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1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용서를 넘어 새로운 마음을 구하다

한 왕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건을 감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찾아와 그가 저지른 일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회개의 기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등장합니다.

「주님께, 오직 주님께 제가 죄를 지었고」(6절).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저지른 일이 있는데, 어떻게 오직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기면 시편 51편의 회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아름다운 기도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악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시인은 처음에는 죄를 지워 달라고 합니다. 씻어 달라고 하고, 깨끗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한가운데에 이르면 전혀 다른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제게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주십시오」(12절). 죄를 없애 달라는 간청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달라는 간청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왜 죄를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씻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 주시기를 구할까요?

시편 51편이 보여주는 회개는 잘못된 행동의 흔적을 지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을 낳은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기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시편의 움직임을 따라가면 죄의 고백, 하나님의 용서, 인간의 변화, 공동체의 회복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1051편 본문 읽기 →

다윗의 죄를 폭로한 것은 그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시편 51:1–2 본문 →

시편의 표제는 이 기도를 한 사건과 연결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를 찾아왔을 때의 시입니다.시편 51:2 · 두루새김

다윗은 왕궁에서 밧세바를 보고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이후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전쟁터에 있던 우리야를 불러들여 사건을 감추려 했습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다윗은 군대 지휘관 요압에게 명령을 보내 우리야를 위험한 전투의 앞줄에 세우고 물러나게 했습니다. 결국 우리야는 전투에서 죽었습니다(사무엘하 11:14–17). 다윗은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책임을 다윗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사무엘하 12:9).

나탄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어린 암양을 빼앗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사람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자 나탄은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밝혔습니다(사무엘하 12:1–7).

다윗은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나탄의 이야기는 다윗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던 도덕적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았습니다.

회개가 시작된 자리는 다윗이 새로운 도덕적 지식을 얻은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운 순간이었습니다.

시편의 화자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고 반복합니다. 그런데 사무엘하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 그 앎은 처음부터 스스로 얻은 분명한 앎이 아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찾아와 감추고 있던 죄를 드러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표제가 제시하는 역사적 배경과 시편의 실제 집필 시점을 같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표제는 이 기도를 다윗의 사건과 연결하여 읽도록 하지만, 본문 자체만으로 누가 언제 최종 형태를 기록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다

시편 51:3–5 본문 →

하나님,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당신의 넘치는 자비로 내 반역을 지워 주십시오.시편 51:3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에게 용서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지도 않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원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변명도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크나큰 자비로」라는 표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서 보여주시는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비」는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를 가리킵니다.

이 두 표현은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은혜가 풍성하시고 사랑과 신실함이 많으신 분으로 자신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선언에는 죄악을 용서하시면서도 악을 무조건 문제 삼지 않고 지나가시는 분은 아니라는 내용도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신, 자신을 판단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의지합니다.

이어서 죄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내 잘못을 씻고 또 씻어 주시고 내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나는 내가 저지른 반역을 압니다. 내 죄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습니다.시편 51:4–5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반역, 죄악, 죄를 가리키는 서로 다른 낱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여러 표현을 겹쳐 자신의 죄를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내놓는 효과가 중요합니다.

죄를 없애 달라는 간청도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지워 주십시오」는 기록된 것을 지워 없애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씻어 주시고」(⁨כָּבַס⁩)는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는 것과 관련된 동사를 사용합니다.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는 부정한 상태에서 깨끗하게 되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시인은 죄를 단순히 한 번 잘못된 행동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워야 할 책임이면서, 씻어야 할 더러움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시인이 자기 죄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아는 것과 그 잘못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제가 지우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지워 달라고 합니다. 회개는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인간의 응답이지만, 그 죄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세 낱말을 「주님을 거역한 제 죄들」, 「제 잘못」, 「제 죄」로 풀어 옮겼습니다. 「주님을 거역한 제 죄들」은 권위와 관계를 거스르는 잘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제 잘못」은 죄와 그로 인한 죄책을 함께 가리킬 수 있으며, 「제 죄」는 잘못과 죄의 상태를 폭넓게 나타냅니다. 이 낱말들이 언제나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라는 불편한 고백

시편 51:6 본문 →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나는 죄를 지었고 당신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실 때 당신은 옳으시고 판결하실 때 흠이 없으십니다.시편 51:6 · 두루새김

표제가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가리키는 이상, 다윗이 하나님에게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문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야는 죽었습니다. 밧세바는 왕의 권력 아래에서 그의 요구를 받았고, 남편을 잃었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를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사무엘하 11–12장이 분명히 밝히는 사건의 책임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죄가 결국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사람들을 판단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왕보다 높은 심판자가 계셨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권력을 이용해 일을 감출 수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악한 행동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라는 표현은 사무엘하 11:27과 12:9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내리신 판단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고백의 후반부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옳으시고」라는 표현은 원문에서 목적이나 결과를 나타내는 연결 구조를 사용합니다. 이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읽으면 다윗이 하나님을 옳게 만들기 위해 죄를 지었다는 이상한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시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이 자신의 죄를 통해 드러났다는 뜻에 더 무게를 둘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죄를 일으키셨다거나, 다윗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판결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회개는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 죄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판결을 인정하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12:13에서 나탄은 다윗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전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그의 행동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뒤에 나오는 「남의 피를 흘린 죄」의 고백은 다윗의 죄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내면적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서 3:4에 시편 51:6의 칠십인역 표현을 직접 인용하여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다는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는 다윗의 죄를 정당화하는 인용이 아니라, 인간이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의로움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논증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시편 51편 자체의 중심은 먼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며 씻김과 회복을 구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죄를 지은 순간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보다

시편 51:7–8 본문 →

시인은 이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넘어 자기 존재의 깊은 곳을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잘못을 안고 있었고 어머니가 나를 밸 때부터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시편 51: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인간의 원죄를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시편 자체에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시인이 어떤 질문에 답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죄가 최근의 한 사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가장 이른 시작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죄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어머니의 특정한 성적 행위가 죄였다고 말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 한 구절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죄책이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이끌어 낼 수도 없습니다.

구약의 시적 언어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는 표현이 어떤 상태가 얼마나 깊고 오래되었는지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시편 58:3에서도 악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빗나갔다고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한 과장으로만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우연히 생겨난 작은 실수가 아니라, 자기 존재 깊은 곳에 뿌리내린 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어지는 8절이 바로 그 내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속 깊은 곳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내 안의 감추어진 곳에서 지혜를 일러 주십니다.시편 51:8 · 두루새김

7절과 8절은 모두 「참으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두 절의 방향은 다릅니다. 7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깊은 죄를 보여줍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깊은 진실함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올바른 모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이 대목은 나탄의 이야기와 다시 연결됩니다. 다윗은 남의 잘못을 판단할 때는 옳은 말을 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를 감추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깊은 곳까지 하나님의 진실 앞에 내놓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죄를 덮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 깊은 곳」과 「제 속의 감추어진 곳」이라는 두 표현은 정확히 어떤 내적 영역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정 신체 기관이나 특별한 비밀 지식을 뜻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내면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눈보다 희게 씻어 달라는 기도

시편 51:9–11 본문 →

히솝으로 나를 정결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그러면 눈보다 희어질 것입니다.시편 51:9 · 두루새김

히솝은 이스라엘의 정결 예식에서 사용되던 식물입니다. 부정한 상태에서 깨끗한 상태로 옮겨지는 정결 의식과 연결된 물건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화자는 제사장에게 자신을 씻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요청합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씻김은 단지 피부나 옷에 묻은 더러움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삶이 깨끗해지는 일입니다.

「눈보다 희어질 것입니다」는 죄를 짓기 전 상태로 적당히 돌아가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강한 시적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시인의 자신감은 자신의 결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깨끗해질 것입니다」라는 확신은 하나님이 씻어 주실 때 가능한 결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간청은 깨끗해지는 것 이상의 일을 요구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내게 들려주십시오. 당신이 부수신 뼈들이 기뻐 뛰게 해 주십시오.시편 51: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죄가 언제나 자기 눈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시인의 죄책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부수신 제 뼈들」은 그 고통을 몸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시에서 뼈는 사람의 몸과 생명의 깊은 부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편 32:3에서도 죄를 침묵하며 감추고 있을 때 뼈들이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뼈들이 다시 기뻐 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책망으로 무너진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로 다시 기쁨을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잘못이 들통난 상황에서 벗어난 안도감과는 다릅니다. 죄 때문에 손상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죄에서 당신의 얼굴을 돌려 주시고 내 모든 잘못을 지워 주십시오.시편 51:11 · 두루새김

이 표현은 곧 등장할 13절과 함께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11절에서는 자신의 죄들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돌려 달라고 합니다.

13절에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외면하시기를 구하지만, 자기 자신을 외면하시기를 구하지는 않습니다.

죄는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시인은 한층 더 깊은 변화를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4:4–7에서는 심각한 피부 질환으로 부정하게 되었던 사람이 깨끗하게 되는 의식에 히솝이 사용됩니다. 민수기 19:18–19에서는 시체 접촉과 관련된 부정을 씻는 물을 뿌릴 때 히솝을 사용합니다. 또 10절의 부서진 뼈들은 하나님께 책망받는 일이 화자에게 얼마나 깊은 고통으로 경험되는지 보여주는 표현으로, 실제로 골절상을 입었다는 진술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씻는 것을 넘어 새롭게 창조해 달라는 기도

시편 51:12–14 본문 →

하나님, 깨끗한 마음을 내게 지어 주시고 내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시편 51:1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시편 51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씻어 달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워 달라고 했습니다.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창조를 가리키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바라(⁨בָּרָא⁩)는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모든 문맥에서 반드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표현하는 특징적인 동사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시인은 자기 마음을 조금 개선해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일을 자기 안에서 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이런 변화가 필요할까요? 자신의 죄가 단순히 한 번 잘못 선택한 행동에 그치지 않는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죄의 문제가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죄가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영역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지를 결정하는 인간의 내적 중심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앞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생각과 의지의 중심이 깨끗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굳건한 영」은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한순간의 감정적인 회개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속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내면이 굳건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같은 유혹이나 상황을 만났을 때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지금 죄책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지탱할 내면의 힘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십시오.시편 51:13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이 왕위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잃거나 나라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먼저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직접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내쫓기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그분이 함께 계시는 것과 관계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용서받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속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이 주는 기쁨을 내게 돌려주시고 기꺼이 따르는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시편 51:14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이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얻고 싶어 합니다. 그 기쁨은 자기 성공이나 안전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의 원문 표현은 기꺼이 응답하는 마음이나 너그러운 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인간의 자발적인 내면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을 주셔서」라고 풀어, 하나님께 응답하려는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는 말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시인이 요청하는 것은 강제로 억눌려 순종하는 삶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붙들어 달라는 간청입니다.

시인은 죄를 용서받은 다음의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황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51편에서 용서와 변화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깊이

「주님의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사야 63:10–11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거룩한 영을 근심하게 했다는 사실이 회상됩니다.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읽으면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는 사무엘상 16:14도 떠오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 때문에 사울처럼 하나님의 영을 잃을까 두려워했다고 읽을 여지는 있지만, 시편이 직접 사울을 언급하지는 않으므로 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에스겔 36:25–27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편 51편에서는 죄인이 하나님께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에스겔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본문을 동일한 역사적 상황의 직접적인 응답 관계로 볼 근거는 없지만, 죄로 손상된 인간의 내면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다는 주제에서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31:33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다

시편 51:15–17 본문 →

나는 반역한 이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면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올 것입니다.시편 51:15 · 두루새김

이제 기도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거역한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마음, 자신의 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죄인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가 가르치려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낫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죄인이 그분께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먼저 깨끗한 마음과 굳건한 영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가운데 자신을 붙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다음에야 다른 죄인들을 가르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새로워진다면, 다른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길을 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일은 자기 마음의 평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자신의 가장 무거운 죄를 다시 떠올립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내 혀가 당신의 의로우심을 소리 높여 노래할 것입니다.시편 51:16 · 두루새김

「남의 피를 흘린 죄」(⁨דָּם⁩)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피들을 뜻합니다. 문맥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한 행위, 살인으로 인한 죄책, 피 흘린 일에 대한 책임 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우리야의 사건을 배경으로 읽으면 우리야의 죽음이 강하게 떠오릅니다. 다윗은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우리야가 죽도록 계획하고 명령했습니다.

시인이 「오직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 남의 피를 흘린 죄를 부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기도에서 그 죄책을 직접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앞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 입을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찬양하는 데 그 입을 사용하려 합니다.

주님, 내 입술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입이 당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할 것입니다.시편 51:17 · 두루새김

입술을 열어 달라는 표현은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먼저 일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새로운 마음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조차 하나님이 열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응답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며, 그분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응답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진다는 사실에 의존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남의 피를 흘린 죄」라는 표현 자체가 특정 사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표제의 배경과 연결될 때 우리야의 죽음이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은 왜 부서진 마음인가?

시편 51:18–19 본문 →

참으로 당신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신다면 내가 드리겠으나 태워 바치는 제물도 반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8 · 두루새김

바로 앞의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시편 51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 자신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사를 무조건 무가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편의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이 올바르게 바치는 제물과 번제물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18절은 모든 제사를 언제나 거부하신다는 절대적인 선언이라기보다, 현재 시인이 처한 죄의 문제를 제물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다윗의 범죄는 의도적인 살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5:31–33에서는 살인자가 죽어야 할 책임을 돈으로 대신하게 하지 말라고 규정합니다. 이 규정은 시인이 왜 제물을 드리는 일만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죄에는 제물을 바치는 형식만으로 덮을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부서진 영입니다. 하나님, 부서지고 짓눌린 마음을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 두루새김

여기서 「부서진」이라는 표현은 앞서 10절의 「주님께서 부수신 제 뼈들」과 연결됩니다. 1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책망으로 뼈들이 부서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제 그 부서짐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부서진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 자체를 즐거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맥에서 부서진 마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왕이라는 지위,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권위,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확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인은 자신의 부서짐이 하나님께 반드시 용서를 요구할 수 있는 공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죄를 감추던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제사를 폐지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사보다 먼저 바로잡혀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서진 마음에서 시온의 성벽으로

시편 51:20–21 본문 →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시온에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시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쌓아 주십시오.시편 51:20 · 두루새김

지금까지 이 시편의 중심에는 한 사람의 죄와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온과 예루살렘이 등장합니다.

왜 개인의 죄를 고백하던 기도가 도시의 성벽을 세워 달라는 요청으로 마무리될까요?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의 사건 이후 이 기도를 드렸다고 이해한다면, 왕의 죄와 공동체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간청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나탄이 선언한 심판은 다윗의 가정과 왕국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벽들을 세워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다른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25:10에서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다고 기록하고, 느헤미야 2–6장에서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런 본문들을 고려하면, 시편의 마지막 두 절을 예루살렘의 파괴와 회복을 경험한 후대 공동체의 기도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편 자체는 이 기도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추가되거나 사용되었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 경우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종 형태의 시편을 읽을 때 분명히 보이는 것은 기도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이제 공동체 전체가 회복되기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지만, 그 죄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남긴 상처와 영향을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죄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왕의 회개는 왕 개인의 평안만을 목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영향을 받는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은 마침내 제사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그때 당신은 올바른 제물을, 태워 바치는 제물과 통째로 태우는 제물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당신의 제단에 수송아지를 바칠 것입니다.시편 51:21 · 두루새김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짐승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이 제물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그때에는」입니다.

시편은 지금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제물과, 하나님이 회복을 이루신 뒤에 드려질 제물을 구별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드리는 제물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가운데 드리는 제물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반드시 성벽이 파괴된 상태를 전제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더욱 굳건하게 세워 달라는 간청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다시 세워지는 성벽

시편 51:1–21 본문 →

시편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 죄는 언제나 자기 눈앞에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그 죄를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흐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죄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할 뿐 아니라, 다시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자신을 새롭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후회와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구별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죄를 지워 달라는 기도는 자신을 씻어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씻어 달라는 기도는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가운데 자신을 붙들어 달라는 간청으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시인은 자신의 부서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끝날 때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의 부서진 마음만이 아닙니다.

시온의 성벽이 등장합니다.

기도는 부서진 마음에서 시작하여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는 성벽으로 향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역시 하나님이 좋게 여겨 주시지 않으면 온전한 회복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제단 위에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제단은 이제 죄를 감추거나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장소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그분께 응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회복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새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시편 51편의 가장 깊은 기도는 「하나님, 제게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