하나하나 느끼는 상태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보면서도 연민을 베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삼습니다.

그들은 제 옷들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제 옷을 놓고 제비를 뽑습니다.시편 22:19 · 본디새김

옷은 사람의 몸을 가리는 가장 기본적인 소유물입니다. 그 옷을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갖고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몸과 소유를 지킬 힘마저 잃었다는 뜻입니다. 적들은 그가 죽었거나 곧 죽을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빼앗는 장면보다 더 깊은 모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아 있는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이미 처분해도 되는 존재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말로 그의 믿음을 조롱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몸과 소유물까지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것처럼 행동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산은 요단강 동쪽의 지역으로, 목초지와 가축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신명기 32:14에는 바산의 숫양들이, 아모스 4:1에는 암소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바산의 힘센 소들」은 크고 강한 동물의 이미지를 더욱 생생하게 만듭니다. 시인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지위에 있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가 그리는 장면에서는 공격자와 피해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 분명합니다. 17절의 마소라 본문에는 카아리, 곧 「사자처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읽으면 「사자처럼, 내 손과 내 발」이라는 불완전한 문장이 됩니다. 사자가 손과 발을 물거나 공격한다는 동작을 문맥에서 보충할 수 있지만, 그 동작 자체가 원문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그들이 내 손과 발을 팠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오륵산으로 옮깁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손과 발을 뚫거나 찌르는 이미지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할 헤베르에서 발견된 고대 히브리어 사본에도 마소라 본문과 다른 철자로 읽힐 수 있는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철자의 해석과 원래 문구를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아무런 설명 없이 유일한 원문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구절의 난해함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처한 극심한 무력함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9:23~24는 예수의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은 사건을 시편 22:19의 성취로 명시합니다.

사자의 입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으로 바뀌는 순간

시편 22:20–22 본문 →

그러나 당신, 여호와야훼, 멀리 계시지 마십시오. 저의 힘이여, 서둘러 저를 도와주십시오.시편 22:20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은 처음의 기도로 돌아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탄식했습니다. 12절에서는 멀리 계시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같은 요청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을 「저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이 말라 버렸다고 말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하나님의 도움이 더욱 절실합니다.

칼에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개의 손아귀에서 하나뿐인 제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시편 22:21 · 본디새김
사자의 입에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들소들의 뿔에서 당신은 제게 대답하셨습니다.시편 22:22 · 본디새김

「하나뿐인 제 목숨」(⁨יָחִיד⁩)의 히브리어는 「나의 하나뿐인 것」, 「나의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생명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리면 다시 다른 목숨을 얻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22절 마지막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은 제게 대답하셨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당신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당신은 제게 대답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완료형이고, 바로 앞에는 여전히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명령형의 간구가 놓여 있습니다.

한 절 안에 간구와 응답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구원이 이루어진 뒤에 드린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이 기도 가운데서 강하게 표현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그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경과를 설명하는 대신, 기도의 목소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의 고난은 앞에서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이 어떤 기술이나 전략으로 위험을 벗어났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시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고난받던 사람이 회중을 찬양으로 부르다

시편 22:23–27 본문 →

제가 제 형제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시편 22:23 · 본디새김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시인을 조롱했습니다. 이제는 시인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다시 공동체 안에 서는 장면입니다.

「이름을 전하겠습니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자신에게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알리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야기로 바꿉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아, 그를 찬양하라. 야곱의 모든 후손아, 그를 높여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아, 그를 두려워하라.시편 22:24 · 본디새김

시인의 말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사람들을 향한 초청으로 바뀝니다. 고난의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조롱했습니다. 이제는 그가 회중 가운데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증언할 내용을 얻었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이의 고난을 멸시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았고, 그에게서 자기 얼굴을 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고난받는 이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며 부르짖었을 때, 그는 들었다.시편 22: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첫 부분을 다시 읽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이의 고난을 멸시하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낮과 밤에 부르짖어도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처음의 고통이 거짓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겪었던 침묵과 버림받았다는 감각은 실제로 그의 기도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뒤, 그는 그 경험의 최종적인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멸시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이를 멸시하지 않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벌레처럼 취급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고난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셨는가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큰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저의 찬양은 당신에게서 나옵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 앞에서 제 서원을 이행하겠습니다.시편 22:26 · 본디새김

「서원을 이행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이 찬양이 실제 예배의 자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서원을 이행한다는 말 다음에 사람들이 함께 먹고 배부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먹고 배부를 것이다. 여호와야훼를 찾는 이들이 그를 찬양할 것이다.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아 있기를.시편 22: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시인의 혀가 턱에 달라붙을 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배부르게 됩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아 있기를」이라고 축복합니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굶주린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의 구원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배부름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하찮게 취급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찬양에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이,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배부르는 장면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 2:12에서는 시편 22:23의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찬양하겠다는 말이 인용되어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신약은 시편의 탄식뿐 아니라 회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찬양까지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읽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위험에 처한 사람이 구원을 간구하며 하나님께 서원하고, 구원받은 뒤에 제사를 드리며 그 서원을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7:16은 서원과 관련된 화목제물을 언급하고, 그 제물은 함께 나누어 먹는 제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22편이 정확히 어떤 제사의 절차를 묘사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외침에서 땅의 모든 끝까지

시편 22:28–30 본문 →

땅의 모든 끝이 기억하고 여호와야훼께 돌아올 것입니다. 민족들의 모든 씨족이 당신 앞에 몸을 굽힐 것입니다.시편 22:28 · 본디새김

이제 시편의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형제들과 이스라엘의 회중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땅의 모든 끝과 민족들의 모든 씨족이 등장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구원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넘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미래와 연결됩니다.

이 절은 기억의 대상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문맥상 하나님과 그의 구원 행위를 기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은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행동으로 이어져, 하나님을 기억한 사람들이 그분께 돌아와 몸을 굽힙니다.

시편의 앞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제는 그 기억의 범위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한 사람의 구원이 온 세상의 예배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왕권은 여호와야훼의 것이며, 그가 민족들을 다스리기 때문이다.시편 22:29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의 경험이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외침을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노래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구원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한 사람이나 이스라엘 한 민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집안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2:2~4에서도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나아오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시편 22편은 이러한 구약의 보편적인 구원 소망을, 한 고난받는 사람의 감사에서 출발해 보여 줍니다.

땅의 살진 이들이 모두 먹고 몸을 굽혔다. 흙먼지로 내려가는 이들이 모두 그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살려 두지 못한 이도.시편 22:30 · 본디새김

「땅의 살진 이들」은 풍족하고 넉넉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풍족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몸을 굽힙니다. 이어지는 「흙먼지로 내려가는 이들」은 죽음에 가까워지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이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되살아나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뜻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는 죽음 이후의 상태나 부활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람의 부유함이나 사회적 지위, 생명을 지킬 능력의 차이를 넘어 모두가 여호와야훼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죽음의 흙먼지에 놓였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흙먼지로 내려가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통치 앞에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한 시가 모든 인간의 유한성을 바라보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인간은 자기 목숨을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생명을 구해야 했던 이유가 모든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땅의 살진 이들」은 앞에서 먹고 배부르는 가난한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마지막의 「자기 목숨을 살려 두지 못한 이도」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보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구절에는 문법과 문장 연결의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흙먼지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자기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시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시편 22:31–32 본문 →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다. 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 세대에 전해질 것이다.시편 22:31 · 본디새김
그들이 와서 태어날 백성에게 그의 의로움을 알릴 것이다. 그가 행했다는 것을.시편 22:32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의외로 조용합니다.

앞에서는 무서운 짐승들이 입을 벌리고, 시인의 몸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옷을 나누며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러다가 회중이 찬양하고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몸을 굽히는 장면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후손과 이야기와 다음 세대가 등장합니다.

시인의 관심이 이제 자신이 살아 있는 시간을 넘어선 것입니다.

「후손」은 씨 또는 자손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후손이 특정한 한 사람의 자손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후대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10~11절에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맡겨진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태어나던 때를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입니다.

이때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그의 의로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단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신 분이라는 추상적인 성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하나님이 옳게 판단하시고, 약속에 신실하시며, 억눌린 사람을 구원하시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고난받는 이를 멸시하지 않으셨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시인이 다음 세대에 전하려는 하나님의 의로움은 이러한 구원의 행동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시는 아주 짧은 말로 끝납니다.

히브리어 키 아사(⁨עָשָׂה⁩)는 「그가 행했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행했다는 것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무엇을 행했는지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 전체를 읽은 독자는 그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인을 조롱하고 멸시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고통을 견뎌 냈는지 자세히 설명하며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처음의 질문은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였고, 마지막의 증언은 「그가 행했다는 것을」입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의 탄식이 찬양과 증언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시편 22:1–32 본문 →

시편 22편이 보여 주는 믿음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계속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시편은 이런 질문을 불신앙이라고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기도의 첫머리에 놓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받는 이의 고난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회중 앞에서 전하려는 증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사용하여 아직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곧 구원을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시편 자체도 구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든 가난이 즉시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시는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넓은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에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찾을 이유가 됩니다.

시편의 마지막에는 처음처럼 울부짖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누군가는 그분을 찬양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배부르며, 먼 곳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몸을 굽힙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때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 사람의 외침이 이제 많은 사람의 입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그가 행했다는 것을.」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