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도망친 왕은 잠들 수 있었습니다
도망치는 사람에게 밤은 깁니다. 낮에는 걸어야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 모든 움직임이 멈춥니다.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고, 눈을 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시편 3편에는 바로 그런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왕이지만 자신의 왕궁을 떠나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를 쫓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집니다. 더구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낯선 적국의 왕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시편 한가운데 뜻밖의 고백이 나옵니다. 「저는 누워 잠들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저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6절)
시인은 원수들을 물리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위를 되찾았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왜 이것이 구원의 확신을 드러내는 고백이 될 수 있을까요?
시편 3편은 하나님이 모든 위협을 즉시 없애 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위협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한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한 복의 기원으로 넓어집니다.
왕을 쫓는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다윗의 시편. 그가 자기 아들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시편 3:1 · 본디새김
시편 3편은 표제를 통해 구체적인 역사적 장면과 연결됩니다.
시편 1편과 2편에는 이러한 표제가 없지만, 시편 3편에는 다윗이라는 이름과 사건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표제가 다윗이 도망치던 바로 그날 직접 시를 작성했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제는 이 시를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던 사건과 연결하여 읽도록 안내합니다.
그 사건은 사무엘하 15–1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은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자신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6절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렸다고 전합니다.
마침내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왕권을 선언했고, 다윗에게 반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싸우는 대신 도망치기로 결정합니다. 성 안에 머무르다가 공격받으면 예루살렘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하 15:14).
도망길은 비참했습니다.
다윗은 올리브 산을 오르면서 울었습니다. 맨발이었고,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함께 울었습니다(사무엘하 15:30).
이 장면에는 왕의 위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한때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 왕권의 중심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가 세운 왕국이 그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 반란이 가족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은 단지 정치적인 경쟁자가 아닙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것을 알면 시편에 등장하는 ‘적들’이라는 말이 단순한 군사적 표현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적들의 무리에는 자기 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한때 자기 백성이었던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윗을 아무런 잘못 없이 박해받는 무고한 왕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사무엘하에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 가문 안에 오랫동안 쌓인 죄와 갈등의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에 관한 자신의 죄 때문에 나단의 책망을 받았고(사무엘하 12:7–12), 이후 그의 가정은 암논과 다말의 사건, 압살롬의 보복과 도피를 거치며 깊이 무너졌습니다(사무엘하 13–14장).
그렇다고 압살롬의 반란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시편의 배경에는 선한 왕과 악한 적들의 단순한 대결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지금 자신에게 닥친 위협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3편의 기도는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적들의 가장 날카로운 공격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었다
여호와야훼, 제 적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요. 저를 거슬러 일어서는 이들이 많습니다.시편 3:2 · 본디새김
많은 이들이 저를 두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이 없다.」 셀라.시편 3:3 · 본디새김
시편은 처음부터 숨 가쁘게 시작됩니다.
세 번에 걸쳐 ‘많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단순히 적의 숫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처음 두 표현은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적들이 늘어나고 그를 거슬러 일어섭니다.
그런데 세 번째 표현에서 공격은 말로 바뀝니다.
그들은 다윗의 군대가 약해졌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부정하는 구원도 우선은 지금의 위기에서 건짐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사무엘하 16장 5–8절에는 다윗이 도망치는 동안 시므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저주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시므이는 다윗에게 닥친 재난을 하나님이 내리신 보응으로 해석합니다. 이 사건은 시편 3편의 적대적인 말과 잘 어울리는 역사적 배경을 제공합니다. 다만 시편 3편의 말을 시므이의 발언에서 직접 가져왔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왕위를 잃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도 다윗을 버리셨다고 판단합니다.
단순히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신을 도우시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현재의 형편에 관한 평가이지만, 후자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 전체에 관한 판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이들의 말이 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적들의 말이 끝나는 자리에 첫 번째 ‘셀라’가 놓여 있습니다. 그 말 뒤에 다윗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서 ‘저를 두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에는 네페쉬(נֶפֶשׁ), 생명·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것을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윗 자신, 곧 위기에 놓인 그의 생명을 두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셀라가 음악적인 지시나 낭송과 관련된 표시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기능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도망친 왕이 하나님을 자신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당신은 저를 감싸는 방패이시며, 제 영광이시고 제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시편 3:4 · 본디새김
제가 소리 내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자,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제게 응답하셨습니다. 셀라.시편 3:5 · 본디새김
4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적들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 내려놓은 판단과 하나님께 자신이 직접 부르짖는 일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표현은 세 가지입니다. 방패, 영광,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
방패는 전쟁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 도구입니다. 다윗처럼 수많은 적에게 쫓기는 사람에게 방패는 매우 구체적인 보호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순히 손에 들고 있는 방패 하나를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다. ‘저를 감싸는’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적들이 사방에서 늘어났지만, 이제 다윗은 자신을 둘러싸는 또 다른 존재를 말합니다.
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영광이라고 부를까요?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왕궁과 왕좌가 있었고, 백성의 존경과 왕의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를 떠나 맨발로 달아나며 울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제 영광이시고.’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כָּבוֹד)는 영예나 존귀, 위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영광이 왕좌 자체에만 달려 있다면, 왕좌를 잃은 순간 그는 모든 영광을 잃은 사람이 됩니다. 이 고백은 왕좌를 되찾을 것이라는 확정적인 예언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왕좌를 빼앗긴 현재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귀를 찾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에서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올리브 산을 올랐습니다. 머리를 가린 모습은 그의 슬픔과 낮아진 처지를 드러냅니다. 이 표현 자체는 낙담한 사람에게 다시 힘과 존귀를 주시는 행동으로 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지위가 회복되는 뜻까지 포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머리를 가리고 울며 도망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좋은 말을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각각 다윗이 잃어버린 것과 연결됩니다.
안전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방패이십니다. 영예를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광이십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낮아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을 말합니다. 응답은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옵니다. 시편 2편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시편 3편에서 그 왕으로 이해되는 다윗은 정작 예루살렘을 떠나 있습니다.
왕은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났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여전히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십니다.
다윗이 도망칠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그를 따라오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에게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다시 돌아와 궤와 하나님의 거처를 보게 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사무엘하 15:24–26).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물건처럼 가지고 다니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거룩한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산의 주인이신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데에는 왕궁도, 왕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응답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을 하나님께서 어떤 음성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뜻으로 구체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응답의 내용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음 절은 그 응답과 이어지는 매우 평범한 일을 들려줍니다.
잠들었다가 깨어난 일입니다.
구원의 첫 증거로 등장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아침이다
저는 누워 잠들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저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6 · 본디새김
저를 거슬러 사방에 자리 잡은 수만의 사람들을 저는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시편 3:7 · 본디새김
시편은 여기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다윗에게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국이 흔들리고 있으며, 군사적인 위협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실제로 누워 잠들고 깨어나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것이 특별한 까닭은 잠이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을 때 사람은 주위를 살피고, 위험을 피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든 동안에는 그런 활동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잠든다는 것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도망치는 왕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잠든 동안 적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다는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났습니다.
‘붙드시다(סָמַךְ)’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받쳐 주고 지탱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좋은 기분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잠든 동안에도 삶이 이어질 수 있었던 까닭을 하나님의 붙드심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편이 잠드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경험한 일은 어찌 보면 매우 일상적입니다. 잠들고, 깨어나고, 다시 하루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위기 속에서는 평범했던 일도 새롭게 보입니다.
어제 자신을 위협하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오늘 다시 눈을 떴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우연한 생존의 기록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붙드시는 분이 여호와야훼라고 고백합니다.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방패라고 불렀습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6절에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을 실제로 붙들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보호를 추상적인 교리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위험 속에서 밤을 지나 아침을 맞이한 경험으로 보여 줍니다.
‘수만’이라는 표현은 매우 많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더욱이 적들은 ‘사방에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감싸는 방패이셨습니다. 이제 적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수가 줄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다윗이 처음부터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의 흐름을 고려하면 압도적인 위협 속에서 여호와야훼의 붙드심을 경험한 사람이 이제 두려움에 맞서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믿음은 위협의 크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위협의 크기를 알면서도 자신을 붙드시는 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잠들었다가 깨어났고 이제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감사와 찬양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구원을 청합니다. 그가 아직 구원받아야 할 위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붙드시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사마크 계열입니다. 7절의 ‘수만’을 정확한 병력 통계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들의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고 부르짖는다
여호와야훼, 일어나십시오. 제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당신은 제 모든 원수의 뺨을 치셨고, 악인들의 이를 부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3:8 · 본디새김
조금 전 다윗은 자신이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께 일어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잠들어 계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십시오’는 하나님께서 행동에 나서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시적인 명령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왜 다시 구원을 요청합니까?
이것은 시편의 모순이 아닙니다. 그는 밤을 무사히 지났지만, 아직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확신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다시 구원을 청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상황을 부정하거나 더 이상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분이라는 믿음으로 그분께 계속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표현은 거칩니다.
뺨을 치는 행위는 상대를 공격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부순다는 말은 더욱 폭력적인 이미지입니다. 이 표현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실제로 제압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치십시오’, ‘부수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치셨고’, ‘부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의 원수들을 물리치셨던 일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께 지금도 구원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전에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가운데 현재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 요청을 곧바로 모든 개인적인 원한을 하나님께 정당화받는 기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에게 분명한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부르며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울었습니다(사무엘하 18:33).
이것은 시편의 거친 심판 언어를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언어를 원수의 죽음 자체를 즐기는 감정과 동일시할 수 없게 합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위협하는 악한 세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자신의 아들을 잃는 고통과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다윗이 이제 마지막 선언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10장 35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궤가 떠날 때 여호와야훼께서 일어나시고 그분의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시편 3편의 ‘일어나십시오’라는 요청도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행동하시기를 바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사건과 함께 읽으면 의미 있는 연결이 됩니다. 다만 시편이 민수기의 표현을 직접 인용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58편 6절에서도 악인들의 이를 부수어 달라는 기도가 등장하며, 그곳에서는 악인들의 이를 사자의 이와 나란히 놓습니다. 따라서 이를 부수는 이미지는 해를 가하는 자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그 힘을 무너뜨리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단지 원수들의 말만 잠잠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제한할 근거는 없습니다. 동사에 관해서는, 본디새김 번역은 이 표현들을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으로 읽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의 완료형 표현과 잘 어울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적인 확신을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승리를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표현했다고 읽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본문 흐름에서는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현재의 간구에 대한 근거로 삼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을 청하던 왕이 백성의 복을 구한다
구원은 여호와야훼께 속합니다. 당신의 백성 위에 당신의 복이 있기를 빕니다. 셀라.시편 3:9 · 본디새김
처음에 다윗이 들은 말은 「그에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이 없다」였습니다. 적들은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구원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3절에서 적들이 부정한 ‘구원(יְשׁוּעָה)’과 9절에서 다윗이 선언한 ‘구원’에는 같은 히브리어 낱말이 사용됩니다. 8절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역시 같은 어근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여호와야훼께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내가 반드시 왕좌를 되찾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곧 패배할 날짜를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구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구원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는 말은 다윗 자신이 구원을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왕인 다윗조차 자기 생명의 최종적인 안전을 스스로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는 ‘제 적들’, ‘저를 거슬러’, ‘저를 두고’라는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기도의 중심에는 다윗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당신의 백성’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장의 주어가 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의 시야가 넓어지는 일입니다.
여기서 ‘복이 있기를 빕니다’는 기원으로 읽을 수 있지만, 히브리어 문장의 간결함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이미 백성 위에 있다는 선언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복의 대상이 다윗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하나로 모여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압살롬을 지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따릅니다. 왕국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다윗이 자신을 공격하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축복하고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백성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윗의 기도는 자신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승리만을 선언하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습니다.
왕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왕의 안전과 권위는 그가 다스리는 백성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이 백성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주권자는 아닙니다. 왕 자신도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왕에게서 시작된 기도가 백성에게로 넓어지고, 왕의 구원을 향한 요청이 구원의 주인이신 여호와야훼를 고백하는 말로 끝납니다.
다시 아침을 맞이한 사람
시편 2편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에 왕을 세우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3편의 다윗은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있습니다. 그가 왕이라는 사실은 그를 고난에서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도 모든 상황을 즉시 바꾸어 놓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모든 위협이 제거된 뒤에야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들이 여전히 사방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신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고백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위험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한 사람이 위기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붙드심을 노래합니다.
처음에는 적들의 숫자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습니다.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구원과 백성의 복이 그의 기도를 채웁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잠들었다가 깨어난 경험이 놓여 있습니다.
다윗이 실제로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 밤이 얼마나 길었는지, 깨어났을 때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잠들었고, 깨어났으며, 자신을 붙드신 분이 여호와야훼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왕은 아직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왕좌도 되찾지 못했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사방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눈을 떴습니다.
시편 3편에서 믿음은 모든 싸움이 끝난 뒤의 승리 선언이 아니라,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도망치는 왕은 그 아침에도 자신을 둘러싼 적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감싸는 방패이신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분께 다시 일어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