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2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가장 낮은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왕

시편 72편에는 놀라울 만큼 강력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미칩니다. 먼 나라의 왕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모든 민족이 그에게 엎드립니다. 그의 이름은 해가 있는 동안 이어지며, 온 땅이 그의 다스림 아래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왕이 왜 그토록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궁핍한 이를, 도울 자 없는 가난한 이를 구해 내기 때문입니다」(12절). 시인은 왕의 거대한 군대나 뛰어난 전술을 이유로 들지 않습니다. 왕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정복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14절은 「그들의 피는 그의 눈에 귀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가 그에게 예물을 가져오는 왕이, 궁핍한 사람 한 명의 피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시편 72편의 중심을 이루는 역설입니다.

시인이 바라는 위대한 왕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생명까지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위대한 왕입니다.

시편 71편에서는 늙어 가는 사람이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72편은 다음 세대의 왕이 어떤 통치를 펼쳐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시선이 한 사람의 생애에서 왕국 전체의 미래로 옮겨 갑니다.

시편 72편은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왕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기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왕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나오며, 누구를 위해 행사되고,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72편 본문 읽기 →

왕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다

시편 72:1–4 본문 →

시편은 ‘솔로몬을 위하여’라는 표제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리슐로모(⁨שְׁלֹמֹה⁩)는 솔로몬과의(⁨צְדָקָה⁩) 관계를 나타내지만, 그것만으로 솔로몬이 직접 시를 지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시로 읽을 수도 있고, 그를 위해 지어진 시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왕과 왕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는 점에서, 왕위 계승이나 새로운 왕의 통치를 축복하는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즉위식에서 사용되었다거나 다윗이 솔로몬에게 직접 남긴 기도라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솔로몬을 위하여. 하나님, 당신의 판결들을 왕에게 주시고, 당신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십시오.시편 72:1 · 본디새김

시인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많은 영토와 재물을 주시기를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결과 의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판결들’은 하나님의 판단과 공의로운 법적 결정을 가리킵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한 올바름과 정의를 나타냅니다. 두 표현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내리고, 그분의 의에 합당하게 다스리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 위에 서 있지만, 하나님 위에 서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판단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지만, 옳고 그름의 최종적인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왕이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왕의 통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올바른 판단을 요청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판단이 누구에게 가장 필요할지 곧바로 밝힙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의로 재판하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기를 바랍니다.시편 72:2 · 본디새김

‘당신의 백성’, 그리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입니다. 시인은 그들을 왕의 소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다스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왕은 그들을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공정하게 재판하느냐는 그들에게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가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해 판결하고, 궁핍한 이들의 자녀들을 구원하며, 억압하는 자를 짓부수기를 바랍니다.시편 72:4 · 본디새김

왕이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의 권리를 지키고, 위험에서 구해 내며, 그들을 짓누르는 세력을 막아 주기를 바랍니다.

‘궁핍한 이들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은 정의가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왕의 정의는 지금 고통받는 사람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또한 시인은 억압하는 자를 ‘짓부수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앞서 등장한 의로운 판결이 단순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약한 사람을 억압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할 때, 왕은 그 힘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런 통치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3절에서 시인은 산과 언덕을 바라봅니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오고, 언덕들도 의로 평화를 가져오기를 바랍니다.시편 72:3 · 본디새김

백성이 살아가는 땅 전체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정의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관계와 삶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사람들이 안전과 안정을 누리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데 나라가 평화롭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편 72편에서 정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이 아닙니다. 백성이 누려야 할 평화 자체를 이루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이해는 신명기 17:18–20에 제시된 왕에 관한 규정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왕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두고 읽으며, 마음이 형제들 위로 높아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3:9에서도 솔로몬은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며, 3:16–28에는 솔로몬이 두 여자의 다툼을 판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4:20–25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풍요와 평화가 묘사되고, 10:1–13에서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찾아와 예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그 모습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서는 솔로몬의 신앙적 실패가 기록되고, 열왕기상 12:4에서는 백성들이 솔로몬 시대에 자신들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요청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72편은 솔로몬 시대의 성취를 찬양하는 노래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을 비롯한 모든 왕이 어떤 모습이어야 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과 왕권의 지속에 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왕이 어떤 행동을 하든 무조건 의로운 통치자가 된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이사야 11:1–5에서는 다윗의 계열에서 나오는 통치자가 가난한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하고 땅의 겸손한 이들을 위하여 정의를 세우는 모습이 묘사되고, 예레미야 22:15–16에서는 요시야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의 권리를 세웠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아는 일과 연결됩니다.

좋은 왕은 땅을 짓밟는 사람이 아니라 비처럼 내려오는 사람이다

시편 72:5–7 본문 →

시인은 이제 왕의 통치가 얼마나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지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해가 있는 동안 당신을 경외하고, 달이 있는 동안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기를 바랍니다.시편 72:5 · 본디새김

여기서 ‘당신’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1절부터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고 있으므로 본디새김처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문맥이 왕의 지속적인 통치를 기원하고 있으므로 왕을 향한 경외나 존중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나 왕에 대한 경외보다, 왕의 통치가 해와 달이 있는 동안 지속되는 의미에 가깝게 옮깁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은 시인이 한 세대에 그치는 통치가 아니라 오래도록 지속되는 질서를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가 풀을 벤 땅에 내리는 비처럼, 땅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기를 바랍니다.시편 72:6 · 본디새김

고대 근동에서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왕이 온다는 것은 병거와 군대가 다가오는 장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상적인 왕이 오는 모습을 비에 비유합니다.

비는 땅을 정복하지 않습니다. 땅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적십니다.

왕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백성을 짓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사무엘하 23:3–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다스리는 통치자는 아침의 빛과 비를 맞아 자라는 풀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그의 시대에 의로운 이가 꽃피고, 달이 없어질 때까지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시편 72:7 · 본디새김

여기서 꽃피는 것은 왕의 명예가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입니다.

강력한 왕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이루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은 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복되게 했는지, 특별히 의로운 이들이 그 아래서 얼마나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가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좋은 통치의 열매는 통치자 자신이 얼마나 커졌는가보다, 그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살아가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동사 이라우카는 ‘그들이 당신을 경외할 것이다’라는 뜻이며, 칠십인역의 번역은 고대 번역 전승에서도 이 문장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했음을 보여 줍니다. 6절의 히브리어 게즈는 깎이거나 베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로, 풀을 벤 땅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양털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양털을 뜻하는 표현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비가 떨어지는 대상의 정확한 의미는 열려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풀을 벤 땅으로 읽으면, 비는 한 차례 베어지고 다시 자라야 하는 땅을 적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리는 왕 — 그런데 왜 그렇게 넓어야 하는가?

시편 72:8–11 본문 →

이제 시편은 갑자기 지평을 넓힙니다.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기를 바랍니다.시편 72:8 · 본디새김

시인은 왕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국경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강’은 구약의 영토 약속에 등장하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15:18; 출애굽기 23:31). 그러나 시편의 표현은 특정한 국경선을 상세히 기록하는 행정 문서가 아니라, 왕의 통치가 널리 확장되기를 바라는 시적 언어입니다.

들짐승들이 그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원수들이 흙먼지를 핥기를 바랍니다.시편 72:9 · 본디새김

원수들이 흙먼지를 핥는 장면은 굴복과 패배를 나타냅니다. 이는 고대 왕권의 승리를 표현하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매우 먼 지역들이 등장합니다.

타르시스와 해안 지역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고, 스바와 세바의 왕들이 예물을 가져오기를 바랍니다.시편 72:10 · 본디새김

시인은 이러한 지명을 통해 먼 곳에 있는 왕들까지 예물을 가져오는 모습을 그립니다.

모든 왕이 그에게 엎드리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기를 바랍니다.시편 72:11 · 본디새김

여기까지만 읽으면 시편은 이상적인 세계 제국을 꿈꾸는 노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구절들은 왕의 보편적인 지배를 바라는 강력한 왕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 점을 약화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읽기를 멈추면 시편이 왜 그러한 권세를 바라는지 놓치게 됩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이유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들짐승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치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광야에 사는 동물들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광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읽기도 합니다. 타르시스는 구약에서 먼 해상 교역지와 연결됩니다. 그 정확한 위치에는 논의가 있지만, 시편에서는 먼 바다 너머의 나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바는 아라비아 남부의 교역 세계와 관련되며, 세바는 구약의 족보와 지리적 언급에서 스바와 구별되는 이름입니다. 흔히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과 연결하여 이해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정확한 지리적 범위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왕의 모습은 이사야 9:6–7의 다윗의 왕좌 위에 정의와 의로 세워질 통치, 스가랴 9:9–10의 평화를 선포하며 땅끝까지 다스리는 왕과 함께 구약 안에서 점차 깊어지는 왕권의 소망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자 약속된 왕으로 소개합니다(누가복음 1:32–33). 마태복음 2:1–12에서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예물로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은 시편 72:10–11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마태복음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며, 두 본문의 관계는 후대의 정경적 읽기와 왕권의 주제적 연결로 구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시편 72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의를 따라 다스리고, 그 결과 모든 민족에게까지 복이 퍼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모든 왕이 그에게 엎드리는 이유

시편 72:12–14 본문 →

12절은 ‘왜냐하면’,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궁핍한 이를, 도울 자 없는 가난한 이를 구해 내기 때문입니다.시편 72:12 · 본디새김

이 짧은 접속사가 앞선 거대한 왕권의 장면을 새롭게 읽게 합니다. 왜 모든 왕이 그에게 엎드려야 합니까? 시인은 그 이유로 궁핍한 사람을 구해 내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이 구절이 왕의 국제적 지배에 관한 모든 정치적 논리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편이 어떤 왕을 존귀하게 여기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도울 자 없는 가난한 이’에게는 자신을 대신하여 싸워 줄 유력한 친척이나 후원자가 없습니다. 권리를 주장할 힘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만한 영향력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지, 왕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고, 그를 도울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 제시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왕의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힘없는 이와 궁핍한 이를 불쌍히 여기고, 궁핍한 이들의 목숨을 구원할 것입니다.시편 72:13 · 본디새김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일시적인 감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연민이 실제적인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억압과 폭력에서 그들의 목숨을 속량하고, 그들의 피는 그의 눈에 귀할 것입니다.시편 72:14 · 본디새김

‘속량하다(⁨גָּאַל⁩)’는 누군가를 되찾거나 보호할 권리와 책임을 행사한다는 뜻을 지닌 동사와 관련됩니다. 왕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개입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피’는 이 문맥에서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폭력으로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의 생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의 피가 왕의 눈에 귀하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생명이 함부로 흘려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생명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거꾸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피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시편의 왕권 이해가 절정에 이릅니다.

모든 왕이 그 앞에 엎드리기를 바라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가 가장 소중하게 보아야 할 것은 자신에게 엎드리는 왕들의 조공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억압하거나 죽이려 하는 가난한 사람의 생명입니다.

왕이 권력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존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넓은 영토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군대와 먼 나라의 조공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왕의 눈이 가난한 사람의 피를 귀하게 여기는 눈이기를 바랍니다.

왕이 무엇을 보고 그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그의 통치가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속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가알과 관련된 동사는 구약에서 가까운 친족이 곤경에 처한 사람이나 그 가족의 재산을 되찾는 일에도 사용됩니다(레위기 25:25, 47–49). 시편 72편에서는 왕이 억압과 폭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되찾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귀할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카르는 귀하거나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이 왕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

시편 72:15 본문 →

이제 시인은 왕이 오래 살기를 구합니다.

그가 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스바의 금을 주고, 언제나 그를 위해 기도하며, 온종일 그를 축복하기를 바랍니다.시편 72:1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왕에게 예물을 바치는 국제적인 장면과, 왕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는 백성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금을 주는 사람과 기도하고 축복하는 사람의 주어가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왕에게 예물을 바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도 있고, 왕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표현의 의미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왕은 기도를 받는 신이 아닙니다. 왕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권세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선 문맥을 따라 읽으면 왕이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달라집니다. 그가 살아 있어야 하는 까닭은 단지 왕조가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가 의롭게 다스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왕을 향한 축복이 곧 왕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승인하는 태도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은 왕을 축복하지만, 그 축복이 어떤 통치를 향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앞에서 충분히 밝혔습니다.

산꼭대기에 곡식이 넘치고 성읍에서 사람들이 돋아나다

시편 72:16–17 본문 →

시인은 다시 땅을 바라봅니다.

땅에, 산꼭대기에 곡식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그 열매가 레바논처럼 흔들리고, 성읍에서 사람들이 땅의 풀처럼 돋아나기를 바랍니다.시편 72:1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서 비가 내리고 의로운 사람들이 꽃피기를 바랐던 6–7절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결실의 모습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곡식이 산꼭대기에까지 가득합니다.

산꼭대기는 일반적으로 넓고 비옥한 농경지를 떠올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 곳에까지 곡식이 풍성하다는 것은 온 땅에 넘치는 풍요를 강조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레바논은 구약에서 크고 울창한 나무들로 알려진 지역입니다. 곡식이 얼마나 무성한지 멀리서 보면 레바논의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만큼 풍요롭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곡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의 기원이 아닙니다. 전쟁과 기근과 억압으로 인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가며 새로운 세대가 자라날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은 처음의 ‘평화’를 더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곡식을 수확할 수 있고, 사람이 성읍에 살 수 있으며, 새로운 세대가 자라날 수 있는 삶의 조건이 마련된 상태입니다.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고, 해가 있는 동안 그의 이름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를 들어 자신에게 복을 빌고, 모든 민족이 그를 복되다고 부르기를 바랍니다.시편 72:17 · 본디새김

여기서 왕의 이름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말은 개인의 명성이 오래 기억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왕조의 계승과 지속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17절 후반부는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얻는다는 약속입니다. 창세기 22:18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되는 약속이 다시 나타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왕이 자신과 자기 나라만을 위해 통치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의 의로운 통치가 모든 민족에까지 복을 가져오기를 바랍니다. 물론 시편 72편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어떤 역사적 사건에서 완전히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러한 복이 왕의 통치를 통해 널리 퍼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왕의 위대함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복을 소유하는가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곡식이 풍성하기를’이라는 부분에는 히브리어 피사트 바르라는 어려운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뉘앙스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문맥은 땅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17절의 히브리어 인논은 드물게 나타나는 형태로, 이어지거나 번성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뉘앙스에는 불확실성이 남지만, 왕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라는 문맥은 분명합니다.

모든 왕이 엎드린 뒤, 시인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72:18–19 본문 →

17절에서 왕을 위한 기도는 절정에 이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시선을 완전히 돌립니다.

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여호와야훼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기를 바랍니다.시편 72:18 · 본디새김

앞에서 왕에게 놀라운 능력과 광대한 권세가 주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송영은 오직 하나님만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그가 이루는 정의와 평화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왕의 통치는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영원히 찬양받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아멘.시편 72:19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모든 민족이 왕을 섬기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왕의 통치가 온 땅에 미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해지는 것이 더 큰 목적입니다.

여기에서 시편 72편이 왕을 찬양하는 노래인 동시에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노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에게 가장 큰 권세가 주어지기를 기도하지만, 그 권세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왕의 권세는 목적 자체가 아니라 맡겨진 책임이 됩니다.

'다윗의 기도들이 끝났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시편 72:20 본문 →

시편 72편은 특이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들이 끝났다.시편 72:20 · 본디새김

시편의 내용을 이어서 기도하는 말이라기보다, 시편들을 모은 책 안에서 하나의 구획이 끝났음을 알려 주는 편집상의 표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편은 전체적으로 다섯 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시편 72편은 그 가운데 둘째 권인 시편 42–72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습니다. 18–19절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장 역시 이 구획의 끝을 알리는 송영으로 기능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기도들이 끝났다’는 말은 시편 전체에 더 이상 다윗의 기도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86편에는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며, 시편 101편과 103편을 비롯해 뒤쪽에도 다윗과 연결되는 여러 시편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시편이 지금의 형태로 모이기 전, 다윗의 기도들을 중심으로 한 어떤 모음집이나 편집 단위의 끝을 표시하던 문구가 보존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모음집의 정확한 범위와 형성 과정을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 솔로몬을 위한 시편이 놓여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왕위를 이어받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배치를 왕권 계승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배치만으로 다윗이 직접 아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남겼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 아무리 위대한 존재로 노래되더라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1:13, 89:52, 106:48에서도 각 권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72편이 우리에게 묻는 것

시편 72:1–20 본문 →

시편 72편은 왕을 위한 기도이지만, 왕에게만 적용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 권한은 무엇을 위해 사용됩니까?

그러나 이 시편을 단순한 지도자의 윤리 강령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왕이 스스로 정의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풍요의 모습을 노래하기 전에 정의를 구했습니다. 곡식의 풍성함을 바라기 전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판결을 구했습니다. 모든 민족이 왕을 섬기기를 바라면서도, 그 왕이 도움받을 곳 없는 사람을 구해 내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약한 사람의 고통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따라 이루어지는 평화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시편 72편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먼 바다에서 왕들이 찾아옵니다. 타르시스와 해안 지역에서 조공이 오고, 스바와 세바에서는 예물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한 장면의 한가운데에는 시인이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지만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먼 나라의 왕처럼 귀한 예물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왕에게 어떤 정치적 이익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힘조차 부족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람의 피가 왕의 눈에 귀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시인의 찬양은 왕의 이름을 넘어 하나님께 향합니다. 처음에는 왕에게 하나님의 의를 달라고 구했던 기도가, 마지막에는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찬양이 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이 가장 낮은 곳의 사람을 위해 정의를 행합니다.

그때 산에는 평화가 깃들고, 들에는 비가 내리며, 성읍에는 사람들이 풀처럼 돋아납니다.

시편 72편이 바라는 왕의 영광은 바로 그런 땅에서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