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8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누가 살 곳을 얻는가
시편 68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흩으시기를 바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연기가 흩어지고 밀랍이 녹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사라지기를 구합니다. 거대한 전쟁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불과 몇 절 뒤, 시인은 하나님을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과부들의 재판관」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어째서 수많은 원수를 흩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고아와 과부의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시인은 왜 하나님의 강력한 병거를 노래하다가, 홀로 있는 사람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는 일을 말할까요?
이 두 장면은 서로 다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흩으시지만,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십니다. 반역하는 자들을 메마른 땅에 두시지만, 지친 백성에게는 비를 내려 주십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는 분이면서, 날마다 자기 백성의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편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움직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광야를 걸어가시고, 산을 흔드시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며, 마침내 성소에서 찬양을 받으십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앞에서 행진하시던 하나님을 노래하지만, 마지막에는 땅의 모든 왕국을 향해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부릅니다.
시편 68편에는 출애굽의 기억, 전쟁의 승리, 성소의 행렬, 여러 민족의 미래가 빠르게 교차합니다. 표현이 난해한 곳도 많고, 모든 장면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정확하게 대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장면을 하나로 묶는 흐름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기까지 걸어오신 길을 기억하며, 그분의 다스림이 온 땅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두 무리의 운명이 갈린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원수들이 흩어지고, 그분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분 앞에서 달아나기를 바랍니다.시편 68:2 · 본디새김
이 말은 민수기 10:35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하면서 언약궤가 출발할 때,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흩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백성의 앞길을 여시고, 그 길을 가로막는 세력을 물리쳐 달라는 간구입니다.
68편의 첫 절을 이러한 배경에서 읽으면, 뒤이어 펼쳐질 광야와 시나이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시인은 오래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보다 앞서 가셨던 일을 기억하면서, 다시 그렇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지고, 밀랍은 불 앞에서 녹습니다. 여기서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연기나 밀랍의 저항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맞닥뜨린 힘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규모나 무기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옵니다.
의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환희에 차고, 기쁨으로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시편 68:4 · 본디새김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누구에게는 두려움이고 누구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사건은 단순히 한편이 이기고 다른 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의 운명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68편의 승리와 기쁨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이 물러나야, 그 힘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광야를 다스리는 분이 홀로 있는 사람을 돌보신다
5절에서 시인은 모든 사람에게 노래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께 노래하여라. 그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사막 평야를 타고 가는 이를 위하여 길을 돋우어라. 야가 그의 이름이다. 그 앞에서 기뻐하여라.시편 68:5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길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길을 돋우어라’는 표현은 길을 마련하거나 높여 정비하는 행동을 나타내며, 왕이 지나갈 길을 준비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왕은 사람이 오가기 어려운 광야를 자신의 길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막 평야’는 ‘광야의 평원들’로도, ‘구름들’로도 읽히는 표현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하나님께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을 자유롭게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묘사는 유지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기의 거룩한 거처에 있는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과부들의 재판관이다.시편 68:6 · 본디새김
당시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는 생계와 법적 보호를 제공할 가족의 울타리를 잃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권리를 주장하고, 억울함을 바로잡고, 삶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가족의 보호를, 다른 하나는 공적인 정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적인 삶의 빈자리와 사회적인 보호의 빈자리를 모두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지는 7절은 그 보호가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홀로 있는 이들을 집에 살게 하고, 갇힌 이들을 풍요 가운데 이끌어 낸다. 그러나 반역하는 자들은 메마른 땅에 살았다.시편 68:7 · 본디새김
여기서 ‘집에 살게 한다’는 것은 건물 하나를 제공한다는 말보다 넓습니다. 홀로 고립된 사람이 안정된 삶의 자리를 얻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집은 머무를 공간이면서 동시에 소속과 관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갇힌 사람도 밖으로 나옵니다. 반면 반역하는 자들은 메마른 땅에 남습니다. 한쪽에는 거처와 풍요가 있고, 다른 쪽에는 황폐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적을 쫓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자리를 마련해 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의 전쟁을 노래하면서 고아와 과부를 이야기한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통치인지는 가장 보호받기 어려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막 평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아라보트는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지형을 가리키는 ‘광야의 평원들’로 읽을 수 있고, 하늘을 달리는 신적 전사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구름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본디새김은 지형적 의미를 택했습니다. 뒤이어 광야 행진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성품은 신명기 10:18에서도 확인됩니다. 신명기 10:17–19에서는 위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정의를 세우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한 흐름 안에서 제시됩니다. 이사야 40:10–11에서는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목자처럼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약자를 돌보시는 성품은 구약 안에서 반복하여 함께 나타납니다.
시나이에서 떨던 땅에 비가 내린다
이제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 앞에 나아가셨을 때, 황무지를 걸어가셨을 때, 셀라.시편 68:8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앞에’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멀리서 관찰하시거나 목적지만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앞서 나아가셨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미 지나가고 계시는 길을 따라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땅이 흔들리고 하늘마저 물을 떨구었습니다. 저 시나이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흔들렸습니다.시편 68:9 · 본디새김
시나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산입니다(출애굽기 19장). 그러나 시인은 언약의 조항이나 모세의 행동보다, 하나님 앞에서 떨던 자연을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드보라의 노래인 사사기 5:4–5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행진하실 때 땅이 떨고 하늘이 비를 내리며 산들이 흔들립니다.
광야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이시고, 시나이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다른 사건들이 하나님의 행진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11절에서 장면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넉넉한 비를 뿌려 주셨습니다. 당신의 소유지가 지쳤을 때, 당신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습니다.시편 68:10 · 본디새김
하늘에서 내리는 물은 앞에서는 땅을 흔드는 하나님의 장엄한 출현에 속했습니다. 이제는 지친 땅을 회복시키는 비가 됩니다.
여기서 ‘당신의 소유지’가 구체적으로 땅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11절에서 공동체가 그곳에 자리 잡았다고 말하는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신 삶의 터전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백성 자체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용례와도 연결됩니다(신명기 9:29). 어느 쪽이든 중심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소유가 지쳤을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공동체가 그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으로 가난한 이를 위해 마련하셨습니다.시편 68:11 · 본디새김
광야를 지나게 하신 일과 비를 내려 주신 일이 여기에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인도하신 목적은 단지 이동에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인은 그 일을 ‘가난한 이를 위해’ 마련하신 일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약한 사람의 삶을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시편은 출애굽의 위대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사건이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왕들은 달아나고, 집에 있던 여자들은 전리품을 나눈다
이제 전쟁의 승리가 노래로 전해집니다.
주가 말을 내린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은 큰 군대다. 군대들의 왕들이 달아난다, 달아난다. 집에 머무는 여자는 전리품을 나눈다.시편 68:12–13 · 본디새김
전쟁을 이끌던 왕들은 도망갑니다. 그러나 전쟁터의 지휘관이 아닌 여자들이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집에 머물던 여자에게까지 전리품이 돌아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승리 노래에서 여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5:20–21에서는 미리암과 여자들이 손북을 들고 춤추며 구원을 노래합니다. 사무엘상 18:6–7에서도 여자들이 노래와 춤으로 전쟁에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합니다. 68편에서는 이들이 승리를 알리는 커다란 무리로 묘사됩니다. 승리의 소식이 전쟁터에서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는 모습입니다.
‘달아난다, 달아난다’는 왕들의 위엄을 묘사하는 대신 허겁지겁 무너지는 모습을 두 번 되풀이합니다. 전쟁을 지휘하던 이들이 도리어 도망하는 자가 됩니다.
그다음 14–15절에서는 시편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난해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두 우리 사이에 눕는다면, 비둘기의 두 날개는 은으로 덮여 있고, 그 날갯깃은 푸르스름한 금으로 덮여 있다.시편 68:14 · 본디새김
양 우리 사이에 눕는 장면은 사사기 5:16을 연상시킵니다. 그곳에서는 르우벤 사람들이 양 떼 곁에 머물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문제로 제기됩니다. 68편에서도 집에 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풍요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비둘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과 금으로 빛나는 날개가 전리품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고, 회복된 이스라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비둘기를 장식물이나 실제 새의 모습에 비유한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비둘기를 명시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5절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능자가 그곳에서 왕들을 흩뜨릴 때, 찰몬에 눈이 내렸다.시편 68:15 · 본디새김
여기서 눈이 실제 기상 현상을 가리키는지, 흩어지는 군대나 전리품의 빛나는 모습을 비유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들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 장면으로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주변 문맥에서 확인되는 핵심은 뚜렷합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흩으신 승리가 왕궁이나 군대 안에 갇히지 않고,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기쁨과 풍요로 전해집니다.
그 승리의 노래는 이제 하나님의 산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찰몬은 사사기 9:48에도 등장하는 산 이름입니다. 그러나 두 본문이 반드시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높은 산보다 하나님께서 거처로 택하신 산
16절은 갑자기 산을 향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산, 바산의 산, 봉우리들이 솟은 산, 바산의 산.시편 68:16 · 본디새김
바산은 요단강 동쪽의 북부 지역으로, 높은 지형과 풍요로운 목초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곳 산들의 높고 웅장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그 산들을 책망하듯 묻습니다.
봉우리들이 솟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기 거처로 원한 저 산을 시샘하며 지켜보느냐? 참으로 여호와야훼가 그곳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시편 68:17 · 본디새김
문맥상 ‘저 산’은 하나님께서 성소를 두신 시온, 곧 예루살렘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30절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명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연적인 높이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산의 크기와 웅장함만으로 하나님의 거처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머무르실 곳을 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머무르시는 것은 그 산이 다른 모든 산보다 압도적으로 높거나 우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장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장소의 위대함이 하나님의 임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병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이만 대, 수천에 또 수천이다. 주가 그 가운데 있고, 시나이가 성소에 있다.시편 68:18 · 본디새김
고대 전쟁에서 병거는 군사력의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이만 대, 수천에 또 수천’이라는 표현은 군사 장비의 정확한 수량을 보고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위엄과 압도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어려운 것은 ‘시나이가 성소에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나이에서 성소로 오셨다고 이해하는 번역도 있고, 주께서 수많은 병거 가운데 계시며 시나이의 거룩함이 성소에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서 8–9절에서 시나이가 등장했고, 이제 하나님의 거처인 성소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시나이의 하나님과 성소의 하나님을 서로 다른 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이끄셨던 분이 이제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십니다.
이 움직임은 19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당신께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고, 포로들을 사로잡으셨으며, 사람들에게서, 반역하는 자들에게서까지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야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려는 것입니다.시편 68:19 · 본디새김
여기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승리한 왕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신의 통치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로잡고 예물을 받는 것은 고대 왕의 승리 행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왕의 이미지를 하나님께 적용합니다.
그런데 승리의 목적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 ‘야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려는 것입니다’가 뜻밖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승리를 단순히 정복의 완성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일과 연결합니다.
광야에서는 백성의 앞에 계셨습니다. 시나이에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십니다.
구약에서 성소는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고 정하신 장소입니다(출애굽기 25:8). 그런 점에서 이 시편의 높은 산은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한 자리를 뜻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머무르시기로 하신 자리를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물의 출처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표현과 반역자들에 대한 서술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승리한 분이 사람들 가운데서 예물을 받으신다는 기본 장면은 유지됩니다. 이 절은 사무엘하 6장에서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지는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그 사건이 이 시편의 직접적인 저작 배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표제의 ‘다윗의 시편’ 역시 특정한 저작 상황을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신약의 에베소서 4:8은 시편 68:19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는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연결합니다. 본디새김 시편 68:19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예물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지만, 에베소서 4:8에서는 높이 올라가신 분이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은 모두 받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에베소서는 이 승리의 이미지를 그리스도께서 자기 공동체에 선물을 주시는 장면에 적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두 문장의 차이를 없애기보다는, 신약이 구약의 승리 노래를 새로운 문맥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시편 68편 자체의 의미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수많은 병거를 거느리시는 분이 날마다 짐을 지신다
19절까지 하나님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는 승리의 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 시인의 어조가 갑자기 가까워집니다.
주가 찬양받기를. 날마다 우리를 위해 짐을 지는 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다. 셀라.시편 68:20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수천에 또 수천의 병거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이 문장은 누가 무엇을 짊어지는지에 관하여 번역상 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짐을 져 주신다는 해석도 있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좋은 것을 실어 주신다는 방향의 해석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께서 짐을 지시는 모습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앞선 장면과 깊은 대조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적의 무거운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의 무거운 짐은 친히 지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날마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시편 앞부분은 출애굽과 승리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20절은 그때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나간 시대의 위대한 사건에만 속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백성의 현실 안에서도 경험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그 돌봄의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며,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들은 주 여호와야훼에게 있다.시편 68:21 · 본디새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들(תּוֹצָאָה)’에는 나가는 길이나 출구를 뜻하는 명사가 쓰였습니다. 시편은 죽음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벗어날 길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앞서 광야에 길을 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벗어날 길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다시 거친 전쟁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자기 원수들의 머리를, 자기 죄 속을 걸어 다니는 자의 머리털 덮인 정수리를 짓부술 것이다.시편 68:22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원수에 대한 심판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짓누르는 적대적인 힘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원수는 단순히 이스라엘과 정치적으로 다른 집단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자기 죄 속을 걸어 다니는 자’라는 표현은 그 적대적인 행동의 도덕적 성격까지 드러냅니다.
주가 말했다. 「바산에서 내가 도로 데려오겠다.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데려오겠다.」시편 68:23 · 본디새김
누구를 데려오시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선 구원의 고백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되찾아 오시는 약속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22절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과 이어지는 24절의 승리 장면을 고려하면, 아무리 멀리 도망한 원수라도 다시 끌어내어 심판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은 후자의 해석에 무게를 주지만, 문장 자체에서 대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은 남습니다.
24절의 피와 개들의 모습은 오늘의 독자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전쟁의 참혹한 승리 장면에 속합니다. 성경이 이 모습을 기록했다는 사실과, 현대의 독자가 이러한 폭력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시편은 특정한 위협과 적대 세력 앞에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본문을 해설하면서 그 폭력성을 다른 의미로 완전히 바꾸어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시인이 그리는 세계에는 실제적인 전쟁과 죽음의 위험이 존재합니다. 그 위험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위협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히브리어 야아모스는 짐을 싣거나 지운다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행렬 안에 작은 베냐민도 있다
25절에서 시인은 마침내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을 말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성소 안에서 당신의 행렬, 곧 제 하나님, 제 왕의 행렬을 보았습니다.시편 68: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행진하시는 모습이 회상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행렬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움직이셨는지를 기억하던 노래가,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장면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손북을 치는 젊은 여자들 가운데서 노래하는 이들이 앞장섰고, 현악기를 타는 이들이 뒤따랐다.시편 68:26 · 본디새김
앞서 전쟁의 승리를 전하던 여자들의 노래가 여기서는 성소의 찬양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왕과 군대만을 행렬의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공동체의 예배로 옮겨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샘에서 나온 이들아, 모임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시편 68:2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샘’은 이스라엘의 근원이나 그에게서 나온 공동체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특정한 지리적 샘으로 확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이 표현을 통해 시인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찬양에 초대합니다.
그다음 28절에는 네 지파가 등장합니다.
거기에는 그들을 다스리는 작은 베냐민이 있고, 유다의 지도자들과 그 무리, 스불론의 지도자들과 납달리의 지도자들이 있다.시편 68:28 · 본디새김
왜 하필 이 네 지파일까요?
베냐민과 유다는 이스라엘 남부와 관련되고,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부에 자리 잡았던 지파들입니다. 따라서 남북의 여러 지파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은 공동체 전체가 찬양에 참여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은 베냐민’이라는 표현은 베냐민의 규모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다른 지파들 가운데 작은 지파로 여겨지는 위치를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은 베냐민이 행렬에서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하나님은 홀로 있는 이들을 집에 살게 하시고, 가난한 이를 위해 마련하시는 분으로 노래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을 찬양하는 행렬에는 크고 작은 지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자리는 강한 이들만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나라들이 예물을 가져온다
이제 시인의 시선이 이스라엘 바깥으로 넓어집니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했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희를 위해 행하신 그 일을 굳세게 해 주십시오.시편 68:29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의 간구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힘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힘이 계속해서 확고하게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오래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을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위에 있는 당신의 성전 때문에 왕들이 당신께 예물을 가져올 것입니다.시편 68:30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 다른 왕에게 예물을 가져오는 행동은 존중이나 외교적 관계를 나타낼 수 있었고, 때로는 우월한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열방의 왕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다음 절에서는 여전히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책망이 나옵니다.
은 조각들을 들고 엎드리는 갈대숲의 짐승을, 민족들의 송아지들과 함께 있는 힘센 수소 떼를 꾸짖어 주십시오. 그는 전쟁을 즐기는 민족들을 흩뜨렸다.시편 68:31 · 본디새김
이 절의 동물들은 실제 가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갈대숲의 짐승’은 나일강과 관련된 이집트의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29:3–5에서도 이집트의 왕은 나일강에 있는 커다란 물짐승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이 절의 짐승을 특정 동물이나 한 나라로 반드시 확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소 떼와 송아지들은 강한 나라들과 그들에게 속한 민족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 조각을 가져오는 행동은 예물을 바치거나 복종을 나타내는 행위일 가능성이 있지만, 히브리어의 연결 관계가 난해하여 세부적인 해석은 갈립니다.
이 절의 마지막 표현은 시편 앞부분과 다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즐기는 민족들을 흩으십니다. 처음에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구했던 기도가 이제 여러 민족의 세계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32절에서는 장면이 바뀝니다.
이집트에서 사절들이 올 것이다. 쿠시는 제 두 손을 하나님께 서둘러 내밀 것이다.시편 68:32 · 본디새김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종살이하던 땅입니다. 쿠시는 고대 나일강 상류 지역과 관련된 나라로, 오늘날의 수단 일대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안에만 갇힌 신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 역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을 바라봅니다.
‘두 손을 내민다’는 행동은 간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움직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시편 초반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분 앞에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끝부분에서는 여러 나라가 하나님을 향해 다가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나라가 이미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역사적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왕권의 비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노래했지만, 끝에서는 땅의 모든 왕국이 노래한다
33절에서 찬양의 초대가 마침내 온 땅으로 확장됩니다.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여라. 주를 찬양하여라, 셀라.시편 68:33 · 본디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께 노래하라는 명령이 나왔고, 27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모임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초대의 대상은 땅의 모든 왕국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머무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옛적부터 있는 하늘의 하늘을 타고 가는 이를. 보아라, 그가 자기 목소리로 힘찬 소리를 낸다.시편 68:34 · 본디새김
여기서 5절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사막 평야를 타고 가시는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는 옛적부터 있는 하늘의 하늘을 타고 가시는 분으로 노래됩니다. 광야의 길과 하늘의 높은 곳이 하나님의 활동 무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도 힘이 있습니다. 앞서 시나이에서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물을 내렸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힘을 돌려라. 그의 위엄은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힘은 구름 속에 있다.시편 68:35 · 본디새김
‘힘을 돌려라’는 말은 하나님께 없는 힘을 인간이 보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힘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양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 절은 뜻밖의 방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성소들에서 두려운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에게 힘과 큰 능력을 준다. 하나님이 찬양받기를.시편 68:36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노래하다가 마무리에서 그 능력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서 20절에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백성의 짐을 지신다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부족해서 사람들의 짐을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자기 백성을 위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강한 분이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시편의 처음과 끝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바랐던 사람들, 광야에서 지쳤던 사람들, 집이 필요했던 사람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구원을 구했던 사람들, 성소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시편 68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고대의 왕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높은 곳에 앉고, 많은 전리품과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68편의 하나님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면서 동시에 지친 백성의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돌보심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그 구원이 사람들의 삶에 무엇을 이루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시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는 두려움만 만들어 내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통치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바라는 한 공동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온 땅의 왕국을 향해 노래하라는 초대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수천에 또 수천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힘차게 울리고, 산들은 그분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에 오르시고, 모든 왕국 위에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 날마다 자기 백성의 짐을 지십니다.
시편 68편의 마지막 찬양,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에게 힘과 큰 능력을 준다. 하나님이 찬양받기를」은 바로 그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