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0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나님은 왜 예배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이 온 땅을 불러 모으십니다. 하늘과 땅이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고, 불과 폭풍이 그분의 앞길을 둘러쌉니다. 이제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는 대상은 이방 민족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왕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그분의 율법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이 늘 자기 앞에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규정과 언약을 입에 올릴 만큼 종교적인 언어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규정들을 읊으며, 내 언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편 50편이 던지는 질문은 제사를 얼마나 드렸느냐, 율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까?
시편 49편은 인간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 생명의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50편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애초에 자신은 인간의 물질적인 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50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조차 하나님을 오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침묵」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침묵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침묵이 깨지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시온에서 온 세상을 법정으로 부르시다
아삽의 시편.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말하고 땅을 불렀다,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시편 50:1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첫머리의 하나님의 호칭은 히브리어로 엘(אֵל) 엘로힘(אֱלֹהִים) 여호와야훼(יְהֹוָה)입니다. 본디새김처럼 앞의 두 낱말을 연결하여 「신들의 하나님」으로 읽을 수 있고, 「엘, 하나님, 여호와야훼」처럼 세 호칭을 나란히 놓은 장엄한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이 지니신 최고의 권위가 강조됩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라는 표현은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을 부르신다고 해서 이제 모든 민족의 죄를 하나씩 심판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 이르면 그 목적이 밝혀집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려고 위에 있는 하늘을, 또 땅을 부를 것이다.시편 50:4 · 본디새김
온 세상이 부름받았지만, 실제로 심판대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언약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30:19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제시하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종교적인 취향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와 의무가 정해진 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름다움이 완전한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했다.시편 50:2 · 본디새김
시편 48편에서 시온은 위대한 왕의 성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시온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계신다는 사실은 그곳에 속한 백성에게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도 하지만, 그들이 언약을 저버릴 때 직접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에서는 오히려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기를,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이 그의 앞에서 삼키고, 그의 둘레에는 폭풍이 몹시 몰아친다.시편 50:3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19:16–18에서 여호와야훼가 시나이산에 강림하실 때의 천둥과 번개, 짙은 구름과 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나이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시온에서는 그 언약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나타나십니다.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하나님께 직접 명령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본디새김이 옮긴 것처럼 하나님이 오시고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기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직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받을 사람들을 모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나의 신실한 이들을 내게 모아라, 제물로 내 언약을 맺은 이들을.」시편 50:5 · 본디새김
「나의 신실한 이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인애와 언약 관계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라는 사실이 먼저 강조됩니다.
제물은 단순히 신에게 선물을 보내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첫 장면은 특별한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제물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제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심판을 피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말씀 앞에 서야 할 이유가 됩니다.
하늘이 그의 의로움을 알렸다. 하나님이 바로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셀라.시편 50:6 · 본디새김
하나님은 단지 재판에 참여하시는 증인이 아닙니다. 사건의 결론을 내리시는 심판자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32:1에서도 모세는 하늘과 땅을 향해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3절의 불과 폭풍을 시나이 사건의 직접적인 재현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현을 불과 폭풍으로 묘사하는 구약의 전통이 두 장면을 연결해 줍니다. 5절의 「제물로 내 언약을 맺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3–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와 맺은 언약을 확증합니다. 히브리어로 언약을 맺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언약을 「자른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시편 50:5도 같은 언약 체결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부족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거슬러 증언하겠다. 나는 하나님, 네 하나님이다.」시편 50: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직접 부르십니다.
「내 백성아」와 「네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낯선 집단이기 때문에 고발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에 고발받습니다.
「나는 하나님, 네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은 십계명의 서두인 출애굽기 20:2와 연결됩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임을 밝히신 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시편 50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관계를 확인하십니다. 그런 다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책망은 예상과 다릅니다.
「내가 너를 꾸짖는 것은 네 제물 때문이 아니다. 네 번제물은 늘 내 앞에 있다.」시편 50:8 · 본디새김
이 시편을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지 않아 책망받는 이야기로 읽으면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제사 제도 자체를 폐지하시거나 모든 제물을 거절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14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감사의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제사의 존재 여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네 집에서 수송아지를, 네 우리에서 숫염소들을 가져가지 않겠다.」시편 50: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고대의 제의에서 신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치는 행위는 흔히 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거나 신의 호의를 얻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제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생존이나 필요를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시편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미 소유하고 계시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배고프지 않으시다
「숲의 모든 짐승이 내 것이며, 천 개의 산에 있는 가축들도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산의 모든 새를 알고, 들에서 움직이는 것들도 내게 있다.」시편 50:10–1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축 우리에서 시선을 온 세상으로 돌리십니다.
숲의 짐승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산의 새들에 대해서는 「나는 산의 모든 새를 알고」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소유하고 계신다는 말에서, 모든 생명체를 알고 계신다는 표현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차갑고 추상적인 소유권의 문제로만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수송아지 한 마리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제야 필요한 무엇을 얻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수송아지도, 그것이 태어나고 자란 땅도, 그 땅에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도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더라도 네게 말하지 않겠다. 세상과 그 안을 채우는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50:12 · 본디새김
하나님이 배고프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로 인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드러내는 가정적인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무엇인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그것을 요청하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센 황소들의 살을 먹으며, 숫염소들의 피를 마시겠느냐?」시편 50:13 · 본디새김
제사의 가장 눈에 보이는 부분은 동물을 잡고, 그 피를 다루고, 제물을 불에 태우는 행위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제사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제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물의 주인이 원래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조금 더 깊이
「천 개의 산」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천 개의 산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제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에게 감사를 제물로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네 서원을 이행하여라.」시편 50:14 · 본디새김
하나님은 제물을 바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다(תּוֹדָה)입니다. 이 낱말은 감사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감사의 제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레위기 7:11–15에는 화목제 가운데 감사의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규정이 나옵니다. 그 제사는 단순히 마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일이 아니라, 실제 제의 행위로 표현되는 감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50:14를 읽을 때 외적인 제사는 필요 없고 마음의 감사만 중요하다는 식으로 둘을 지나치게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제물은 하나님이 배고프시기 때문에 공급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대한 신실한 응답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어서 「네 서원을 이행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서원하고, 그분이 구원하신 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일이 구약의 여러 본문에 나타납니다(민수기 30:2; 시편 66:13–14).
그런데 시편은 감사와 서원을 이행하라는 명령을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으로 연결합니다.
「고난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져 내겠고,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시편 50:15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 내십니다.
건짐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이 관계는 제물을 주고 복을 사는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생명을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인간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도움을 구하며, 구원받은 뒤에 감사로 응답합니다. 마지막의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는 건짐을 받은 뒤에 뒤따르는 결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구원을 구매하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인간에게서 얻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필요할 때 그분을 부르고,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 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누가 근본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존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말씀을 마치지 않으십니다.
지금까지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의 하나님 이해를 바로잡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올리면서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언약을 입에 올리지만, 말씀은 뒤로 내던지는 사람들
그러나 악한 자에게 하나님이 말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규정들을 읊으며, 내 언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시편 50:16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은 두 번째 고발을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내 백성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악한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악한 자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으로 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규정과 언약을 입에 올릴 만큼 종교적인 언어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사람의 실제 삶이 그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너는 훈계를 미워했고, 내 말을 네 뒤로 내던졌다.」시편 50:17 · 본디새김
16절과 17절의 대조가 매우 날카롭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입에 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뒤로 내던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말씀을 자기 삶에서 멀리 밀어낸 것입니다. 「내던졌다」는 표현은 단순히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보다 훨씬 적극적인 거부를 나타냅니다. 그는 말씀을 몰라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알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도록 허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앞부분의 제물 문제보다 더 깊은 모순을 드러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처럼 오해할 수 있다면, 율법을 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유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의 권위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잘못일까요? 하나님은 추상적인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왜 형제에게 한 말을 문제 삼으시는가?
「너는 도둑을 보면 그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네 몫은 간음하는 자들과 함께 있다.」시편 50:18 · 본디새김
「도둑을 보면 그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라는 표현은 단지 우연히 나쁜 사람을 만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일을 기꺼워하고, 그의 행동에 동조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십계명의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20:14–15). 그러나 시편은 직접 범죄를 저질렀는지만을 묻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어떤 관계에 두고 있는지도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부터는 초점이 달라집니다.
「너는 네 입을 악에 풀어 놓았고, 네 혀는 속임수를 엮는다.」시편 50:19 · 본디새김
앞에서는 도둑과 간음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악한 자 자신의 입과 혀가 등장합니다. 「입을 악에 풀어 놓았다」는 표현은 말이 마치 제어되지 않은 것처럼 악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네 혀는 속임수를 엮는다」고 말합니다. 속임수를 엮는다는 표현에는 의도적으로 거짓을 구성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단지 실수로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말을 조직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말을 가볍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말은 사람의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속이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거슬러 말하고, 네 어머니의 아들에게 허물을 씌운다.」시편 50:20 · 본디새김
그가 비방하는 대상은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네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형제라는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강조합니다.
왜 하나님은 여기서 형제를 특별히 언급하실까요? 앞에서는 하나님이 「내 백성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언약에 속한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된 말을 하고 허물을 씌우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거짓과 비방을 일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약의 문제가 단순한 제의적 의무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이웃과 살아가야 하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해치는 행동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올리면서 형제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말씀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 50편은 그 문제를 특별히 말의 영역에서 보여줍니다. 입으로 언약을 말하면서 같은 입으로 형제를 비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종교성이 빠질 수 있는 깊은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말하는지와, 그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모든 행동 뒤에 숨어 있던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11–17에서도 하나님은 많은 제물과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배우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5:21–24에서도 종교적인 절기와 제물의 문제를 공의와 정의의 부재와 연결합니다. 이 본문들은 제의가 불필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동의로 착각하다
「네가 이런 일을 했는데도 나는 침묵했다. 너는 내가 틀림없이 너와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꾸짖고, 이 일들을 네 눈앞에 차례로 펼쳐 놓겠다.」시편 50:21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을 모르신다고 생각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입에 올리고, 언약 백성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도둑들과 어울리고, 속임수를 말하고, 형제를 비방해도 즉각적인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맞추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도 중요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기 모습을 하나님께 투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문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50편이 직접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사상적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자기 악행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제 3절의 「우리 하나님이 오기를,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가 다시 떠오릅니다. 시편의 처음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침묵하고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집니다.
「차례로 펼쳐 놓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죄인의 행동들을 그의 눈앞에 정리하여 제시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그 일들을 드러내실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피할 수 없이 보게 될 것입니다.
시편의 처음에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불린 이유가 이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심판이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동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깨진다는 사실은 심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바로 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찢으시는 분과 건져 내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잊는 자들아, 부디 이것을 깨달아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찢어 버릴 것이며, 건져 낼 자가 없을 것이다.」시편 50:22 · 본디새김
하나님은 지금까지 책망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을 잊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에는 앞에서 드러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규정들을 읊었습니다. 언약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과 규정을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는 것은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말을 알고 있었지만,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잊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디 이것을 깨달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그들에게 깨달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고, 그 길에서 돌아설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편 앞부분의 약속이 다시 떠오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건져 내겠고」라고 건져 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하나님이 찢으실 때 아무도 건져 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구절은 같은 하나님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을 다른 누군가가 막거나 무효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분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심판과 분리해서 이해하거나,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인애와 무관한 폭력으로 이해하는 일을 경계하게 합니다.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발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깨달으라고 부르시며, 마지막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이는 나를 영화롭게 한다. 길을 정하는 이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시편 50:23 · 본디새김
시편은 여기서 14절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는 처음부터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감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길을 정하는 이」가 등장합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삼 데레크(שׂוּם)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길을 놓거나 정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문법적으로 압축되어 있어, 자신의 길을 바르게 정돈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기도 하고, 길을 마련하는 행위에 더 무게를 두어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전체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아무 길이나 선택한다는 뜻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뒤로 내던지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길을 정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내던지는 대신,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제물과,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 삶이 마지막 절에서 만납니다. 이는 제사의 진정성과 삶의 순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시편 전체의 메시지를 완성합니다.
마지막에도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사하고, 자신의 길을 바로잡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행하시고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시편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사고팔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예배
시편 50편은 두 종류의 잘못된 예배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무엇인가 제공해야 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행동을 묵인하거나 승인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두 문제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오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부족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깨달으라고 부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시온에서 빛을 발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앞에서는 불이 삼키고, 둘레에서는 폭풍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하늘과 땅이 부름받았고, 언약 백성들이 그 앞에 모였습니다.
시편의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시고 침묵하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불과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찾으시는 것은 자신을 먹여 살릴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부르며, 감사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이 깨뜨리시는 것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인간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