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1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의 손에 맡긴 삶

시편 31편에는 한 사람의 믿음과 두려움이 놀라울 만큼 가까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당신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6절)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같은 시편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이 한때 「저는 당신 눈앞에서 끊겨 나갔습니다」(23절)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영을 맡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모순이 아닙니다. 시편 31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실제 고난 속에서 어떤 모습을 띠는지 보여 줍니다.

시인은 적들에게 쫓기고, 거짓된 말에 시달리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외면받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죽은 사람처럼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가 겪는 고통은 육체적인 위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더 이상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고통입니다.

이 시편에는 ‘손’과 ‘얼굴’, ‘눈’과 ‘입술’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인의 목숨을 노리는 적들의 손과 그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 사람들의 외면과 하나님의 시선, 거짓된 입술과 하나님께 부르짖는 목소리가 서로 대조됩니다.

시편 31편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알려지고 보호받는 존재임을 발견하는 노래입니다.

그 발견은 고통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831편 본문 읽기 →

당신은 제 바위이시니, 저의 바위가 되어 주십시오

시편 31:1–5 본문 →

여호와야훼, 제가 당신께 피했습니다. 제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의로 저를 건져 주십시오.시편 31:2 · 본디새김

시편의 첫 문장에서 시인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피했다고 말합니다.

아직 피난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지할 분을 정하고 그분께 나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하나님께 피했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을 요청합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 피난처인 바위와 요새가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바위와 요새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제게 귀를 기울이시고, 서둘러 저를 구해 주십시오. 저를 구원할 피난처인 바위와 요새인 집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은 제 바위이며 제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 저를 이끄시고 인도해 주십시오.시편 31:3–4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아직 나의 바위가 아니시니 바위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나의 바위이시므로, 실제로 나를 지켜 주는 바위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도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는 고백이, 바로 그분께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근거가 됩니다. 믿음과 간구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믿기 때문에 그분께 구체적인 구원을 요청합니다.

당신의 의로 저를 건져 주십시오

2절에서 시인이 구원을 요청하는 근거는 ‘당신의 의’입니다. ‘의(⁨צְדָקָ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의로움과 올바름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그분이 바르게 판단하시고 행동하시는 성품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먼저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가 의로우니 저를 건져 주십시오’가 아니라 ‘당신의 의로 저를 건져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나중에 자신의 죄악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 시를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적들만 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최종적인 근거는 자신이 완벽하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게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4절에서는 또 다른 근거, 「당신의 이름을 위해 저를 이끄시고 인도해 주십시오」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으로 알려져 계신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을 위해’라는 요청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과 명예에 걸맞게 행동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구원의 근거로 삼습니다.

피난처와 그물

5절에 이르면 앞의 바위와 요새가 왜 필요한지 구체적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저를 잡으려고 숨겨 놓은 그물에서 저를 꺼내 주십시오. 당신은 제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1:5 · 본디새김

그물은 짐승이나 새를 잡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여기서는 누군가를 몰래 붙잡으려는 계략을 표현합니다. 적들의 공격은 정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인이 알지 못하는 곳에 함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갇혀 버린 그물에서 꺼내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앞에서 자신을 이끌고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숨겨진 그물에서 꺼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도움은 단지 멀리서 위험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에 갇힌 사람을 실제로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31편의 첫머리는 시편 71:1–3과 매우 가까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시편 모두 하나님께 피한다고 고백하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하나님의 의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하나님의 의와 피난처라는 주제가 한 사람의 특수한 경험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백성의 공통된 기도 언어가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당신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시편 31:6–9 본문 →

당신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 여호와야훼, 신실하신 하나님, 당신은 저를 속량하셨습니다.시편 31:6 · 본디새김

‘영(⁨רוּ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람, 숨, 영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시인의 생명과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을 맡긴다고 할 때, 이는 몸과 분리된 영혼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 곧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기는 고백입니다.

특히 ‘맡깁니다(⁨פָּקַד⁩)’에 해당하는 동사의 형태는 무엇인가를 다른 이의 관리나 책임 아래 맡기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키실 수 있는 분께 맡깁니다.

죽음을 앞둔 기도인가, 살아 있기 위한 기도인가

이 구절은 누가복음 23:46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의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니다.

그러나 시편 31편의 본래 장면에서는 먼저 살아 있는 사람의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들의 위협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 언어를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인용은 시편의 의미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이 고백을 예수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들려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기도한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당신은 저를 속량하셨습니다」에서 분명해집니다. ‘속량하다(⁨פָּדָ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거나, 다른 사람의 지배와 위험에서 구해 내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설명할 때도 사용됩니다. 신명기 7:8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속량하셨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과거에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삶도 그분께 맡깁니다. 이는 자신의 영을 맡기는 행위가 단순한 체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살기를 포기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알기에 자신의 생명을 맡깁니다.

6절의 ‘신실함(⁨אֶמֶ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진실함과 믿을 만함을 함께 나타냅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행동하시거나 사람을 속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그는 헛되고 허망한 것들을 떠받드는 이들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저는 헛되고 허망한 것들을 떠받드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합니다.시편 31:7 · 본디새김

‘헛되고 허망한 것들’은 문자적으로 허무하고 거짓된 것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상숭배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의지할 만한 실체가 없는 것들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신실하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보시고 아십니다

8–9절에서는 그 신뢰의 이유가 더욱 개인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의 인애로 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당신은 제 고통을 보셨고, 제가 겪는 고난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고, 제 두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시편 31:8–9 · 본디새김

시인은 단지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알아보셨다고 고백합니다. ‘알다(⁨יָדַע⁩)’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단순한 지식뿐 아니라 경험하고 알아보는 관계적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보호가 더욱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적들이 숨겨 놓은 그물은 사람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인을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 이 표현은 붙잡히고 갇힌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시인의 발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습니다. 다음 절에 이르면 시인은 다시 깊은 고통을 호소합니다.

죽은 사람처럼 잊히고, 망가진 그릇처럼 버려지다

시편 31:10–14 본문 →

여호와야훼, 제가 곤경에 빠졌으니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눈이 울분으로 쇠약해졌고, 제 넋과 배도 쇠약해졌습니다.시편 31: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여전히 곤경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시편의 시간적 배열을 한 줄로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미 경험한 구원을 감사하는 말과 현재 겪는 고난의 호소가 함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서로 다른 시기의 경험을 한 기도에 담았을 수도 있고, 구원을 경험한 뒤에도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사람이 더 이상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미 하나님의 인애를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고통이 몸 전체에 남긴 흔적

10–11절은 시인의 고통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눈이 쇠약해지고, 넋과 배가 쇠약해집니다. 삶은 슬픔으로, 세월은 탄식으로 다해 갑니다. 힘이 무너지고 뼈들이 쇠약해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단순히 마음이 괴롭다는 표현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고통은 그의 눈과 배와 뼈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히브리어에서 배나 내장은 인간의 내면과 감정이 경험되는 자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반드시 특정한 장기의 질병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인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가 겪는 슬픔은 몸 전체를 쇠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11절에는 눈여겨볼 고백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 삶은 슬픔으로, 제 세월은 탄식으로 다해 가고, 제 죄악 때문에 제 힘이 무너졌으며, 제 뼈들이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31:11 · 본디새김

그는 적들에게 부당하게 공격받는 사람인 동시에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가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그 죄악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적대적인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악과 자신이 겪는 고난을 함께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이것은 시편의 기도를 단순한 선인과 악인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는 행동까지 정당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은 두 현실을 모두 숨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해 달아납니다

12절부터는 고통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제 모든 적대자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제 이웃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저를 아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밖에서 저를 보는 이들은 저를 피해 달아났습니다.시편 31:12 · 본디새김

시인은 적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고통은 적들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적의 수가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인을 둘러싼 인간관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호의적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조차 그를 멀리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를 피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적들의 위협에 연루될까 두려워했을 수도 있고, 시인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그를 꺼리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 이유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서는 이 고립이 더욱 선명한 두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저는 죽은 사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혔습니다. 망가진 그릇처럼 되었습니다.시편 31:13 · 본디새김

시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잊혔습니다. 여기서 죽음의 이미지는 육체적인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않고 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사라진 사람처럼 느낍니다.

고대의 토기 그릇은 깨지거나 망가지면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렇게 쓸모를 잃고 버려진 물건처럼 되었다고 느낍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잊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망가진 그릇처럼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의 가장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는 생명을 잃을 위험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신이 이미 버려진 존재처럼 취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방에 공포가 있습니다

많은 이가 헐뜯는 말을 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방에 공포가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치려고 함께 모의하며 제 목숨을 빼앗으려 꾀했습니다.시편 31:14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위협을 소리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에는 물리적인 위험과 언어적인 공격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사방에 공포가 있다’는 표현이 보여 주는 위협의 성격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어느 방향을 보아도 안심할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시인의 고통은 이제 극에 달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문장이 반전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에서는 ‘죄악’으로 읽는 마소라 본문을 따릅니다. 14절의 ‘사방에 공포가 있다’는 히브리어 마고르 미사비브는 예레미야서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6:25에서는 칼과 적들의 위협 때문에 사방에 공포가 있다고 말하며, 20:10에서는 예언자를 둘러싼 비난과 고발의 상황에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인용했는지는 여기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때들은 당신 손에 있습니다

시편 31:15–19 본문 →

그러나 여호와야훼,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제 하나님이십니다.」시편 31:15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러나 나는’이라는 대조를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웃은 외면하고, 아는 사람들은 피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시인은 그 모든 위협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처받지 않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다음, 그 현실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판단이 되도록 두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무너진 모든 인간관계와 대조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 삶의 때들이 당신 손에 있습니다

제 삶의 때들이 당신 손에 있습니다. 제 원수들의 손에서, 저를 뒤쫓는 이들에게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시편 31:16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 ‘제 삶의 때들(⁨עֵת⁩)’은 때나 시기를 나타내는 말의 복수형에 일인칭 소유 표현이 붙은 형태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단순히 하나의 시간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때들을 이야기합니다.

기쁨의 때, 고난의 때, 안전한 때, 위험한 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이 이런 시기들을 하나씩 열거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삶에 속한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 「제 원수들의 손에서, 저를 뒤쫓는 이들에게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에서 다시 ‘손’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적들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때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손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나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시인은 여전히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행동은 실제 위협이며,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이 적들에게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6절의 ‘당신 손에 제 영을 맡깁니다’와 깊게 연결됩니다. 6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16절에서는 자신의 삶의 시간들이 이미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맡김은 단지 위기 순간의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는 신앙의 관점이 됩니다.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 주십시오

17절에서는 손의 이미지에서 얼굴의 이미지로 옮겨 갑니다.

당신의 종 위에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십시오. 당신의 인애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시편 31:1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얼굴빛은 구약에서 은혜와 복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민수기 6:25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얼굴을 백성에게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 시편 31편의 시인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호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앞의 사회적 고립과 연결해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합니다. 아무도 그를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표현 이상입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자신을 하나님만은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8–19절에서는 다시 적들의 말에 관한 기도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제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고, 스올에서 잠잠해지기를 바랍니다. 교만과 멸시로 의인을 거슬러 오만하게 말하는 거짓된 입술이 말을 못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31:18–19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수치를 막아 달라고 구하는 동시에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적들의 말은 시인을 무너뜨리는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헐뜯고 모의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바로 그 거짓된 말이 멈추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문제 삼는 것은 의인을 거슬러 교만과 멸시로 말하는 거짓된 입술입니다.

다만 본문에는 악인들이 스올에서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엄한 심판의 기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언어폭력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온건한 요청으로만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해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그 심판을 집행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에 따라 판단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당신은 그들을 당신 얼굴 앞에 숨기십니다

시편 31:20–21 본문 →

당신의 선하심이 얼마나 큰지요. 당신은 그것을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간직해 두셨고, 당신께 피하는 이들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베푸셨습니다.시편 31:20 · 본디새김

이제 시인은 자신의 구체적인 위기에서 시선을 넓혀, 하나님이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이야기합니다.

‘간직해 두셨고(⁨צָפַן⁩)’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감추다, 보관하다, 간직해 두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마치 잘 보관된 귀중한 것처럼 간직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그 선하심이 ‘사람들 앞에서’ 베풀어졌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에게 항상 즉시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 자신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 선하심을 간직하고 계시며, 필요한 때에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과 ‘당신께 피하는 이들’이 나란히 놓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위엄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분께 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그분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그분을 신뢰하는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숨겨진다는 역설

당신은 사람들의 모의로부터 그들을 당신 얼굴 앞의 은밀한 곳에 숨기십니다. 혀로 벌이는 다툼으로부터 그들을 초막에 감추십니다.시편 31:21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언뜻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보통 누군가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은 그에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으면서 숨겨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보이고 누구에게 숨겨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모의와 다툼에서는 보호받습니다.

사람들에게서는 감추어지지만 하나님께는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시인은 밖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들이 자기를 피해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 앞에 사람들을 숨겨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단지 시인이 바라보고 싶은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의 보호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모의’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드문 표현이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 ‘혀로 벌이는 다툼’이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적대적인 말과 행동에서 보호받는다는 전체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시편의 앞부분에서 적들은 그물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함정을 만들어 시인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숨기십니다. 적들은 사람을 해치려고 그물을 숨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키려고 그들을 자신의 은밀한 곳에 감추십니다.

같은 감춤의 이미지가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호의 장소를 시인은 ‘초막’이라고 부릅니다. 초막은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작은 거처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강한 요새의 이미지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은밀한 곳에 품어 숨기시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는 단지 외부의 공격을 막는 견고한 성벽만이 아니라, 그분 가까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자리로 묘사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의 모의’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크세 이시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드문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음모나 계략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인간의 교만이나 적대적인 언행과 관련해 읽기도 합니다.

당신 눈앞에서 끊겨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편 31:22–23 본문 →

여호와야훼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는 포위된 성읍에서 내게 놀라운 인애를 베풀었다.시편 31:22 · 본디새김

시편은 이제 다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포위된 성읍’이라는 표현은 해석상 논의가 있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 베이르 마초르는 포위된 성읍 또는 방비된 성읍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포위된 성읍으로 이해하면 적들에게 둘러싸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인애를 경험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방비된 성읍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견고한 성읍 안에서 시인을 보호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역사적 장소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인애를 추상적인 교리로만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을 하나님의 놀라운 인애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 구원이 왜 그토록 놀라웠는지 드러납니다.

저는 두려워 허둥대며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 눈앞에서 끊겨 나갔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때, 당신은 제 간구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시편 31:23 · 본디새김

‘끊겨 나갔다(⁨גָּרַז⁩)’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잘려 나가거나 분리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분의 눈앞에서 끊어진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고백은 앞의 사회적 고립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도 자신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경험한 두려움의 깊이입니다.

그런데 23절 후반부, 「그러나 제가 당신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때, 당신은 제 간구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에는 결정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과거 판단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가입니다. 그는 그때 자신이 ‘두려워 허둥대며’ 말했다고 고백합니다. 원문의 표현은 급박함이나 당황하여 서두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내린 판단을 회상합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판단이 자신의 경험 전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 느낀 모든 감정이 거짓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겪은 고통은 실제였습니다. 그가 느낀 두려움도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내린 결론은, 나중에 경험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다시 해석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과 하나님께 실제로 버림받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경험의 의미를 하나님의 인애와 응답이라는 더 큰 사실 속에서 다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앞서 등장했던 손과 얼굴의 이미지가 모두 연결됩니다. 그는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자신의 삶의 때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끊겨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눈앞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던 것입니다.

시인의 찬양은 바로 이 발견에서 나옵니다.

여호와야훼를 사랑하여라 — 한 사람의 경험이 모두의 권면이 되다

시편 31:24–25 본문 →

여호와야훼에게 신실한 모든 이들아, 여호와야훼를 사랑하여라. 여호와야훼는 신실한 이들을 지키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갚는다.시편 31:24 · 본디새김

시인은 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시편의 처음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겁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하나님께 따뜻한 감정을 느끼라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다(⁨אָהַ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설명할 때도 사용됩니다. 신명기 6:5에서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여호와야훼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사랑은 감정적인 호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충성, 삶의 방향을 포함합니다.

시편 31편에서는 이 명령이 특별한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 순간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분을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강한 믿음을 지녔기 때문에 언제나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두려워 허둥대며 잘못된 결론을 내렸던 순간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믿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행동하셨는지에 있습니다.

신실한 이들을 지키시는 하나님

24절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신실한 이들을 지키시고 교만한 자들에게 보응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처음부터 등장했던 대조가 다시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적들은 교만하게 행동하고 거짓된 말로 다른 사람을 해쳤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 두 부류를 똑같이 대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이들을 지키시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에 따른 책임을 물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런 고난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전체가 이미 그 반대의 경험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도 육체적으로 쇠약해졌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빼앗길까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를 고난의 부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보호는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붙드시는 일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절은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아, 굳세어져라. 너희 마음이 담대해지기를 바란다.시편 31:25 · 본디새김

‘기다리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기대하는 일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권면은 고난이 모두 끝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입니다.

시인은 실제로 두려움에 휩싸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굳세어지라고 말합니다.

그가 경험한 용기는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을 신뢰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기는 태도였습니다.

시편 31편의 마지막 권면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말보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굳세어져라’와 ‘너희 마음이 담대해지기를’은 용기와 굳셈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1:6–9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편 31편은 특정한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에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맺음 —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사람

시편 31:1–25 본문 →

시편 31편을 처음 읽으면 두려움과 탄식이 매우 길게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은 적들의 그물에 갇힐까 두려워하고, 거짓된 말에 시달리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죽은 사람처럼 잊혔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한때 자신이 하나님의 눈앞에서도 끊겨 나갔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시를 관통하는 문제는 단지 위협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위협 속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 신실하신 분, 인애를 베푸시는 분으로 부릅니다. 그분의 의는 구원의 근거가 되고, 신실함은 자신의 영을 맡길 이유가 되며, 인애는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그 모든 고통을 지나며 반복되는 하나의 행동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의 삶의 때들이 그분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 발견이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아, 굳세어져라」라는 시편의 마지막 권면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그분은 자신의 간구를 듣고 계셨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하나님의 손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같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말을 겁니다. 자신의 삶을 여전히 하나님께 맡긴 채, 그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굳세어지라고 권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