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0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서 영원한 감사로
시편 30편에는 ‘영원히’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번의 고백이 전혀 다릅니다.
처음에 시인은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7절). 그러나 시편의 마지막에서는 「제가 영원히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13절). 처음에는 자신의 평안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영원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두 문장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인은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부르짖었고, 자신의 생명이 구덩이로 내려갈까 두려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굳건하다고 생각했던 삶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단순히 고난을 겪은 사람이 겸손해졌다는 교훈을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자신이 평안했던 때에도 이미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평안할 때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자신을 굳게 세우셨던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그 안전은 하나님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30편은 이 깨달음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합니다. 먼저 구원의 결과를 노래하고, 뒤로 돌아가 위기 이전의 마음과 위기 속의 기도를 들려준 다음, 마지막에 다시 찬양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에서 바뀌는 것은 시인의 상황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뀝니다.
집을 봉헌하는 노래가 어째서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인가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특별한 예배의 자리와 연결합니다.
다윗의 시편. 집을 봉헌하는 노래.시편 30:1 · 본디새김
구약에서 집을 봉헌하는 일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신명기 20:5에는 집을 짓고도 아직 봉헌하지 못한 사람을 전쟁에서 돌아가게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12:27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면서 감사와 찬양으로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편 30편의 본문을 읽으면 특이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집을 짓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건물이 완성되었다는 말도 없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나 봉헌 의식에 관한 설명도 없습니다. 대신 시인은 자신이 병에서 고침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노래는 어떤 집의 봉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표제의 ‘집’을 성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일을 기억하며 성전을 봉헌하거나 기념하는 예배에서 이 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왕궁이나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하 5:11에는 다윗을 위해 집을 건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표제만으로 어느 집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과의 관계 역시 구체적인 작곡 시점이나 봉헌 행사를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노래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30편이 들려주는 것은 건축의 성공보다 생명을 지켜 주신 하나님에 관한 증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봉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누카는 어떤 건물이나 물건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처음 사용하거나 바치는 일과 관련됩니다. 건물의 봉헌을 기념하는 노래에 개인의 구원 경험이 담긴 이유를 정확히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자리에서도 개인과 공동체의 구원을 기억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끌어 올리셨기에 당신을 높입니다
여호와야훼, 제가 당신을 높이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끌어 올리셨고,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30:2 · 본디새김
이 첫 문장에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두 동작이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끌어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셨다’는 물을 길어 올리는 행동과 연결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표현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위로 끌어 올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끌어 올리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제가 당신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고, 당신은 저를 고치셨습니다.시편 30:3 · 본디새김
‘고치셨습니다’라는 말은 실제 질병에서의 회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낱말은 병을 고치거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시인이 자신의 위기를 치료와 회복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병을 앓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질환을 추측하거나 그 질병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확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그가 겪은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다고 느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제 목숨을 스올에서 끌어 올리셨습니다. 저를 살려 두셔서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습니다.시편 30:4 · 본디새김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덩이 역시 죽음과 무덤의 이미지를 지닙니다. 따라서 시인은 단순히 몸이 조금 아팠다가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갔다가 생명을 되찾은 경험을 노래합니다.
다만 이 표현을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 두셔서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구덩이는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시인을 위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자 시인은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찬양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정하는 응답입니다.
2절에는 원수들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시인의 질병이나 죽음의 위기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이나 실패를 바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기 생명의 회복을 적들에 대한 개인적인 승리로만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높이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까지 찬양에 초대합니다.
조금 더 깊이
‘높이다’와 ‘끌어 올리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서로 다르지만, 높이는 행동과 끌어 올리는 행동이 대응하면서 시의 출발점을 이룹니다. ‘끌어 올리셨다’는 딜리타니, ‘고치셨다’는 라파입니다.
저녁의 울음은 하룻밤 머물지만
여호와야훼에게 신실한 이들아, 그에게 찬양 노래를 불러라.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여라.시편 30:5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제 목숨’, ‘저를 고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겁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이들’은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에 연결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여호와야훼께 속하여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떠올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되새기며 그분을 찬양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과 구별되는 그분의 특별한 성품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거룩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노래합니다.
그의 진노는 잠깐이고, 그의 호의는 평생이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하룻밤 머물지만, 아침에는 기쁨의 외침이 있다.시편 30:6 · 본디새김
잠깐과 평생
원문의 첫 부분은 간결하여, ‘그의 진노는 잠깐이고 그의 호의는 평생이다’라는 시간의 대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 읽기를 선택했습니다. 반면 ‘그의 진노는 잠깐이지만, 그의 호의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히브리어 하임(חַי)이 생명과 살아 있는 기간을 모두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읽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호의를 대조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호의가 지니는 더 크고 지속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다만 이 표현을 모든 인간의 고난에 대한 일반 법칙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 고통받고 있다면, 그 고난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노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보편적인 인과관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군가 오랜 질병이나 상실을 겪고 있을 때, 이제 곧 좋아질 것이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위기와 회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판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듯했던 시간보다, 자신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호의가 더 근본적이고 지속적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룻밤 머무는 울음
‘머물다’는 밤을 지내다, 하룻밤 머무르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 표현을 따라 읽으면 울음이 마치 밤에 찾아와 잠시 머무는 손님처럼 느껴집니다.
울음은 찾아옵니다. 시인은 울음이 아예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울음이 영원한 주인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아침이 오면 그 자리에 기쁨의 외침이 있습니다.
시인은 ‘울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울음이 영원하지 않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저녁과 아침을 문자적인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밤과 아침이라는 인간에게 익숙한 시간의 변화로 슬픔과 기쁨의 대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노래하던 시인은 갑자기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을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기억’에 해당하는 제케르는 명사입니다. 따라서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라는 본디새김 번역은 그 거룩한 기념과 기억의 의미를 살린 표현입니다. ‘신실한 이들’은 하시다브, ‘머물다’는 얄린입니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저는 평안할 때 말했습니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시편 30: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에서 끌어 올리셨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기 이전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때 그는 평안했습니다.
‘평안’은 안정, 걱정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원래 나쁜 상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평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누리는 안정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평안이 깨졌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실수를 단순히 교만했다고 말하고 넘어가면 중요한 특징을 놓치게 됩니다. 그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믿은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호의로 제 산을 굳건히 세우셨습니다. 당신이 얼굴을 숨기시자, 저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시편 30:8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의 평안이 전적으로 거짓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의 산을 굳건히 세워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평안할 때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제 산을 굳건히 세우셨습니다
‘제 산’이라는 표현은 조금 낯섭니다. 이것이 문자적으로 시인에게 속한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지, 왕권의 중심지인 시온과 연결되는지,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삶의 안정성을 산에 비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윗이라는 표제와 연결하여 왕의 견고한 지위나 왕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본문만으로 특정한 산이나 왕궁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산이 지닌 이미지입니다. 산은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7절의 고백을 다시 읽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굳건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8절에서 밝히는 사실은 그 굳건함의 근거가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의’는 6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대조되었던 것과 같은 낱말입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호의가 평생이라고 말했습니다. 8절에서는 그 호의가 자신의 산을 굳게 세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평안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에도 그 평안을 지탱한 것은 하나님의 호의였습니다.
시인의 잘못은 평안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마치 자신에게 영원히 보장된 상태처럼 여긴 데 있었습니다.
당신이 얼굴을 숨기시자
산처럼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관심과 돌보심,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민수기 6:24–26에서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의 복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그분의 도우심과 호의를 경험하지 못하는 두려운 상황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정확한 이유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앞선 자신감과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어진 경험을 연이어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 신학적 관계가 있다고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하나님이 시인의 교만을 벌하시기 위해 특정한 질병을 보내셨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어떤 죄를 지적하셨다는 말도 없고, 그가 특정한 죄를 회개했다는 장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단순히 ‘교만해서 병들었고 겸손해져서 나았다’는 인과관계로 정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시인이 실제로 보여 주는 신앙의 깊이가 줄어듭니다.
하나님이 호의를 베푸실 때에는 굳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어지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두려움 속에서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평안’은 히브리어 샬바, ‘산’은 실제로 산을 나타내는 하르, ‘호의’는 6절과 같은 라촌입니다.
죽으면 누가 당신께 감사하겠습니까
여호와야훼, 당신께 제가 부르짖습니다. 주께 은혜를 간청합니다.시편 30:9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은 위기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이미 회복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당시 자신이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는지를 들려줍니다.
그 기도는 예상보다 대담합니다.
제가 구덩이로 내려갈 때, 제 피에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먼지가 당신께 감사하겠습니까? 당신의 신실함을 알리겠습니까?시편 30:10 · 본디새김
시인이 내세우는 이유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미래가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죽음과 찬양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먼지가 감사할 수 있는가
10절의 ‘피’는 생명이 흘러나가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덩이로 내려간다’는 표현도 4절에서 등장했던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찬양을 받지 못하시면 어떤 결핍을 겪으신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시인의 관심은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신실함을 선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죽음 이후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있으며, 살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신실함을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달라졌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했습니다. 5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시인의 생명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는 절박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그가 살아 있는 삶의 목적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야훼, 들으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저를 돕는 이가 되어 주십시오.시편 30:11 · 본디새김
시인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이미 충분한 힘이 있으니 조금만 보태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7절의 고백과 크게 다릅니다. 그때는 자신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사람으로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기도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의 영역에 대한 구약의 여러 시편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예배와 찬양이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시편 6:5에서도 죽음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을 기억하며 스올에서 누가 감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시편 88:10–12에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할 수 있는지를 질문합니다. 이사야 38:18–19에서 죽을병에서 회복된 히스기야는 스올과 죽음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그분을 찬양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시편 30:10의 질문과 매우 가깝습니다. 시편 116:3–4에서도 죽음의 줄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16:12–14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 묻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말합니다. 두 시편에서 감사는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라기보다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드리는 응답입니다.
자루옷을 벗기시고 기쁨을 입히시는 하나님
당신은 저를 위해 제 통곡을 춤으로 바꾸셨습니다. 제 자루옷을 풀어 벗기시고, 제게 기쁨을 띠로 둘러 주셨습니다.시편 30:12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은 다시 처음의 찬양으로 돌아옵니다.
통곡과 춤은 사람의 몸짓을 바꾸어 놓습니다. 슬픔 속에서 우는 사람이 이제 기쁨을 표현하며 몸을 움직입니다. 자루옷과 띠는 사람이 입고 있는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루옷은 슬픔이나 애통함을 나타내는 옷이었습니다. 죽음을 애도하거나 재난을 겪을 때, 또는 회개하며 자신을 낮추는 상황에서 자루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이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둘러싼 슬픔의 표시를 제거하시고 기쁨으로 새롭게 입히셨다고 묘사합니다.
변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꾸셨습니다.’
‘풀어 벗기시고.’
‘둘러 주셨습니다.’
모든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마음을 굳게 먹어 슬픔을 이겨 냈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강한 의지를 발휘해서 통곡을 춤으로 바꾸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실제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결정적인 변화는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구원에 근거합니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 살아 있다
제 영광이 당신께 찬양 노래를 부르며 침묵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제가 영원히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시편 30:13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제 영광’은 해석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카보드(כָּבוֹד)는 영광, 존귀, 무게 있는 가치 등을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찬양 노래를 부르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의 영혼이나 마음속의 고귀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30:13 자체는 어떤 신체 기관이나 인간의 내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시인 자신이 온 존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시인은 먼지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찬양 노래를 부르며 침묵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돌려주신 것은 단지 생명만이 아닙니다. 그 생명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원히’라는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7절의 ‘영원히’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었습니다. 13절의 ‘영원히’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계속 감사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영원하다고 믿는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57:8에서도 ‘나의 영광아, 깨어나라’라는 표현이 찬양의 문맥에 등장합니다.
자루옷을 벗은 사람의 마지막 노래
시인은 회복되었으니 이제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안전 보장이 아니라 감사의 약속입니다. 시인의 경험은 고난을 겪으면 사람이 더 강해져서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흔들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평안하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에도,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에도,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어진 것 같은 순간에 두려움에 휩싸였고, 자기 생명이 구덩이로 내려갈까 두려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고치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끌어 올리신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앞으로 다시는 울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시인이 발견한 영원한 것은 자신이 누리는 평안이 아니라, 그 평안을 주셨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시편은 자루옷을 벗은 사람의 노래로 끝납니다.
이제 그의 몸에는 애통의 옷 대신 기쁨이 둘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제 하나님, 제가 영원히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