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4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두려움에서 건짐받은 사람의 삶의 길
시편 34편은 뜻밖의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표제에 따르면 다윗은 낯선 왕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꾸었고, 그 왕에게 쫓겨난 뒤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돌아보며 다윗이 처음 꺼내는 말은 자신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도, 얼마나 지혜롭게 위기를 벗어났는지도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리라.」
사무엘상 21:10–15은 이 표제와 연결되는 사건을 전합니다. 사울에게서 도망친 다윗은 블레셋의 도시 가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보자 그는 크게 두려워했고, 왕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성문에 흔적을 남기고 수염에 침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왕은 그를 내보냈습니다. 한때 이스라엘에서 승리의 노래를 들었던 사람이 적국에서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체면을 내려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시편 표제의 왕은 ‘아비멜렉’이고 사무엘상에는 ‘아기스’로 나옵니다. 아비멜렉을 왕의 칭호로 보는 설명도 있지만, 두 이름이 왜 다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시편이 사건 직후에 쓰였는지도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편의 표제가 독자에게 이 위태로운 경험을 기억하며 노래를 읽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다윗의 찬양은 새로운 깊이를 얻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기를 능숙하게 해결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과 명예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여호와야훼를 자랑합니다.
시편 34편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가르치는 노래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이 다른 두려움 속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을 전하는 노래입니다.
이 시편의 흐름도 여기에 맞추어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찬양으로 시작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을 그 찬양에 초대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라고 권하고, 마침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마지막에는 의인에게도 재앙이 많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인지 다시 확인합니다.
이 시편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표제를 제외한 시의 각 행은 대체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합니다. 여섯째 글자 ‘바브’에 해당하는 행은 빠져 있고, 마지막 23절은 알파벳 순서를 마친 뒤 덧붙은 형태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노래를 기억하고 가르치는 데 적합합니다.
알파벳의 순서는 끝났지만, 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마지막을 맺습니다.
자신의 찬양에서 모두의 찬양으로
다윗은 먼저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
나는 언제나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리라. 그를 향한 찬양이 늘 내 입에 있으리라.시편 34:2 · 본디새김
다윗은 모든 상황이 언제나 즐겁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경험에는 실제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곧이어 그 두려움에서 건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언제나 찬양하겠다는 말은 삶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두려움을 통과한 사람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를 밝히는 결심입니다.
내 영혼은 여호와야훼를 자랑하리라. 가난한 이들이 듣고 기뻐하기를.시편 34:3 · 본디새김
자랑에는 보통 자랑할 만한 소유나 성취가 필요합니다. 강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승리한 사람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랑의 대상을 자신에게서 여호와야훼에게로 옮깁니다. 그의 자랑을 듣고 기뻐할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곳의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거나 억눌린 사람들, 낮아진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씨가 겸손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형편 때문에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들과도 관련됩니다.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말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거리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랑은 가난한 사람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가 높이는 분은 사람의 힘이나 지위가 아니라, 곤경에 빠진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2:1–2에서 다윗이 가드에서 벗어난 뒤 아둘람 굴로 갔을 때,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빚진 사람들,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듭니다. 이들이 시편 34편의 직접적인 청중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야기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4절의 초대는 자연스럽습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야훼를 높여라. 우리 함께 그의 이름을 드높이자.시편 34:4 · 본디새김
시작할 때는 ‘나는’이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넓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억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는 증언이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다
내가 여호와야훼를 찾았더니 그가 내게 응답했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졌다.시편 34:5 · 본디새김
다윗은 여기서 구체적인 적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도, 블레셋 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 모든 두려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두려움은 위협적인 상황에서 생겨나지만, 상황이 끝난 뒤에도 사람 안에 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두려워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구원은 단순히 한 장소에서 빠져나온 사건보다 넓은 의미로 노래됩니다.
그들은 그를 바라보고 환해졌다.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워지지 않기를.시편 34:6 · 본디새김
여기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초대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은 그 대상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다윗 자신의 경험을 넘어 여호와야훼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시야를 넓히는 역할을 합니다.
‘환해졌다’는 표현은 얼굴이 밝아지는 변화를 그립니다. 두려움이나 수치심으로 고개를 숙이던 사람이 다시 얼굴을 드는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마지막 문장은 확정적인 미래의 선언이라기보다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이 문장을 바람의 형태로 옮긴 것도 이러한 문법적 가능성을 반영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가난한 이가 부르짖자 여호와야훼가 듣고, 그의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했다.시편 34:7 · 본디새김
‘이 가난한 이’는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내가 여호와야훼를 찾았더니’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듯 ‘이 가난한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윗만의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왕이나 용사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5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응답’하셨고, 7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들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이 이 경험의 핵심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전령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낸다.시편 34:8 · 본디새김
‘진을 친다’는 표현은 군대가 일정한 장소를 둘러싸고 머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위협적인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있는 곳에서 벗어날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는 확신이기도 합니다.
시편 34편의 전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위협은 사람을 둘러쌀 수 있지만, 여호와야훼의 보호 역시 그 사람을 둘러쌉니다.
이것은 다음 권면을 준비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 뒤, 듣는 사람들에게도 직접 확인해 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32:1–2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나님의 전령들을 만납니다. 야곱이 그곳을 하나님의 진영과 연결해 이름 붙이는 장면은, 인간의 여정 곁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는 초대
여호와야훼가 선하다는 것을 맛보고 보아라. 그에게 피하는 사람은 복되다.시편 34:9 · 본디새김
보통 선하다는 것은 생각하거나 판단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말합니다. ‘맛보라’는 실제로 맛을 보라는 뜻의 명령형입니다. 음식을 직접 먹어 보아 그 맛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도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알아 가라는 초대입니다.
다윗이 제안하는 방법은 추상적인 명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맛본다는 것은 그분께 피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이들아,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여라.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시편 34: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두려움에서 건짐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이 두 두려움은 구별해야 합니다. 5절의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시키는 위험과 공포를 가리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와 거룩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뜻합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젊은 사자들은 궁핍해지고 굶주렸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찾는 이들은 어떤 좋은 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34:11 · 본디새김
젊은 사자는 힘과 생존 능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조차 굶주릴 수 있습니다. 타고난 힘이 삶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은 언제나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뒤에 나오는 20절과 충돌합니다. 거기서는 의인에게 재앙이 많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의 약속은 모든 욕구가 반드시 충족된다는 보증으로 읽기보다,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의 삶이 그분의 선하심과 돌보심에 달려 있다는 신뢰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시편 전체에 더 잘 맞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말이 반복되기 시작합니다. 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선하시다’고 했고,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찾는 이들에게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13절은 좋은 것을 보려고 날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15절은 직접 선을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일이 어떻게 인간의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시는 이제 그 길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타아무(맛보라(טָעַם))와 관련해 표제와의 언어적 연결도 발견됩니다. 표제의 ‘행동을 바꾸었을 때’에는 명사 타암에 ‘그의’가 붙은 타으모가 쓰입니다. 본래 맛이라는 뜻과 연결되며 판단이나 분별의 의미로도 쓰이는 낱말입니다. 표제에서는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분별이나 행동 양상을 바꾼 것으로 묘사되고, 본문에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권합니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말놀이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표제와 본문을 함께 읽을 때 눈여겨볼 만한 언어적 특징입니다. 신약의 베드로전서 2:3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다는 표현을 다시 사용합니다.
좋은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의외의 대답
아들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르치겠다.시편 34:12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의 어조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증언하던 사람이 이제는 스승처럼 말합니다. ‘아들들아’라는 호칭은 잠언에서 지혜를 가르칠 때 자주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잠언 4:1에서도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가르침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시편 34편은 찬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지혜를 가르치는 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르침은 명령보다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삶을 바라며, 좋은 것을 보려고 날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냐?시편 34:13 · 본디새김
누가 좋은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 가운데 좋은 것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제시하는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네 혀가 악을 말하지 않게 지키고, 네 입술이 속이는 말을 하지 않게 지켜라.시편 34:14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찬양이 언제나 자신의 입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입에서 악과 속임이 나오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과 이웃에게 말하는 입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찬양하면서, 같은 입술로 다른 사람을 속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자신이 고백하는 하나님과 어긋나게 됩니다.
시편 34편이 말하는 경건은 예배의 말에서 일상의 말로 이어집니다.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행하여라. 평화를 찾고 그것을 뒤쫓아라.시편 34:15 · 본디새김
단순히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일에는 선을 행하는 일이 뒤따릅니다.
평화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찾아야 하고, 뒤쫓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뒤쫓다(רָדַ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누군가를 추격한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평화를 위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이야기와도 대조를 이룹니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그가 가르치는 사람들은 평화를 뒤쫓아야 합니다. 서로를 추격하는 인간의 세계에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를 새롭게 묻는 것입니다.
물론 평화를 뒤쫓으라는 말이 무조건 갈등을 피하거나 부당한 일에 침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악에서 돌아서고 선을 행하라는 명령과 함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악을 외면하는 평온함이 아니라, 선한 관계와 올바른 삶을 적극적으로 이루려는 태도입니다.
이로써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르치겠다는 12절의 약속에 구체적인 내용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만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말과 행동에서도 그 경외심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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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베드로전서 3:10–12은 시편 34:13–17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여 악한 말을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라고 권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눈과 귀와 얼굴
시편은 이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호와야훼가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의 눈은 의인들을 향하고, 그의 귀는 도와 달라는 그들의 외침을 향한다.시편 34:1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단순히 멀리서 세상을 관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의 처지를 살피시고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앞서 7절에서 한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었을 때 여호와야훼가 들으셨습니다. 그 개인적인 경험이 이제 의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으로 확대됩니다.
반면 다음 절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맞서 있다. 땅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끊어 버리려는 것이다.시편 34:17 · 본디새김
6절에서 여호와야훼를 바라본 사람들의 얼굴은 환해졌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야훼의 얼굴이 그들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곤경에 처한 의인에게는 도움과 보호가 되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 악을 심판하시는 임재가 됩니다.
‘땅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끊어 버리려는 것’이라는 표현은 엄중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과 기억은 한 사람이 후대에 어떻게 남는가와 깊이 관계되었습니다. 이름이 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더 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보다, 그가 세상에 남기려는 자리와 영향력이 사라지는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대조 뒤에 시인은 다시 의인들의 외침으로 돌아옵니다.
의인들이 외치자 여호와야훼가 듣고, 그들의 모든 곤경에서 그들을 건졌다.시편 34:18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있고, 영이 짓눌린 이들을 구원한다.시편 34:1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여호와야훼가 사람들을 보시고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합니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과 ‘영이 짓눌린 이들’은 서로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두 표현 모두 인간의 내면이 깊은 고통을 겪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가까이 계신 이유는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서지고 짓눌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언제나 강인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7:15에서도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면서, 동시에 영이 짓눌리고 낮아진 사람과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까이하심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만납니다. 시편 34편에서는 그 가까이하심이 추상적인 위로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 절을 함께 읽어야 비로소 분명해집니다.
의인에게도 재앙이 많다는 말
의인에게 재앙이 많으나, 여호와야훼는 그 모든 재앙에서 그를 건질 것이다.시편 34:20 · 본디새김
앞에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의인에게 재앙이 많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재앙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34편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누가 더 적게 고통받는가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앞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으며, 그 길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가입니다.
20절의 ‘재앙(רַע)’과 22절의 ‘재앙’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의 표현입니다. 20절에서는 의인이 많은 재앙을 겪지만 여호와야훼가 그를 건지십니다. 22절에서는 재앙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의인에게 재앙은 실제로 겪는 고통이지만, 악인에게는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됩니다.
그 사이에 놓인 21절은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의인의 뼈를 모두 지킨다. 그 가운데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시편 34:21 · 본디새김
뼈는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부분입니다. 뼈가 부러지는 것은 몸의 심각한 손상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철저히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강렬한 신체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의인이 실제로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절대 겪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 절이 의인의 많은 재앙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긴장을 지닌 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도 부정하지 않고, 여호와야훼가 그를 지키신다는 믿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편이 이 둘 사이의 모든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 어떤 의인은 오랫동안 고통받는지, 어떤 구원은 언제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답도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바탕으로, 의인의 삶이 재앙의 손에 최종적으로 맡겨진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의인의 길은 고난이 없는 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야훼를 찾는 길입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는 한 번 더 대조가 이루어집니다.
재앙이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의인을 미워하는 이들은 죄의 책임을 질 것이다.시편 34:22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자기 종들의 목숨을 속량한다. 그에게 피하는 이들은 누구도 죄의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시편 34:23 · 본디새김
22절과 23절의 ‘죄의 책임을 지다(אָשַׁם)’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악을 행하며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 책임을 지게 됩니다. 반면 여호와야훼께 피하는 사람들은 그 책임에서 벗어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시편의 관심은 인간의 완전무결함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의 중심에는 ‘속량하신다’는 하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속량은 어떤 사람을 묶고 있는 상태에서 풀어 내거나 되찾는 행위와 관련된 말입니다. 출애굽기 6:6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속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억압의 손에서 되찾아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종들의 ‘목숨’을 속량하십니다. 여기서 관심의 중심은 한 사람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절의 ‘그에게 피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9절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에게 피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에서는 그에게 피하는 사람들이 죄의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편은 시편 1편의 의인과 악인의 두 길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이 두 길의 차이를 선언한다면, 시편 34편은 그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 실제로 두려움과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또한 요한복음 19:36의 뼈가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시편 34:21과 연결되며, 출애굽기 12:46의 유월절 규정과도 관련됩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사용은 시편이 처음 노래된 상황과 구별되는 후대의 그리스도론적 읽기입니다. 신약의 독자들도 시편 34편의 말을 이어받았지만, 시편 자체가 그리는 장면은 먼저 하나님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
시편 34편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의 모습이 다시 보입니다.
그는 왕 앞에서 당당하게 승리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바꾸어야 했고, 결국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이 가난한 이가 부르짖자 여호와야훼가 듣고, 그의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끄러운 과거로 지워 버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두려운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의인에게 재앙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고난 가운데 여호와야훼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증언합니다.
시편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관계로 돌아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안전한 삶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피하여 자신의 삶을 맡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찬양은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보여 주는 노래가 아니라, 자신이 약할 때 누가 자신의 외침을 들으셨는지를 기억하는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말의 한가운데에는 시인이 잊지 못한 한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있고, 영이 짓눌린 이들을 구원한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없었던 사람,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야 했던 사람, 끝내 남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34편에서 그 사람이 발견한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약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약한 바로 그 자리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외침을 듣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