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6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께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의 기도

시편 26편은 대담한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결백을 밝혀 주십시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더욱 뜻밖의 말을 합니다. 「여호와야훼, 저를 살피고 시험해 주십시오. 제 콩팥과 심장을 정련해 주십시오.」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검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자신이 옳다는 증거를 제시하거나 상대방의 잘못을 밝히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 주장을 입증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시인은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요?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을 말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속량하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악인들과 함께 앉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그 선언의 목적은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을 돌며 감사의 소리를 높이고,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는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자랑하는 노래라기보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분께 인정받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안에는 두 종류의 모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느 자리에 앉지 않을 것인지, 그리고 어느 자리에 서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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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하다

시편 26:1–3 본문 →

다윗의 것. 여호와야훼, 제 결백을 밝혀 주십시오. 제가 온전함으로 걸어왔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끄러지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26:1 · 본디새김

「제 결백을 밝혀 주십시오」(⁨שָׁפַ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를 판단해 주십시오」, 「나를 재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법정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 올바른 판단을 내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실제로 법정에 서 있었는지, 누군가에게 부당한 고발을 당했는지, 어떤 분쟁에 휘말렸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시인이 자신을 악인들과 구별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결백을 주장하는 근거가 흥미롭습니다. 「제가 온전함으로 걸어왔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은 완전함, 성실함, 흠 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모든 순간에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절대적인 무죄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의 방향과 하나님을 향한 성실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함은 단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실제로 걸어온 삶의 길과 연결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면서 무엇을 믿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인애가 제 눈앞에 있고, 제가 당신의 진실 안에서 걸어왔기 때문입니다.시편 26:3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온전함으로 걸어왔다」고 말했고, 3절에서는 「당신의 진실 안에서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두 표현이 서로를 설명합니다. 시인의 온전함은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는 완고한 도덕적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인애」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신실한 호의를, 「진실」은 그분의 참됨과 믿을 만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눈앞에 하나님의 인애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계속 바라보는가는 그가 어떤 길을 걷는지와 연결됩니다. 그가 말하는 온전함은 하나님이 필요 없을 만큼 훌륭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애를 바라보며 그분의 진실을 따라 걸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시험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 저를 살피고 시험해 주십시오. 제 콩팥과 심장을 정련해 주십시오.시편 26:2 · 본디새김

「살피고」와 「시험해」는 비슷한 뜻을 지니지만, 단순한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 진실함을 실제로 확인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정련은 금속을 불에 녹여 불순물을 걸러 내는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금속이라도 불을 통과하면 그 안에 섞인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콩팥은 사람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었고, 심장은 생각과 판단, 의지가 이루어지는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청은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살피신다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잘못도 밝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검사를 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진실함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맞서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왔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 맡기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 판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삶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시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17:10에서도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콩팥을 살피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시험해 달라는 요청은 시편 139:23~2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고, 자신의 생각을 시험하시며, 자신에게 악한 길이 있는지 보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시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감추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다만 시편 26편은 특별히 자신이 악인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어느 자리에 앉지 않을 것인가

시편 26:4–5 본문 →

저는 헛된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았고, 자신을 감추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겠습니다.시편 26:4 · 본디새김
저는 악을 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미워합니다. 악인들과 함께 앉지 않겠습니다.시편 26:5 · 본디새김

이 두 절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동이 반복됩니다. 함께 앉고, 어울리고, 모임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헛된 사람들」은 공허하고 거짓된 것을 추구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감추는 이들」은 자신의 참모습이나 의도를 숨기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위선자라는 도덕적 이름으로 바꾸지 않고, 감춘다는 행동 자체에 주목하면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살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드러나기를 원하고, 그들은 자신을 감춥니다.

5절에서 미움의 대상은 단순히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에게 불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시인은 악한 행동을 함께하고 지지하는 자리에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모든 죄인과 어떤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특정한 개인이 일상에서 누구를 만나도 되는지에 관한 세부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행위를 일삼는 모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헛된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았다고 말하고, 5절에서 악인들과 함께 앉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우연한 접촉보다 지속적으로 자리를 함께하고 그들의 방식에 동참하는 일을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어느 모임에 속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곧바로 다른 장소로 움직입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 남으려 하지 않습니다.

악한 모임을 떠나 하나님의 제단으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시편 1:1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사람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두 시에는 삶의 방향이 사람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자리에 앉는가와 연결된다는 공통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씻은 손으로 제단을 돌며 감사하다

시편 26:6–8 본문 →

여호와야훼, 저는 결백함으로 제 두 손을 씻고 당신의 제단을 돌겠습니다.시편 26: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삶에 관해 말했습니다. 이제는 예배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손을 씻는 이미지는 「결백함」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손을 씻는 행동에는 실제적인 정결 의식의 이미지와 더불어 자신이 악한 행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선언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겠다는 말이 이제 하나님 앞에서 결백한 손으로 예배하겠다는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손을 씻는 일 자체를 최종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시편 26: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말합니다. 시편이 말하는 온전함은 악을 피하는 소극적인 태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적극적인 삶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라는 표현은 이 예배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행동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감사는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됩니다. 이것은 마지막 절의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찬양을 준비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토록 하나님의 제단과 그분의 집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여호와야훼, 저는 당신 집의 거처와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해 왔습니다.시편 26:8 · 본디새김

시인의 관심은 제단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장소입니다.

시인이 성소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성소의 아름다운 건축이나 장식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소에 대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시인의 온전함은 무엇을 멀리하는가에 의해서만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디에서 기쁨을 찾는가에 의해서도 드러납니다. 악한 모임을 떠나는 것과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삶의 두 방향입니다.

하나는 거절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예배의 장면 뒤에서 시인은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걱정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손과 발을 씻는 행위는 정결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17~21은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갈 때 물로 씻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시편 26편의 장면을 그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 의식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시인이 제사장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제단을 도는 행동의 구체적인 절차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결백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קָּיוֹן⁩)는 깨끗함이나 결백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다는 표현은 출애굽기 40:34~35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웁니다. 시편 26편이 정확히 어느 시대의 성소를 배경으로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표제에 다윗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 솔로몬 성전의 시대를 전제하거나 특정한 예배 행사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26편은 시편 15편과 24편에서 제기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시편 15편은 누가 여호와야훼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지 묻고, 진실하게 말하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시편 24편은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는지 묻고,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맑은 사람을 말합니다. 시편 26편은 그 질문을 한 사람의 기도 안으로 가져옵니다. 이렇게 세 시를 함께 읽으면 성소에 나아가는 일과 일상의 윤리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손과 뇌물로 가득한 손

시편 26:9–10 본문 →

죄인들과 함께 제 목숨을, 남의 피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제 생명을 거두지 마십시오.시편 26:9 · 본디새김

처음에는 자신의 결백을 밝혀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죄인들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거두다」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으거나 거두어들이는 뜻을 지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죄인들과 함께 죽음이나 심판의 운명에 놓이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죽음 이후의 특정한 장소나 심판의 절차를 설명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악인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가 왜 그런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폭력 때문에 함께 죽을 위기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그들과 함께 취급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자신과 악인들을 구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의 손에는 악한 계략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이 가득합니다.시편 26:10 · 본디새김

6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두 손을 결백함으로 씻겠다고 말했습니다. 10절에서는 악인들의 손을 묘사합니다.

같은 손이지만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시인의 손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깨끗하게 씻는 손입니다. 악인들의 손은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한 계략을 품고, 부당한 이득을 받는 손입니다.

앞에서 시인이 헛된 사람들과 악인들의 모임을 멀리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을 행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남의 피를 흘리고, 악한 계략을 세우며, 뇌물을 받습니다.

여기서 「뇌물」은 단순히 돈을 좋아하는 태도 이상의 문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뇌물은 공정한 판단을 왜곡하고 정의를 무너뜨리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편 26편의 악인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도덕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생명과 정의를 해칠 수 있습니다.

남의 피를 흘리는 자들과 뇌물을 받는 자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폭력과 부패가 서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뇌물을 통해 책임을 피하거나, 권한을 가진 사람이 뇌물 때문에 피해자의 억울함을 외면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시편이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결백은 단순한 종교적 정결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과 정의를 대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손으로 나아가겠다는 고백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 손으로 불의를 행하지 않겠다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악인들과 자신을 구별한 뒤, 다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3:8은 뇌물이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을 뒤틀리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신명기 16:19도 재판에서 공정함을 굽게 하거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이사야 1:15~17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손을 펼쳐 기도해도 그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악한 행위를 그치고 정의를 배우며 억눌린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1:27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말하면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신을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삶을 언급합니다. 이는 시편 26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실제 삶의 윤리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온전함으로 걸어가면서 은혜를 구하다

시편 26:11 본문 →

그러나 저는 온전함으로 걸어가겠습니다. 저를 속량하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 26:11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 시인은 자신이 온전함으로 걸어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앞으로도 온전함으로 걸어가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구절에는 같은 핵심 표현이 사용됩니다. 1절에서는 「나의 온전함으로 걸어왔다」라고 말하고, 11절에서는 「나의 온전함으로 걸어가겠다」라고 말합니다.

이 반복은 시편의 처음과 끝을 연결합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같은 방향을 향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저를 속량하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요청이 나옵니다.

자신이 온전하게 살아왔다고 주장한 사람이 왜 하나님의 속량과 은혜를 구할까요? 만약 시인의 온전함을 모든 죄와 결함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완전성으로 이해한다면, 이 요청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악인들의 모임에 동참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애와 진실 안에서 걸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운명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달려 있다고 인정합니다.

「속량하다」(⁨פָּדָה⁩)라는 동사는 구속하거나 위험과 속박에서 건져 내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자신을 악인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게 구해 달라는 앞의 간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역시 하나님이 호의를 베푸시기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두 요청은 시인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앞의 시편 25편과도 의미 있게 구별됩니다. 시편 25편에서는 자신의 죄악이 크다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시편 26편에서는 자신이 악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결백을 밝혀 달라고 요청합니다. 두 시의 기도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부당한 고발이나 악한 사람들의 공격 앞에서 결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행하는 악이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도 악한 길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26편의 신앙은 자기 의로움에 대한 자랑과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자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미끄러지지 않겠다는 고백에서 평탄한 곳에 선 발까지

시편 26:12 본문 →

제 발은 평탄한 곳에 서 있습니다. 회중들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습니다.시편 26:12 · 본디새김

시편은 마지막에 시인의 발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발이 평탄한 곳에 서 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온전함으로 걸어왔다고 말했습니다. 중간에는 악인들과 함께 앉지 않고 하나님의 제단을 돌겠다고 했습니다.

걷고, 앉지 않고, 제단을 돌며, 마침내 섭니다.

「평탄한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쇼르(⁨מִישׁוֹר⁩)는 평평하고 고른 땅을 나타내며, 문맥에 따라 올바름과 공정함을 뜻하는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시인이 더 이상 비틀거리거나 넘어질 위험이 없는 안정된 자리에 서 있다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올곧은 삶의 자리라는 의미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시인이 겪던 위험이 실제로 모두 해결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하나님께 속량과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탄한 곳에 선 발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신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의 관심은 자신이 안정된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5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이들의 모임」을 미워한다고 말했고, 12절에서는 「회중들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느 공동체에 속할 것인지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악한 사람들은 피하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모임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한쪽에서는 악한 계략과 뇌물이 오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이야기되고 감사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에 대한 정당한 판정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는 5절의 「모임」과 12절의 「회중」 두 표현 모두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와 관련된 낱말을 사용합니다. 다만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악을 행하는 무리를,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임을 가리킵니다.

온전함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시편 26:1–12 본문 →

시편 26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시인의 삶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신체 이미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인의 눈앞에는 하나님의 인애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 하나님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손은 결백함으로 씻는 손이고, 그의 발은 마지막에 평탄한 곳에 서 있습니다. 눈과 내면, 손과 발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콩팥과 심장을 정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보다 하나님의 진실한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살피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를 원하는 이유는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결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도움을 더욱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시인은 평탄한 곳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결백한가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회중들 가운데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습니다.」

시편은 사람들이 그의 결백을 인정해 주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모임에는 앉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회중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의 발은 평탄한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