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3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없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땅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함한 인간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철학적 논증을 펼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그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다른 사람을 마치 음식처럼 먹어 치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여 행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마침내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이라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으로 끝납니다.

시편 53편이 다루는 문제는 단순히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의 구원이 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653편 본문 읽기 →

「하나님은 없다」 — 어리석은 자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시편 53:1–2 본문 →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을 어리석음이라고 부를까요?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나님은 없다.」 그들은 타락했고 혐오스러운 불의를 저질렀다. 선을 행하는 이가 없다.시편 53:2 · 본디새김

여기서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발(⁨נָבָל⁩)입니다. 이 낱말은 단순히 머리가 나쁘거나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도덕적 분별을 저버린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실제로 나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도왔던 다윗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냉혹하게 대했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이름과 어리석은 행동이 서로 어울린다고 말합니다(사무엘상 25:25).

시편 53편의 「어리석은 자」도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이어서 타락과 불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문장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명제를 철학적으로 논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집중합니다. 따라서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태도뿐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권위를 자신의 삶에서 배제하는 태도까지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도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악하게 행동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현대의 다양한 무신론적 입장을 조사하거나 평가하는 글이 아닙니다. 시인이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말과 타락한 행동이 결합된 특정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한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단지 감정을 느끼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내면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의 판단에서 제외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시편은 그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곧바로 보여줍니다.

주어가 단수에서 복수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자」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그들은」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그런 어리석음이 퍼져 있는 인간 사회 전체로 시선을 넓힙니다.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특정한 어리석은 사람 한 명의 초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삶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충격적인 선언을 덧붙입니다. 「선을 행하는 이가 없다.」 이 말이 얼마나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지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표제에는 「마할랏」과 「마스길」이라는 낯선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할랏」은 다른 곳에서는 시편 88편의 표제에도 등장하는 말입니다. 어떤 곡조나 음악적 지시와 관련된 표현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스길」 역시 시편의 성격이나 연주 방식과 관련된 표제로 사용되지만, 그 기능을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표제의 히브리어 마스킬은 깨닫고 분별한다는 의미를 가진 어근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가리키는 「깨닫고」에도 같은 형태의 낱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문학적 반복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시편 전체가 참된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대조한다는 사실과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려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가?

시편 53:3–4 본문 →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이가 있는지 보려고.시편 53:3 · 본디새김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를 알고 계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부유한 사람이 있는지 살피지 않으십니다. 강한 군대나 큰 성읍이 있는지 찾지도 않으십니다.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이가 있는지」 보려고 하십니다.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깨달음은 단순히 세상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그분을 찾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찾는다」는 말은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뜻을 묻고, 그분께 나아가려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다보신다는 말을 하나님이 상황을 모르셨다가 이제야 알아보시는 행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상태가 하나님의 판단 앞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여러 방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평가를 넘어섭니다. 그분은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다보신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모두 물러났고, 함께 썩어 버렸다. 선을 행하는 이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시편 53:4 · 본디새김

이번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라는 표현까지 덧붙입니다. 2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악행이 고발되었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깨닫고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셨습니다. 4절에서는 그 조사 결과가 선언됩니다.

「물러났다」는 말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느낌보다,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났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썩어 버렸다」는 표현은 부패하여 본래의 좋은 상태를 잃은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두 표현은 죄를 단순히 개별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상태의 문제로 드러냅니다.

정말 단 한 사람도 선하지 않은가?

만일 선을 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면, 뒤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일까요? 시편 52편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의지하던 사람도 있었고, 시편의 여러 곳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타락을 예외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한 언어로 고발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함을 독점하거나 자신의 의로움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편이 모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언제나 똑같이 악하다고 가르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시편은 이어서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우는 악인들과 그들에게 짓밟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두 차원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고발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타락이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쉽게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행한 악의 책임이나 피해의 정도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은 이러한 구분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제 인간의 타락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창세기 6장의 홍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6:12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타락시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장면과 인간의 타락을 묘사하는 표현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시편 53편과 닮아 있습니다. 로마서 3:10–12에서 바울은 시편 14편과 53편의 첫부분과 겹치는 표현들을 인용합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모두 빗나갔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 표현들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논증 안에 사용합니다(로마서 3:9–20). 그러나 시편 53편의 본래 문맥을 먼저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단지 인간 전체가 죄인이라는 추상적인 교리를 설명하려고 이 노래를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우는 악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고발하고, 그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본문이 가진 인간의 보편적 죄성에 대한 언어를 자신의 논증 안에서 사용합니다. 시편 자체에서는 그 보편적 진단이 구체적인 압제와 공동체의 구원을 향한 소망으로 전개됩니다.

사람을 빵처럼 먹어 치우는 사회

시편 53:5 본문 →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알지 못하느냐? 그들은 빵을 먹듯 내 백성을 먹어 치웠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시편 53:5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간 전체를 바라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악을 행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관계가 나타납니다.

이 비유가 강렬한 이유는 먹는 행위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빵은 매일 먹는 음식입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특별한 결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자연스럽게 먹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파괴하는 일을 특별한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은 자기 욕구를 채우는 일상적인 행동처럼 되어 있습니다.

빵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 생존과 이익을 위한 자원처럼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자기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악인들이 먹어 치우는 대상이 「내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이 「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고발하시는 장면이 됩니다. 반면 시인이 자기 공동체를 가리키며 말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이 구절에서 새로운 직접 인용의 시작을 명확히 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악인들이 해치는 사람들은 단지 익명의 피해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악인들은 사람들을 먹어 치우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

3절에서 하나님은 깨닫는 사람이 있는지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책망받습니다.

그들은 먹고, 말하고, 판단하고, 자기 목적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지적 능력의 부족과는 다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내면의 태도는 하나님을 찾거나 부르지 않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의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삶의 마지막 권위와 도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우면서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들의 확신이 무너집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3:2–3에서도 지도자들의 착취와 폭력이 사람의 살을 먹고 뼈에서 살을 벗겨 내는 끔찍한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사람을 먹는다는 표현은 문자적인 식인 행위라기보다 타인의 삶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착취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예언자적 비유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시편 53편에서도 바로 그런 효과를 냅니다.

두려워할 일이 없다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다

시편 53:6 본문 →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할 일이 없었는데도 큰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이 너를 대적하여 진 친 자의 뼈들을 흩었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에게 수치를 안겼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다.시편 53:6 · 본디새김

지금까지 악인들은 거리낌 없이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먹어 치우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 두려움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악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눈에 보이는 위협이 없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그들의 두려움이 일반적인 상황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갑작스럽고 압도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하나님이 악인들의 확신을 뒤집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너를 대적하여 진 친 자의 뼈들을 흩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력이 한 사람이나 공동체를 대적하여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공격하거나 포위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뼈들을 흩으십니다.

고대 전쟁에서 전사자의 뼈가 땅에 흩어져 있다는 이미지는 철저한 패배와 죽음, 수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편은 적군의 전투 계획이나 전쟁의 세부 경과를 설명하지 않고 결과만을 보여줍니다.

앞에서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집니다. 자신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을 마음대로 짓밟던 자들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무력해진 것입니다.

누구의 뼈이며, 누가 수치를 안겼는가?

처음에는 「그들은」이라는 복수 주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곧 「너를 대적하여」와 「너는 그들에게」라는 단수 이인칭 표현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너」가 누구인지는 직접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단수로 부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공격한 자들을 무너뜨리셨고, 그 백성은 대적들이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정한 개인이나 지도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 인물을 식별할 단서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너는 그들에게 수치를 안겼다」는 표현이 실제 군사적인 승리 행위를 가리키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결과 대적들이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가리키는지도 세밀하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정확히 어느 전쟁에서 어떤 군대가 패배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큰 방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던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무너집니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절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의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을 새롭게 들리게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사실이 그들의 패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시하던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이 심판의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려워할 일이 없었는데도 큰 두려움에 떨었다」에서 히브리어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명사와 동사를 반복하여 두려움에 크게 사로잡힌 모습을 강조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에서 또 다른 읽기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너를 대적하여 진 친 자」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자들을 뜻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고대부터 이 구절의 전달과 해석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 이 시편은 시편 14편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첫 문장부터,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장면과,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선언, 시온에서 구원이 오기를 바라는 마지막 소망까지 거의 같은 구조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편 14편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야훼」가 사용되는 부분이 있지만, 시편 53편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일관되게 등장합니다. 또한 시편 14:5–6에서는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 가운데 계시며 가난한 사람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시편 53:6에서는 하나님이 대적들의 뼈를 흩으시고 그들을 버리셨다는 심판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시편 14편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보호의 하나님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면, 시편 53편은 그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는 장면을 더욱 강하게 부각합니다. 왜 같은 노래가 서로 다른 형태로 시편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후대의 새로운 상황에 맞게 노래가 수정되었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전승 형태가 시편집에 함께 보존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53편의 심판 장면을 특정 역사적 전투와 연결하려는 시도도 가능하지만, 그 전투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무너뜨리셨는데, 왜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는가?

시편 53:7 본문 →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킬 때, 야곱은 환호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할 것이다.시편 53:7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은 승리를 자랑하는 선언이 아니라 간절한 소망입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대적들의 뼈를 흩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7절에서는 아직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 바랄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6절의 심판 장면이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회상하는 것이고, 7절은 앞으로 필요한 구원을 구하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적들을 물리치셨다는 사실이 지금의 고난도 끝내 주시리라는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6절의 심판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확신에 차서 묘사하는 시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표현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시간적 관계가 확정적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절을 함께 읽을 때, 악인이 무너지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회복되는 일은 반드시 같은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압제자가 패배했다고 해서 그에게 짓밟혔던 사람들의 삶이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침략군이 물러갔다고 해서 파괴된 집이 곧바로 다시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이 단순히 원수를 제거하는 일로만 끝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백성이 다시 살아가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킬 때」라는 표현은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더 넓게는 불행과 억압 속에 있는 공동체의 형편이 회복되는 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53:7을 반드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관심은 역사적 사건의 세부 사항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형편을 돌이키시는 행동에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온 인류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인간의 타락을 보시는 하나님이, 시온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기대되십니다.

시온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나타내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시온에서 구원이 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군사적인 도움이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뜻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의 처음에 등장했던 것은 부패와 불의였습니다. 중간에는 다른 사람을 먹어 치우는 악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두려움과 수치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환호와 기쁨이 놓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패배할 것인가를 길게 묘사하면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기뻐하게 될 날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목표는 악인의 패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악으로 인해 고통받던 백성의 회복에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킬 때」의 히브리어 표현에는 「돌아오다」 또는 「돌이키다」와 관련된 낱말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30:3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돌이키시고 그들을 다시 모으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욥기 42:10에서도 하나님이 욥의 형편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비슷한 언어로 나타냅니다. 물론 포로 생활과 귀환을 경험한 공동체는 이 노래를 자신들의 회복을 바라보는 기도로 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특정 왕의 이름이나 포로 생활의 시기, 귀환의 장소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7–8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괴로움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53편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불의를 보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두 본문의 상황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는 구체적인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을 이야기하고, 시편 53편은 하나님의 백성을 착취하는 악인들을 고발하면서 공동체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시온에서 기다리는 백성

시편 53:1–7 본문 →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현실과 관계없는 분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살피시고, 악인들이 자신의 백성을 해치는 일을 보시며, 그들을 대적하여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실 분으로 소망의 대상이 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시선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짓밟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았다는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시편 53편의 소망은 인간이 생각보다 선하다는 낙관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 사회를 보고 계시며, 그 안에서 구원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초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곧바로 구출하신다는 단순한 보증이 아닙니다. 시편의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편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서로 다른 두 말이 놓여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속에서 하는 말, 「하나님은 없다」입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바라며 드리는 소망,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기를」입니다.

처음의 말은 하나님을 자기 삶에서 지워 버립니다.

마지막의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삶을 회복시키시기를 기다립니다.

한쪽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먹어 치웁니다. 다른 한쪽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시편은 마지막에 그 구원이 가져올 장면을 짧게 보여줍니다. 「야곱은 환호하고 이스라엘은 기뻐할 것이다.」 더 이상 악인들의 말도, 그들이 누리던 힘도 마지막 장면의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과, 그분이 이루신 일로 기뻐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한 시편이,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기뻐할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끝납니다.

시인은 그날이 언제 올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온을 바라보며, 아직 들리지 않는 그 환호를 기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