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5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날개 대신 붙드시는 하나님
시편 55편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칼이 아니라 말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원수의 목소리」 때문에 괴로워합니다(4절). 그는 하나님께 원수들의 「혀를 갈라」 달라고 요청합니다(10절). 그런데 시가 진행되면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힌 사람은 함께 「다정하게 속이야기」를 나누던 벗이었습니다(15절). 마지막에 이르면 그 벗의 말은 버터와 기름보다 부드러웠지만, 실상은 「뽑힌 칼들」이었다고 밝혀집니다(22절).
이 시에서 말은 사람을 연결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파괴하는 무기가 됩니다. 시인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단순한 적대감이 아닙니다. 자신을 안심시켰던 말이 사실은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는 발견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 다른 목소리를 찾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고백하며, 끝내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의 말이 신뢰를 무너뜨린 자리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어 하며, 자신을 배신한 사람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 감정들이 정리되고 난 뒤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모든 감정 속에서 하나님께 말합니다.
시편 55편은 배신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평정심을 되찾는지를 설명하기보다, 평정심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계속 말을 걸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 — 들으시기를 구하는 기도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제 간구를 피하여 숨지 마십시오.시편 55:2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피해 숨으실 가능성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숨어 계신다는 진술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침묵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시인의 상태는 이어지는 동사들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는 「탄식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신음」합니다(3절).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괴로움을 다스리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5–6절에서는 그 고통이 몸 전체로 번져 갑니다. 「제 마음이 제 안에서 몸부림치고」라는 표현에서 마음은 더 이상 안정된 내면의 중심이 아닙니다. 시인의 안쪽에서 고통이 요동합니다. 이어서 죽음의 공포가 그 위에 내려앉고, 두려움과 떨림이 밀려들며, 전율이 온몸을 뒤덮습니다.
마음은 안에서 몸부림치고, 공포는 위에서 내려앉으며, 전율은 시인을 뒤덮습니다. 시인은 자기 몸의 안팎 어디에서도 안전을 느끼지 못합니다. 위협이 삶 전체를 압도하는 상태입니다.
원인은 「원수의 목소리」와 「악인의 압박」입니다(4절). 원수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아직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대신 시인은 그 행동이 자신에게 일으킨 결과부터 보여줍니다. 독자는 아직 사건의 전모를 모르지만, 이미 그 사건이 한 사람을 얼마나 깊이 무너뜨렸는지는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이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적을 물리칠 힘이나 승리의 전략을 구하기에 앞서, 멀리 달아날 수 있는 날개를 원합니다.
비둘기의 날개 — 도망쳐서라도 쉬고 싶다
저는 말했습니다. 「내게 비둘기 같은 날개가 있으면 좋으련만. 날아가서 머물 텐데.」시편 55: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에서 특히 아름답게 들리는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시인이 날개를 원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날아가는 일 자체가 아니라, 날아간 뒤에 머물 수 있는 자리입니다. 7절의 「머물 텐데」(שָׁכַן)는 거주하거나 자리를 잡는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위협을 피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더 이상 쫓기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곳입니다.
「보라, 멀리 달아나 광야에서 밤을 보내리라.」 셀라.시편 55:8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읍은 성벽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통해 보호를 제공하는 장소였습니다. 반면 광야는 거주와 생존이 어려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성읍보다 광야를 안전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야 할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는 「몰아치는 바람과 폭풍」을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폭풍이 실제 기상 현상이라는 설명은 없습니다. 앞서 묘사한 위협과 불안이 시인의 삶에 몰아치는 폭풍처럼 느껴진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믿음이 약해서 도망치려는 모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죄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직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를 실제로 광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곧바로 시선이 다시 성안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왜 그렇게 간절히 성읍을 벗어나려 했는지 이제 드러납니다.
성벽 위를 돌아다니는 폭력 — 뒤집힌 도시의 질서
주, 삼켜 버려 주십시오. 그들의 혀를 갈라 주십시오. 제가 성안에서 폭력과 다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시편 55:10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도시의 혼란을 끝내 달라고 구합니다. 여기서 「삼켜 버려 주십시오」의 목적어는 히브리어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나 그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특정한 목적어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그들의 혀를 갈라 주십시오」라는 요청은 분명합니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말소리를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해치는 데 사용되는 언어와 결탁의 힘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폭력과 다툼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서 그 성을 돌아다니고, 그 안에는 재앙과 고통이 있습니다.시편 55:11 · 본디새김
여기서 폭력과 다툼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성벽 위를 돌아다닙니다. 성벽은 본래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시설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성벽을 순찰하는 것은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과 다툼입니다.
12절에서는 시선이 성안으로 내려옵니다. 파괴가 그 안에 있고, 억압과 속임수가 광장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만나고 물건을 거래하고 공동체의 일을 처리하는 공적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사회생활 전체가 불안해집니다.
이렇게 시인은 도시의 바깥 경계인 성벽에서부터 안쪽의 광장까지 보여줍니다. 어느 곳에도 안전이 없습니다.
도시는 여전히 성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을 지켜야 할 질서는 무너졌습니다.
시인이 광야로 달아나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자신을 미워하는 몇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폭력과 속임수가 공동체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이 도시에서 겪은 가장 깊은 고통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신뢰했던 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의 혀를 갈라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의 언어 혼란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1:7에서 하나님은 함께 악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십니다. 두 본문의 히브리어 동사가 같지는 않으므로 직접 인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목적을 위해 결합한 사람들의 언어를 하나님께서 무력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로 너다」 — 배신의 얼굴이 드러나다
13절에 이르면 시인의 말투가 갑자기 바뀝니다.
앞에서는 원수들과 악인들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해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모욕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견뎠을 것이다. 나를 거슬러 뽐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그에게서 숨었을 것이다.시편 55:13 · 본디새김
분명 원수의 목소리 때문에 괴롭다고 했는데, 이제 그를 모욕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에게 원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힌 사람이 자신이 예상했던 종류의 원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적대적인 사람의 행동은 괴롭지만, 적어도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그런데 바로 너다. 나와 동등한 사람, 나의 벗, 나와 가까이 지내던 너다.시편 55:14 · 본디새김
시인의 말은 이제 그 사람에게 직접 꽂힙니다. 「나와 동등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가 같았다는 뜻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그 사람을 자신과 견줄 만한 가까운 관계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나의 벗」과 「나와 가까이 지내던 너」가 그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이 사람은 우연히 가까이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이 자신의 생각과 비밀을 나눌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함께 다정하게 속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집에서 무리와 함께 걷곤 했다.시편 55:15 · 본디새김
「속이야기」는 은밀한 대화,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의논이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 사람과 자신의 속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본문은 이 교제를 「다정하게」 나누었다고 묘사합니다. 그 관계는 시인의 기억 속에서 따뜻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걸었습니다. 그들은 사적인 친밀함뿐 아니라 공동의 예배 경험도 나누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배신은 더욱 아픕니다.
그는 낯선 사람의 적의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었던 관계의 진실성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시인은 더 이상 그 사람과 속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그런데 너는」으로 시작합니다. 15절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만으로 이 장면을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특정한 시기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기억하는 것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갔던 공동체적 예배의 경험입니다.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과 연결합니다. 사무엘하 15–17장에 나오는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다가 압살롬 편에 가담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시편의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사무엘하 15:12, 31; 16:23). 그러나 시편 자체는 배신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반드시 아히도벨이라는 사실이나 이 노래가 정확히 압살롬의 반란 중에 지어졌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독자에게 들려주려는 핵심은 배신자의 신원이 아니라, 그가 시인에게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시편 41:9–10에서도 시인은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한 경험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13:18이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설명하면서 시편 41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55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배신이라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과도 이어집니다.
죽음이 그들을 속이기를 — 배신 앞에서 터져 나온 분노
죽음이 그들을 속이기를. 그들이 산 채로 스올로 내려가기를. 그들의 거처에, 그들 가운데에 악이 있기 때문이다.시편 55: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거칠고 불편한 부분입니다.
조금 전까지 시인은 함께 예배하던 벗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과 악한 자들에게 죽음이 닥치기를 바랍니다.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강렬한 반전이 생깁니다. 시인을 속인 사람에게 이제 죽음이 속여 닥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속임수로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린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파멸을 맞기를 바라는 기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낱말은 「속이기를」 말고 파멸이나 죽음이 닥치기를 바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시인의 말은 자신의 원수를 죽여도 좋다는 일반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악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분노를 점잖은 언어로 바꾸지 않습니다. 부당한 배신을 당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극단적인 소망까지 기도의 언어 안에 담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직접 심판을 집행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말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이 그들을 속이기를」이라는 번역에는 중요한 원문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기록된 형태와 전통적으로 읽는 형태가 다릅니다. 기록된 형태를 하나의 낱말로 이해하면 황폐함이나 파멸을 뜻하는 표현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낭독 방식은 속이게 하다로 해석되는 형태와 죽음을 구별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읽기를 따릅니다. 다만 이 동사 형태 자체가 드물고 해석이 쉽지 않으므로, 「죽음이 속이기를」이라는 뜻이 유일하게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칠십인역은 좀 더 단순하게 죽음이 그들에게 닥치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반전이 의도된 언어유희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산 채로 스올로 내려가기를」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16:30–3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에게 반역한 고라 일당과 관련된 심판은 땅이 입을 벌려 사람들을 산 채로 스올에 삼키는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55편에도 삼킴과 스올로 내려감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심판의 이미지에서 뚜렷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 계속되는 기도와 응답
저는 하나님께 부르짖겠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저를 구하실 것입니다.시편 55:1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선 저주의 말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말한 뒤,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선언합니다. 그가 선택한 행동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저는 탄식하며 신음하겠습니다. 그분은 제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시편 55:18 · 본디새김
이 순서를 반드시 하루 세 차례의 정해진 기도 시간에 관한 규정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인이 하루의 여러 시간에 걸쳐 거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계속 탄식하며 신음하겠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피해 숨지 않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저를 향한 전쟁에서 제 목숨을 평안히 건져 내셨습니다. 저와 싸우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시편 55:19 · 본디새김
「평안히」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이 차분해졌다는 의미보다 넓습니다. 앞서 도시에는 폭력과 다툼이 가득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전쟁과 같은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평안히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19절의 히브리어에는 해석이 갈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와 싸우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로 옮긴 구절은 직역하면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는 형태에 가깝습니다. 문맥에 따라 많은 적들이 자신에게 맞서 있었다고 읽거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돕는 편에 있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저를 향한 전쟁」에 주목하여 적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이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다시 미래의 심판을 바라봅니다.
오래전부터 앉아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괴롭게 하실 것입니다. 셀라. 그들에게는 변화가 없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시편 55:20 · 본디새김
시인에게는 삶의 질서가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믿었던 친구가 적이 되었고, 안전해야 할 도시가 두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인이 경험하는 이 급격한 변화에 휩쓸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오래전부터 계신 통치자이며, 지금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변화가 없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바뀜이나 교체를 뜻합니다. 이것을 악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그들이 형편의 역전이나 시련을 겪지 않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연결하지만, 그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과 처지가 계속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위에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통치가 있습니다.
버터 같은 말과 뽑힌 칼 — 배신의 실체
이제 시인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의 행동을 다시 설명합니다.
그 벗은 자기와 평화롭게 지내던 이들에게 손을 뻗었고, 자기의 계약을 더럽혔습니다.시편 55:21 · 본디새김
여기서 「계약」은 반드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시내산 언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상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이나 신뢰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신은 단순히 마음이 달라진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 맺었던 관계의 의무를 깨뜨리고, 그 관계에 기대고 있던 사람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 입의 버터 같은 말들은 매끄러웠지만, 그의 마음은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말들은 기름보다 부드러웠지만, 그것들은 뽑힌 칼들이었습니다.시편 55:22 · 본디새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친근함과 안심을 주는 언어입니다.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은 적대적인 의도와 실제적인 위협입니다. 시인은 그 말이 부드럽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실제로 부드러웠습니다.
문제는 말의 느낌과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말이 듣기 좋게 들린다는 사실과 그 말이 진실하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칼과 같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칼집에서 뽑힌 칼들이었습니다. 칼집 안의 칼은 아직 사용되지 않은 무기입니다. 그러나 뽑힌 칼은 공격할 준비가 된 무기입니다. 시인은 상대방의 말을 단순한 위선이나 듣기 좋은 거짓말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 자체가 자신을 해치는 수단이었다고 고발합니다.
시인은 원수의 목소리 때문에 괴로워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혀를 갈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목소리의 가장 잔인한 형태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자신을 미워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친밀하게 대하면서 공격의 의도를 숨겼던 목소리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무너진 것은 상대방이 부드럽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드러운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시인이 앞서 비둘기 같은 날개를 원했던 이유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단지 적의 공격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관계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 칼이 된 세상에서 무엇을 붙들 수 있을까요? 23절은 그 질문에 답합니다.
「네게 주어진 몫을 여호와야훼께 맡겨라」 — 도망치는 대신 맡기다
네게 주어진 몫을 여호와야훼께 맡겨라. 그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그는 의인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55:23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은 또 한 번 말하는 대상을 바꿉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직접 말하거나 원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네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시인이 자신을 향해 하는 권면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전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개인적인 탄식이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신뢰의 언어로 넓어집니다.
「네게 주어진 몫」(יְהָב)은 구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드문 낱말로,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 맡겨진 몫, 짐 등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본디새김의 「네게 주어진 몫」은 이 낱말에 담긴 몫과 부담의 의미를 함께 살리려는 번역입니다.
주어진 몫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을, 시인을 배신한 사람의 악행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정해 주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배신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네가 맡긴 일을 모두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상황만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 놓인 사람을 향한 약속입니다. 시인은 마음이 몸부림치고, 공포에 휩싸이고, 전율에 뒤덮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안정적으로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 주어지는 말은 스스로 단단해지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의인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도 모든 종류의 불안이나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이 시편의 화자 자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흔들리지 않음은 감정이 언제나 안정되어 있다는 뜻보다, 하나님이 의인을 끝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 전체에 어울립니다.
또한 여기서 의인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거나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자들의 길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그 현실이 아직 끝나지 않았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시편 55편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조금 더 깊이
「네게 주어진 몫」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예하브카입니다. 칠십인역은 이를 근심이나 염려에 해당하는 말로 옮깁니다. 베드로전서 5:7은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권면에서 시편 55:23의 칠십인역 표현과 매우 가까운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직접 인용이라는 명시적 형식보다는 그 말씀을 받아 사용하는 언어적 연결에 해당합니다. 시편 37:5는 자신의 길을 여호와야훼께 맡기고 그를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잠언 16:3도 자신의 일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시편 55편은 이러한 권면을 추상적인 지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도망가고 싶어 하고, 분노에 사로잡힌 뒤에야 그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같은 권면이라도 이 시편에서는 특별한 무게를 갖습니다.
멸망의 구덩이와 마지막 신뢰 — 결말의 대조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과 남의 피를 흘리고 속이는 사람의 운명이 대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은 그들을 멸망의 구덩이로 내려보내실 것입니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하고 속이는 자들은 자기 날들의 절반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시편 55:24 · 본디새김
시인은 16절에서 악한 자들이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가기를 바랐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의 구덩이」로 내려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아래로 내려가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는 심판의 주체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앞서 23절에서 하나님이 의인을 붙들어 주신다고 한 바로 다음에, 24절에서는 악인들을 구덩이로 내려보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쪽을 붙드시고 다른 쪽을 내려보내십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신다는 의미에서 공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 악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붙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자기 날들의 절반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악인의 수명을 정확히 예측하는 계산식이 아닙니다. 시인은 폭력과 속임수로 자신의 삶을 보장받으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생명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심판에 관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파멸을 확신한 뒤에도 자기 삶의 중심을 그들의 파멸에 두지 않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말하는 것은 원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0:27에서도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사람의 날들이 길어지고 악한 사람들의 해가 짧아진다는 지혜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이는 악인의 삶이 마땅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정과 지속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결론 — 날개 대신 주어진 약속
시편 55편에서 하나님은 시인의 인생을 순식간에 평온하게 바꾸어 놓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내셨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했다는 사실과 삶의 모든 갈등이 끝났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여전히 그 악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배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자신이 당한 일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것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자리에서 물러나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은 악을 선하다고 부르는 일이 아니라, 그 악이 자신의 삶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을 갖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본문은 배신자가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 시인이 다시 안전한 도시로 돌아갔는지, 인간관계가 회복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처음에 비둘기 같은 날개를 꿈꾸었습니다. 멀리 날아가 폭풍을 피하고, 아무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곳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에게 날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가 바라던 광야의 은신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배신자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마지막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
시편은 그 고백에서 멈춥니다. 멀리 날아가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건네는 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