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하늘의 왕은 무엇을 두고 웃으시는가
땅에서는 왕들이 모여 반란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묶고 있는 결박을 끊어 버리자고 외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뜻을 모았으니, 세상은 곧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갑자기 하늘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는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다급하게 군대를 소집하지도 않으시고, 반란을 막기 위해 황급히 움직이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웃으십니다.
이 웃음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힘과 권세에 대해 결정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시편 2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독자를 땅과 하늘 사이로 데려갑니다. 땅의 왕들이 말하고, 하늘의 여호와야훼가 응답하시며, 시온에 세워진 왕이 자신에게 주어진 법령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땅의 왕들을 향해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시의 핵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권력은 누구에게서 정당성을 얻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돌아설 길이 열려 있습니까? 시편은 반란과 분노의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복과 피난처를 이야기합니다.
왕들은 누구의 결박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였으며, 겨레들은 헛된 일을 읊조리는가?시편 2:1 · 본디새김
땅의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거슬러 나섰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의했다.시편 2:2 · 본디새김
「그들의 결박을 끊어 버리자. 그들의 밧줄을 우리에게서 벗어 던지자.」시편 2:3 · 본디새김
시편의 첫마디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을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질문에는 오히려 놀라움과 반문이 담겨 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결국 헛된 일이 될 계획에 이토록 열중하고 있습니까?
첫 절의 ‘술렁였으며’는 무리가 소란스럽게 움직이거나 격동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조용히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동요하며 움직이는 집단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소란과 나란히 놓인 동사는 ‘읊조리는가(הָגָה)’입니다. 시편 1편에서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읊조리던 사람과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번에는 민족들이 헛된 일을 되새기고 계획합니다. 이것이 두 시편 사이에서 실제로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무엇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되뇌는가가 서로 다른 삶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2절로 넘어가면 이 소란의 주체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땅의 왕들과 통치자들입니다. 왕들은 각기 자기 영토를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권력을 지닌 이들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입니다.
그들이 대적하는 대상은 둘입니다. 여호와야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
‘기름부음 받은 이’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는 여호와야훼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왕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그가 특별한 직무를 위해 구별되고 세워졌음을 나타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사무엘상 10:1)과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사무엘상 16:13)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이 시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먼저 왕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뒤이어 시온에 세워진 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표현은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훗날 ‘메시아(מָשִׁיחַ)’라는 표현과 연결되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시의 최초 장면에서 왕의 역사적 의미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시는 우선 여호와야훼의 통치와 그분이 세우신 왕권을 거스르는 땅의 통치자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반란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왕들은 여호와야훼와 그의 왕의 통치를 ‘결박’과 ‘밧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속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호와야훼가 실제로 이들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계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결박과 밧줄은 반란을 모의하는 왕들 자신의 입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시편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들려주는 것이지, 그들의 평가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들에게 자유란 더 이상 자기 위에 어떤 권위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들의 뜻을 제한하는 권위를 제거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반란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섭니다. 누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를 둘러싼 충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결집했는지를 보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대적하는 분은 땅에 있는 또 하나의 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은 그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 시선을 하늘로 돌립니다.
왕들은 일어섰지만, 여호와야훼는 앉아 계신다
하늘에 앉은 이가 웃었다. 주가 그들을 비웃었다.시편 2:4 · 본디새김
그때 그는 분노하며 그들에게 말했고, 타오르는 진노로 그들을 떨게 했다.시편 2:5 · 본디새김
「그러나 나는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 위에 세웠다.」시편 2:6 · 본디새김
땅에서는 민족들이 술렁이고, 왕들이 나서며, 통치자들이 함께 모의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박을 끊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여호와야훼는 앉아 계십니다.
고대의 왕에게 앉아 있는 자리는 통치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에서 하늘에 앉아 계신 여호와야훼는 왕들의 도전에 밀려나 자리를 되찾아야 하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모였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미 자신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리고 웃으십니다.
여기서 웃음은 즐거움이나 기쁨의 표현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행이 그 웃음을 ‘비웃었다’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통치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왕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계획은 충분히 현실적이고 위협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결집하면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가 무너지며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웃음을 그 반란이 인간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시편이 보여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차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세력을 모아도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무너뜨릴 권세까지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계획이 ‘헛된 일’인 까닭은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반응은 웃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웃음과 분노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웃음은 반란의 허망함을 드러내고, 분노는 그 반란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단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어리석은 계획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질서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말씀으로 그들을 떨게 하십니까? 6절의 선언에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도, 적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도 없습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결박을 끊겠다고 말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이 이미 하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왕들이 무엇을 계획하든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의 응답은 새로운 대책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왕권에 관한 선언입니다.
‘내 왕’은 독립적으로 자기 권위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왕인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왕의 권세는 여호와야훼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주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통치를 드러내는 권세입니다.
그가 세워진 장소는 시온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연결되는 구체적인 장소이며, 다윗 왕조와 여호와야훼의 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사무엘하 5:7; 6:12–17).
땅의 왕들은 수많은 민족을 동원하여 여호와야훼께 도전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온 세상의 여러 성읍이나 광대한 영토를 열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의 산을 가리키십니다.
온 땅의 통치자들이 거스르는 여호와야훼의 왕권이 특정한 산에 세워진 한 왕을 통해 드러납니다. 왕의 위치는 구체적이고 제한되어 있지만, 그를 세우신 여호와야훼의 권위는 땅의 모든 왕에게 미칩니다. 시온이 거룩한 까닭도 산 자체가 다른 산보다 높거나 웅장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그곳을 ‘내 거룩한 산’이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합니다.
시온에 세워진 이 왕은 어떤 권리를 부여받았기에 땅의 왕들과 맞설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왕 자신의 입에서 나옵니다.
왕은 어떻게 여호와야훼의 아들이 되는가
나는 여호와야훼의 법령을 전하겠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 2:7 · 본디새김
이 절에서 시편의 목소리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내 왕’을 세우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 왕으로 이해되는 인물이 직접 말합니다. 왕은 자신의 힘이나 업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법령’은 정해진 규정이나 법령을 뜻합니다. 7절에서는 왕의 지위와 권한을 확립하는 여호와야훼의 선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왕의 말은 단순히 개인적인 종교 경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권한으로 왕의 자리에 있는지 밝히는 공식적인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선언의 내용이 뜻밖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왕권에 관한 다른 구약 본문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7장 12–16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후손과 왕조에 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 가운데 1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후손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그 후손은 여호와야훼에게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태어난 다윗의 후손이 왕의 자리에 서는 일을 다룹니다. 왕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존재가 된다거나, 하나님이 인간처럼 육체적으로 자녀를 낳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여호와야훼께서 왕을 특별한 관계 안에 두시며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편의 ‘아들’도 먼저 이러한 왕권의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까?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표현은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는 결정적인 때를 가리킵니다. 왕의 즉위나 왕권의 공식적인 인정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구체적인 의식이나 날짜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즉위식에서 낭독된 말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지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먼저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백성을 다스릴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야훼로부터 독립된 최종 권력자가 아닙니다. 왕의 권한은 여호와야훼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집니다. 왕에게 주어진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를 높이지만, 동시에 그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왕은 여호와야훼의 아들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권위를 무제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 점은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그곳에서는 왕이 잘못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왕의 모든 행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 속의 어떤 통치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에 신적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2편의 왕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 있는 왕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 왕조의 왕들은 모두 이상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에는 불순종과 실패가 있었고, 예루살렘과 왕조 역시 역사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에게 주신 왕권의 약속과 실제 역사의 모습 사이에는 질문이 남게 되었습니다. 시편 89편은 이 긴장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과 왕권의 약속을 회상하면서, 현실에서는 왕의 권세가 꺾인 상황을 탄식합니다(시편 89:38–51). 이러한 질문은 왕권에 관한 구약의 약속들이 장차 오실 이상적인 통치자를 바라보는 기대와 연결되는 배경이 됩니다. 이사야 9장 6–7절과 11장 1–9절은 다윗의 왕권과 의로운 통치, 더 넓은 평화의 질서를 함께 그리는 본문들입니다. 신약은 시편 2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도행전 4장 25–28절은 시편 2편 1–2절을 인용하면서, 예수에 맞서 모인 통치자들과 사람들의 행동을 이 시편의 반란 장면에 연결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과 히브리서 1장 5절은 7절의 아들 선언을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 27절은 9절의 쇠막대기와 도공의 그릇 이미지를 다시 사용합니다. 이는 신약 저자들이 다윗 왕권에 관한 시편의 언어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과 통치에 비추어 읽은 직접적인 인용과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의 읽기는 시편 2편이 처음부터 보여 준 왕권의 의미를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왕과 그분의 통치라는 구약의 질문 위에서 발전합니다.
온 땅이 왕의 유산이 되지만, 그 유산은 왕이 스스로 차지한 것이 아니다
「내게 청하여라. 그러면 민족들을 네 유산으로, 땅끝을 네 소유로 주겠다.」시편 2:8 · 본디새김
「너는 쇠막대기로 그들을 부수고, 도공의 그릇처럼 그들을 산산이 깨뜨릴 것이다.」시편 2:9 · 본디새김
7절에서 왕의 신분을 선언하신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제 그에게 주어질 권한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왕에게 곧바로 땅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자신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이 받을 것은 ‘유산’과 ‘소유’입니다. 이 두 표현은 단순한 전쟁의 전리품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전해지는 유산이라는 말은 앞 절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이어받습니다.
왕은 여호와야훼께 청하고,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에게 유산을 주십니다. 왕의 권세가 아무리 광대해지더라도 그것은 여호와야훼에게서 받은 것이지, 왕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왕이 세워진 장소는 시온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한 도시의 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약속된 왕의 통치 범위는 땅끝까지 확장됩니다.
시온에 세워진 왕과 온 땅을 잇는 이 표현에는 시편의 왕권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통치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며, 그분이 세우신 왕에게 주어지는 통치의 범위도 민족들의 세계로 확장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어떤 역사적 이스라엘 왕이 실제로 지구의 모든 민족을 통치했다고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왕에게 주어지는 통치의 이상과 약속을 표현하는 왕권의 언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시편 자체가 어떤 왕권을 선포하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 이르면 이 왕권의 모습이 매우 거칠고 위협적으로 나타납니다.
쇠막대기와 도공의 그릇은 단단함과 깨지기 쉬움을 극단적으로 대조합니다. 쇠막대기는 단단한 통치 권력을 나타냅니다. 그와 대조되는 도공의 그릇은 한 번 강한 충격을 받으면 조각나 버리는 물건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왕에 맞서는 권세는 최종적으로 그 왕권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권세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여기에는 실제로 파괴와 심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부드러운 지도력이나 평화로운 설득에 관한 말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야훼의 왕권을 강력한 폭력의 행사로만 이해합니까? 9절만 떼어 놓으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의 전환을 보면 시편이 훨씬 복합적인 장면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시편은 바로 그 왕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는 중요한 번역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동사는 ‘부수다’로 읽히며, 뒤따르는 ‘도공의 그릇처럼 그들을 산산이 깨뜨릴 것이다’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앞부분을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라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그리스어 동사 포이마네이스는 ‘목양할 것이다’, ‘다스릴 것이다’라는 뜻을 지닐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왕의 행동을 조금 다르게 그립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파괴하는 힘을 전면에 놓고, 칠십인역은 다스리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에서도 뒤이어 도공의 그릇을 깨뜨리는 이미지가 유지되므로, 심판의 강렬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이 선언된 뒤에도 왕들에게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니 이제 왕들아, 분별하여라. 땅의 재판관들아, 훈계를 받아들여라.시편 2:10 · 본디새김
두려움을 품고 여호와야훼를 섬겨라. 떨며 기뻐하여라.시편 2:11 · 본디새김
10절의 첫 표현은 ‘그러니 이제’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선언된 모든 내용을 근거로 새로운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반란에 가담한 왕들에게 남은 길은 무엇입니까? 뜻밖에도 시편은 그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분별하여라’는 지혜롭게 행동하거나 사려 깊게 판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정보를 더 많이 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라는 요청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왕들에게 부족한 것은 정치적 계산 능력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의할 만큼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자신들이 누구를 거스르고 있는지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그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이어지는 말은 ‘훈계를 받아들여라’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왕들에게 이미 심판의 권세가 선포되었지만, 시편은 그들을 향한 권고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길로 돌아서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들의 반란을 무너뜨릴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 왕들에게 자신의 길을 바꾸도록 권하신다는 사실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반역자를 제거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인간이 자기 판단을 고치고 그분을 섬기는 길로 들어설 가능성도 제시됩니다.
‘땅의 재판관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은 자신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 그들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백성에게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에게 분별과 훈계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 경건의 권고가 아닙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한과 그 한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기쁨은 쉽게 함께 놓이지 않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기쁨이 사라질 것 같고, 기쁨이 있다면 두려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두 가지를 함께 요구합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여호와야훼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인간이 자기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자신보다 높으신 분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은 그 두려움이 공포 속의 복종으로만 끝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이 문장에 실제로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라는 의미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세가 최종적인 권세가 아님을 인정하는 일이 기쁨과 반드시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왕에게 다른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속박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들은 결박을 끊어 버리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바로 그런 왕들에게 여호와야훼를 섬기며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속박이라고 여겼던 관계가 사실은 그들이 들어서야 할 올바른 관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여기서 자유에 대한 왕들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왕들은 여호와야훼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권하는 삶은 여호와야훼를 섬기면서 기뻐하는 삶입니다.
이 반전은 마지막 절에서 더욱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가 노하여 너희가 길에서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의 분노가 순식간에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몸을 피하는 사람은 모두 복이 있다.시편 2:12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는 낯선 명령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는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라는 표현이 친밀한 애정의 표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문맥에서는 입맞춤이 존경과 복종, 충성의 표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에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춥니다. 그 장면에서 입맞춤은 왕의 지위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따라서 시편 2편의 이 표현도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7절에서 왕은 여호와야훼의 ‘아들’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그 흐름을 고려하면 마지막에 왕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호와야훼가 세우신 아들을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시편 2편에서 가장 신중하게 읽어야 할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12절에서 ‘아들(בַּר)’로 옮긴 낱말은 7절의 ‘아들’과 다른 단어여서, 이 구절은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순결한 태도로 경의를 표하라’, ‘훈계를 붙잡아라’로 읽기가 갈립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는 앞선 왕권 선언과 잘 어울리는 번역이지만, 다른 읽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 때문에 시편의 결론이 불분명해집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마지막 절은 앞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들에게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자신들의 독립적인 권세만을 주장하던 자리에서 물러나 여호와야훼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노하여’와 ‘그에게 몸을 피하는’이라는 표현에서 ‘그’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왕인 아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시편 전체에서 분노하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은 여호와야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 대명사의 대상을 매번 명시하지 않으므로, 한쪽으로 확정하지 않는 편이 신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과 별개로 마지막 문장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시편은 여기서 처음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처음에 왕들은 결박을 끊고 밧줄을 벗어 던지겠다고 외쳤습니다. 자기들 위에 있는 권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몸을 피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몸을 피하다’는 위험 속에서 피난처를 찾거나 보호를 의지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누군가에게 몸을 피하려면 먼저 자신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땅의 왕들은 처음에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한하는 것을 없애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마지막은 자유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권세 아래에서 보호를 구하는 것입니다.
9절에는 쇠막대기가 등장했습니다. 그 쇠막대기는 도공의 그릇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독자에게 어떤 권세가 사람을 깨뜨릴 수 있는지만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권세 앞에서 사람이 어디로 몸을 피해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같은 시편 안에 심판과 피난처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엄중함을 약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엄중한 심판의 선언 속에서도 인간에게 돌아설 길이 제시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시편은 마지막 문장을 위협이 아닌 복의 선언으로 끝맺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나슈쿠 바르입니다. 첫 번째 단어는 ‘입 맞추어라’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은 두 번째 단어 바르에 있습니다. 아람어에서 이 단어는 ‘아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아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은 히브리어 벤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바르’에는 ‘순수한’, ‘깨끗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순결한 태도로 경의를 표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더욱이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말이 아니라 ‘훈계를 붙잡아라’라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이는 10절에서 훈계를 받아들이라고 한 말과 연결됩니다. ‘그’를 여호와야훼로 읽는 쪽의 근거로는,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여호와야훼를 피난처로 삼는 표현이 반복된다는 점이 있습니다(시편 7:1; 11:1; 16:1).
시편 2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과 인간의 권력
시편 2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인간의 권세보다 크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이 제한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인간의 왕권이 본래부터 독립적인 최종 권위일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은 반드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크고 신뢰할 수 있는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은 기쁨과 보호의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편은 다시 처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땅의 왕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계획을 되풀이하고, 결박을 끊어 버리자고 외칩니다.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전히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계획을 비웃으셨고, 시온에 세우신 왕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왕들에게 분별하고 훈계를 받아들이라고 권하십니다.
시편은 그 왕들이 실제로 어떻게 대답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마지막에 두 가지 가능성을 남깁니다. 자기 길을 고집하다 멸망하는 것과, 몸을 피하여 복을 얻는 것입니다.
시편의 첫 장면에서는 왕들이 결박을 끊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들에게 몸을 피할 곳이 제시됩니다.
시편 2편은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을 보여 준 뒤, 그 앞에서 땅의 왕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묻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