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달라지지 않은 밤의 평안
사람은 언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요?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을 때일까요? 억울함이 풀리고 명예를 되찾았을 때일까요? 아니면 내일 먹을 것이 충분하고 앞으로의 삶이 보장되었을 때일까요?
시편 4편은 이런 기대를 뒤집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명예가 수치를 당하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찾는다고 책망하며, 많은 이들이 좋은 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현실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저는 평안히 눕자마자 잠들겠습니다」라는 뜻밖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시인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잠들겠다고 합니다. 시편 4편은 환경이 안전해졌다는 보고가 아니라, 안전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 시에는 눈여겨볼 만한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도 잠자리에 누워 자기 마음을 돌아보라고 명합니다(4:5).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평안히 잠자리에 눕습니다(4:9). 같은 밤, 같은 잠자리이지만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서로 다릅니다.
이 두 잠자리 사이에서 시편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 기도의 출발점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가 다윗의 시편이며 지휘자를 위해 네기노트로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앞의 시편 3편에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라는 상황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4편에는 그런 역사적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가 보여주는 갈등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 좋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제 의로움을 밝혀 주시는 하나님, 제가 부를 때 응답해 주십시오. 곤경 속에서 제게 넓은 자리를 내주셨으니, 저를 은혜로이 대하시고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시편 4:2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응답을 구하면서, 하나님이 이전에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매우 구체적인 공간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어에서 ‘곤경’을 표현하는 말은 좁고 압박받는 상태를 가리키며, ‘넓은 자리를 내주셨다’는 표현은 그 반대 방향을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장소를 말한다기보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움직일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는 이미지입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은 사방이 막힌 것처럼 느낍니다. 무엇을 해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삶을 조여 옵니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그 좁은 자리에서 새로운 공간을 열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 현재의 어려움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이미 응답받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응답을 청합니다.
「제 의로움을 밝혀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도 그런 상황과 어울립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자신의 정당함을 판단하고 드러내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호소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의 명예가 수치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평가를 다른 사람들의 손에만 맡겨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가져갑니다.
기도의 시작은 문제가 사라졌다는 확신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네기노트는 음악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정확한 연주 방식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이 시에는 명예를 훼손당하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이것을 다윗 생애의 특정 사건에 연결할 충분한 단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구별
기도하던 시인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사람들아, 언제까지 내 명예가 수치가 되겠느냐? 너희는 언제까지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찾느냐? 셀라.시편 4:3 · 본디새김
시인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행동을 두 가지로 규정합니다. 헛된 것은 단순히 우연히 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거짓 역시 실수로 믿게 된 정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잘못된 말 몇 마디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진실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뒤틀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정확히 어떤 거짓을 퍼뜨렸는지, 헛된 것이 권력이나 재물이나 우상 가운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본문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명예를 수치로 만드는 행동이 그들의 잘못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신실한 이를 자신을 위해 구별했다는 것을 알아라. 내가 그에게 부르짖을 때 여호와야훼가 들을 것이다.시편 4:4 · 본디새김
여기서 ‘신실한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실하고 경건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실한 태도와 삶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별했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입니다. 세상이 그를 어떻게 취급하든, 여호와야훼는 자신에게 신실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를 수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평가가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까지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2절과 4절을 나란히 놓으면 작은 변화가 보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실제 응답이 이루어졌다고 보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도의 청원이 확신의 언어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근거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은 상대방을 향한 위협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그들에게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길로 돌아서라고 요청합니다.
상대방에게도 잠자리가 필요하다
몸을 떨어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마라. 너희 잠자리에서 마음속으로 말하고 잠잠하여라. 셀라.시편 4:5 · 본디새김
‘몸을 떨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그주(רָגַז)는 몸이나 마음이 크게 동요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떨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분노로 인한 격동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는 중요한 해석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 있고, 격앙된 감정을 느끼더라도 죄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동요와 떨림을 나타내는 명령 자체를 살려 ‘몸을 떨어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음에 나오는 말이 행동의 방향을 제한합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과 그 흔들림을 따라 죄를 짓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상대방이 느끼는 동요를 지워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동요가 죄악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멈추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명령이 뜻밖입니다.
명예를 훼손하고 거짓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인이 요구하는 것은 공개적인 논쟁이나 즉각적인 사과가 아닙니다. 자신의 잠자리에서 자기 마음과 마주하는 일입니다.
낮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며, 군중의 분위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우면 그런 외부의 소리에서 떨어져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기회가 생깁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무엇을 좇고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정말 옳은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말하고 잠잠하여라’라는 명령에는 의미 있는 순서가 있습니다. 단순히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말하고, 그다음 잠잠해지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쏟아 내던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더 큰 목소리로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을 만큼 잠잠해지기를 요구합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의로운 희생 제물들을 잡아 바치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시편 4:6 · 본디새김
희생 제물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체적인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제물을 바치는 것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물과 함께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라고 합니다. 시인의 요구는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동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시편 4편의 상대방은 거짓을 찾고 자신의 명예를 수치스럽게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가고 그분을 신뢰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를 괴롭히지 마라’는 요구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낳은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찾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사람
이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그런데 먼저 많은 사람의 질문을 전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 주겠는가?」 여호와야훼, 당신 얼굴의 빛을 들어 저희 위에 비추어 주십시오.시편 4:7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두 번째는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의 삶에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삶을 가져다줄 것인가요? 누구를 의지하면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어리석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소망입니다. 다만 이들이 무엇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지, 누구에게서 그것을 기대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앞의 명예 훼손자들과 여기서 말하는 ‘많은 이들’이 정확히 같은 사람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인간이 좋은 것을 찾는 일반적인 질문 앞에서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의 얼굴빛입니다.
민수기 6:24–26에서 제사장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의 보호와 은혜와 평안을 축복합니다. 그 축복의 중심에는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얼굴을 백성에게 비추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단순히 빛을 내는 물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그에게 관심과 은혜를 베푸는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그 반대의 이미지는 얼굴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도움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시편 13:2; 27:9). 따라서 시인이 여호와야훼의 얼굴빛을 구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들을 향해 은혜롭게 돌아보시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은 좋은 것을 보여 줄 누군가를 찾습니다. 시인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직접 청합니다.
그는 좋은 삶의 조건을 열거하기보다, 좋은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이어서 그가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당신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많아졌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제 마음에 주셨습니다.시편 4:8 · 본디새김
곡식과 새 포도주는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중요한 생산물이었습니다. 곡식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공급했고, 포도주는 수확의 풍요와 잔치의 기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대비를 물질적인 부요는 나쁘고 정신적인 만족만 좋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곡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신명기 7:13; 11:14). 시인은 풍요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곡식과 포도주가 많아지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전제로 더 깊은 이야기를 합니다.
수확이 풍성한 사람이 누리는 기쁨은 분명 큽니다. 오랫동안 애써 가꾼 밭에서 많은 곡식을 거두고, 포도원에서 풍성한 열매를 얻는 것은 마땅히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기쁨을 그 기쁨과 견줍니다.
‘많아졌을 때보다’는 수확이 많아진 ‘때부터’로도, 그때의 기쁨과 견주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에서 핵심은 분명합니다. 시인의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곡식과 포도주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충분해졌다고 보고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소유의 양을 제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동을 말합니다.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얼굴빛을 구했던 기도가 여기서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막연한 위안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분이 이미 자신의 마음에 주신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확을 확인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발견한 기쁨은 자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왔느냐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은혜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많아졌을 때보다’의 히브리어 메에트는 수확이 많아진 ‘때부터’라는 시간적인 의미로도 읽을 수 있고, 그때의 기쁨과 견주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비교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어느 쪽인지를 원문의 형태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비교의 의미로 읽으면, 사람들이 소유의 증가에서 경험하는 기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더 크다는 뜻이 됩니다.
같은 잠자리, 다른 마음
시편은 마침내 조용한 밤의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평안히 눕자마자 잠들겠습니다. 여호와야훼, 오직 당신만이 저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4:9 · 본디새김
이 고백이 특별한 이유는 시인이 앞에서 말한 갈등을 해결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든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수치스럽게 만들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이 정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나요? 좋은 것을 찾던 많은 사람은 여호와야훼의 얼굴빛을 구하게 되었나요?
본문은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마지막 행동은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눕는 일입니다.
‘평안히’라는 말은 단순히 소음이 없고 갈등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온전함, 안녕, 평화로운 삶의 상태를 폭넓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평안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야훼이시기 때문에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는 잠들기 위해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주변 상황을 살피는 활동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깨어 있을 때에는 누가 자신을 비난하는지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위험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들면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안전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행동과 연결됩니다.
그가 잠든 동안에도 여호와야훼는 그를 안전하게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앞서 상대방에게 자기 잠자리에서 마음속으로 말하고 잠잠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잠자리는 자기 마음을 살펴야 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시인 자신의 잠자리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며 평안히 잠드는 장소가 됩니다.
두 장면이 뜻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은 나쁘고 자신은 좋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차이입니다. 헛된 것과 거짓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추구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결과를 자기 손으로 결정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이 두 행동 모두를 여호와야훼와의 관계 속에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고백은 앞의 시편과도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시편 3편에서는 시인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난 일을 여호와야훼의 붙드심과 연결했습니다(시편 3:6). 시편 4편에서는 아직 잠들기 전,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들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깨어난 아침과 잠들기 전의 밤을 각각 다른 자리에서 노래하는 셈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좋은 환경 자체를 삶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지 않고, 그 환경 속에서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름받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었던 이스라엘이 다음 날의 생존까지 자기 손에 쌓아 둘 수는 없었던 것처럼(출애굽기 16:16–30), 시인 역시 자신의 안전을 끝까지 직접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서 발견하는 평안
시편 4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도,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경험하는 여러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 불안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습니다. 곤경 속에서는 좁은 자리를 넓혀 주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왜곡된 평가 앞에서는 자신에게 신실한 이를 구별하시고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을 찾는 세상의 질문 앞에서는 얼굴빛을 비추시고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와 다릅니다. 시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했고,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했으며, 그들에게 돌이키라고 명했습니다. 자신이 할 말을 다한 뒤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자신의 손에 붙들어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좁은 곤경 속에서 자신에게 넓은 자리를 내어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명예를 수치로 바꾸고, 좋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그 모든 말이 지나간 뒤에도 세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잠자리에 눕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할지,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평안은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밤에도 자신을 지키시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잠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