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
시편 5편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하나님께 들려 드리는 기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사람을 속이고 파멸시키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말을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의 입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장 뜻밖의 질문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없다는 선언 다음에, 시인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5:6).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시인 자신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자신이 남들보다 의롭기 때문일까요?
그는 자신의 결백이나 공로가 아니라 「당신의 풍성한 인애」(5:8)를 말합니다. 시인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바로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 앞에서 악한 자들의 심판을 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인 동시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희망입니다.
말에서 중얼거림으로, 중얼거림에서 부르짖음으로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의 시편이라고 소개하며, ‘느힐로트’에 맞추어 연주하도록 지시합니다. 느힐로트는 음악과 관련된 용어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의미와 연주 방법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표제만으로 시가 쓰인 역사적 사건을 특정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은 매우 개인적인 기도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제 중얼거림을 헤아려 주십시오.시편 5:2 · 본디새김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대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말’과 ‘중얼거림’이라는 두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얼거림’은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속으로 되뇌거나 낮게 읊조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들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속에 담긴 생각과 사정까지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언제나 정확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에는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완성된 문장보다 낮은 중얼거림이 자신의 상태를 더 잘 드러냅니다.
시인은 그런 중얼거림도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제 왕, 제 하나님, 도움을 청하는 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기도하기 때문입니다.시편 5:3 · 본디새김
이제 중얼거림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제 왕’이라고 부릅니다. 시편의 표제에 따르면 이 노래는 다윗에게 속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지니고 있든, 그의 위에는 또 다른 왕이 계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왕은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송사를 듣고 정의를 시행할 책임을 지닌 통치자이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3:16–28에서 솔로몬이 두 여인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장면은 이런 왕의 역할을 잘 보여 줍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부르는 것은 단순한 존경의 표현을 넘어, 자신의 사정을 판단하고 바로잡을 권한을 지닌 분께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는 일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아침에 당신은 제 목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아침에 당신께 제 말을 갖추어 아뢰고 지켜보겠습니다.시편 5:4 · 본디새김
시편 4편이 잠자리에 드는 고백으로 끝났다면, 시편 5편은 아침에 기도하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을 하나님께 향하는 시간으로 삼습니다.
‘갖추어 아뢰다(עָרַךְ)’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사물을 배열하거나 정돈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갖추어 놓듯 자신의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기다립니다.
‘지켜보겠습니다(צָפָ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주의 깊게 바라보거나 망을 본다는 뜻을 지닙니다. 멀리서 무엇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는 사람의 모습과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려고 기다리는지는 명시되지 않지만, 기도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이나 행동을 기대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에게 기도는 말을 마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아뢴 뒤에는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악을 대하시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악은 왜 하나님의 곁에 머무를 수 없는가
당신은 악함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악은 당신과 함께 머무르지 않습니다.시편 5:5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행동을 곧장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단순히 하나님이 악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뜻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과 어떤 관계를 맺으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머무르다(גּ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어떤 곳에 거주하거나 체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낯선 곳에 머무는 사람의 상황을 표현할 때에도 쓰입니다. 5절에서 악은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누가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뽐내는 자들은 당신 눈앞에 서지 못합니다. 당신은 불의를 행하는 모든 이를 미워하십니다.시편 5:6 · 본디새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과 판단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이 심판과 의인들의 모임에 서지 못한다고 선언한 내용과도 연결됩니다(시편 1:5).
이 구절을 하나님은 죄만 미워하시고 죄인은 미워하지 않으신다는 말로 바꾸면 본문의 표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분명히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으로 말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선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른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고 즉각적인 파멸만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확장해서도 안 됩니다. 이 시는 죄를 범한 인간 일반의 모든 가능성을 논하는 글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멸하십니다. 여호와야훼는 남의 피를 흘리게 하고 속이는 사람을 역겨워하십니다.시편 5:7 · 본디새김
여기서 앞서 나온 악과 불의는 구체적인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행동은 모두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거짓과 속임은 단순히 사실을 잘못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건에서 누구의 피를 흘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고발하는 악이 추상적인 불경건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생명과 신뢰를 파괴하는 행동에 닿아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라면, 거짓과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분께 정의를 기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불의에 맞서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악은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없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분 앞에 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시인 자신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근거 — 인애와 두려움
그러나 저는 당신의 풍성한 인애에 힘입어 당신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을 두려워하며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해 몸을 굽히겠습니다.시편 5:8 · 본디새김
시편은 여기서 방향을 바꿉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시인이 자신을 악인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당신의 풍성한 인애’입니다.
‘인애’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느끼는 호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베푸는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는 그분이 자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악인이 하나님 곁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선언과,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고백 사이에는 자신의 우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애는 서로 반대되는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면서도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인애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인애를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면서 ‘당신을 두려워하며’ 몸을 굽히겠다고 말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공손한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애를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아가지만, 그 인애를 자신이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두려움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중심적인 장소였습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단순히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간 뒤 시인이 구하는 것은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에게서 구해 달라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인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인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의 모든 용례를 한 가지 뜻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시편 5편에서는 분명히 시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다윗이라는 표제만으로 이 시가 솔로몬 성전 건축 이후에 기록되었다거나, 시인이 실제로 성전 건물 안에 들어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이라는 표현은 성소를 가리킬 수 있으며, 이 구절은 성전을 향해 몸을 굽힌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형성 과정과 구체적인 예배 상황은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 여호와야훼는 인애가 풍성하고 죄악을 용서하시지만, 죄를 결코 무조건 면죄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시편 15편은 여호와야훼의 장막에 머무를 사람의 삶을 묻고, 그 대답에는 정직한 말, 올바른 행동,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이 포함됩니다(시편 15:1–3). 시편 15편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시편 5편은 그런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적들 때문에 자기 길을 바로잡아 달라는 기도
여호와야훼, 저를 노리는 자들 때문에 당신의 의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제 앞에서 당신의 길을 곧게 해 주십시오.시편 5:9 · 본디새김
시인은 분명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적들을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면 나도 거친 말로 맞설 수 있고, 상대방이 나를 해치려 한다면 나도 그를 해칠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청원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적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운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제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길’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의 장애물을 치워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자기 앞에 곧게 놓이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실제적인 보호의 요청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호는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적들이 자신의 길을 막는 것보다, 적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길을 잃게 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의 입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은 파멸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들은 혀를 매끄럽게 놀립니다.시편 5:10 · 본디새김
입, 속, 목구멍, 혀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뿐 아니라 내면의 방향이 파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덤은 죽음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덤은 닫혀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속에는 파멸이 있고 목구멍은 무덤과 같은데, 혀는 매끄럽습니다.
겉으로 나오는 말이 부드럽고 듣기 좋다고 해서 그 말이 진실하거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게 꾸민 말이 오히려 해를 끼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언 26:24–26에서도 미워하는 사람이 입술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출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의 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그들의 혀가 매끄럽다고 해서 자신도 더 교묘한 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이 자기 앞에 놓이기를 구하는 것이 그가 택한 길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기록된 자음 형태와 전통적으로 읽도록 제시된 형태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의 ‘곧게 해 주십시오’는 전통적인 읽기인 하이샤르를 따릅니다. 이는 곧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10절의 원문에서 ‘그의 입’은 단수로 시작하지만 이후 ‘그들의 속’과 ‘그들의 목구멍’은 복수로 나타납니다. 특정한 한 사람의 입을 가리키면서도 그가 속한 집단 전체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한 명의 주모자를 생각하고 있는지, 적대자들을 집합적으로 묘사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악인의 파멸을 구하는 기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나님, 그들에게 유죄를 선언해 주십시오. 그들이 자기들의 계략 때문에 쓰러지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많은 반역 때문에 그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들이 당신께 반항했기 때문입니다.시편 5: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인애에 힘입어 성전에 들어간다고 말했던 시인이, 이제는 사람들의 유죄 판정과 파멸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6–17, 35:1–8, 58:6–11에도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강한 요청이 나타납니다.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시인이 바라는 일과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셨다고 기록된 일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유죄를 선언하셨다거나, 그들이 실제로 쓰러졌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이라고 불렀고, 이제 그 왕께 정의로운 판결을 구합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어떤 불행이든 닥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세운 계략이 그들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지기를 구합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나무를 준비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 나무에 달립니다(에스더 7:9–10). 시편 7:15–16에서도 함정을 파는 사람이 자신이 판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편 5편의 청원 역시 그런 심판의 질서를 바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갑니까? 11절의 마지막 문장 「그들이 당신께 반항했기 때문입니다」가 이유를 밝힙니다. 시인은 적들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거짓과 폭력과 불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판단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적들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고발했다고 해서,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선언할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은 분쟁 당사자의 기도이기 때문에 시인의 관점에서 적들을 묘사합니다. 본문 밖의 모든 분쟁에 그 판단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앞의 기도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적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 인도받기를 구했습니다. 자기 행동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제외하고 상대방의 악만 심판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시인은 정의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이 악으로 드러나고 그 책임이 판결받도록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 기도는 악의 심각성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악을 심판할 최종 권한을 시인 자신에게 두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심판을 구하는 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의 관심은 자기 적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넘어 더 넓은 곳으로 향합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모든 피신하는 사람들의 노래가 되다
당신께 피신하는 모든 이가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 영원히 기쁨의 소리를 내게 해 주십시오. 그들을 덮어 주십시오.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5:12 · 본디새김
이제 기도의 대상이 크게 넓어집니다.
시편은 처음에 ‘제 말’, ‘제 중얼거림’, ‘제 목소리’로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시인은 자신만이 아니라 ‘당신께 피신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쁨은 막연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덮어 주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덮어 주십시오’는 보호의 이미지를 지닌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 보호가 그 한 사람을 넘어 하나님께 피신하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말을 들려 드립니다. 중얼거리고, 도움을 청하고, 아침에 자신의 기도를 갖추어 아룁니다. 중간에는 적들의 입과 혀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되고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기쁨의 소리가 등장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입은 사람을 해치고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피신하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기쁨의 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한 사람의 탄식이 여러 사람의 기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이 의로운 이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호의로 그를 큰 방패처럼 둘러싸십니다.시편 5:13 · 본디새김
여기서 ‘큰 방패’는 몸을 폭넓게 보호할 수 있는 큰 방패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인은 방패 자체가 사람을 보호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호의가 그를 방패처럼 둘러싼다고 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자신의 길을 곧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길의 한쪽에만 보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어느 방향에서 다가올지 알 수 없더라도, 하나님께 피신하는 사람은 그분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시편 자체가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의 기도이며, 여전히 심판과 보호를 청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모든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의로운 이를 복 주시고 호의로 감싸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피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둘러싸십니다.
시편 5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시편 5편을 끝까지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본문은 악한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집에 나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잘못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인애에 힘입어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시편 5편의 답은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시편이 보여 주는 의로운 사람은 스스로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인도 없이는 자신도 바르게 걸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던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중얼거림에서 부르짖음으로 이어졌고, 그는 아침에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의 입과 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 채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며, 그분의 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이 끝날 때 그의 눈앞에는 한 가지 이미지가 남습니다.
하나님께 피신하는 사람을 여호와야훼의 호의가 큰 방패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도 그 적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은 달라졌습니다.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둘러싸시는 여호와야훼의 호의가 더 깊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하나님께 자신의 말을 갖추어 아뢰고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아침의 끝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적들의 계략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여호와야훼의 큰 방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