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3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세상을 세우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유

시편 33편은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래가 한창 진행되던 중, 시인은 왕과 군대와 군마를 이야기합니다. 「왕은 큰 군대로 구원받지 못하고, 용사는 큰 힘으로 건짐받지 못한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에서 뜻밖의 선언입니다.

왕에게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용사의 힘은 전투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었고, 말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인간이 의지하는 이런 힘들이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요?

시인은 그 답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아주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하늘이 만들어지고 바닷물이 모이는 장면입니다. 「그가 말하자 생겨났고, 그가 명령하자 굳게 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세우지만, 인간의 힘은 자신의 생명조차 확실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이 대조는 시편의 중심을 이룹니다.

그런데 시편은 하나님의 힘을 찬양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 영혼은 여호와야훼를 기다려 왔다」고 고백하는 ‘우리’라는 작은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창조 세계와 모든 민족을 이야기하던 시가 어떻게 한 공동체의 기다림으로 끝나게 되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며, 세상을 인애로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시편 33편은 그 두 사실을 하나로 묶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신실하시고, 모든 사람을 살피시는 분이 자기 백성의 생명을 돌보십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노래하고, 신뢰하며,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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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곧은 이들에게 어울린다

시편 33:1–3 본문 →

의인들아, 여호와야훼 안에서 환호하여라. 찬양은 곧은 이들에게 어울린다.시편 33:1 · 본디새김

시편 33편에는 별도의 표제가 없습니다. 첫 문장부터 곧장 찬양이 시작됩니다.

시편 32편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의 복을 이야기했습니다. 시편 33편은 곧바로 시야를 넓혀 창조 세계와 민족들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바라봅니다. 시편 33편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가 어떤 분의 손에 놓여 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왜 찬양이 ‘어울린다’고 하는가

‘어울린다(⁨נָאוֶ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알맞다, 아름답다, 적절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단순히 의인은 반드시 찬양해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찬양이 곧은 사람에게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곧은 이들’은 곧음과 올바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4절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 「여호와야훼의 말은 곧고」와 연결됩니다. 사람에게 사용된 ‘곧다’와 하나님의 말씀에 사용된 ‘곧다’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곧은 사람들에게 어울립니다.

물론 이것을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만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시편 32편에서 의인들의 찬양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려는 삶과 찬양이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입니다.

왜 새 노래를 부르는가

리라로 여호와야훼께 감사하여라. 열 줄 네벨로 그를 찬양하며 연주하여라. 그에게 새 노래를 불러라. 환호 소리와 함께 솜씨 좋게 연주하여라.시편 33:2–3 · 본디새김

시인은 목소리만 아니라 악기의 소리까지 동원해 찬양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솜씨 좋게 연주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뿐 아니라 실제적인 기술과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새 노래’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시편 98:1은 여호와야훼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새 노래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새 노래는 반드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곡을 작곡하라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새롭게 인정하고 그분의 영광을 기쁨으로 노래하는 태도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33편에서 노래할 새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4절부터 그 답이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33:1은 앞의 시편 32편 마지막 절과 매우 가깝습니다. 시편 32:11은 의인들과 마음이 곧은 사람들에게 기뻐하고 환호하라고 권합니다. 두 시편이 본래 하나의 작품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배열에서는 앞 시편의 마지막 권면이 다음 시편의 첫 노래로 이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리라와 네벨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현악기입니다. 네벨의 정확한 형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열 줄을 가진 악기로 묘사됩니다. 새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은 시편 96:1과 98:1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이 곧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시편 33:4–5 본문 →

여호와야훼의 말은 곧고, 그의 모든 일은 신실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의와 공정을 사랑한다. 땅은 여호와야훼의 인애로 가득하다.시편 33:4–5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말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무엇을 하시든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분이라고 먼저 고백한 뒤, 그분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 줍니다.

말과 일이 일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은 곧고, 그분의 일은 신실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신실함’은 믿을 만함과 성실함, 확고한 신뢰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은 옳은 말을 하면서도 그 말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의도를 선언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일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말과 일에 그런 분열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5절은 그 일관성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하나님은 의와 공정을 사랑하십니다. 의는 올바른 관계와 행동의 질서를, 공정은 바른 판단과 정의로운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압도적인 능력을 지니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의롭고 신실하게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애로 가득한 땅

여기서 ‘인애’는 사랑과 신실한 호의, 관계 안에서 지속되는 돌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인애를 그분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사랑과 연결해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인애가 온 땅에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시선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물론 이 선언을 세상에 고통이나 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편도 뒤에서 죽음과 기근의 위험을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고통이 없는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위협이 존재하는 세계도 하나님의 인애 밖에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기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땅이 여호와야훼의 인애로 가득하다고 선언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그 인애가 자기들 위에 있기를 요청합니다.

말씀으로 만들어진 하늘, 모아 놓으신 바다

시편 33:6–9 본문 →

하늘은 여호와야훼의 말로 만들어졌고, 하늘의 모든 군대는 그의 입김으로 만들어졌다.시편 33:6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이 곧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말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여 줍니다.

‘입김(⁨רוּ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람, 숨, 영을 의미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입을 나타내는 말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입김’이라는 번역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은 인간처럼 재료를 모으고 복잡한 도구를 사용해야만 무엇을 만드실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자 세상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늘의 군대는 무엇인가

‘하늘의 모든 군대’는 해와 달과 별 같은 천체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열왕기하 17:16), 하나님을 섬기는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열왕기상 22:19). 시편 33:6은 그 대상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체들로 이해하는 것이 창조의 문맥에 잘 어울리지만, 표현의 범위를 단정적으로 제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시인이 전하려는 사실은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어떤 존재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여호와야훼의 말씀과 입김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과 자연의 힘은 종종 신적 권능과 연결되어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하늘의 군대를 경배의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군대를 만드신 여호와야훼를 찬양합니다.

바닷물을 창고에 넣으시는 하나님

그는 바닷물을 무더기처럼 모으고, 깊은 물들을 창고들에 넣는다.시편 33:7 · 본디새김

고대의 창고는 곡식이나 귀중한 물건들을 모아 두고 관리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닷물조차 하나님께서 물건처럼 모아 두실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바다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깊은 물들을 창고들에 넣는다’는 표현도 실제로 바다가 어떤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지리적 설명이 아닙니다. 시인은 바다의 경계와 질서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비유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혼돈과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 물도 창조주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굳게 섰다

온 땅아,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여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아, 그를 무서워하여라. 그가 말하자 생겨났고, 그가 명령하자 굳게 섰기 때문이다.시편 33:8–9 · 본디새김

처음에는 의인들과 곧은 이들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 땅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창조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9절의 ‘굳게 섰다(⁨עָמַד⁩)’에 사용된 동사는 서다, 머물다, 굳게 지속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이루어진 세계가 굳게 섰습니다.

그런데 두 절 뒤에서 바로 같은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사용됩니다. 이 반복이 시편의 다음 장면을 열어 줍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무더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칸네드는 물이 한곳에 쌓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15:8에서도 물이 무더기처럼 서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한편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호스 아스콘, 곧 ‘가죽 부대처럼’이라는 뜻으로 옮깁니다. 이 경우 바닷물을 그릇이나 가죽 부대에 담는 듯한 이미지가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나 두 읽기는 공통된 방향을 가집니다. 인간에게는 한없이 거대하고 제어할 수 없어 보이는 물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으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9–10에서도 하나님이 물을 한곳에 모으시자 마른땅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질서 있게 창조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시편 33편은 그 창조주가 오늘도 인간의 삶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시편 33:10–12 본문 →

여호와야훼는 민족들의 계획을 무너뜨렸고, 백성들의 구상을 좌절시켰다. 여호와야훼의 계획은 영원히 굳게 서고, 그의 마음속 구상은 대대로 굳게 선다.시편 33:10–11 · 본디새김

민족들에게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도 계획이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구상이 있고, 하나님께도 마음속 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계획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굳게 섭니다.

그리고 11절의 ‘굳게 선다’는 9절과 같은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고 굳게 세웠듯이, 그분의 계획도 대대로 굳게 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세계와 하나님의 계획이 지속되는 역사는 같은 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계획은 모두 잘못된 것인가

시인은 인간이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언 15:22에서는 의논이 없으면 계획이 무너지지만 조언자가 많으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겨냥하는 것은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궁극적인 결과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민족들과 백성들의 계획이 언급된다는 사실은 정치적·군사적 영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동맹을 맺고 전쟁을 준비하며 나라의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나라의 힘과 전략도 하나님의 계획보다 궁극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군사적 계획이 언제나 실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승리했다고 해서 그 나라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근거도 아닙니다.

역사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권한이 인간의 계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백성은 어떤 복을 누리는가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하나님인 민족, 그가 자기 소유로 선택한 백성은 복되다.시편 33:1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언약적 정체성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신명기 7:6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소유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선택의 근거를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들이 복된 이유는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8절에서는 온 땅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13절부터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12절을 세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갑자기 특정 민족에게만 좁혀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백성과 관계를 맺으셨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계획’에 해당하는 에차와 ‘구상’에 해당하는 마하샤보트가 10절과 11절에 대응하여 반복됩니다. 시인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행동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계획’과 ‘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빚으신 분이 모든 일을 살피신다

시편 33:13–15 본문 →

여호와야훼는 하늘에서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을 보았다. 그는 자기 거처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를 눈여겨보았다.시편 33:13–14 · 본디새김

이 부분에서는 시선의 방향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왕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에게만 머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 선택하신 백성에게만 시선을 고정하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빚는 이, 그들의 모든 일을 헤아리는 이다.시편 33:15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동을 멀리서 관찰하시는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빚으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는 장면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각과 판단, 의지와 결정을 포함하는 인간 내면의 중심입니다.

모두의 마음이 같다는 뜻인가

15절의 히브리어에는 야하드(⁨יַחַד⁩), 곧 ‘함께’, ‘모두’를 나타낼 수 있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함께 빚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람 하나하나의 마음을 포괄하여 빚으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마음이나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마음과 행동도 하나님의 이해 밖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을 빚으신 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계획을 실행하면서도 그 결과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세우는 마음과 실제로 행하는 일을 모두 살피십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이 사실을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연결합니다. 왕은 큰 군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큰 군대도, 강한 말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시편 33:16–19 본문 →

왕은 큰 군대로 구원받지 못하고, 용사는 큰 힘으로 건짐받지 못한다. 구원을 얻는 데 말은 의지할 만하지 않고, 그 큰 힘으로도 구해 내지 못한다.시편 33:16–17 · 본디새김

왕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강력한 국가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용사는 전쟁에서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말은 특히 전차와 결합하여 군사적 우위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먼저 실제적인 위험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큰 군대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강한 용사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힘센 말도 모든 위험에서 사람을 건져 내지는 못합니다.

말은 왜 ‘의지할 만하지’ 않은가

17절의 ‘의지할 만하지 않다(⁨שֶׁקֶר⁩)’에 해당하는 말은 거짓이나 속임, 믿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말이라는 동물이 본질적으로 나쁘거나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이 사람을 반드시 구해 줄 것이라고 믿는 기대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 실제로 강력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만하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편 33편이 군대나 국방, 인간의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가진 절대적인 신뢰성입니다. 인간의 힘은 실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약속할 수 없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8절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시선으로 돌아갑니다.

보라, 여호와야훼의 눈은 누구를 향하는가

보라, 여호와야훼의 눈은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 그의 인애를 기다리는 이들을 향한다.시편 33:18 · 본디새김

13–15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라보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그분의 눈이 특별히 어떤 사람들을 향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그분을 무서워하여 멀리 달아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애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하늘을 말씀으로 만드시고, 깊은 물을 모으시며, 민족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실 수 있는 분 앞에서 사람이 경외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의와 공정을 사랑하시고 인애로 땅을 채우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분의 인애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군대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건지고, 기근 속에서 그들을 살려 두려는 것이다.시편 33:19 · 본디새김

군사력은 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전쟁만이 아닙니다.

기근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아무리 강한 군대와 말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영역을 보여 줍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굶거나 죽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약속을 끌어내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고난과 죽음을 겪는 이야기도 분명히 있습니다. 시편 33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그분의 돌보심에 달려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헤아리시는 눈이면서,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의 생명을 돌보시는 눈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직접 입을 엽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이 말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신명기 17:16의 왕에 관한 규정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왕이 말을 많이 늘리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시편 20:7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병거를 의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이야기하던 노래가 '우리'의 기도가 되다

시편 33:20–22 본문 →

우리 영혼은 여호와야훼를 기다려 왔다. 그는 우리의 도움이며 방패다.시편 33:20 · 본디새김

시편 33편의 마지막 세 절에서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영혼,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우리 마음, 우리의 신뢰처럼 ‘우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희’라는 말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합니다.

시인은 청중에게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정보를 들은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아직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분은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방패이십니다.

앞에서는 왕의 군대와 용사와 말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우리의 방패’로 등장하는 것은 군사적인 장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모든 위험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보호의 궁극적인 근거를 자신들이 소유한 힘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둡니다.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들

참으로 우리 마음은 그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해 왔기 때문이다.시편 33:21 · 본디새김

20절에서는 하나님을 기다려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다림과 기쁨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원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해 왔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인애로 땅을 채우시는 분, 하늘과 바다를 만드시고 인간의 계획보다 오래 지속되는 계획을 지니신 분에 관한 모든 고백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한다는 말 안에 모입니다. 그들은 막연한 낙관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찬양해 온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마지막에는 직접 하나님께 말한다

여호와야훼여, 저희가 당신을 기다린 대로 당신의 인애가 저희 위에 있게 해 주십시오.시편 33:2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대부분 하나님을 ‘그’라고 부르며 그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바뀝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5절에서는 이미 땅이 여호와야훼의 인애로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에 다시 인애를 구할까요?

땅은 인애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애를 구한다

하나님의 인애가 온 땅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애를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앞으로 어떤 위험을 겪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군대도, 용사의 힘도, 말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기근과 죽음이 실제적인 위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인애를 기다립니다.

여기서 ‘저희가 당신을 기다린 대로’라는 말은 자신들이 기다린 기간이나 노력만큼 보상해 달라는 요구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로(⁨אֲשֶׁר⁩)’로 옮긴 말은 ‘그와 같이’, ‘그에 따라’라는 연결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당신께 소망을 두었으니, 바로 그 인애가 우리 위에 있기를 바란다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얻을 자격이 생긴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그분의 인애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큰 세계를 향한 신앙고백이 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간구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

시편 33:1–22 본문 →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역사는 그분의 계획 아래 있으며, 사람은 그분의 시선 아래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인애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강하시다는 사실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힘이 자신을 향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며, 땅이 그분의 인애로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시편이 찬양에서 신뢰로, 신뢰에서 기다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시편 33편의 시작에는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리라와 네벨이 연주되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는 점점 더 넓은 세계를 보여 줍니다.

하늘이 만들어지고, 바닷물이 모이고, 깊은 물들이 창고에 놓입니다. 민족들은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용사는 자기 힘을 믿지만, 그 힘이 생명을 반드시 구하지는 못합니다.

그 모든 세계 위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편의 마지막에 작은 공동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세상을 움직일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주이시며 영원히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 자기들의 도움이자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노래는 조용한 간구로 바뀝니다.

그들은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과 기근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도 없고, 자신들이 바라는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자신들이 누구를 신뢰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말씀으로 굳게 세우신 하나님, 인간의 마음을 아시며 자기 백성을 인애로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그분께 자신들의 생명을 맡기며 마지막으로 청합니다. 「여호와야훼여, 저희가 당신을 기다린 대로 당신의 인애가 저희 위에 있게 해 주십시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