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7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나를 숨기시되 얼굴은 숨기지 마십시오
시편 27편은 처음과 끝의 분위기가 놀라울 만큼 다릅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군대가 진을 치고 전쟁이 일어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라고 묻던 사람이 「저를 내버리지 말고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의 진짜 믿음일까요?
앞부분의 확신을 진짜 믿음으로 여기고 뒷부분의 두려움을 믿음의 부족으로 판단한다면, 이 시가 보여 주는 신앙의 중요한 모습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뢰하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향해 기도합니다.
이 시편을 이해하는 열쇠는 5절과 9절의 대조에 있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겨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9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얼굴만은 숨기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27편은 이 소망이 어떻게 확신이 되고, 기도가 되고, 마침내 기다림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나의 빛이다 — 두려움의 근거를 다시 묻다
시편은 두 번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의 것. 여호와야훼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여호와야훼는 내 생명의 피난처다.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는가?시편 27:1 · 본디새김
이 질문들은 실제로 두려워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적들을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 앞에 놓인 선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빛이고 구원이며 생명의 피난처라는 사실이 두려움에 대한 대답을 결정합니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되면서도 구별되는 세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빛은 어둠과 대조됩니다. 구원은 위협에서 건져 내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피난처는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주신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자신의 빛이고 구원이며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안전의 근거를 하나님이라는 한 분에게 두고 있습니다.
2절에서 적들은 매우 잔혹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 다가왔을 때, 나의 적들과 나의 원수들, 바로 그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졌다.시편 27:2 · 본디새김
‘내 살을 먹는다’는 표현은 적들의 공격적인 의도를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을 먹잇감처럼 삼키려는 무자비한 적대감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장의 끝에서 예상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자들이 정작 비틀거리고 쓰러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뛰어난 전투 능력이나 전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쓰러졌다는 결과만 말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까지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은 그것을 여호와야훼에 대한 신뢰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과거의 경험에서 미래의 가능성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군대가 나를 거슬러 진을 친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그런 중에도 나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한다.시편 27: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적들이 다가왔을 때 쓰러졌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제는 훨씬 큰 군대가 자신을 포위하는 상황까지 상상합니다. 시인은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의 ‘그런 중에도(זֹא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이것 안에서’, 또는 ‘이것으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이 바로 앞의 전쟁 상황을 가리키는지, 앞서 고백한 여호와야훼의 구원과 보호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에 어울립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이 말하는 신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다릅니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큰 위협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단 한 가지를 구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가지를 구하다 — 구원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내가 여호와야훼에게 한 가지를 청했다. 나는 그것을 구한다. 곧 내 평생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물며 여호와야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의 성전에서 묻는 것이다.시편 27:4 · 본디새김
군대와 전쟁을 이야기한 직후이므로, 우리는 시인이 적들을 물리쳐 달라고 청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하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무는 일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는 세 가지 행동이 등장합니다. 머무는 것, 바라보는 것,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소원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무르며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 묻는, 하나로 연결된 삶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야훼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가 특별하게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는 곳이었습니다.
‘내 평생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문다’는 말이 반드시 성소 건물 안에서 평생 실제로 거주하겠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지속적인 관계를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만 하나님의 집에 피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모든 날에 그분 가까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야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다
‘아름다움(נֹעַ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즐거움, 사랑스러움, 호의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라보는 것은 성소 건축물의 장식이나 외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인이 바라보려는 대상은 여호와야훼 자신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임재가 얼마나 귀하고 기쁜 것인지를 표현합니다. 시인은 재앙을 피할 방법뿐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그의 성전에서 묻는 것’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살피다, 조사하다, 찾아보다 등의 뜻을 지니며,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탐구하거나 묻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신탁을 구하는 절차를 가리키는지, 하나님에 관해 깊이 숙고하는 행위인지, 성소를 찾아 하나님께 묻는 일을 폭넓게 표현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은 무엇을 질문하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라봄과 물음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이 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저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면서, 그분 앞에서 계속 묻고 알아 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그가 ‘한 가지’라고 부른 소원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현실의 위험을 잊게 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시인은 다시 재앙의 날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집’과 ‘성전’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지만, 이것만으로 이 시가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뒤에 기록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전’에 해당하는 헤칼은 본래 궁전이나 큰 건물을 가리킬 수 있었고, 사무엘상 1:9에서도 솔로몬 성전 이전의 실로 성소에 사용됩니다. 이 시의 소망은 시편 안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6도 평생 여호와야훼의 집에 머무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 시에서 여호와야훼는 목자이시며, 시인은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편 27편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소망이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묻는 일로 확장됩니다. 바로 앞의 시편 26:8에서는 시인이 여호와야훼께서 거하시는 집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27편은 그 사랑을 더욱 절박한 소망으로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의 천막에 숨겨진 사람 — 보호가 찬양으로 이어지다
재앙의 날에 그가 나를 그의 은신처에 감추고, 그의 천막 안의 은밀한 곳에 숨기며, 바위 위에 높이 올려놓을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27:5 · 본디새김
처음 두 이미지는 다른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안전하게 감추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이미지는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세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숨겨 보호하시기도 하고, 높이 들어 올려 적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이 이미지들이 실제로 시인이 경험한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소와 천막의 이미지가 연결되면서, 그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는 곳입니다.
6절에서는 그 보호의 결과를 새로운 장면으로 표현합니다.
이제 내 머리는 나를 둘러싼 원수들 위로 높이 들릴 것이다. 나는 그의 천막에서 환호하며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겠다. 여호와야훼에게 노래하고 찬양을 연주하겠다.시편 27:6 · 본디새김
고개를 들 수 없던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드는 모습입니다. 이 표현은 위험에서 벗어나 명예와 자신감을 회복하는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리는 최종 장면은 자신이 적들을 정복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막으로 가서 희생 제물을 드리고 노래합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구원이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시인이 노래와 제사를 말한다고 해서 이미 모든 위험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장차 얻게 될 구원을 확신하며 그때의 예배를 그려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습니다.
6절의 환호성과 7절의 간구 사이에는 별도의 설명이 없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전환이 시편의 다음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확신하던 사람이 부르짖다 —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기도
여호와야훼,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제가 부르짖습니다. 제게 은혜를 베풀고 응답해 주십시오.시편 27:7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양을 연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목소리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이 전환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은 제시되지 않습니다.
완성된 시편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은, 시인의 신뢰가 간구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구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바로 그 여호와야훼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8절에서는 기도가 더욱 깊어집니다.
제 마음이 당신을 대신하여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여호와야훼, 저는 당신의 얼굴을 찾겠습니다.시편 27:8 · 본디새김
이 구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간결하지만 문법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당신께 제 마음이 말했습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있고, 이어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라는 복수 명령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당신의 얼굴을 찾겠습니다’라고 단수의 응답을 합니다. 문장 구성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구절 끝의 시인 자신의 응답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찾겠습니다(בָּקַשׁ)’라는 동사는 4절에서 ‘나는 그것을 구한다’고 말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한 가지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8절에서 그 소원이 ‘당신의 얼굴을 찾겠습니다’라는 말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려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흔히 그분의 임재와 관계, 관심과 호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겠다고 응답한 시인은 즉시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의 얼굴을 제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분노하여 당신의 종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저의 도움이셨습니다. 저의 구원이신 하나님, 저를 내버리지 말고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시편 27:9 · 본디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숨겨 주시는 것이 구원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 시인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같은 ‘숨김’이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감추시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시면, 시인은 그분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은밀한 곳에 숨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저의 도움이셨습니다’라는 과거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을 버리셨다고 확정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도와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시편의 전반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했다면, 여기서는 그 고백이 개인적인 관계의 언어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라는 믿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이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두 노래를 결합한 것이라고 보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확신과 탄식이 한 편의 시 안에서 의도적으로 함께 놓였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형성 과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8절에는 두 가지 주요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내 얼굴을 찾아라’라는 부르심을 시인의 마음이 되받아 전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이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이 하나님께 말한다는 문장 구조를 더 직접적으로 살리면서, 시인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요청이 울려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복수 명령과 ‘내 얼굴’이라는 표현의 화자 문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시편 24:3–6과의 연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르고 그분 앞에 설 수 있는지를 묻고,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27편에서는 한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의 얼굴을 찾겠다고 응답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려도 — 하나님은 받아 주신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저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시편 27:10 · 본디새김
시인은 부모를 이야기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은 개인이 보호와 부양을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였습니다. 부모는 특별히 자녀의 생존과 소속에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에게조차 버림받는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보호 관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어는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형태로 말합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이미 일어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적 문맥에서 ‘설령 부모가 나를 버린다고 해도’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본문만으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다윗이 실제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구체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저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라는 여호와야훼에 대한 선언입니다. ‘받아 주다(אָסַ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으다, 거두다,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행동은 단지 버려진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를 받아들이시고 자신의 보호 아래 거두시는 일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천막 안에 숨겨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보호의 의미가 더욱 따뜻하고 개인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버림받은 이를 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부모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부모에게 버림받는 일을 가벼운 문제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무너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관심은 다시 바뀝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을 말한 그는 이제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평탄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 구원과 삶의 방향
여호와야훼, 당신의 길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를 노리는 자들 때문에 저를 평탄한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시편 27:11 · 본디새김
시인은 적들을 물리쳐 달라는 요청을 곧바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호와야훼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당신의 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 그분의 뜻과 가르침에 따라 걷는 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현실의 위험과 분리된 추상적인 도덕적 이상이 아닙니다. 시인은 ‘저를 노리는 자들 때문에’ 이 길로 인도해 달라고 말합니다. 적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그의 관심사입니다.
‘평탄한 길(מִישׁ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고르고 반듯한 길의 이미지를 지닙니다. 장애물이 없는 안전한 길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올바르고 곧은 삶의 방향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에는 두 의미가 함께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적들이 자신을 해치기 어려운 안전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요청과,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적들의 위협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저를 적들의 욕망에 넘겨주지 마십시오. 거짓 증인들과 폭력을 내뿜는 자가 저를 거슬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시편 27:12 · 본디새김
시편 앞부분에서는 적들이 군대와 전쟁의 이미지로 등장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라는 표현은 시인이 물리적인 공격뿐 아니라 거짓된 증언과 비난의 위협도 겪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누군가 자신에 관해 험담한다는 상황보다 심각한 위협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는지까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폭력을 내뿜는 자’라는 표현에서는 숨을 내뿜는 동작과 폭력을 뜻하는 말이 함께 사용됩니다. 마치 적대자의 입에서 나오는 숨 자체가 폭력이 되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거짓 증언과 폭력이 나란히 놓이면서, 사람의 말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과 똑같아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길을 구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적들의 거짓과 폭력에 맞서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은 시인이 어떤 구체적인 대응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요청한 것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적을 응징할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인이 구하는 구원은 적들로부터 살아남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적들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시는 마무리로 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가장 뜻밖의 문장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사회에서 증언은 분쟁과 재판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거짓 증언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뿐 아니라 부당한 판결과 실제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19:15–21은 거짓 증언을 공동체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문제로 다룹니다.
끝나지 않은 문장과 기다림 — 믿음이 멈추는 자리
내가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선함을 보리라고 믿지 않았다면……시편 27:13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은 ‘만일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조건을 나타내는 말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장에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말하는 뒷부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 결과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서 문장이 멈춥니다.
시인은 믿음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끝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제껏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그분께 부르짖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엇을 믿고 버텨 왔는지를 말하려는 순간, 문장이 열린 채로 남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선함을 보리라’는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보리라
여기서 ‘살아 있는 이들의 땅’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죽음의 영역과 대비되는 현재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고백으로 먼저 읽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벗어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이 대목은 4절과 연결됩니다. 4절에서 그가 원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여호와야훼의 선함을 보리라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살아가는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소망이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기다리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기다려라. 굳세어라. 네 마음이 강해지기를. 여호와야훼를 기다려라.시편 27:14 · 본디새김
시편 27편은 적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선언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태도와 다릅니다. ‘기다리다(קָוָ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기다리다, 기대를 걸다, 소망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를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어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에게 자신의 기대를 두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권면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명시되지 않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일 수도 있고, 이 노래를 듣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권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3절과 연결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네 마음이 강해지기를’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의 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확신이 앞으로도 계속 굳게 서 있어야 함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강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는 순간에도 자신이 기다릴 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다시 ‘여호와야훼를 기다려라’입니다. 이 반복은 기다림이 잠깐의 과정이라는 착각을 막습니다. 아직 응답을 보지 못했더라도, 시인이 기대를 둘 대상은 처음과 같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을 번역하면서 ‘나는 절망했을 것이다’라든가 ‘나는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덧붙이면 자연스러운 문장이 됩니다. 실제로 문맥상 그런 의미를 추론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원문의 특징이 사라집니다. 이 생략이 어떤 의도를 지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감정이 고조되어 말을 멈춘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조건문의 뒷부분이 시적으로 생략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4절과 13절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보다’는 서로 다른 동사입니다. 그러나 시의 흐름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이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굳세어라. 네 마음이 강해지기를’이라는 말은 여호수아 1:9에서 볼 수 있는 굳셈과 용기를 향한 권면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정한 전쟁의 승리를 약속하기보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바라보는 사람
시편 27편을 다시 돌아보면, 처음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시인은 적들 앞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빛과 구원으로 고백하고, 그 현실에서 하나님께 세 가지 방향으로 응답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리라는 믿음 안에서 기다립니다.
신뢰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두려운 상황에서조차 누구를 향해 돌아설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를 빛과 구원이라고 불렀던 시인은 마지막에도 여호와야훼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백을 실제로 살아 내야 하는 자리에서 기다림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시편 27편을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한다면,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승리를 외치는 사람의 모습만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적들이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그를 노리고 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보리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말하려다가 문장을 끝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혹은 이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 「여호와야훼를 기다려라」라고 말합니다.
시편은 그가 마침내 무엇을 보았는지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직 승리의 장면은 완성되지 않았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도 모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편 27편의 믿음은 모든 것을 이미 보았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이 바라볼 분을 알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추어져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얼굴만은 자신에게서 감추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찾으며, 자신이 살아 있는 땅에 서서 기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