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0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나님은 왜 예배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이 온 땅을 불러 모으십니다. 하늘과 땅이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고, 불과 폭풍이 그분의 앞길을 둘러쌉니다. 이제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는 대상은 다른 민족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왕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그분의 법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꾸지람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이 늘 자기 앞에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가 정한 법을 말하며 내 언약을 입에 올리느냐?」(16절) 하고 물으십니다.
시편 50편이 던지는 질문은 제사를 얼마나 드렸느냐,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까?
시편 49편은 인간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 생명의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50편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애초에 자신은 인간이 물질을 공급해 주어야 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50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조차 하나님을 오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잠잠히」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잠잠히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침묵이 깨지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시온에서 온 세상을 법정으로 부르시다
아삽의 시입니다. 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시고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땅을 부르셨다.시편 50:1 · 두루새김
시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첫머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말은 세 요소가 연달아 나오는 형태입니다. 두루새김처럼 앞의 두 낱말을 연결하여 「신들의 하나님」으로 읽을 수 있고, 「엘, 하나님, 여호와야훼」처럼 세 호칭을 나란히 놓은 장엄한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이 지니신 최고의 권위가 강조됩니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라는 표현은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을 부르신다고 해서 이제 모든 민족의 죄를 하나씩 심판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 이르면 그 목적이 밝혀집니다.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위의 하늘과 땅을 부르시리라.시편 50:4 · 두루새김
온 세상이 부름받았지만, 실제로 심판대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의 언약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30:19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제시하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종교적인 취향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와 의무가 정해진 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다.시편 50:2 · 두루새김
시편 48편에서 시온은 위대한 왕의 성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시온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계신다는 사실은 그곳에 속한 백성에게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도 하지만, 그들이 언약을 저버릴 때 직접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에서는 오히려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시기를, 잠잠히 계시지 않으시기를. 불이 그분 앞에서 집어삼키고 그분 둘레에는 폭풍이 거세게 몰아친다.시편 50:3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19:16–18에서 하나님이 시나이산에 내려오실 때의 천둥과 번개, 짙은 구름과 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나이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시온에서는 그 언약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나타나십니다.
왜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직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받을 사람들을 모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물을 바쳐 나와 언약을 맺은 이들, 내게 충실한 이들을 내게 모아라.」시편 50:5 · 두루새김
「나에게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언약 관계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제물을 바쳐 나와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3–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첫 장면은 특별한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바쳐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제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심판을 피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말씀 앞에 서야 할 이유가 됩니다.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리라. 참으로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 셀라.시편 50:6 · 두루새김
하나님은 단지 재판에 참여하시는 증인이 아닙니다. 사건의 결론을 내리시는 심판자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32:1에서도 모세는 하늘과 땅을 향해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3절을 시나이 사건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을 불과 폭풍으로 묘사하는 구약의 전통이 두 장면을 연결해 줍니다. 3절은 하나님께 직접 명령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이 오시고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5절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언약을 「자른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제물은 단순히 신에게 선물을 보내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부족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거슬러 증언하겠다. 나는 하나님, 네 하나님이다.」시편 50: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직접 부르십니다. 「내 백성아」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낯선 집단이기 때문에 고발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에 고발받습니다.
특히 「나는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은 십계명의 첫머리인 출애굽기 20:2와 연결됩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임을 밝히신 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시편 50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관계를 확인하십니다. 그런 다음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꾸지람은 예상과 다릅니다.
「네 제물 때문에 너를 꾸짖지는 않는다. 네 번제물은 늘 내 앞에 있다.」시편 50:8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번제물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지 않아 꾸지람을 듣는 이야기로 읽으면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제사 제도 자체를 없애시거나 모든 제물을 거절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14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네 집에서 수송아지도, 네 우리에서 숫염소들도 가져가지 않겠다.」시편 50:9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고대의 종교 의식에서 신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치는 행위는 흔히 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거나 신의 호의를 얻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살아가시는 데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배고프지 않으시다
「참으로 숲의 모든 짐승이 내 것이고, 천 개의 산에 있는 가축들도 내 것이다.」 「나는 산의 모든 새를 알고 들에서 움직이는 것들도 내게 속해 있다.」시편 50:10–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축 우리에서 시선을 온 세상으로 돌리십니다. 「천 개의 산」은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숲의 짐승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산의 새들에 대해서는 「나는 산의 모든 새를 알고」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소유하고 계신다는 말에서, 모든 생명체를 알고 계신다는 표현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수송아지 한 마리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제야 필요한 무엇을 얻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수송아지도, 그것이 태어나고 자란 땅도, 그 땅에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도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배고파도 네게 말하지 않겠다. 참으로 세상도, 그 안에 가득한 것도 모두 내 것이다.」시편 50:12 · 두루새김
하나님이 배고프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로 인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알맞지 않은지를 드러내는 가정적인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무엇인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그것을 요청하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센 황소들의 살을 먹겠느냐? 숫염소들의 피를 마시겠느냐?」시편 50:13 · 두루새김
제사의 가장 눈에 보이는 부분은 동물을 잡고, 그 피를 다루고, 제물을 불에 태우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제물을 실제 음식처럼 드시거나 마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제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물의 주인이 원래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께 감사를 제물로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맹세한 약속을 지켜라.」시편 50:14 · 두루새김
하나님은 제물을 바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다(תּוֹדָה)입니다. 이 낱말은 감사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감사의 제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레위기 7:11–15에는 화목제 가운데 감사의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규정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편 50:14를 읽을 때 겉으로 드리는 제사는 필요 없고 마음의 감사만 중요하다는 식으로 둘을 지나치게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제물은 하나님이 배고프시기 때문에 공급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대한 충실한 응답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어서 「네가 맹세한 약속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약속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약속하고, 그분이 구원하신 후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이 구약의 여러 본문에 나타납니다(민수기 30:2; 시편 66:13–14).
「괴로운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져 내리니 너는 나를 높이리라.」시편 50:15 · 두루새김
인간이 고난을 겪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 내십니다.
건짐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입니다.
이 관계는 제물을 주고 복을 사는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구원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인간에게서 얻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필요할 때 그분을 부르고,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 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말씀을 마치지 않으십니다.
언약을 입에 올리지만, 말씀은 뒤로 내던지는 사람들
그러나 악한 이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법을 말하고 내 언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시편 50:16 · 두루새김
여기서 시편은 두 번째 고발을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내 백성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악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악한 사람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다른 민족의 사람으로 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언약을 입에 올릴 만큼 종교적인 말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사람의 실제 삶이 그 말씀과 어긋나기 때문에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너는 훈계를 미워했고 내 말을 등 뒤로 던져 버렸다.」시편 50:17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입에 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은 자기 등 뒤로 내던집니다.
「내던졌다」는 단순히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보다 훨씬 적극적인 거부를 나타냅니다. 그는 말씀을 몰라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알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도록 허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야 하는 존재처럼 오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법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유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의 권위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잘못일까요? 하나님은 막연한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왜 형제에게 한 말을 문제 삼으시는가?
「도둑을 보면 너는 그와 어울려 즐거워했고 간음하는 이들과 한패였다.」시편 50:18 · 두루새김
「도둑을 보면 그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라는 표현은 단지 우연히 나쁜 사람을 만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일을 기꺼워하고, 그의 행동에 뜻을 같이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십계명의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20:14–15).
그러나 시편은 직접 범죄를 저질렀는지만을 묻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어떤 관계에 두고 있는지도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부터는 초점이 달라집니다.
「너는 네 입을 악에 풀어 놓고 네 혀는 속임수를 엮는다.」시편 50:19 · 두루새김
「입으로 악한 말을 쏟아 놓고」라는 표현은 악한 말이 마치 제어되지 않은 것처럼 입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속이는 말을 엮는다는 표현에는 일부러 거짓을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단지 실수로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말을 짜 맞추는 모습입니다.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헐뜯고 네 어머니의 아들에게 허물을 씌운다.」시편 50:20 · 두루새김
그가 헐뜯는 대상은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는 구체적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여기서 형제를 특별히 언급하실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거짓말과 헐뜯는 말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이웃과 살아가야 하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해치는 행동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입으로 언약을 말하면서 같은 입으로 형제를 헐뜯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종교생활이 빠질 수 있는 깊은 모순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11–17에서도 하나님은 많은 제물과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배우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5:21–24에서도 종교적인 절기와 제물의 문제를 공의와 정의가 없는 삶과 연결합니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50편은 그 문제를 특별히 말의 영역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동의로 착각하다
「네가 이런 일을 했는데도 나는 잠잠했다. 너는 내가 너와 똑같다고 여겼다. 내가 너를 꾸짖고 이 일들을 네 눈앞에 차례로 펼쳐 놓으리라.」시편 50:21 · 두루새김
하나님이 악한 행동을 보시고도 잠잠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하나님도 자신과 같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입에 올리고, 언약 백성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도둑들과 어울리고, 속이는 말을 하고, 형제를 헐뜯어도 즉각적인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맞추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도 중요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기 모습을 하나님께 덧씌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문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50편이 직접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의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자기 악행에 대한 동의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시편의 처음에는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3절) 하고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잠잠히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집니다.
「차례로 펼쳐 놓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죄인의 행동들을 그의 눈앞에 정리하여 보여 주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그 일들을 드러내실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피할 수 없이 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동의가 아닙니다.
찢으시는 분과 건져 내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잊은 자들아, 부디 이것을 깨달아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찢어 버리고 건져 줄 이도 없으리라.」시편 50:22 · 두루새김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말했습니다. 언약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과 법을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는 것은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말을 알고 있었지만,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잊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디 이것을 깨달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그들에게 깨달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고, 그 길에서 돌아설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건져 내겠고」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하나님이 찢어 버리실 때 구해 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겪는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을 다른 누군가가 막거나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분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심판과 분리해서 이해하거나,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무관한 폭력으로 이해하는 일을 경계하게 합니다.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이는 나를 높인다. 길을 바로잡는 이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시편 50:23 · 두루새김
「감사를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라는 14절의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감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길을 바로잡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바르게 정돈하는 사람으로도, 길을 마련하는 행위에 무게를 두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을 자기 등 뒤로 내던지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 뒤로 내던지는 대신,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감사의 제물과, 자신의 길을 바로잡는 삶이 마지막 절에서 만납니다.
마지막에도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사고팔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삶의 길을 바로잡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삼 데레크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길을 놓거나 정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짧게 줄여져 있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길을 정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가운데 자신의 삶의 길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시편 전체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아무 길이나 선택한다는 뜻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온에서 들려온 마지막 말씀
시편 50편은 두 종류의 잘못된 예배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마치 그분이 인간의 공급을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예배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올리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 말씀의 권위를 거부하는 예배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의존하신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이 자기와 같으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부족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지도 않으십니다.
시편 50편은 하나님께 많이 드렸다는 사실이나 말씀을 많이 안다는 사실로 그런 확신을 너무 쉽게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완전해진 뒤에야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깨달으라고 부르십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시온에서 빛을 비추시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앞에는 집어삼키는 불길이 있었고, 둘레에서는 거센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하늘과 땅이 부름받았고, 언약 백성들이 그 앞에 모였습니다.
시편의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시고 잠잠히 계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불과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찾으시는 것은 자신을 먹여 살릴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부르며, 감사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이 깨뜨리시는 것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인간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