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4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나를 넘겨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다
한 사람이 위험을 피해 숨어 있습니다. 그를 찾는 사람은 왕이고, 왕에게는 군대가 있습니다. 숨어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런데 그의 은신처를 알려준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온 적군이 아닙니다.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찾아가 「다윗이 저희 곁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이 짧은 말이 시편 54편의 출발점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를 보호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찾는 왕에게 그의 위치를 알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시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이 다윗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적들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는 간청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저를 돕는 이이십니다. 주는 제 목숨을 붙드는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 자신을 넘겨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윗은 자신을 붙드는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54편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노래가 아닙니다.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마저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도움으로 발견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이 짧은 시편은 구원을 청하는 간구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고백을 거쳐, 기꺼이 드리는 감사로 마무리됩니다.
「우리 곁에 숨어 있습니다」 — 피난처가 위험한 장소로 바뀌다
시편의 표제는 이 기도를 다윗의 도피 생활과 연결합니다.
지프 사람들이 와서 사울에게 「다윗이 저희 곁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을 때.시편 54:2 · 본디새김
지프는 유다 산지에 속한 지역으로, 여호수아 15:55에도 유다의 성읍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지프 사람들은 다윗에게 전혀 관계없는 외국인들이라기보다 같은 유다 지역에 속한 주민들이었습니다.
다윗을 위협하는 사울의 군대도 이스라엘의 군대이고, 다윗의 위치를 알려주는 사람들도 유다 지역의 주민들입니다. 다윗에게 닥친 위험은 이방 민족과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백성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입니다.
사무엘상에는 지프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리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상 23:19–20입니다. 지프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의 은신처를 알려주며, 그를 왕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사울은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고,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더욱 정확히 확인하라고 지시합니다.
그 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장면은 긴박하게 전개됩니다. 다윗과 사울은 같은 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군대는 다윗을 붙잡기 위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던 일을 중단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러 돌아갑니다(사무엘상 23:25–28). 다윗은 거의 붙잡힐 뻔한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사무엘상 26:1에 등장합니다. 지프 사람들이 다시 사울에게 다윗의 은신처를 알려줍니다.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윗은 잠든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고도 그의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사무엘상 26:7–12).
다윗은 실제로 사울에게 쫓겼고, 지프 사람들은 그의 은신처를 알렸습니다. 사울의 왕권과 군사력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했으며, 다윗은 그 상황을 자기 힘만으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표제의 작은 표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저희 곁에」. 지프 사람들은 다윗이 자신들 곁에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 반드시 보호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서로의 사정을 알고,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사실이 신뢰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아는 사람들은 그 정보를 그를 잡으려는 왕에게 제공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은밀한 은신처가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가 알려지고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곧바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54편의 표제는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표제의 말은 사무엘상 23:19의 표현과 특히 가깝지만, 26:1에도 거의 같은 상황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이 두 사건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이야기 모두 시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 구원과 정당한 판결을 함께 구하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구해 주십시오. 당신의 힘으로 제 정당함을 밝혀 주십시오.시편 54:3 · 본디새김
첫 번째 간구에는 구해 달라는 요청과 자신의 정당함을 밝혀 달라는 요청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왜 다윗은 살아남게 해 달라고만 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함까지 밝혀 달라고 할까요?
표제의 역사적 배경에서 다윗은 단순한 도망자가 아닙니다. 왕의 적으로 의심받고 추격당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충성했으며 여러 차례 그를 도왔지만, 사울은 그를 제거하려 했습니다(사무엘상 18–20장).
따라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나야 합니다. 「제 정당함을 밝혀 주십시오」(דִּין)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판단하고 재판하며 권리를 변호하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사건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떤 사건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것과 자신이 모든 면에서 죄 없는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무죄 선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닥친 부당한 위협을 하나님이 판단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는 「당신의 이름으로」 구해 달라고 하고, 「당신의 힘으로」 정당함을 밝혀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나 특별한 능력을 불러내는 주문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존재가 누구인지, 어떤 성품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신 성품과 권위에 합당하게 행동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과 힘은 서로 분리된 두 가지 구원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편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건을 바르게 판단하시고, 그 판단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제 입의 말들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시편 54:4 · 본디새김
표제를 떠올리면 이 장면은 더욱 의미 있게 읽힙니다. 지프 사람들은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다윗에 관한 말이 그를 죽이려는 왕에게 전달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다윗 자신의 말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향합니다.
시편이 이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응시키도록 구성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와 본문을 함께 읽으면, 누구에게 말하고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이 선명해집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이유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낯선 자들」 — 같은 백성도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낯선 자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났고, 폭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노렸으며,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셀라.시편 54:5 · 본디새김
그런데 표제에는 지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유다 지역의 주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그들을 낯선 자들이라고 부를까요?
「낯선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림(זוּר)입니다. 이 낱말은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나 낯선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낱말을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민족적 신분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편이 이 표현을 지프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같은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라도 다윗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처럼 묘사되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다윗의 은신처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에는 관계가 단절된 상황의 고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자림」이 실제로 외부인 집단을 가리키는지, 공동체 내부에서 낯설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본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표제의 배경 때문에 두 번째 독법이 특히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낯섦보다 더 심각한 특징을 곧바로 지적합니다. 그들은 폭악한 자들이며,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제 목숨」은 단순히 시인의 정신이나 내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살아 있는 생명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의 생명이 실제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구체적인 정치적 계산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 두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말로 부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때 하나님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편에 서면 유리할지 생각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행동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가 한 사람의 생명을 넘겨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다면, 정작 다윗을 도울 사람은 누구일까요? 시편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바로 앞 시편 53편에서 악인들이 하나님을 찾거나 부르지 않는다고 했던 대목과 짧게 연결됩니다. 두 시편은 모두 악한 행동을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태도와 관련짓습니다. 하지만 시편 54편의 고발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저를 돕는 이이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저를 돕는 이이십니다. 주는 제 목숨을 붙드는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시편 54:6 · 본디새김
이 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돕는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보십시오」는 듣는 사람의 주의를 어떤 사실이나 장면으로 돌리는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설명했지만, 이제는 그 위험 속에서도 함께 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적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취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에 한 가지 더 중요한 현실을 놓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 목숨을 붙드는 이들 가운데」에서 「붙드는 이들」은 복수 형태입니다. 이 때문에 본디새김은 하나님이 기도자의 생명을 붙드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를 살렸습니다. 이 표현 전체를 하나님이 시인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의 압축된 구조 때문에 두 방향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붙드는 이들 가운데」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면,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을 추상적인 방식으로만 약속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을 지키는 도움의 현장 가운데 계시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사무엘상 23:16–18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 안에서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함께 도망하고 어려움을 견디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적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생명을 지키고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54:6이 요나단이나 특정한 동료들을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목숨을 붙드는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과 경쟁하는 분이 아니라, 그 도움 가운데서도 자신의 백성을 붙드시는 분으로 이해할 여지를 열어 줍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을 사람의 도움이 완전히 끊긴 상황에서만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위험한 순간에 곁을 지켜 주고, 누군가가 도망할 길을 열어 주며, 누군가가 지친 마음을 일으켜 줄 때, 시인은 그 도움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선한 행동을 곧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라고 확정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도움을 고백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셨는지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하나님께 자신의 원수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맡깁니다.
악을 되돌려 달라는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가?
그분이 저를 노리는 자들에게 그 악을 되돌리실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함으로 그들을 없애 버려 주십시오.시편 54:7 · 본디새김
이 절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관한 선언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간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의 거친 표현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실제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원수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 악을 되돌리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악한 자들이 행한 악이 그들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원수들에게 아무 상관없는 고통이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지른 악과 연결된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반복되는 보응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잠언 26:27에서는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거기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에게 그 돌이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세상에서 모든 악인이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는 기계적인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신뢰하는 기도이지, 인간이 언제 어떤 형태의 심판이 일어날지 계산할 수 있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 심판을 누구에게 요청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직접 원수들을 없애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굴에 들어온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 대신 여호와야훼께서 자신과 사울 사이를 판단하시기를 구합니다(사무엘상 24:12–15). 사무엘상 26장에서도 다윗은 잠든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여호와야훼께서 판단하시리라고 말합니다(사무엘상 26:10–11, 23).
이 두 이야기가 시편 54편과 정확히 같은 순간을 가리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는 왕에 대한 판단을 다윗 자신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시편의 기도를 폭력과 전혀 무관한 평온한 감정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시인은 원수의 제거를 요청합니다. 다만 그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힘이 최종적인 권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의 사건을 맡깁니다.
왜 「당신의 신실함으로」 없애 달라고 하는가?
이 절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심판의 근거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원수들이 미우니 없애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신실함으로」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신실함」(אֶמֶ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진실함과 신뢰할 만함, 변함없는 성실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심판의 근거로 삼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순간적인 분노에 무조건 동조해 주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으로서 악을 판단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근거로 원수의 멸망을 요청한다고 해서,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의 적을 모두 하나님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파멸을 요구할 정당성을 자동으로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의 화자는 자기 생명을 노리는 폭악한 자들의 위협을 하나님께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 상황의 심각성과 구체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의 판단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갈등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실 강한 동맹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분께 자신의 생명과 사건의 결말을 맡깁니다.
그리고 기도는 여기서 갑자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왜 위협받던 사람이 기꺼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가?
기꺼이 당신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그 이름이 좋기 때문입니다.시편 54:8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기꺼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דָבָה)는 자발성과 기꺼운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자원하여 드리는 제물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 7:16에서는 서원이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화목제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이 시점에서 제사를 말할까요? 자신이 제물을 드릴 테니 하나님도 반드시 자신을 구원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일까요? 시편의 흐름을 보면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앞에서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돕는 분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했고, 원수들에 대한 판단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따라서 이 제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지급하는 대가라기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도움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좋은 이름이란 단지 듣기 좋거나 아름다운 호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성품과 행동이 선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넘겨주려는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신실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까지 신실하지 않은 분이시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의 이름에 맡깁니다.
시인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에, 그분께 자발적으로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 그 감사의 이유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앞선 시편 50–51편에서 등장했던 제물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을 인간이 공급한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로 응답한다는 이해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건져 내셨기 때문입니다」 — 구원의 기억인가, 믿음의 확신인가?
그분이 모든 곤경에서 저를 건져 내셨기 때문입니다. 제 눈이 제 원수들을 보았습니다.시편 54:9 · 본디새김
3절에서는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이 악을 되돌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원수들을 없애 달라고 청했습니다. 8절에서는 기꺼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미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 사건의 구원을 경험한 뒤의 감사로도, 이미 경험한 여러 구원을 돌아보며 현재의 곤경에서도 도우시리라 확신하는 말로도,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며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찬양의 언어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54편에는 기도자의 구체적인 상황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설명하는 서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사건의 시점을 결정하는 것보다, 간구가 확신과 감사로 나아가는 움직임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의 현실이 기도를 낳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신뢰가 찬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 「제 눈이 제 원수들을 보았습니다」는 무엇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원수들이 패배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원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원수들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장면에 승리나 만족, 복수의 감정을 얼마나 담아 읽을지는 해석의 문제로 남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시편 마지막의 「보았습니다」를 사울의 죽음이나 도엑의 최후 같은 특정 사건에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원수들에게 발견될까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수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곧 원수들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시인의 시야 전체를 차지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건져 내셨다」(נָצַל)에 해당하는 동사는 완료된 행위를 나타내는 형태입니다. 본디새김은 그 형태에 따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고백으로 옮겼습니다. 사무엘상 23장의 사건을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이 고백은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에게 거의 포위될 뻔했지만 블레셋의 침입 소식 때문에 사울은 추격을 중단했고, 다윗은 자신이 계획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 사건을 통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시편 54편의 마지막 절을 반드시 그 한 사건의 완료 보고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보았다」는 전치사와 결합해 승리의 뉘앙스를 띱니다. 이 때문에 원수들의 멸망을 기뻐하며 바라보았다는 뜻을 반드시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이 마지막에 부르는 이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실제로 사울을 피해 도망했고,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하나님께 구원을 구했습니다. 시인이 발견한 안전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등장한 것은 다윗의 이름이었습니다. 지프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저희 곁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그를 지목했습니다. 그의 이름과 은신처가 왕에게 알려지는 순간, 그의 생명은 추격하는 군대 앞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다른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왕에게 알려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처음에는 그 이름으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이름을 찬양합니다.
시편은 다윗이 완전히 안전한 궁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왕위에 올랐다는 말도 없고, 그를 배신한 지프 사람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에게는 군대가 있었고, 지프 사람들은 그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완전히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붙드는 도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움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54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도망자가 갑자기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쫓는 사람들만 바라보던 사람이,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입을 여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기억하는 것은 지프 사람들이 사울에게 전한 자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자신을 건져 내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