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9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부의 한계와 하나님의 속량
사람은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집을 사고, 땅을 사고, 다른 사람의 노동과 시간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위험에 대비할 수 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넓어집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땅에 남겨,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기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편 49편은 이 질문을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으로 끌고 갑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단순히 부자도 결국 죽는다는 교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누구도 값을 치를 수 없는 생명을 하나님은 속량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목숨을 스올의 손에서 속량할 것이다」라는 한 문장은 앞에서 쌓아 올린 논리를 뒤집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에게는 절망의 근거가 되지만, 시인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할 이유가 됩니다.
시편 49편의 핵심 질문은 누가 더 많은 재산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느냐입니다.
이 시편은 앞선 시온 찬양과도 분위기가 다릅니다. 시편 48편이 하나님이 지키시는 성을 바라보게 했다면, 49편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재산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시야도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넓어집니다. 이제 특정 공동체의 구원을 노래하는 대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들으라고 초청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들려줄 하나의 수수께끼
모든 민족들아, 이것을 들어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아, 귀를 기울여라. 평범한 이들도 지체 높은 이들도, 부자와 가난한 이가 함께.시편 49:2–3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시작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구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금부터 들려줄 지혜 앞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아무런 특권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시인이 다루려는 문제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의 묵상은 깨달음이다. 나는 잠언에 귀를 기울이고, 리라를 타며 내 수수께끼를 펼치겠다.시편 49:4–5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이 지혜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잠언에 귀를 기울이고」라고 덧붙입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과시하는 모습과 다릅니다. 자신도 먼저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들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래하려 합니다.
여기서 「잠언」은 비유와 격언을 포함하는 지혜의 표현을, 「수수께끼」는 쉽게 이해되지 않아 풀어내야 하는 어려운 말이나 수수께끼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펼치겠다는 것은 단순히 정답을 맞히는 놀이가 아닙니다. 누구나 보고 있는 현실 속에 숨어 있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죽는 것을 봅니다. 죽은 사람이 자기 재산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를 부러워하고, 부를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재산이 영원한 안전을 보장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도 삶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이 풀어내려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지식보다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시인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하려 합니다.
부자가 살 수 없는 단 하나의 것
시인은 이제 수수께끼의 출발점을 자신의 두려움에서 찾습니다.
재앙의 날들에 내가 왜 두려워하랴, 나를 속이는 자들의 죄악이 나를 에워쌀 때에?시편 49: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시인이 현실에서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에워싸는 악한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 있습니다.
「나를 속이는 자들」(עָקֵב)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발뒤꿈치와 관련된 낱말을 포함하고 있어, 자신을 뒤쫓거나 속이는 자들의 악으로 읽을 수 있고, 자신을 둘러싼 죄악을 다르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에 나오는 부를 의지하는 사람들과 연결해 자신을 속이는 이들의 죄악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해석이든 시인은 실제적인 위협 앞에서 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재산을 믿고, 넘치는 부를 자랑한다.시편 49:7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동사는 「믿고」와 「자랑한다」입니다. 그들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재산에 자신을 맡기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위대한 사람인지를 재산의 크기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이 가진 힘을 가장 결정적인 문제 앞에 세웁니다.
사람은 형제를 결코 속량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 그의 몸값을 낼 수도 없다, (그들의 목숨을 되찾을 값은 너무 비싸서,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그가 영원히 계속 살고, 구덩이를 보지 않도록.시편 49:8–10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사람이 가난해져 자기 땅을 팔았을 때 가까운 친족이 그것을 되살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레위기 25:25).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종이 된 사람을 친족이 속량할 수 있는 규정도 있습니다(레위기 25:47–49). 이런 제도에서 속량은 단순한 선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얽매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값을 치르는 행위입니다.
시편 49편은 이러한 속량의 언어를 생명의 문제로 옮깁니다. 8절의 「속량할」(פָּדָה)은 값을 치르고 되찾거나 속량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경제적 곤경에 빠진 형제를 위해 친족이 값을 치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놓인 형제를 영원히 살게 할 만큼의 값을 치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 까닭을 시인은 「그들의 목숨을 되찾을 값은 너무 비싸서,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지 아직 충분히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값을 치르기 위해 재산을 더 모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애초에 인간이 가진 재산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부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생명을 되찾는 일에서는 아무것도 치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통해 부자의 능력을 조롱하기보다, 인간이 가진 모든 재산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시인은 곧바로 그 가능성도 차단합니다.
집은 남고 이름은 남아도, 사람은 머물지 못한다
그는 지혜로운 이들이 죽고, 어리석은 자와 우둔한 자가 함께 멸망하며, 자기 재산을 다른 이들에게 남기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시편 49:11 · 본디새김
시인은 죽음을 부자나 악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벌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습니다.
시편이 지혜로운 사람을 칭찬한다고 해서 지혜가 죽음을 피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전도서 2:14–16도 바로 이 문제를 깊이 다룹니다.
시편 49편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합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남깁니다. 집은 그대로 있고, 땅도 남으며, 금과 은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부르던 사람은 더 이상 그것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오래 남기려 합니다.
그들의 속생각은 자기 집들이 영원하고, 자기 거처들이 대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땅들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시편 49:12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두 종류의 영속성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집과 거처가 대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땅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소유가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이름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속생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키르밤(קֶרֶב)입니다. 본디새김처럼 그들의 내면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으면, 시인은 그들이 속으로 품고 있는 영속성의 기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그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배열을 다르게 이해한 전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독법에서는 앞 절의 죽음과 이어져, 그들이 오래 머물게 될 집이 실은 무덤이라는 풍자가 만들어집니다.
두 독법 모두 문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디새김이 채택한 히브리어 독법에서는 자기 집과 이름을 통해 오래 남으려는 인간의 내면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집을 대대로 물려주거나 땅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이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자기 존재가 영원히 보장될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존귀 속에 머물지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시편 49:13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집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집을 소유한 사람은 존귀 속에 머물지 못합니다. 「머물지 못하며」(לוּן)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밤을 지내거나 머무는 것과 관련된 동사를 사용합니다.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는 표현도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인간에게 아무런 존엄이나 특별한 지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더라도 죽음이라는 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전도서 3:19–20의 인간과 짐승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무한한 존재로 착각하지 못하게 하는 관찰입니다.
시편은 이러한 착각이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그들의 길이다. 그들 뒤에 오는 이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셀라.시편 49:14 · 본디새김
왜 그럴까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하면, 뒤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성공의 비결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것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지만, 7절의 자기 재산을 자랑하는 모습과 14절의 후대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서로 연결됩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부자가 부를 의지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부를 신뢰하는 삶의 방식이 지혜로 여겨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일입니다.
처음에 시인이 모든 사람을 불러 지혜를 들으라고 한 이유도 여기서 드러납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기꺼이 따르는 성공의 말들이 있지만, 그 말들이 반드시 참된 지혜인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되었다
그들은 양 떼처럼 스올에 놓였다.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며, 아침에는 올곧은 이들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의 형체는 제 거처를 떠나 스올에서 닳아 없어질 것이다.시편 49:15 · 본디새김
이 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강렬한 장면입니다.
집과 땅을 가진 사람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자기 이름을 남긴 그들이 여기서는 양 떼처럼 묘사됩니다.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통제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양 떼의 목자는 누구일까요?
앞에서는 그들이 자기 재산을 믿었습니다. 재산이 자신을 보호하고 앞길을 열어 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을 이끌고 가는 것은 그 재산이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목자이시며, 그분이 자기 양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한쪽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지만, 여기서는 죽음이 재산을 의지하던 사람들을 스올로 이끌어 갑니다.
누구에게 자신을 맡기느냐에 따라, 같은 양 떼의 이미지도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5절에는 또 다른 반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침에는 올곧은 이들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며 그 관계가 뒤집히는 때를 말합니다. 「아침」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본문에서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지금 눈에 보이는 권력관계가 마지막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영원히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누리던 영화가 마지막 판결을 결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부자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죽는다면, 시인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시편 23편과의 대조가 두 시편을 의도적으로 짝지어 썼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시편집 안에서 목자의 이미지가 어떤 대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아침」은 현재의 불의가 끝나고 하나님의 의로운 질서가 드러나는 때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역전의 소망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한 표현만으로 부활의 시점이나 최후 심판의 구체적인 과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15절 후반부의 형체와 거처에 관한 히브리어 표현에는 문법적·어휘적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치를 수 없는 값을 하나님이 감당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목숨을 스올의 손에서 속량할 것이다. 그가 나를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셀라.시편 49:16 · 본디새김
시편 49편의 중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첫 단어 「그러나」가 앞서 말한 모든 장면을 뒤집습니다. 시인은 8절에서 사람이 형제를 속량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목숨을 되찾는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속량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8절에서 사람이 형제를 속량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사용된 동사와 같습니다.
사람은 속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량하실 것입니다.
스올의 손에서 속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모든 경우에 악인만 가는 형벌의 장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스올을 마치 사람을 붙잡는 손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그 손에서 자신의 목숨을 되찾아 주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인이 죽음의 위험에서 실제로 구출받을 것을 확신한다고 읽는 것입니다. 시편의 여러 탄식시에서 죽음이나 스올은 당장 자신에게 닥친 치명적인 위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 시인은 부자들이 자신을 위협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고 읽는 것입니다. 시인은 앞에서 사람이 영원히 살아 죽음의 구덩이를 보지 않도록 값을 치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49:8–10). 그리고 11절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조차 죽는다고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16절을 단지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으로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하나님의 속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도 이 가능성을 깊게 합니다. 시편 49편의 정확한 사후 세계관을 한 문장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명시적인 육체 부활의 묘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이 고백하는 신뢰는 분명합니다.
스올의 손이 자신을 붙잡을 수 있다 해도, 자신의 생명에 대한 마지막 권한이 스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죽음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힘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이 확신을 바탕으로 처음에 제기했던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데려갈」에 쓰인 히브리어 라카흐(לָקַח)는 취하거나 데려간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5:24에서는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할 때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시편 73:24에서도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을 이끄시고 마침내 데려가실 것을 고백할 때 이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시편 49편의 저자가 에녹과 동일한 경험을 하리라고 생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동사 자체가 반드시 죽음 이후의 특별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의 이끄심과 데려가심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호세아 13:14에도 스올과 죽음의 권세로부터 속량한다는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 구절은 문맥과 번역에 따라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죽음의 권세에 대해 하나님이 결정적인 권한을 가지신다는 주제에서는 시편 49편과 연결됩니다. 신약의 마가복음 10:45는 예수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속량의 대가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시편 49편이 예수의 죽음을 직접 예언하거나 특정한 속죄 방식을 설명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먼저 이 시편 자체가 말하는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속량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영화는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누군가 부자가 될 때, 그 집의 영화가 늘어날 때 두려워하지 마라.시편 49:17 · 본디새김
6절에서 시인은 「내가 왜 두려워하랴」라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제기된 질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질문을 통과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더 부유해지고, 그의 집안이 더 큰 영화를 누리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큰 힘을 가졌더라도 그 힘의 마지막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의 영화가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시편 49:18 · 본디새김
1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부자가 죽을 때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고」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이 두 절에는 같은 동사 라카흐가 쓰였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가십니다.
18절에서는 부자가 죽을 때 자기 재산을 가져가지 못합니다.
부자는 평생 무언가를 얻고 소유하는 일에 능숙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가 가진 것들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재산을 끝까지 붙잡을 수 없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잡아 주실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이것이 시편이 말하는 안전의 차이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네가 너 자신에게 잘해 주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한다 해도,시편 49:19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부자의 자기 평가와 사회의 평가를 함께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을 축복합니다. 자신이 성공했고, 잘살고 있으며,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도 그를 칭찬합니다.
이것은 앞서 14절에서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이 부자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가진 확신은 단지 개인적인 착각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그의 삶을 성공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정은 자신의 삶이 옳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시인이 부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칭찬이 그에게 무엇을 보장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목숨은 그의 조상들의 세대에게로 갈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시편 49:20 · 본디새김
이 절은 히브리어에서 주어의 연결이 다소 까다롭습니다. 부자를 가리키는 표현에서 그의 목숨이나 존재를 가리키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그의 목숨」으로 옮겨 앞선 흐름과 연결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아져도 앞서 죽은 조상들과 같은 길을 간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10절에서는 사람이 영원히 살면서 구덩이를 보지 않도록 값을 치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죽은 자들이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구덩이와 빛은 생명과 죽음의 대조를 이루는 이미지입니다.
시편은 부자가 누렸던 영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가 실제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 부유하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의 마지막 운명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지혜입니다.
상대방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존귀 속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존귀 속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시편 49:21 · 본디새김
마지막 절은 13절의 「그러나 사람은 존귀 속에 머물지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21절에서는 「머물지 못하며」가 「깨닫지 못하는」으로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두 표현은 구별됩니다. 13절의 표현은 머무르거나 밤을 지낸다는 의미와 관계되고, 21절의 표현은 이해하거나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가 시편의 결론을 결정합니다.
13절에서는 인간의 한계가 강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나 21절에서는 인간의 깨달음이 강조됩니다. 사람은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시편이 단순히 죽음에 관한 비관적인 노래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어리석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가진 재산과 존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자신의 입이 지혜를 말하고, 마음의 묵상이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49:4). 이제 마지막에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전체가 지혜와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도 지혜로운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참된 지혜는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그 한계 너머에서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이 보여주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시편 49편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운명을 단순히 뒤집는 노래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피하거나 하나님의 속량을 자동으로 보장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부유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부자가 악인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시편이 비판하는 것은 재산 자체보다 재산을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참된 지혜는 재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앞에는 이미 깨달은 사람의 고백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비밀을 찾아낸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값을 치르더라도 되찾을 수 없는 생명을 하나님은 속량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은 자신을 에워싼 위협 앞에서 「재앙의 날들에 내가 왜 두려워하랴」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한가운데서 「그러나 하나님은 내 목숨을 스올의 손에서 속량할 것이다」라는 자신의 대답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자신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는 재산의 한계를 보았고,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여 시편은 모든 민족과 모든 계층의 사람을 불러 모았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높은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이 지혜 앞에 서 있습니다. 각자가 가진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목숨을 되찾을 값을 하나님께 낼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시인은 더 이상 부자의 영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재산을 끝까지 가져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데려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