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2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잠잠한 영혼은 어디에 마음을 쏟는가
시편 62편에는 처음 읽을 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잠잠하여라」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입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라고 말하면서, 백성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권합니다. 침묵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는 것일까요?
시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곳에서 잠잠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 모의하며, 입으로는 복을 빌면서 속으로는 저주하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시인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은 뒤로 갈수록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모든 인간의 지위와 능력을 저울에 올려놓습니다. 이어 폭력으로 얻은 재물과 늘어나는 부를 살펴봅니다.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과 대조되는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힘과 인애입니다.
이 시편에서 잠잠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최종적으로 신뢰할 것인지 결정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만을 향해 잠잠한 영혼
내 영혼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다. 나의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시편 62:2 · 본디새김
시편은 무엇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말은 「오직」입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오직」(אַךְ), 「참으로」, 「다만」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시에서는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시인이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신뢰하지 않는지 선명하게 구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2절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다고 말하고, 3절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바위와 구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적들이 「오직」 그를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모의한다고 말합니다. 6–7절에서는 다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라는 고백이 반복됩니다. 10절의 「한낱 입김」에서도 같은 히브리어가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적들은 그를 무너뜨리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의지하는 하나님과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같은 저울 위에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2절의 「잠잠하다」(דּוּמִיָּה)는 침묵이나 고요함을 나타내는 명사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시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고요히 머무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 고요함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평온함으로 이해하면 뒤따르는 내용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바로 다음 단락에서 적들의 공격을 날카롭게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위험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잠잠함은 현실을 보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인은 구원이 자신의 능력이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도움이나 현실적인 수단이 전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시가 묻는 것은 궁극적인 의존의 대상입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바위요 나의 구원이며, 나의 높은 피난처다.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시편 62:3 · 본디새김
앞선 시편 61편에서도 바위와 피난처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편은 그 이미지를 설명하기보다 거듭 선언하면서, 그것과 대조되는 인간의 불안정함을 드러냅니다.
히브리어에는 「크게」(רַב)에 해당하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아무리 작은 흔들림도 겪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확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으므로 크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요동치는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적들에게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시인은 바로 그 적들을 향해 돌아섭니다.
이미 기울어진 벽을 다시 밀어 넘어뜨리는 사람들
너희는 언제까지 한 사람에게 고함치려느냐? 기울어진 벽, 밀려 넘어가는 담 같은 그를 너희 모두가 죽이려 하느냐?시편 62:4 · 본디새김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조금 전까지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뢰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공격자들에게 직접 질문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할 것이냐는 책망에 가깝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벽은 굳건히 서 있는 벽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가해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입니다. 본디새김은 이 이미지를 공격받는 사람에게 연결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시인은 이미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여럿이 달려들어 무너뜨리려는 잔혹함을 고발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읽기입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도 적들이 그 사람을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모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기울어진 벽과 담의 이미지가 문장의 끝에 놓여 있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공격받는 사람이 무너지기 쉬운 벽과 같다고 볼 수도 있고, 공격자들 자신이 결국 무너질 벽과 같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공격받는 사람의 취약함을 강조하고, 둘째 해석은 공격자들이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실상은 불안정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의지하는 힘이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견고함과 대조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를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모의했다. 그들은 거짓을 좋아한다. 저마다 입으로는 복을 빌지만, 속으로는 저주한다. 셀라.시편 62:5 · 본디새김
확실한 것은 적들이 그 사람의 지위를 무너뜨리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실제 의도가 서로 반대입니다. 시인이 경험하는 적대감은 단순한 정면 공격이 아닙니다. 우호적인 말 뒤에 적대적인 의도를 숨긴 사람들의 위협입니다.
이 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도 묻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속마음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에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실입니다.
적들은 마음을 감춘 채 복을 빕니다. 시인은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으라고 권합니다.
시편은 거짓된 말과 진실한 마음을 서로 대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높은 자리가 반드시 왕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 명예, 영향력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의 표제가 다윗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왕권을 둘러싼 갈등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본문만으로 특정한 정치적 사건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에게 다시 말하다
내 영혼아,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여라. 나의 희망은 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시편 62:6 · 본디새김
오직 그만이 나의 바위요 나의 구원이며, 나의 높은 피난처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시편 62:7 · 본디새김
나의 구원과 영예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내 힘이 되는 바위와 나의 피난처는 하나님께 있다.시편 62:8 · 본디새김
2절과 6절, 3절과 7절은 거의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반복을 단순한 강조로만 읽으면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자기 영혼에게 직접 명령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이 차이가 나타납니다. 2절에서는 잠잠함을 나타내는 명사가 쓰였지만, 6절에서는 영혼을 향한 명령형이 사용됩니다.
왜 이미 잠잠하다고 고백한 사람이 다시 잠잠하라고 명령할까요?
그 사이에 4–5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향한 공격과 거짓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있다고 해서 적들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혼에게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라고요.
이는 믿음이 없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앞에서 고백한 신뢰를 실제 위협 앞에서 다시 붙드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2절에서는 「나의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고 했고, 6절에서는 「나의 희망은 그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위협에서 건짐을 받는 일을 가리키고, 희망은 그 구원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태도를 더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고백하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까지 하나님께 맡깁니다.
7절에서는 또 하나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앞선 문장에 있던 「크게」가 사라집니다.
이 차이를 시인의 감정이 실제로 얼마나 안정되었는지를 측정하는 기록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의 문학적 흐름에서는 확신이 더욱 단호하게 표현된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적들이 강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위협을 정면으로 바라본 후에도 자신이 의지하는 분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는 「영예」가 추가됩니다. 적들은 그를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합니다. 그의 지위나 명예를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영예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자신이 어떤 자리를 유지하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공격받는 것이 실제 문제이기 때문에 시인은 적들의 행동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예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를 공격자들에게 넘겨주지는 않습니다.
적들이 빼앗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적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 되는 바위이자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이 신뢰는 개인적인 고백에 머물지 않습니다.
잠잠함과 마음을 쏟는 일이 만나는 자리
백성아, 언제나 그를 신뢰하여라. 그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다. 셀라.시편 62:9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시편의 청중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영혼에게 말했지만, 이제는 백성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발견한 신뢰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라고 했는데, 이제는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합니다.
두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잠잠함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태도라면, 마음을 쏟는 일은 그 신뢰가 실제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쏟아 놓아라」는 이미지는 용기에 담긴 것을 밖으로 붓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에 담긴 것을 조금씩 골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라는 표현입니다.
시편 62편에서도 마음을 쏟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억누르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앞에서 적들의 행동을 숨기지 않고 고발했습니다. 이제 백성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감추지 말라고 합니다.
적들은 입으로 복을 빌면서 속으로 저주합니다. 겉으로 드러낸 말과 마음속에 품은 것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그대로 그분 앞에 쏟아 놓으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잠잠함은 마음을 닫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신뢰에서 나옵니다.
앞에서는 「나의 피난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고백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넓어진 것입니다. 시인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 단락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흔히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씩 저울에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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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이미지가 예레미야애가 2:19에도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주 앞에서 마음을 물처럼 쏟으라고 요청합니다. 굶주리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위해 부르짖으라는 말이 이어지므로, 마음을 쏟는다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 정리가 아니라 절박한 기도와 연결됩니다.
저울에 올려놓으니 입김보다 가벼운 사람들
낮은 자들은 한낱 입김이고, 높은 자들은 거짓이다. 저울에 올리면 그들은 위로 들려 올라가니, 모두 합쳐도 입김보다 가볍다.시편 62:10 · 본디새김
시인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낮은 자들과 높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낮은 사람들만 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입김」은 입김이나 수증기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붙잡기 어렵고 지속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문맥에 따라 덧없음, 허무함, 실체 없음 등의 의미로 발전합니다. 시편 62편에서는 저울이라는 이미지가 그 뜻을 선명하게 만듭니다.
저울에 사람들을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올라간 쪽의 저울판이 위로 들립니다.
왜 올라갈까요?
너무 가볍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말하다가, 갑자기 그들을 저울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게가 얼마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의 가치가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사람을 신뢰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을 때,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드러내는 이미지입니다.
실제로 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4–5절의 적들처럼 누군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힘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들을 궁극적으로 견고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적들은 한 사람을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자체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다투지만, 시인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게부터 묻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저울 위에 재물도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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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들과 높은 자들에는 히브리어 브네 아담과 브네 이시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둘 다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문장에서는 서로 대조되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높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벨(הֶבֶל)입니다. 전도서에서 반복되는 그 단어입니다.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마음은 거기에 두지 마라
갈취를 신뢰하지 마라. 약탈에 헛된 기대를 걸지 마라. 재물이 열매를 맺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마라.시편 62:11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사람이 궁극적인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1절에서는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힘과 재물을 다룹니다.
갈취와 약탈은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행동입니다. 시인은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신뢰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악한 행동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재산을 빼앗으면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기대를 부정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구원할 견고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더욱 넓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재물이 열매를 맺더라도」라는 구절은 늘어난 재물이 반드시 불의하게 얻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당하게 재산이 증가하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재물에 마음을 두는 일입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사람은 그분을 자신의 피난처로 신뢰합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재물이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10절의 「입김」과 11절의 「헛된 기대」는 히브리어에서 서로 관련된 표현입니다. 사람이 가볍고 헛되다는 말과, 약탈을 믿는 것이 헛되다는 말이 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시가 여기서 끝난다면 인간의 모든 의지가 허무하다는 어두운 결론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에 전혀 다른 말을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의 무게 없음을 나타낸 헤벨과 같은 어근이 약탈에 헛된 기대를 거는 행동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17:5–8은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대조합니다. 시편 73편은 악인들의 형통을 바라보며 흔들리던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신의 판단을 새롭게 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도 디모데전서 6:17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라고 권합니다. 이 본문들은 시편 62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힘과 번영이 인간의 궁극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고, 시인이 두 가지를 듣다
하나님이 한 번 말했고, 나는 이 두 가지를 들었다. 힘은 하나님께 속하고,시편 62:12 · 본디새김
주, 인애는 당신께 속합니다. 당신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62:13 · 본디새김
그렇다면 왜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까?
마지막 두 구절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시편 62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시인이 그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들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두 가지는 힘과 인애입니다.
다만 마지막의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신다」는 내용을 별도의 두 번째 원리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경우 힘과 인애를 함께 첫 원리로 보고, 행위에 따른 보응을 또 하나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평행 구조에서는 힘과 인애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두 고백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보응에 관한 마지막 문장은 그것이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합니다.
힘은 하나님께 속한다
이것은 시편 앞부분의 모든 장면을 뒤집는 선언입니다.
적들은 힘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의하고, 거짓을 말하고, 사람을 높은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재물도 힘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공격자들이 실제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힘이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힘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힘을 추상적으로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힘이 자신의 구원과 직결된다고 믿습니다.
인애는 당신께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시인의 신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은 그것을 지닌 존재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위협이 될 수도 있고 보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애는 단순한 친절이나 일시적인 호의를 넘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사랑과 신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강하시지만 인애가 없는 분이라면, 그 힘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애가 있지만 힘이 없는 분이라면, 시인이 의지하는 구원의 근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힘이 있는 분이며, 그 힘을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인애와 행위에 따른 보응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인애를 용서와 자비로 이해하고, 행위에 따른 보응을 심판과 처벌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문맥에서는 이 둘이 대립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미 사람들을 죽이려 하고, 거짓을 좋아하고, 갈취와 약탈에 기대는 행동을 고발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위를 살피시고 그에 따라 갚으신다는 것은 불의한 행동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끝나지 않는다는 소망을 담습니다.
피해를 입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인애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을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즉시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다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자체도 그런 상황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시인은 지금 공격받고 있으며, 거짓된 사람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백하는 것은 눈앞의 모든 문제가 이미 정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번 말했고 두 가지를 들었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실제로 한 차례 발언하셨는데 시인이 그 소리를 두 번 들었다는 사건의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 히브리 문학에서는 숫자를 나란히 놓아 내용을 강조하거나 뒤에 이어질 중요한 가르침을 소개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잠언 30:15–16, 18–19 등에서도 한 숫자를 제시한 뒤 다음 숫자로 발전시키는 방식이 사용됩니다. 인애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입니다. 앞선 시편 61편에서는 인애와 신실함이 왕을 지켜 주는 보호자로 묘사되었습니다. 시편 62편에서는 그 인애가 힘과 함께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포됩니다.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
시편 62편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데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납니다.
시인이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힘보다 더 근본적인 힘이 하나님께 있고, 그 하나님이 인애와 공의로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잠잠함은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는 침묵이 아닙니다.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신뢰입니다.
누군가는 고함칩니다. 누군가는 거짓된 복을 빕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웁니다. 누군가는 약탈로 재물을 얻고, 누군가는 늘어나는 부를 믿습니다.
한쪽에는 사람의 입이 있습니다. 복을 빌면서 속으로 저주하고, 거짓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모의하는 입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힘과 인애가 속한다는 진실을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그 말씀을 들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수 있습니다.
높은 자들과 낮은 자들이 저울에 올려집니다. 그들은 모두 합쳐도 입김보다 가볍습니다. 저울판은 위로 들려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해 말합니다. 「내 영혼아,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잠잠하여라.」
그리고 백성을 향해 말합니다. 「백성아, 언제나 그를 신뢰하여라. 그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