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4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아무도 보지 못하리라는 착각
시편 64편에는 두 번의 화살 공격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화살은 사람들이 쏩니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아무런 예고 없이 온전한 사람을 향해 화살을 날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 화살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말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하나님이 쏘십니다. 이번에도 공격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그러나 화살을 맞는 사람은 처음에 공격을 받았던 사람이 아니라, 그를 공격하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시편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처음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며, 그분의 행위를 깨닫습니다.
시편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들이 어디에서 자신감을 얻는지를 자세히 보여 줍니다. 그들은 치밀하게 계획하면 아무도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이 무너집니다.
이 시편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세 가지 대조입니다. 감추어진 악과 드러나는 하나님의 행위, 사람의 화살과 하나님의 화살,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악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원수만이 아니다
하나님, 제가 탄식할 때 제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원수가 주는 두려움에서 제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시편 64:2 · 본디새김
악을 행하는 자들의 모의에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의 무리에서 저를 숨겨 주십시오.시편 64:3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는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표제에는 「다윗의 시편」이라고 적혀 있지만 구체적인 사건은 제시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생애에는 사울의 추격이나 압살롬의 반란처럼 음모와 적대적인 말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어느 하나의 사건에 직접 대응시키기에는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자신이 탄식하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위협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간구를 자세히 보면 조금 특이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원수에게서 구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일으키는 두려움에서 생명을 지켜 달라고 합니다.
적이 사람을 위협할 때 실제로 가할 수 있는 피해도 중요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힘도 큽니다. 언제 공격할지 모르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사람의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구합니다.
그는 아직 적의 공격이 현실화되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협 아래 살아가는 일 자체가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는 고통입니다.
이어지는 간구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숨겨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적들이 하는 일도 몰래 숨어서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감추기 위해 숨어 있고, 시인은 그 악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하나님께 자신을 숨겨 달라고 구합니다.
두 종류의 숨김이 대조됩니다.
또한 적들의 행동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모의」는 비밀스럽게 의논하고 계획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무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רֶגֶשׁ)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위협은 단순히 한 사람이 몰래 품은 악의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행동하고 서로를 부추기는 조직적인 적대감입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그들의 모의로부터 자신을 감추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을 해치려는 계획은 어떻게 실행됩니까? 다음 장면에서 시인은 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무기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두려움」으로 옮긴 히브리어 파하드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가리킵니다. 본문의 표현은 원수가 일으키는 공포를 뜻할 수 있으며, 적의 위협 자체를 그 두려움과 함께 나타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부터의 보호를 명시적으로 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칼처럼 갈아 놓은 혀, 화살이 된 말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칼처럼 갈고, 자기들의 화살인 쓰디쓴 말을 은밀한 곳에서 온전한 사람을 쏘려고 겨누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그를 쏘고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편 64:4–5 · 본디새김
시인은 적들을 무기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칼을 갑니다. 활에 화살을 메깁니다. 공격할 사람을 겨눕니다. 그리고 숨어서 기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인이 지목하는 무기는 혀와 말입니다.
말은 칼이 아닙니다. 그러나 칼이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내듯이, 말도 한 사람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우발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칼을 간다는 이미지에는 준비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말을 정교하게 다듬고, 공격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화살의 이미지는 이 공격의 성격을 더욱 자세히 보여 줍니다. 칼은 가까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지만, 화살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은밀한 곳에서 화살을 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이 지닌 위험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이미지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거짓말이나 악의적인 비방은 그 사람 앞에서 직접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그 말 때문에 상대방이 피해를 입더라도 최초의 발화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시편은 어떤 구체적인 거짓말이 오갔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공격을 반드시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이나 정치적 중상모략 중 하나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무기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겨누는 대상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온전한」은 온전함, 성실함, 흠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그 사람이 모든 영역에서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여기서 묘사되는 공격을 정당하게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갑자기」는 공격받는 사람에게 준비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공격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원수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공격자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공격받는 사람은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반면 공격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자신만만합니까? 다음 단락에서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1:1에서도 욥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소개할 때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시인은 공격받는 사람이 완전무결하다는 철학적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들을 보겠느냐?」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계획을 굳게 다지며, 덫을 숨겨 놓을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누가 그것들을 보겠느냐?」 하고 말했습니다.시편 64:6 · 본디새김
그들은 불의한 일들을 궁리합니다. 「우리가 치밀하게 찾아낸 계책을 완성했다.」 사람의 속과 마음은 깊습니다.시편 64:7 · 본디새김
이 단락에서는 악인들의 행동이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단순히 악한 계획을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계획을 굳게 다지고, 덫을 숨겨 놓을 장소를 의논하며, 더욱 치밀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여기서 「굳게 다지며」라는 표현은 서로를 격려하거나 자신들의 계획을 확고하게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혼자서는 주저할 수 있는 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계획하고 서로 확신을 심어 주면 실행에 옮기기 쉬워질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악인들은 그런 집단적인 결속을 보여 줍니다.
「누가 그것들을 보겠느냐?」라는 짧은 질문은 악인들이 가진 확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들의 덫을 발견하지 못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단순히 누가 볼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계획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그것들」이 숨겨 놓은 덫을 가리키든 악을 행하는 사람들 자신을 가리키든, 핵심은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확신은 시편 10:11에 나타나는 악인의 생각과 닮았습니다. 그곳에서 악인은 하나님이 잊으셨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셨으므로 아무것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64편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동 역시 자신들이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 그들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시인은 여기서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악을 궁리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이 악을 우연히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궁리하고 계획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7절의 마지막 문장 「사람의 속과 마음은 깊습니다」를 단순히 인간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내용과 연결하면 더욱 날카로운 의미가 나타납니다. 악인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들의 마음속 의도와 비밀스러운 궁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 그 사람이 속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모두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깊다는 사실과 그 마음속의 악이 영원히 감추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그 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치밀하므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깊으므로 아무도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시편의 가장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히브리어 대명사는 앞에 나오는 덫들을 가리킬 수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읽으면 아무도 숨겨 놓은 덫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로 읽으면 아무도 자기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뜻에 가까워집니다. 7절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찾다」, 「탐색하다」와 관련된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앞의 동사는 그들이 불의한 일을 찾아 궁리한다는 뜻이며, 뒤의 표현은 철저하게 찾아낸 계책 또는 탐색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압축적이고 난해합니다. 「우리가 치밀하게 찾아낸 계책을 완성했다」는 악인들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시인이 그들의 치밀한 탐색을 바깥에서 묘사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완성했다」에 해당하는 형태와 그 뒤의 표현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악인들이 실제로 어떤 방법을 찾아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제는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사야 29:15는 자기들의 계획을 깊이 숨기면서 누가 자신들을 보고 알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마음을 살피시고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39:11–12에서는 어둠으로 자신을 가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기대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본문들이 시편 64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앎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하나님도 갑자기 화살을 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갑자기 그들에게 상처가 생겼다.시편 64:8 · 본디새김
이 한 구절은 시편 전체의 방향을 뒤집습니다.
앞에서는 악인들이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온전한 사람을 겨누었고,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화살을 쏘십니다.
시인은 여기서 장황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악인들의 계획을 알아내셨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화살을 쏘셨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여러 구절에 걸쳐 자세히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준비하고, 은신처를 정하고, 덫을 숨기고, 서로 의논하며, 치밀한 계책을 완성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단 한 구절에 담깁니다. 그들이 그렇게 오래 궁리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5절에서는 악인들이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갑자기 화살을 쏘십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두 구절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 갑작스러움은 공격받는 사람에게 예고 없는 위험을 뜻했습니다. 두 번째 갑작스러움은 공격자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심판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시적 반전입니다.
악인들은 상대방이 대비하지 못하도록 공격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의 2–3절에서는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가 나오는데, 8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행동이 일어난 것처럼 말합니다. 시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확신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화살은 악인들의 화살과 다르게 묘사됩니다. 악인들의 화살은 「쓰디쓴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화살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반드시 물리적인 무기나 특정한 재난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닥친다는 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또 하나의 은밀한 공격자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숨어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다음 구절들에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악인들의 공격은 감추어지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하나님의 행동은 드러나고 알려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라는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뒤 작성한 역사적 보고로 읽을 수도 있지만, 시의 문학적 흐름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을 확신하며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묘사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전투나 재판, 처벌 사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하나님이 언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악인들에게 상처를 입히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해치던 혀가 자신을 넘어뜨리다
그들의 혀가 도리어 그들을 넘어뜨렸다. 그들을 보는 사람은 모두 달아날 것이다.시편 64:9 · 본디새김
8절에서 하나님의 화살이 등장한 뒤, 9절에서는 다시 혀가 등장합니다. 4절에서 악인들은 자신의 혀를 칼처럼 갈았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말이 그들의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혀가 자신들을 넘어뜨립니다.
시인은 공격에 사용했던 수단이 도리어 공격자에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말이 스스로에게 해가 되어 자신들이 무너졌다고 읽든, 하나님이 그들의 혀를 도리어 그들에게 불리하게 만드셨다고 읽든, 본문이 드러내는 것은 결과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사용한 혀가 자기 자신의 몰락과 연결됩니다.
시의 처음에는 혀가 다른 사람을 해칠 만큼 날카롭고 강력한 무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 혀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넘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남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듬은 말이 결국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 몰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악인들은 「누가 그것들을 보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자신들이 숨긴 악은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의 몰락은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납니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피해 달아나든 머리를 흔들든, 그들의 운명은 공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기를 원했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원문의 문장 구조는 다소 어렵습니다. 혀와 넘어뜨리는 행동의 관계, 그리고 대명사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 여러 읽기가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그들의 혀가 자신들을 넘어뜨렸다고 옮깁니다. 시편 전체의 흐름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짓말을 하다가 발각되었는지, 서로의 말을 모순되게 만들어 자멸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는 말 때문에 심판받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자멸의 과정으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시편 7:15–16과도 닮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고 구덩이를 판 사람이 자신이 판 구덩이에 빠지고, 자신이 꾸민 악이 자기 머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잠언 26:27에서도 함정을 파는 사람이 거기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에게 그 돌이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이 불의를 심판하시는 방식과 악한 행동이 스스로 불러오는 결과가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달아날 것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떠나거나 피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머리를 흔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후자로 읽으면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놀라거나 경멸하며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 그리고 두려워하게 된 모든 사람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고, 하나님이 한 일을 알렸으며, 그가 행한 일을 깨달았다.시편 64:10 · 본디새김
시인은 여기서 단순히 악인들의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갑니다. 악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합니다.
먼저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이 표현은 5절과 직접 대조됩니다. 5절에서는 악인들이 온전한 사람을 공격하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두 구절에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이 사용됩니다. 두려워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경외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러나 두 구절에서 두려움의 성격은 다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드러나거나 심판받을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행동을 본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는 단순한 공포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고, 그분의 행위를 깨닫습니다.
첫째, 그들은 알립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집니다. 이제 말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해치는 무기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는 수단이 됩니다.
둘째, 그들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목격하는 것만으로 시편의 목적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악인들은 치밀한 계책을 궁리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깊은 마음속에서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만들어 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행동을 본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을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지적인 활동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악을 더 효과적으로 행할 방법을 깊이 연구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행동을 깊이 생각하여 그 의미를 깨닫습니다.
시인은 처음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동을 알리는 목소리를 냅니다.
시인의 탄식이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하는 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제어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시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알리고 깨달았다는 사실을 전할 뿐입니다.
그 깨달음 뒤에 마지막 장면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구약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출애굽기 14:31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고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며 그분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편 64편에서도 하나님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이 깊은 사람들에서 마음이 곧은 사람들로
의로운 사람은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며 그에게 피할 것이다. 마음이 곧은 이들은 모두 자랑할 것이다.시편 64:11 · 본디새김
시편은 악인들의 파멸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의로운 사람들의 기쁨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숨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의로운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피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구했고, 마지막에는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에는 또 하나의 대조가 있습니다. 7절에서는 「사람의 속과 마음은 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1절에서는 「마음이 곧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구절 모두 마음을 가리키는 같은 낱말을 사용합니다.
앞에서는 악인들의 치밀한 계책과 깊은 내면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제는 의로운 사람들의 곧은 마음이 강조됩니다.
깊은 마음과 곧은 마음이 서로 대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깊다는 말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악인들의 숨겨진 생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깊음이 악을 은폐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반면 「마음이 곧은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방향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시편은 사람이 얼마나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는지보다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악인들은 깊은 마음속에서 남을 해칠 계획을 세웁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곧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 안에서 기뻐합니다.
마지막의 「자랑할 것이다」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내세우는 자랑이 아닙니다. 앞의 문장과 연결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치밀한 계책을 완성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기뻐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 계책을 세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믿었지만,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앞부분에서는 계속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마지막에서는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 변화에 반드시 특별한 문학적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호칭이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
시편 64편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화살이지만, 그 화살을 둘러싸고 더 깊은 주제가 전개됩니다. 바로 감추어진 것과 드러나는 것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감추어져 있던 것은 악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악인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힘과 지혜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곧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감추어진 악을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악의 힘을 꺾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물론 이를 모든 악한 계획이 곧바로 실패하고, 모든 거짓말이 즉시 드러나며, 모든 의로운 사람이 현세에서 반드시 억울함을 풀게 된다는 보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시의 확신은 심판이 일어나는 정확한 시기나 방법을 사람이 예측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시편은 말이 실제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읽으면서 말의 폭력을 겪는 사람에게 단순히 참으라거나,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본문의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탄식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이 시에서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보호를 받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제 위협을 겪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이유도 없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발견되지 않을 만큼 치밀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동하시자,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칭찬하는 대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깨닫습니다.
은밀한 곳에서 날아오던 쓰디쓴 말의 화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행위를 전하는 말이 남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계획은 무너지고,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그들의 말도 힘을 잃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곧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사람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화살로부터 사람을 지켜 주시는 여호와야훼를 향한 그들의 기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