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2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사람을 죽이는 혀와 뿌리내린 나무

시편 52편의 배경에는 무서운 학살 사건이 있습니다. 제사장 여든다섯 명이 죽었고, 그들이 살던 성읍에서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칼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첫 고발은 살인자의 칼을 향하지 않습니다.

그의 혀를 향합니다.

더욱 섬뜩한 것은 이 사건이 한 사람의 보고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표제에 기록된 도엑의 말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갔습니다」는 그 자체로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실제로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울에게 전달한 일은 결국 죄 없는 제사장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시편은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을 말했더라도 그 말이 악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까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로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면서도 그것을 능력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시편은 그런 사람을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진정으로 안전한 사람은 그 용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 뿌리내린 푸른 올리브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더 강한지를 묻는 노래가 아닙니다. 무엇을 힘으로 삼는 사람이 끝까지 서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노래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52편 본문 읽기 →

도엑의 보고는 어떻게 학살로 이어졌는가?

시편 52:1–2 본문 →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갔습니다」 하고 알렸을 때의 시입니다.시편 52:2 · 두루새김

이 장면의 배경은 사무엘상 21–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던 중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히멜렉에게 자신이 왕의 명령으로 급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며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그에게 거룩한 빵을 주었고, 보관하고 있던 골리앗의 칼도 내주었습니다(사무엘상 21:1–9).

그런데 그 자리에 도엑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1:7은 도엑을 사울에게 속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사울의 목자들을 관리하는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로 묘사됩니다.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을 만나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울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울은 이미 다윗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엑의 보고를 들은 사울은 아히멜렉과 그의 집안을 반역에 함께한 사람들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다윗이 왕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고, 자신은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사무엘상 22:14–15).

사울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에게 손을 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 도엑이 나섰습니다.

사무엘상 22:18–19에 따르면 도엑은 제사장 여든다섯 명을 죽였고, 놉 성읍의 남녀와 아이들, 가축들까지 칼로 쳤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살아남아 다윗에게 도망쳤습니다.

여기서 도엑의 행동을 단순히 거짓으로 신고한 일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다윗의 방문 사실을 보고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에 근거했습니다. 문제는 그 보고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후 도엑이 무엇을 했느냐에 있습니다. 그는 다윗을 적으로 여기는 사울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다른 신하들조차 거부했던 제사장 살해 명령을 직접 실행했습니다.

따라서 시편이 도엑의 혀를 「속이는 일」과 「남을 망칠 일」에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보고 내용 중 어느 문장이 사실과 달랐는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말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행동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도엑만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학살을 명령했고, 다윗 역시 아히멜렉에게 자신의 처지를 정직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비아달이 찾아왔을 때 다윗은 도엑이 사울에게 알릴 것을 예상했다고 말하며, 아히멜렉 집안 사람들이 죽은 일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사무엘상 22:22).

이 사실은 시편 52편을 단순히 잘못 없는 다윗이 악한 도엑을 비난하는 노래로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앞선 시편 51편에서 다윗의 이름과 연결된 기도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면, 이 시편은 다른 사람을 무너뜨린 악을 고발합니다. 두 시편을 나란히 읽는 독자는 다른 사람의 악을 알아보는 일과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다만 시편 52편 자체는 다윗의 책임을 다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표제의 사건을 배경으로, 악을 자랑하는 사람의 힘이 무엇에 기대고 있으며 그 힘이 어디에서 끝나는지에 집중합니다.

「용사야」 — 정말 강한 사람을 부르는 말인가?

시편 52:3 본문 →

용사야, 왜 악을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온종일 이어진다.시편 52:3 · 두루새김

시편의 첫마디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의 상대를 부르는 말이 뜻밖입니다.

히브리어 학기보르(⁨גִּבּוֹר⁩)는 강한 사람, 용사, 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전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부를 때에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표현에 비꼬는 뜻이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도엑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절한 사울의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권력자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반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에게 진정한 용기가 있었느냐고 묻는 대신, 왜 그런 악한 일을 자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힘이 어떤 힘인지 문제 삼는 것입니다.

강하다는 사실과 옳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바로 뒤에 갑자기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문장은 동사가 없는 짧은 명사문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온종일」이라는 시간 표현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앞의 고발과 잇는 방식은 둘로 읽힙니다. 도엑이 악한 일을 자랑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계속된다는 대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강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힘과 계속해서 한결같으신 하나님을 맞세우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두 문장 사이의 긴장은 분명합니다. 도엑은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보다 더 오래 이어지고 더 깊은 바탕이 되는 현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이 관계 안에서 보여주시는 한결같음과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낱말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인 10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악한 일을 자랑하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선언됩니다. 마지막에는 시인 자신이 그 사랑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3절은 시편 전체를 이끌어 갈 두 가지 힘을 처음부터 맞세우는 선언입니다. 한쪽에는 남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이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도엑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붙드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사실입니다.

이 차이가 이어지는 고발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은 어떤 말인가?

시편 52:4–6 본문 →

네 혀는 남을 망칠 일을 꾸미며 날카롭게 간 면도칼처럼 속임수를 부린다.시편 52:4 · 두루새김

시인은 도엑의 손이나 칼을 먼저 언급하지 않습니다.

혀를 언급합니다.

도엑은 실제로 칼을 사용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가 사용한 실제 칼보다 먼저 그의 혀를 날카로운 면도칼에 비유합니다. 면도칼은 세심하게 사용하면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자를 수 있지만, 사람의 살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그의 혀는 「남을 망칠 일을 꾸민다」고 합니다. 말이 우연히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남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향해 움직이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혀는 「속이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말을 사용하는 방식까지 문제 삼습니다. 사람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건의 한 부분만 전달해 다른 사람에게 불리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분노를 알면서 그 분노를 더욱 자극할 목적으로 말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시편이 도엑의 구체적인 속마음을 모두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의 보고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건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종류의 말을 사람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묘사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도엑의 말보다 더 깊은 곳을 지적합니다.

너는 선보다 악을 사랑하고 바른말보다 거짓말을 사랑한다. 셀라.시편 52:5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더 좋아했다」(⁨אָהַב⁩)입니다. 사람은 두려움이나 압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여기서 악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욱 깊은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무엇을 기꺼이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선보다 악을」, 「바른말을 하는 것보다 거짓말을」이라는 나란한 표현은 도엑의 가치 판단이 뒤집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른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기보다, 악과 거짓말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속이는 혀야, 너는 남을 집어삼키는 온갖 말을 사랑한다.시편 52:6 · 두루새김

이번에는 사람 전체를 부르지 않고 그의 혀를 직접 부릅니다. 마치 혀 자체가 하나의 인격인 것처럼 말합니다. 「집어삼키는」(⁨בֶּלַע⁩)에 해당하는 표현은 삼키거나 파괴한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말이 단지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는 악과 거짓말을 더 좋아했다고 했고, 6절에서는 남을 집어삼키는 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남을 무너뜨리는 말은 어쩌다 사용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가 좋아하고 선택하는 행동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시편은 말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조심해서 말하라는 교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혀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기를 좋아합니까? 진실을 밝히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도엑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의 힘이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지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행동하실지가 선언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린 사람이 뿌리째 뽑히다

시편 52:7 본문 →

하나님께서도 너를 영원히 허무시리라. 너를 낚아채 천막에서 끌어내시고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뿌리째 뽑으시리라. 셀라.시편 52:7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단순히 도엑을 약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의지하던 삶의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도엑의 혀는 남을 망칠 일을 꾸몄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에 참여했고, 실제로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자신을 무너뜨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남을 무너뜨리던 사람에게 자신도 무너지는 심판이 선언됩니다.

처음에는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다음에는 천막에서 끌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에서 뿌리째 뽑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안정적으로 머무르지 못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막」은 사람이 살아가는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 천막에서 끌어내십니다.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던 집이 더 이상 그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뿌리는 식물이 한자리에 붙어 있게 하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뿌리째 뽑힌 식물은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가던 바탕 자체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푸른 올리브나무와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도엑은 뿌리째 뽑힐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나무로 묘사합니다.

시편은 도엑이 실제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의 도엑 이야기에도 그가 이런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미 확인된 역사적 사건의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을 담은 선언입니다.

그 확신이 눈앞의 현실에서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힘의 크기가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막은 단순히 잠시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사람이 살고 머무는 공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왜 그를 보고 웃는가?

시편 52:8–9 본문 →

의로운 이들은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시편 52: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처음 읽을 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반응이 의로움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의로운 사람들은 먼저 「두려워할」 것이며, 그다음에 「비웃으며 말할」 것입니다. 이 두 반응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라보는 대상이 다르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두려움과 존경을 느낍니다. 동시에 악인이 자기 힘을 지나치게 믿었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그를 비웃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웃음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즐기는 태도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웃음의 내용을 바로 다음 절이 밝혀 줍니다.

「보아라, 하나님을 자기 요새로 삼지 않고 넘치는 재산을 의지하며 남을 망치는 일로 힘을 얻던 사내다.」시편 52:9 · 두루새김

여기서 그들은 도엑의 악한 행동을 하나하나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에 자신의 힘을 두었는지 지적합니다. 이 세 가지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안전과 권력을 얻으려 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많은 재산」이라는 표현을 역사 속 도엑의 구체적인 재산 규모에 대한 기록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은 도엑이 사울에게 속한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전하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시편은 도엑이라는 인물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재산과 남을 망치는 일을 힘의 근거로 삼는 악인의 대표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처음의 「용사야」라는 부름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이 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이 있었습니다. 권력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을 해칠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피난처로 삼은 것들은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그를 비웃는 까닭은 바로 그 뒤바뀐 결과 때문입니다. 그가 힘이라고 자랑했던 것이 실은 자신을 끝까지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남의 멸망 앞에서 우쭐해할 권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힘을 최종적인 힘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하는 깨달음입니다. 악인을 향한 웃음은 자신들이 악인보다 본래 강하다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확신이 무너진 데 대한 반응입니다.

이제 시편은 그 악인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남을 망치는 일로 제 힘을 키우던」이라는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하바는 파멸이나 재앙과 관련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악인이 남을 망치는 행동이나 그로 인해 얻는 힘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이 장면은 시편 2:4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서는 권력자들을 비웃으시는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두 본문 모두 세상의 강한 자들이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모습을 뒤집습니다. 그러나 시편 52편에서 의로운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나무 같다」

시편 52:10 본문 →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싱싱한 올리브나무 같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히, 끝없이 의지한다.시편 52: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악인이 천막에서 끌려 나오고 땅에서 뿌리째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신을 뿌리를 내리고 푸르게 살아가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용사나 왕, 튼튼한 성벽에 비유하지 않습니다.

나무에 비유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집에 있는 나무입니다.

푸른 올리브나무는 단순히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한 식물이 아닙니다. 생명력과 오래 이어지는 삶, 풍성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시편 52편에서 시인이 푸른 올리브나무로 서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나무라는 이미지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온종일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자신이 그 사랑을 「영원히, 끝없이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한결같으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한결같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힘과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본 뒤, 자신이 무엇을 신뢰하는지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올리브나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표현을 반드시 시인이 실제로 성전 건물 안에서 살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이 시편을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의 상황과 직접 연결한다면, 솔로몬 시대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집」은 솔로몬 성전 이전의 성소에도 쓰인 표현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집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하나님의 집에 뿌리내린 나무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갔다고 사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서 다윗의 목소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나무 같다고 고백합니다. 두 「집」이 반드시 서로 맞물리도록 의도된 표현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와 본문을 함께 읽으면, 도엑의 보고가 파괴로 몰아갔던 제사장과 하나님의 집이라는 장소가 마지막에 다시 신뢰의 이미지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도엑은 자신의 천막에서 끌려 나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뿌리내립니다.

도엑은 땅에서 뿌리째 뽑힙니다.

시인은 푸른 올리브나무처럼 살아갑니다.

표제의 다윗은 여전히 도망자였고, 죄 없는 제사장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의 마지막 안전이 악인의 권력이나 세상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을 뽑아내는 힘을 의지했지만,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곁에 머물게 하는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이 두 사람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올리브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길러 온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비교적 메마른 환경에서도 자랄 수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리브의 열매와 기름은 이스라엘의 일상생활과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름은 음식과 등불, 몸에 바르는 용도 등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1:16에서도 이스라엘은 아름답고 열매 맺는 올리브나무에 비유되지만, 그 본문에서는 불순종에 따른 심판이 그 나무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올리브나무 자체가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상징은 아닙니다. 이 대조는 예레미야 17:5–8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대조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가뭄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시편 1:3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에 비유되고, 시편 92:13–15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 뜰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로 묘사됩니다. 시편 37:35–36에는 힘 있는 악인이 무성한 나무처럼 보이다가 사라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편 37편은 악인이 잠시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시편 52편은 오히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사람이 푸른 올리브나무 같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이 서로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명력과 오래 이어지는 삶을 얻는 사람을 나무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이미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아직 그 이름을 기다리다

시편 52:11 본문 →

주님, 당신이 이루셨으니 나는 영원히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선하니 당신께 충실한 이들 앞에서 그 이름에 소망을 두겠습니다.시편 52:11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 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앞에서는 악인에게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시선이 악인에게서 하나님께로 완전히 옮겨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일을 하셨으니」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두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셨다면 왜 여전히 희망을 두고 기다려야 할까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행위를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도엑이 이미 죽었다거나, 그의 모든 악행에 대한 심판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일하실 것을 확신하는 찬양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시인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바탕으로 드리는 감사일 수도 있습니다.

원문에서 「희망을 두겠습니다」(⁨קָוָה⁩)에 쓰인 동사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그 기대를 「희망을 두겠습니다」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희망을 둔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그 이름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지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성품과 행위, 그리고 그분이 알려지시는 방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희망을 둔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실제로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어 마지막 문장의 구조에는 조금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선하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이름의 선함에 대한 선언으로 읽을 수 있고, 기다리는 행위가 선하다는 뜻에 더 가깝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이름이 선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마지막 순간에 악인의 심판을 자신이 직접 실행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악을 분명하게 고발합니다. 악인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한결같음을 의지하며 그분이 행하실 일을 기다립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 앞에서」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시편은 한 사람의 원한이나 개인적인 승리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의 공동체 앞에서 감사하고 희망을 두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도엑은 자신의 말을 사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말은 권력자의 의심과 분노 속에서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말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두겠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말의 방향과 목적이 다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도엑은 자신의 악한 일을 자랑했습니다. 마지막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입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 입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느냐는 사실입니다.

날카로운 면도칼과 푸른 올리브나무

시편 52:1–11 본문 →

시편의 처음에는 한 사람의 혀가 등장했습니다. 날카롭게 간 면도칼 같은 혀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종일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배경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너무 쉽게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죽은 제사장들이 되살아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가족들이 입은 상처가 모두 회복되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하나님을 믿으면 악한 사람에게 결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시편의 표제가 가리키는 사건은 그 반대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악인의 손에 죽을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권력자의 보호 아래에서 사람들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 보고라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악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다스림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신뢰의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뢰는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악의 힘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모든 악행 앞에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시인 자신이 도엑의 악을 분명한 말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악을 고발하는 것과 악을 통해 자신의 힘을 얻으려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 누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자신의 힘과 안전의 근거로 삼고 있느냐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공격할 무기를 들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푸른 올리브나무 같습니다.

그 나무의 생명력은 다른 나무를 뽑아내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라고 있는 자리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그 자리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뿌리 뽑으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안에 뿌리내립니다.

시편의 끝에는 더 이상 면도칼 같은 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집에 푸르게 서 있는 올리브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자신을 비유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 앞에서 조용히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