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3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악인의 평안과 하나님의 선하심

시편 73편은 흔들림 없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아삽의 시편. 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선하다.시편 73:1 · 본디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그 믿음을 거의 잃어버릴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발이 거의 기울어질 뻔했고, 발걸음이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시편 73:2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 믿음에서 미끄러질 뻔했을까요?

그 이유는 특별한 재난이나 박해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다가 흔들렸습니다.

악인들이 너무 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풍족하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난에서도 비켜나 있는 듯했습니다. 교만하고 폭력적이며 하나님을 조롱하기까지 했지만, 그들의 재산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려고 애쓴 시인은 날마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그는 자신이 믿어 온 삶의 질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왜 악인이 평안을 누립니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면 왜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이 고통받습니까? 선하게 살아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합니까?

시편 73편은 이 질문들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끝에 이르면 시인은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말합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시인이 겪은 변화가 시편 73편의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왜 형통한지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정말 좋은 것인지를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시 붙들게 되었습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1173편 본문 읽기 →

악인의 평안을 보고 믿음이 흔들리다

시편 73:1–5 본문 →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편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은 시편집의 셋째 권을 여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의 시편 72편에서는 의로운 왕의 시대에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했습니다(72:7). 그런데 73편에서는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73:3).

같은 평화의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등장합니다. 시인이 겪는 혼란은 그만큼 절실합니다.

악인들의 평안을 보고 뽐내는 자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시편 73:3 · 본디새김

시인은 악인들이 단지 돈을 많이 벌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아무런 결핍이나 불안 없이 온전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삶을 보고 부러워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의문을 갖게 된 출발점은 바로 이 부러움입니다.

그는 악인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폭력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평안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들의 몸은 살쪘다. 그들은 사람들이 겪는 고생 속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앙을 당하지도 않는다.시편 73:4–5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악인의 형통함을 강렬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는 표현은 그들의 삶이 마지막 순간까지 평온해 보인다는 인상을 강조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살찐 몸은 충분한 음식과 물질적 풍요를 연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몸에서조차 넉넉함이 드러난다고 느낍니다.

반면 자신은 날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대조는 단순한 질투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믿어 온 도덕적 세계 전체를 흔듭니다.

여기서 시인의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악인이 겉으로만 행복하고 실제로는 모두 불행할 것이라고 말해 버리면 본문의 긴장이 사라집니다. 시인은 바로 악인들이 실제로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시 악인의 형통이라는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2:1에서도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왜 악한 사람들의 길이 형통하고 배신하는 자들이 평안하게 사는지 묻습니다. 욥기에서도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겪는 현실은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편 73편은 이러한 질문을 신앙이 부족한 사람의 사소한 불평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사람이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볼 때 겪을 수 있는 깊은 혼란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아삽은 역대상 16:4–5와 25:1–2에서 찬양과 관련된 인물로 등장합니다. 시편 73–83편에도 연속해서 아삽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제만으로 모든 시편을 역사적 아삽 한 사람이 직접 지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이름과 연결된 찬양 전통을 반영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풍요는 어떻게 교만과 폭력의 옷이 되는가?

시편 73:6–12 본문 →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묘사하다가 그들의 행동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폭력이 옷처럼 그들을 감싼다.시편 73:6 · 본디새김

목걸이와 옷은 몸에 걸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부와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합니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억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힘으로 드러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고 여기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해도 된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기름진 살 밖으로 불거지고, 마음속 상상은 한계를 넘어섰다.시편 73: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히브리어의 연결 관계가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눈이 살찐 몸에서 불거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풍요 속에서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넘쳐나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눈과 마음속 상상의 이미지를 함께 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이 묘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풍요가 절제와 감사로 이어지지 않고, 더욱 큰 욕망과 오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비웃으며 악의로 억압을 말하고, 높은 데서 말한다. 그들은 입을 하늘에 두었고, 그들의 혀는 땅을 돌아다닌다.시편 73:8–9 · 본디새김

그들의 입은 하늘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말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의 혀는 땅 전체를 돌아다닙니다. 그들이 하는 말과 그 말이 만들어 내는 영향력이 넓게 퍼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자신의 권력을 믿고 누구든 조롱하며,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조차 자신들의 행동을 판단하실 수 없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지식이 있는가?」시편 73:11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알고 판단하시는지를 의심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시거나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자신들의 행동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시편 10:11에서도 나타납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셨고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시인은 재물이 많다는 사실 자체를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재산이 늘어나는 동안 교만과 폭력이 함께 커지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오고, 그들은 풍성한 물을 남김없이 마신다.시편 73:10 · 본디새김

다만 이 절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특히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의 백성’이 정확히 누구인지, ‘이리로’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풍성한 물을 마시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끌려 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고, 그들과 어울려 풍요를 누리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세부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절이 악인들의 말과 형통함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흐름에 놓여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보라, 이들이 악인들이다. 언제나 평안히 지내며 재산을 늘렸다.시편 73:12 · 본디새김

악인은 평안합니다. 재산은 늘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동을 아시는지조차 의심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그 사실이 시인 자신의 삶을 향한 질문으로 바뀝니다.

깨끗하게 산 것은 정말 헛된 일이었는가?

시편 73:13–14 본문 →

참으로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결백함으로 내 두 손바닥을 씻은 것은 헛되었다.시편 73: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같은 ‘깨끗한 마음’이 두 구절에 등장합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13절에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 삶의 방식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온종일 재앙을 당하고, 아침마다 꾸지람을 받았다.시편 73:14 · 본디새김

악인은 날마다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시인은 날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침은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헛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헛되었다고 판단합니까? 그 기준은 악인들이 누리는 형통함입니다.

처음에는 악인의 행동을 비판하던 사람이, 이제는 악인이 가진 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의 폭력과 교만을 옳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동안, 자신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좋은 삶의 척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인이 거의 미끄러질 뻔한 이유는 단지 악인이 잘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인의 형통함이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판단하는 자신의 기준까지 바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혼자 이해할 수도 없는 질문

시편 73:15–16 본문 →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겠다.」라고 말했다면, 보십시오, 당신 자녀들의 세대를 저버린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시편 73: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조건문입니다. 시인이 실제로 자신의 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자신이 지금 느끼는 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믿음까지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심을 표현하는 일이 언제나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자체가 바로 그 의심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혼란을 숨기지 않습니다. 다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판단을 최종적인 진실처럼 선언하는 일을 조심합니다.

그는 공동체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현실의 문제를 없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혼란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는 믿음 전체를 무너뜨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그는 더 깊이 이해하려 합니다.

제가 이것을 알려고 생각했으나, 제 눈에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시편 73:16 · 본디새김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이 보는 현실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에게 이 문제는 지적으로도 괴롭고 정서적으로도 힘든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시편은 신앙의 실패로 간단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관찰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판단과 역사의 방향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시편은 이제 결정적인 장소로 시인을 데려갑니다.

성소에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시편 73:17 본문 →

제가 하나님의 성소들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그제야 저는 그들의 마지막을 분별했습니다.시편 73:17 · 본디새김

시편 73편의 전환점입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예배 절차나 계시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특별한 해답을 전해 주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시인이 그곳에서 악인들의 ‘마지막’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이전까지 악인들의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건강과 재산과 권세, 다른 사람들보다 편안해 보이는 삶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서는 그들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그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의 눈앞에서 악인들의 재산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질병에 걸리거나 권력을 잃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시인이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간의 범위입니다.

성소에서 시인은 자신이 보고 있던 현실의 일부를 전체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성소의 의미를 단지 더 긴 시간의 관점을 얻은 장소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악인의 형통함과 자신의 고난을 비교해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 삶의 의미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가 얻은 것은 단순히 악인도 언젠가 죽는다는 지식이 아닙니다.

현재의 형통함이 하나님 앞에서의 안전과 동일하지 않다는 깨달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소들’은 형태상 복수형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여러 거룩한 영역이나 성소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 독립된 성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디새김은 이 복수형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마지막(⁨אַחֲרִית⁩)’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끝이나 뒤에 오는 결과, 궁극적인 결말을 뜻할 수 있습니다.

미끄러질 뻔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시편 73:18–20 본문 →

성소에서 돌아본 악인들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참으로 당신은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파멸에 떨어뜨리셨습니다.시편 73:18 · 본디새김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미끄러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악인들이 미끄러운 곳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자신이 불안정하고 악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이해합니다.

시인이 부러워하던 악인들의 평안이야말로 미끄러운 땅 위에 서 있는 삶이었습니다.

‘미끄러운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걷기 편해 보여도 발을 제대로 붙들어 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 장소에 서 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넘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이나 권력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그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게 지탱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황폐해졌는지요. 공포 때문에 끝장나고 완전히 사라졌습니다.시편 73:19 · 본디새김

시인은 악인의 안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강렬한 심판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대하듯, 주여, 당신이 깨어나실 때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실 것입니다.시편 73:20 · 본디새김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속의 사건이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면 조금 전까지 생생했던 장면이 실체 없는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권세와 부는 매우 실제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고 지배하는 힘도 실제로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들을 판단하실 때, 그들이 자랑하던 영광은 꿈처럼 덧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깨어나실 때’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잠들어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눈에 하나님의 판단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마침내 그분의 심판이 드러나는 순간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들을 악인이 현실에서 언제나 빨리 몰락한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의 첫 고민은 악인이 오래도록 형통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번영이 삶의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정의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관해서는 본문이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악인의 현재를 부러워하던 시선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 전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악인들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다시 본다

시편 73:21–22 본문 →

성소에서 악인들의 마지막을 분별한 뒤, 시인은 곧장 자신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제 마음이 씁쓸해지고 제 콩팥이 찔렸을 때, 저는 미련하여 알지 못했고, 당신 곁에서 짐승과 같았습니다.시편 73:21–22 · 본디새김

고대 히브리어의 시적 표현에서 콩팥은 사람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쓰라리고 내면 깊은 곳이 찔리는 듯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악인들의 형통함을 바라보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고통과 분노를 느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그 상태를 ‘미련하여 알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시인이 악인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틀린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형통함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까지 잘못 이해하게 된 데 있었습니다.

그는 악인의 부유함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깨끗한 삶이 헛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 잊어버렸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삶을 더 넓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특별히 놓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 곁에서.’

시인은 자신이 미련한 판단을 하던 때에도 하나님 곁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완전히 끊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내가 거의 넘어졌을 때, 하나님은 내 손을 붙들고 계셨다

시편 73:23–24 본문 →

그렇지만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제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시편 73:23 · 본디새김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끝까지 잘 붙들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처음에는 자신의 발이 거의 미끄러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위태로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부러워했고, 흔들렸으며, 자신의 깨끗한 삶이 헛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처음의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는 고백은 자신의 위태로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는 말이 됩니다.

당신의 조언으로 저를 이끄시고, 그 뒤에 영예롭게 저를 받아들이실 것입니다.시편 73:24 · 본디새김

앞서 시인은 자신의 생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조언으로 이끌림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여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심으로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라는 말을 시간적 순서로 읽고, 하나님께서 시인을 영광 가운데 받아들이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과 수치 이후에 하나님께서 시인을 존귀하게 회복시키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지금 붙들고 계시며, 앞으로도 인도하시고 존귀하게 받아 주실 것이라는 신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신뢰에서 시편의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베아하르 카보드 티카헤니로, 그 연결 관계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이다(⁨לָקַח⁩)’에 해당하는 동사는 ‘취하다’, ‘데려가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창세기 5:24에서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셨다고 말할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절을 죽음 이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소망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편 73:24 자체는 그 일이 일어나는 시점이나 장소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삶을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구절로만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소망의 가능성을 문법적으로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말의 뜻

시편 73:25–26 본문 →

하늘에서 제게 누가 있습니까? 당신 말고는 땅에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시편 73:25 · 본디새김

처음에 시인은 악인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평안과 재산, 그들의 넉넉한 삶이 자신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시인이 이제부터 음식도 필요 없고, 재물도 필요 없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바랄 것인가에 관한 고백입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제 살과 마음은 쇠하였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제 마음의 바위이며 제 몫이십니다.시편 73:26 · 본디새김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몸이 언제나 건강하거나, 마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소에 들어간 뒤에도 시인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쇠한다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다만 이제는 그 쇠약함이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마음의 바위’는 자신을 지탱하는 견고한 근거를 나타냅니다. ‘제 몫(⁨חֵלֶק⁩)’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분배받은 몫이나 소유의 지분을 뜻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말은 땅을 분배받는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악인들이 가진 재산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의 몫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신의 몫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가난 자체를 좋은 것이라고 찬양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적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세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계신 분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악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레위인들에게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들의 몫이라는 말이 주어집니다(민수기 18:20; 신명기 10:9). 시편 16:5에서도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가이다

시편 73:27–28 본문 →

시편의 마지막 두 절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보십시오,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자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떠나 음행하는 자를 모두 없애셨습니다.시편 73:27 · 본디새김

시인은 악인들을 단순히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음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일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처음에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동을 아시는지조차 의심했습니다. 시인은 한때 바로 그들이 누리는 형통함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습니다.

시편은 고통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시인이 문제 삼는 것은 교만과 폭력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삶입니다.

그 반대편에 자신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일을 이야기하려고 주 여호와야훼를 제 피난처로 삼았습니다.시편 73:28 · 본디새김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하시다고 말했습니다. 28절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고 말합니다. 두 절에는 같은 ‘좋다’, ‘선하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시편 전체가 이 ‘좋음’이라는 말로 둘러싸인 셈입니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그는 ‘좋음’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악인이 누리는 것을 모두 소유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자신의 의심을 그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에 관한 모든 질문에 완전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얻게 된 것은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사건들 가운데서도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이 그의 말을 다시 열어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행동은 종종 혼인 관계의 배신이나 음행에 비유됩니다(호세아 1–3장; 예레미야 3장). 이러한 깨달음은 욥기의 결말과도 일정한 공통점을 가집니다. 욥은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의 원인을 완전히 설명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욥기 38–42장). 성경의 지혜 전통에는 의로운 삶이 복을 가져온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와 전도서, 시편 73편과 같은 본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개별 인생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 73편이 바꾸어 놓는 질문

시편 73:1–28 본문 →

시편 73편은 처음에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왜 악인이 잘삽니까?

그런데 시편이 진행될수록 더 중요한 질문이 나타납니다.

나는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시인의 판단에는 감추어진 전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간다면 자신도 악인들보다 더 좋은 형편을 누려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성소에서 그가 새롭게 본 것은 바로 그 기준의 불완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서 나타나는 불공평함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악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발이 거의 미끄러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서 그는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부러워하던 악인들이야말로 미끄러운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거의 넘어질 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그가 이제 악인들보다 부유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에서 벗어났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인의 평안을 부러워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이심을 깨닫고, 그분께 가까이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더 이상 악인들의 목걸이도, 넘쳐나는 재산도, 그들이 누리는 평안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발은 여전히 약할 수 있고, 걸어가야 할 길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혼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시편 73편은 더 단단한 발을 얻은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자신을 붙들고 계신 손을 발견한 사람의 노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