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6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내 눈물을 헤아리시는 하나님

시편 56편에는 한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두 종류의 시선이 등장합니다.

원수들은 시인의 발뒤꿈치를 지켜봅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언제 넘어지는지, 어떻게 하면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지 살핍니다(7절).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은 제 떠돌아다님을 헤아리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원수들도 시인을 주의 깊게 살피고, 하나님도 그를 주의 깊게 살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원수들은 그를 넘어뜨릴 기회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떠돌았고 얼마나 울었는지 알고 계십니다.

이 시편의 시작과 끝에는 짓밟힘과 걸어 다님이라는 대조도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짓밟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걸어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립니다.

시편 56편은 두려움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설명하기보다, 두려움 속에 놓인 한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고 붙드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중심에는 「제가 두려워하는 날에, 저는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신뢰가 어떻게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따라 읽으면 시편 56편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856편 본문 읽기 →

적의 땅에서 드리는 기도 — 가드의 다윗

시편 56:1–3 본문 →

시편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던 가드의 사건과 연결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골리앗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사무엘상 17:4).

사무엘상 21:10–15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찬양하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고, 성문에 표시를 남기며 수염에 침을 흘렸습니다. 한때 적을 무찌른 용사로 칭송받던 사람이 이제 적의 성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위엄을 버려야 했습니다.

시편 표제가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무엘상은 다윗이 그 자리에서 시편 56편을 지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구체적인 표현을 사무엘상 사건의 모든 장면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다만 이 역사적 배경은 시인이 느끼는 두려움의 무게를 이해하게 합니다.

다윗에게 가드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달아난 곳에서 또 다른 위협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이 저를 짓밟고, 온종일 싸우며 저를 짓누르기 때문입니다.시편 56:2 · 본디새김

시인이 처음 구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사람들에게 맞설 힘을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합니다. 2–3절에는 「온종일」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를 짓밟고 싸우는 일이 한순간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원수들의 위협은 그의 일상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자신과 싸우는 자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힘의 불균형을 느낍니다. 자신은 한 사람인데, 적들은 여럿입니다.

적이 많고, 공격은 온종일 계속되며, 자신에게는 그것을 멈출 힘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현실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교만하게 저와 싸우는 자들」이라는 본디새김의 번역에는 원문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롬은 일반적으로 높은 곳이나 높음을 뜻합니다. 이를 적들의 오만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읽으면 본디새김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연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앞의 「많기 때문입니다」와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문장 구조가 달라지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읽기 모두 시인이 압도적인 적대적 세력 앞에서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큰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날에」 — 두려움과 신뢰의 관계

시편 56:4–5 본문 →

제가 두려워하는 날에, 저는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시편 56:4 · 본디새김

이 짧은 구절은 시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는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두려워하는 날에」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실제로 찾아옵니다. 때로는 그 두려움이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커집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날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사라진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5절에서는 시인의 고백이 더욱 담대해집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찬양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육체가 제게 무엇을 하겠습니까?시편 56:5 · 본디새김

4절에서는 두려워하는 날에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첫 문장은 두려움이 찾아오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두 번째 문장은 그 두려움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그 사이에 무엇을 놓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시인은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는 중입니다. 현실을 바꿀 만한 힘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인간적인 수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말씀이 어떤 구체적인 약속인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막연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실 존재가 아니십니다.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알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그 말씀의 신실함을 붙듭니다.

「육체」는 인간의 살이나 몸을 가리키며, 문맥상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인간의 위협을 실제보다 작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그는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짓밟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에게 자신을 해칠 힘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힘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호를 넘어 자신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신뢰의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이 아무리 강하게 느껴져도 하나님보다 크지는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했다고 해서 원수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뒤틀리는 말과 감시당하는 발걸음

시편 56:6–8 본문 →

온종일 그들은 제 말을 뒤틉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은 저를 해치는 데 쏠려 있습니다.시편 56:6 · 본디새김

앞 시편에서는 벗의 부드러운 말이 실제로는 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인 자신이 한 말이 적대자들의 손에서 다른 의미로 바뀝니다. 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언어의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원수들이 자신의 말을 뒤튼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한 말조차 남들에게 어떻게 이용될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가 의지할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붙드는 것은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방어할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원수들은 단순히 시인을 향해 거짓말을 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시인에게서 나온 말마저 자신들의 공격을 위한 재료로 삼습니다.

7절에서는 공격이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그들은 다툼을 일으키고 숨어듭니다. 제 목숨을 노리며, 그들은 제 발뒤꿈치를 지켜봅니다.시편 56:7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의 말을 공격했지만, 이제는 그의 움직임을 감시합니다. 말과 행동 모두 적들의 관찰 대상입니다. 「제 목숨을 노리며」라는 표현이 그 목적을 드러냅니다.

적들의 주의 깊은 관찰은 한 사람을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관심이 아닙니다. 그를 해칠 기회를 찾는 감시입니다.

원수들은 시인의 발걸음을 헤아리듯 지켜봅니다. 그러나 곧 시인은 하나님도 자신의 움직임을 헤아리신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합니다.

악을 짓고도 그들에게 벗어날 길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분노로 뭇 백성을 끌어내려 주십시오.시편 56:8 · 본디새김

첫 문장은 히브리어 문장 구조가 다소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악을 짓고도 벗어날 길이 있겠습니까?」라는 수사적 물음으로 읽으면, 악을 행한 사람들이 과연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 됩니다. 반면 부정어를 보충하면, 악행 때문에 그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달라는 요청으로 읽게 됩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읽기를 따릅니다. 뒤이어 하나님께 뭇 백성을 끌어내려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에, 악인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문맥에는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다른 문법적 읽기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이들의 행동을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는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일이 가능한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과 속임수가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호소 바로 다음에 시인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원수들의 악행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시선을 옮겼던 그는, 이제 자신의 눈물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제 말을 뒤틉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괴롭히거나 상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왔습니다. 여기서는 「제 말」을 목적어로 취하기 때문에 말의 내용을 손상하거나 왜곡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단어 자체가 언제나 ‘말을 왜곡하다’라는 전문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발뒤꿈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실제 발뒤꿈치를 가리킬 수도 있고, 발걸음이나 이동 경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죽 부대와 책 — 잊히지 않는 고통

시편 56:9 본문 →

당신은 제 떠돌아다님을 헤아리셨습니다. 제 눈물을 당신의 가죽 부대에 담아 주십시오. 제 눈물이 당신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시편 56:9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의 발걸음을 지켜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떠돌아다님을 헤아리셨다고 고백합니다.

원수들의 관심은 그를 해치는 데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그의 고통을 놓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떠돌아다님과 가죽 부대

「제 떠돌아다님」은 노디이고, 「당신의 가죽 부대」는 노데카입니다. 두 단어는 어원이 같지 않지만 발음이 비슷합니다. 시인은 서로 닮은 소리를 통해 떠돌아다님과 눈물을 담는 그릇을 가까이 놓습니다. 떠돌아다니던 자신의 삶과 그 과정에서 흘린 눈물이 하나님의 관심 속에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죽 부대는 물이나 포도주 같은 액체를 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눈물을 그 부대에 담아 달라고 구합니다.

눈물은 흘리면 사라집니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얼굴에서 마르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시적 이미지의 핵심은 사람들에게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고통도 하나님께는 잊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눈물이 당신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앞에서는 떠돌아다님을 헤아리신다고 했고, 이제는 눈물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정확히 알려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훌륭하게 행동했는지를 기록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떠돌아다님과 눈물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고통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이 없어 보이게 하고, 하루하루가 그저 견디는 시간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자신이 떠돌고 울었던 날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물 하나하나를 기록하시는 특정한 천상의 절차를 설명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완전히 아신다는 사실을 두 개의 생생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원수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대로입니다. 위험이 끝났다는 말도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고통 속에서 홀로 잊힌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수아 9:4, 13이나 사무엘상 16:20에서도 이러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책이라는 이미지는 여러 맥락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는 하나님 앞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문제가 나오고, 말라기 3:16에서는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억의 책이 언급됩니다. 이 구절들을 모두 같은 종류의 기록에 관한 설명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시편 56편에서 책이라는 이미지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시인의 고통을 기억하신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이 제 편이시라는 것을」 — 두려운 날이 부르짖는 날로 바뀌다

시편 56:10–12 본문 →

그때, 제가 부르짖는 날에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제 편이시라는 것을.시편 56:10 · 본디새김

2–3절에서 원수들은 「온종일」 시인을 짓밟았습니다. 6절에서도 「온종일」 시인의 말을 뒤틀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제가 두려워하는 날에」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10절에서는 「제가 부르짖는 날에」 원수들이 뒤로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원수들의 공격이 하루를 지배했습니다. 두려움이 그 하루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날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날이 됩니다.

상황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하루를 이해하는 중심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하루를 더 이상 원수들의 행동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간결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시라는 고백을 무조건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지지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짓밟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떠돌아다님과 눈물을 기억하신다고 말한 뒤, 10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고 선언하는 순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시라는 확신은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5절의 고백을 반복합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말씀을 찬양합니다. 저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말씀을 찬양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제게 무엇을 하겠습니까?시편 56:11–12 · 본디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찬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말씀을 찬양한다는 말에 「여호와야훼 안에서 말씀을 찬양합니다」가 더해집니다. 두 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을 두 호칭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5절의 「육체가 제게 무엇을 하겠습니까?」가 12절에서는 「사람이 제게 무엇을 하겠습니까?」로 바뀝니다. 표현은 달라졌지만 질문은 같습니다.

시인은 앞의 고백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그 말이 어떤 경험을 통과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왜곡되고, 움직임이 감시당하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떠돌아다님과 눈물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의 고백이 두려움 속에서 내놓은 신뢰의 결단이었다면, 두 번째 고백은 그 신뢰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더욱 분명해진 선언입니다.

감사의 제물 —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시편 56:13 본문 →

하나님, 당신께 한 서원들을 제가 갚아야 합니다. 당신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겠습니다.시편 56:13 · 본디새김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서원한 사람이 그 약속을 가볍게 여기거나 이행하지 않는 일을 경계합니다(민수기 30:2; 신명기 23:21–23).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서원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감사의 제물」(⁨תּוֹדָה⁩)로 번역된 말은 감사나 찬양의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두 가능성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행위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알리는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내신 일을 예배와 감사의 행위로 표현하려 합니다. 처음에는 혼자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위협을 당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배로 향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7:11–15에서는 감사와 관련된 화목제의 규정이 등장합니다. 시편 66:13–16에서도 시인은 자신이 환난 중에 한 서원을 갚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시편 56편의 마지막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감사한 감정을 느끼는 장면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빛 속에서 — 하나님 앞에서 걷는 삶

시편 56:14 본문 →

당신이 제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 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이들의 빛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걸어 다니도록 제 발도 넘어짐에서 건져 내지 않으셨습니까?시편 56:14 · 본디새김

그를 짓밟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위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결론을 맺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도 넘어짐에서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7절에서 원수들은 「제 발뒤꿈치를 지켜봅니다」. 그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살폈고, 그를 해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그 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원수들은 그를 넘어뜨리려 했고, 하나님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건져 내셨습니다.

시편의 처음에 사람들은 그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시인은 자신이 「걸어 다니도록」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의 발은 더 이상 단순히 추적당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 다니는 발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빛

이 구절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시인은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시 걸어 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그 빛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다고 말합니다. 살아남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은 서로 구별되지만, 이 시편에서는 함께 연결됩니다. 시인이 바라는 구원은 단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삶을 계속 이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걸어 다닌다」라는 말은 단순한 신체적 이동을 넘어 삶의 행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단순히 죽지 않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발걸음을 지켜 주셨습니다.

마지막 절의 동사들을 보면 시인은 이미 경험한 구원을 감사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동시에 이 시의 앞부분에는 미래의 보호에 대한 기대도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원수가 사라졌고 앞으로 어떠한 위험도 없으리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험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살아 있는 이들의 빛」은 히브리어로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의 빛, 또는 생명의 빛이라고 옮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욥기 33:30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숨을 구덩이에서 돌이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신다는 유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116:9에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걷는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 표현들은 죽음의 위험과 대비되는 생명의 영역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다는 표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을 나타내곤 합니다.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앞에서 걸으며 온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시편 56:14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명령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걷는 삶이라는 공통된 표현은 구원이 무엇을 향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내 발걸음을 기억하는가

시편 56:1–14 본문 →

시편 56편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시인의 발걸음이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순간에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56편은 두려움 없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두려운 날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지 않는 길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짓밟습니다. 원수들은 그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살피며 발뒤꿈치를 지켜봅니다. 그는 떠돌아다니고, 그 길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떠돌아다님을 헤아리십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시인은 분명 두려워했고, 떠돌았으며, 울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뒤트는 사람들과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잊힌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원수들의 얼굴이 아닙니다.

자신의 발입니다.

자기를 짓밟으려는 사람들에게서 건짐받은 발, 그토록 위태로웠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린 발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발로 다시 걷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빛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