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7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굴속에서 새벽을 깨우는 사람
시편 57편은 놀라운 공간적 대비를 품고 있습니다.
표제에 따르면 시인은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속에서 부르는 노래는 하늘과 온 땅을 향해 뻗어 나갑니다. 「하나님, 하늘 위로 높아지십시오. 당신의 영광이 온 땅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시편 한가운데서 한 번,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상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 왜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랍니까? 자신의 안전이 절실한 순간에 왜 하나님께서 하늘 위로 높아지시기를 기도합니까?
시편을 따라가면 이 질문의 답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시인은 처음에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숨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깨우고, 악기들을 깨우고, 마침내 새벽을 깨우겠다고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숨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는 깨어나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재앙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먼저 새벽을 깨우겠다고 합니다.
시편 57편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노래입니다.
앞선 시편 56편에서는 두려운 날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편 57편은 그 신뢰가 어떻게 찬양으로 자라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만 이번 시편은 전혀 다른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굴속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굴보다 깊은 피난처 — 당신의 날개 그늘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던 때와 연결합니다. 사무엘상에는 다윗이 굴에 피신한 사건이 두 차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22:1에서는 다윗이 가드를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합니다. 사무엘상 24:1–3에서는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이 그 굴에 들어옵니다.
어느 사건이 시편 57편의 직접적인 배경인지는 표제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던 처지를 보여줍니다.
굴은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피난처였습니다. 바깥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고, 추적자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굴에 들어갔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보듯이 추적자가 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굴은 사람을 숨겨 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까지 통제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실제 굴을 묘사하는 대신 다른 피난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피했기 때문입니다. 재앙들이 지나갈 때까지 당신의 날개 그늘에 피하겠습니다.시편 57:2 · 본디새김
시인은 은혜를 두 번 구합니다. 이 반복은 기도의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 간청에는 이미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겠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당신의 날개 그늘」이라는 이미지는 그 고백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돌로 된 굴과 살아 있는 날개
날개 그늘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룻기 2:12에서 보아스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시편 17:8에서도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숨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표현은 새가 날개를 펼쳐 새끼를 보호하는 모습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소의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과 연관하여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57편은 어느 한쪽의 구체적인 형상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굴은 바깥세상과 시인 사이에 돌벽을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하나님 자신이 시인을 보호하신다는 관계적 이미지입니다. 시인은 재앙을 막을 만한 단단한 구조물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피합니다.
그가 숨어 있는 장소는 굴이지만, 그가 의지하는 피난처는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재앙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피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위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협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아직 굴속에 있습니다. 재앙이 모두 지나갔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앙이 자신의 삶을 영원히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다음 두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중요한 장면은 사무엘상 24장입니다. 다윗이 숨어 있던 굴에 사울이 들어왔을 때, 다윗의 부하들은 그를 죽일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고, 이후 자신이 사울을 해칠 뜻이 없음을 밝히면서 하나님께 판단을 맡깁니다(사무엘상 24:12–15). 시편 57편의 표제가 반드시 이 사건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맡기고 스스로 악을 저질러 위협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다윗의 태도는 이 시편의 신뢰와 주제적으로 어울립니다. 시편 142편 역시 표제에서 다윗이 굴에 있을 때를 언급합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호소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시편 142:4–5). 시편 142편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이 두드러집니다. 시편 57편에서는 그 탄식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확장되는지가 두드러집니다.
하늘에서 보내시는 하나님 — 인애와 신실함
저는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이께 부르짖겠습니다. 저를 위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시편 57:3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시편의 공간적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시인은 땅의 굴속에 숨었지만, 자신이 부르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높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라도 시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그 높음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곧바로 하나님을 「저를 위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에는 어떤 일을 이루거나 완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행동하신다는 신뢰를 나타냅니다. 다만 원문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왕위에 오르게 하신다거나 원수에게 복수해 주신다는 특정한 사건을 여기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삶을 미완성인 채로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도망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남을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보내어 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를 짓밟는 자를 모욕하셨습니다. 셀라. 하나님은 그분의 인애와 신실함을 보내실 것입니다.시편 57:4 · 본디새김
여기서 「보내다」(שָׁלַח)라는 동사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보내어 구원하시고, 자신의 인애와 신실함을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확히 무엇을 보내십니까? 시인은 군대를 보내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을 말합니다.
이 두 낱말은 함께 사용될 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믿을 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인애와 진실이 풍성한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시편 57편에서 하나님이 인애와 신실함을 보내신다는 말은 아름다운 감정이나 추상적인 덕목을 내려보내신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에 합당하게 행동하십니다. 그분의 구원은 변덕스러운 호의가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행동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이 상상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인애와 신실함에 따라 행동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구원의 방식은 아직 알지 못해도, 구원하시는 분의 성품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모욕하는가
4절의 「저를 짓밟는 자를 모욕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은 원문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모욕한다는 동사와 시인을 짓밟거나 집어삼키려는 자를 가리키는 표현이 이어지는데, 모욕하는 주체와 그 관계가 분명하게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을 공격하는 자에게 수치를 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도 하나님이 자신을 짓밟는 자들을 수치스럽게 하셨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반면 시인을 쫓는 자가 모욕하거나 비난한다는 상황 묘사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이 어느 한쪽을 확정할 충분한 문법적 단서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절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인애, 신실함이 강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과 무관하게 머물러 계시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서 그가 처한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냅니다.
사자들 사이에 누운 사람 — 칼이 된 혀
저는 사자들 한가운데 있으며, 불타는 사람들 사이에 눕겠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입니다.시편 57:5 · 본디새김
사자는 강력한 포식자입니다. 그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위협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사자들을 이야기하다가 곧 사람들의 이와 혀를 말합니다. 여기서 사자는 시인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잔혹함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사자가 먹잇감을 이빨로 물어뜯듯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로 시인을 공격합니다.
그들의 혀는 칼입니다.
말은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 있지만, 시인은 그것을 실제 무기와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공격적인 말과 모욕, 위협이 한 사람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의 이야기와도 어울립니다. 사무엘상 24:9에서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사울이 왜 듣느냐고 묻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윗을 둘러싼 위협이 칼을 든 추적에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말도 왕과 다윗 사이의 적대관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시편 57편의 원수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모든 표현을 사무엘상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자들 사이에서 눕는다는 말
시인은 「불타는 사람들 사이에 눕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불타는 사람들」(לָהַ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불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들의 격렬한 분노나 해치려는 사나운 열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눕겠습니다」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위험한 사람들 사이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를 묘사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처럼 위험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눕겠다는 태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시인이 원수들 가운데서도 완전히 평온하게 잠을 잤다는 뜻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사자 같은 사람들 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전혀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사자들의 이빨과 사람들의 칼 같은 혀를 묘사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늘과 온 땅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이 대목에서 구원받았다는 표현을 덧붙인 뒤, 시인이 불안한 가운데 누웠다고 서술합니다. 히브리어 본문과는 문장 전개가 다릅니다.
위협 한가운데서 부르는 후렴 — 하늘 위로 높아지십시오
하나님, 하늘 위로 높아지십시오. 당신의 영광이 온 땅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시편 57:6 · 본디새김
시인은 아직 위험 속에 있습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혀는 칼과 같고, 그는 사자들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자신의 안전만을 구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마지막인 12절에서 그대로 반복됩니다. 따라서 6절은 지나가는 한마디가 아니라 시 전체를 감싸는 후렴입니다. 두 번의 후렴 사이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 번째 후렴 뒤에는 원수들이 파 놓은 구덩이가 등장합니다. 이어서 시인의 마음이 굳게 서고, 새벽을 깨우는 찬양이 시작됩니다. 마지막 후렴은 그 찬양의 결론이 됩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 위로 높아지시기를 바랍니까? 「높아지십시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낮은 곳에 계시다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영광이 드러나고 인정받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의 통치자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원수를 물리치는 일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이 사람을 짓밟고도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고통을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인은 위험이 모두 끝난 뒤에야 이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위협을 말한 직후에 부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현실에는 여전히 사자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지다 — 뒤집힌 함정
그들은 제 발걸음을 겨냥해 그물을 마련했습니다. 제 영혼은 꺾였습니다. 그들은 제 앞에 구덩이를 팠다가 그 안에 빠졌습니다. 셀라.시편 57:7 · 본디새김
여기서는 시편의 장면이 다시 땅으로 내려옵니다.
조금 전까지 시인은 하늘 위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는 발걸음과 그물, 땅에 파 놓은 구덩이를 말합니다. 원수들이 사용하는 수단은 사냥의 도구들입니다. 그물은 짐승의 움직임을 가로막고, 구덩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해 먹잇감을 떨어뜨리는 함정입니다.
특히 「제 발걸음을 겨냥해」라는 표현은 위협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시인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상하고, 그 길에 함정을 마련합니다. 그 결과 시인의 「영혼은 꺾였습니다」.
여기에는 해석상의 작은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직역하면 「그가 내 영혼을 굽혔다」 또는 「내 영혼이 굽혀졌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억눌렀다고 읽거나, 그 압박으로 시인의 마음이 짓눌렸다고 읽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시인은 실제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을 빠뜨리려고 만든 구덩이에 그들 자신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반복되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시편 7:15–16에서도 악인이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잠언 26:27 역시 함정을 파는 사람이 그곳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의 핵심은 악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수단을 마련하지만, 자신이 만든 파괴적인 질서에서 자신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혜와 시는 악이 스스로의 몰락을 가져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시편 57편의 서술은 원수들이 이미 구덩이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지, 혹은 하나님이 이루실 심판을 확신하며 완료된 일처럼 말하는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의 세부 사항보다 뒤집힌 결과에 집중합니다.
이제 시인은 더 이상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습니다. 시선은 자기 마음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꺾였던 영혼이 이제 굳게 서 있다고 말합니다.
꺾인 영혼과 굳게 선 마음 — 찬양의 시작
제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 저는 노래하고 찬양을 연주하겠습니다.시편 57:8 · 본디새김
7절에서 시인은 「제 영혼은 꺾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제 마음은 굳게 서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꺾인 영혼과 굳게 선 마음.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지우지 않은 채 새로운 고백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굳게 서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כּוּן)는 단단하게 세워지거나 확립된 상태, 또는 준비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낱말은 단순히 감정이 안정되었다는 뜻으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확고하게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고백을 두 번 반복합니다. 첫 절의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반복과 비교하면 이 시의 변화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두 번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두 번 마음이 굳게 서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의 마음이 본래부터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그는 자신의 영혼이 꺾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오히려 흔들리고 꺾였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마음을 세우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이 변화가 실제로 어떤 감정적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의 인애와 신실함을 기대하며, 악한 자들의 함정이 뒤집히는 일을 말한 뒤 자신의 마음이 굳게 서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확고함은 곧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노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위험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던 사람이 이제 그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사용하려 합니다.
5절에서 원수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에 맞서 또 다른 칼을 드는 것으로 노래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찬양을 시작합니다.
사람을 해치는 언어가 가득한 곳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높이는 언어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위해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을 깨웁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57편의 후반부는 성경 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시편 108:1–5는 시편 57:8–12의 찬양을 거의 그대로 사용합니다. 시편 108편은 이 찬양에 시편 60편의 다른 부분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로 구성합니다. 원래 시편 57편에서 그 찬양은 굴속의 위협과 간구 뒤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편 108편에서는 그 찬양이 시의 시작을 이룹니다. 한 사람의 위기에서 시작된 노래가 다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시편의 노래가 공동체의 예배 속에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경 안의 사례입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 밤보다 먼저 일어나는 노래
깨어나라, 내 영광아. 깨어나라, 하프와 리라야.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시편 57:9 · 본디새김
시편 57편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시인은 세 번에 걸쳐 깨어남을 말합니다. 먼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깨우고, 악기들을 깨우고, 마지막에는 새벽을 깨웁니다.
「깨어나라, 내 영광아」
여기서 「내 영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다른 문맥을 보면 「내 영광」을 시인의 내적인 존재, 그의 영혼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노래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자신의 혀나 목소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깨웁니다. 노래할 힘이 충분히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스스로를 일으켜 세웁니다.
악기를 깨우다
이어서 시인은 「하프와 리라」를 부릅니다. 실제로 악기들이 잠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오랫동안 잠잠했던 악기들을 불러 일으키듯 찬양을 준비합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시인은 자신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리를 내려 합니다.
그것도 노래와 악기를 동원한 찬양을 하겠다고 합니다. 문학적으로는 매우 선명한 장면이 만들어집니다.
숨죽여 지내야 했던 사람이 소리 높여 찬양하려 합니다.
새벽을 깨우다
보통은 새벽이 밝아 오면서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새벽을 깨우겠다고 말합니다.
문장의 주도권이 뒤집혔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는 시편의 배경 때문입니다. 표제에 따르면 시인은 굴속에 있습니다. 굴은 바깥의 빛이 쉽게 닿지 않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새벽을 깨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앞의 어둠을 바라보며 해가 뜨기만 기다리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새벽을 맞이하려 합니다.
새벽이 와서 그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노래하여 새벽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시인은 이미 재앙과 사자 같은 원수들, 그물과 구덩이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그의 노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새벽이 아직 오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이미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찬양은 굴속의 한 사람을 넘어 여러 민족에게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내 영광」은 문자 그대로 「나의 영광」입니다. 시편 16:9에서는 마음의 기쁨과 함께 영광이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30:12에서는 영광이 잠잠하지 않고 하나님을 노래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이 장면을 굴속에서 실제로 하프와 리라를 연주한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표제가 제시하는 배경과 시인이 사용하는 찬양의 언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리라」도 시인이 실제로 태양을 떠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먼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굴속의 노래가 뭇 민족에게 이르다
주, 제가 뭇 백성 가운데서 당신께 감사하겠습니다. 뭇 민족 가운데서 당신께 찬양을 연주하겠습니다.시편 57:10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의 시작을 생각하면 놀라운 확장입니다. 처음에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실제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찬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릴 찬양의 범위를 온 세상으로 넓히고 있습니다.
왜 자신의 구원이 이렇게 넓은 찬양으로 이어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당신의 인애가 커서 하늘까지 이르고, 당신의 신실함이 구름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시편 57:11 · 본디새김
여기서 우리는 4절의 표현을 다시 만납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애와 신실함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 시편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표현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이 하늘에서 시인에게 보내집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처음에는 작았는데 나중에는 커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자신의 위기 속에서 바라보던 하나님의 성품을 이제 온 세상에 가득한 것으로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시인의 개인적인 구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건이며, 그 하나님의 성품은 한 사람의 삶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굴속에서 돌보시는 분이시지만, 굴속에만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은 시인의 작은 세계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시인은 뭇 민족 가운데서 그분을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알려져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일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제 시편은 처음의 후렴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과 찬양의 보편적인 지평과 연결됩니다. 시편 67:3–5에서는 여러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민족들을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땅 위의 나라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민족에게 알려진다는 주제가 더욱 넓게 펼쳐집니다. 로마서 15:9–11에서 바울은 여러 구약 본문을 인용하며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때 로마서 15:9의 직접적인 인용은 시편 57편이 아니라 시편 18:49에 해당합니다. 시편 57편과의 연결은 직접 인용보다 주제적인 연결입니다. 시편 57편을 읽을 때는 먼저 굴속에 숨은 시인이 자신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본래의 문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의 찬양이 여러 민족에게로 확장되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울려 퍼지는 후렴 — 온 땅 위에 당신의 영광이
하나님, 하늘 위로 높아지십시오. 당신의 영광이 온 땅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시편 57:12 · 본디새김
시편은 6절과 똑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같은 문장이 놓인 자리는 달라졌습니다.
6절에서 이 기도는 시인이 사자 같은 원수들 사이에 있다는 고백 직후에 등장했습니다. 12절에서는 마음이 굳게 서고, 자신과 악기들을 깨우며, 뭇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한 다음에 등장합니다.
첫 번째 후렴은 위협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후렴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결심의 절정입니다.
이 반복은 시편 전체의 구성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두 번 구합니다. 중간에는 하나님께서 높아지시고 그 영광이 온 땅 위에 있기를 구합니다. 후반부에서 그는 자기 마음이 굳게 서 있다고 두 번 고백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같은 기도로 돌아옵니다.
마지막 절에는 굴도, 사울도, 원수들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의 고통을 일으킨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설명하는 말로 노래를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찬양하는 말로 끝냅니다.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나는 노래
시편 57편의 시작과 끝에는 서로 다른 기다림이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재앙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그 신뢰 속에서 시인의 시야가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은 단지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인은 다시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고난이 없었던 사람처럼 노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 위협이 자신의 마지막 말을 결정하게 두지 않습니다.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여전히 굴속에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굴을 떠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울의 추적이 완전히 끝났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위협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깨우고, 악기들을 깨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깨어나라, 내 영광아. 깨어나라, 하프와 리라야.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굴 밖으로 아침빛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노래는 이미 굴을 넘어섰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을 가두었던 어두운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이 닿아 있는 하늘입니다.
그의 찬양은 마침내 온 땅을 향한 기도로 끝납니다. 「하나님, 하늘 위로 높아지십시오. 당신의 영광이 온 땅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