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4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불탄 성소에서 하나님을 부르다
하나님의 성소가 불타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그 안으로 들어와 함성을 지르고, 자기들의 표징을 세웁니다. 정성껏 새겨진 장식들은 도끼에 부서지고, 거룩한 곳은 불길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거처하셨던 장소가 폐허로 변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원수들의 행동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왜 영원히 버리셨습니까?」 시인은 왜 원수들이 성소를 파괴했는지 묻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지 묻습니다. 그가 경험하는 재앙은 단순히 한 건물이 무너진 사건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믿음까지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던 곳이 파괴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신다면, 왜 원수들이 그분의 이름을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성소를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는지를 회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다를 가르시고, 바다 괴물들의 머리를 부수시고, 샘과 강을 다스리시며, 낮과 밤을 마련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왜 불탄 성소를 바라보면서 바다와 창조 세계를 이야기할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인지 알기 때문에, 그분의 침묵을 더욱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시편 73편에서는 한 사람이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다가 성소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시편인 74편에서는 그 성소 자체가 파괴되어 있습니다. 앞의 시편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던 장소가, 이제는 하나님의 부재를 가장 고통스럽게 느끼게 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 시편은 그 폐허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소가 무너진 뒤에도 하나님을 어떻게 부를 수 있는지,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무엇을 붙들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버림받았다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당신의 양 떼'라고 부른다
시편은 아삽의 마스길이라는 표제로 시작합니다. ‘마스길’의 정확한 음악적·문학적 기능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노래가 개인의 어려움보다 공동체 전체의 재앙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첫 절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아삽의 마스길. 하나님, 왜 영원히 버리셨습니까? 왜 당신의 분노가 당신 목장의 양 떼를 향해 연기를 내뿜습니까?시편 74:1 · 본디새김
여기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영원한 버림을 선언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버림받은 상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을 나타냅니다.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가 ‘당신 목장의 양 떼’를 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양 떼는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위험에서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양 떼는 목자의 분노 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관계를 근거로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신데, 어째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그 관계 때문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2절에서는 이 관계가 더욱 강조됩니다.
옛날에 얻으시고 되찾으신 당신의 회중, 당신의 소유인 지파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거처하셨던 이 시온산을 기억해 주십시오.시편 74:2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얻으셨습니다. 되찾으셨습니다.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시온산에 거처하셨습니다. 이 표현들은 출애굽과 언약,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처를 두신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6:6–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9:5–6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관계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얻으셨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확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보다,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일을 하셨는지가 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머무르셨던 장소, ‘당신이 거처하셨던 이 시온산’을 가리키며 그곳을 기억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 장소는 지금 폐허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폐허로 발걸음을 내디뎌 주십시오. 원수가 성소 안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습니다.시편 74:3 · 본디새김
‘발걸음을 내디뎌 주십시오’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채 폐허를 바라보시기만 하지 말고 직접 그곳으로 오시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물었던 시인이 이제 하나님께 폐허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장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있는 폐허로 와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소가 무너졌다고 해서 기도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폐허가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표징이 사라진 자리에 원수들의 표징이 세워졌다
시인은 이제 성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묘사합니다.
당신을 적대하는 자들이 당신의 모임 장소 한가운데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표징을 표징으로 세웠습니다.시편 74:4 · 본디새김
성소는 본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서 원수들의 함성이 들립니다. 예배의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정복자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징은 정복자가 자신의 권세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해 세운 표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던 장소에 원수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나타내는 표징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을 점령하는 것보다 더 깊은 모욕입니다. 성소를 자신들의 권세 아래 있는 장소처럼 취급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성소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빽빽한 숲에서 도끼들을 높이 쳐드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도끼와 도끼들로 그곳의 새긴 장식들을 한꺼번에 두들겨 부숩니다.시편 74:5–6 · 본디새김
6절에서 성소의 새긴 장식들이 도구에 의해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열왕기상 6:18, 29에는 솔로몬이 세운 성전의 나무 장식과 새긴 형상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소의 장식은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은 그것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성소의 파괴는 단순히 돌과 나무가 무너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가꾸어 온 공간이 파괴되는 사건입니다. 오랜 시간 쌓여 온 공동체의 기억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파괴가 절정에 이릅니다.
그들은 당신의 성소에 불을 놓고, 당신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을 땅에 무너뜨려 더럽혔습니다.시편 74:7 · 본디새김
‘당신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소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신명기 12:5, 11). 이스라엘은 성소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은 그 장소를 불태웠습니다. 시인은 그 행동을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더럽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손실을 넘어 거룩한 장소가 적대자들에 의해 모독당했다는 뜻입니다.
8절에서는 그 파괴가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됩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을 모조리 짓누르자.」 그들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임 장소를 모두 불태웠습니다.시편 74:8 · 본디새김
본문은 원수들이 예루살렘의 한 성소만 훼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자리들을 두루 파괴하려 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건물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공동체 자체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묘사하는 파괴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삶 전체를 위협하는 사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표징이 정확히 어떤 물건이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군사적 깃발이나 상징물, 종교적 표식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특정한 형태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5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압축되어 있고 주어와 동작의 연결이 불분명합니다. 숲에서 나무를 베는 사람에 비유하여 원수들이 성소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원래 성소의 목재를 다듬던 장인들의 모습을 회상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세부적인 장면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8절의 ‘하나님의 모임 장소’에 해당하는 표현은 모아데 엘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정해진 모임이나 그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를 훗날의 회당과 동일시하는 읽기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당시 후대와 같은 회당 제도가 존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와 관련된 모임 장소들을 폭넓게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이 사건은 언제 일어났을까요? 이 시편의 묘사는 열왕기하 25:8–10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기원전 586년 무렵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파괴했고, 성전과 왕궁을 불태웠습니다. 예레미야 52:12–14에도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가 2:6–9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장소가 파괴되고, 절기와 안식일이 잊히며, 율법과 환상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탄식됩니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표제에 아삽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작 시기를 결정할 수 없고, 본문도 특정한 왕이나 침략군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시편의 전승과 최종 편집 시기가 사건 자체의 시기와 같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성소의 파괴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위기에 처한 사건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출애굽기 25:8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성소를 만들라고 말씀하시지만, 성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하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7:1–15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라는 사실만을 의지하면서 불의와 폭력을 행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에스겔 8–11장에서는 성전 안의 죄악과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환상이 등장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장소이지만 하나님을 한 건물 안에 가두거나 그분의 행동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시편 74편의 시인은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소가 파괴된 이유를 구체적인 죄목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표징은 보이는데, 우리의 표징은 보이지 않는다
성소가 파괴되었다는 사실만큼 시인을 괴롭게 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표징을 보지 못했습니다. 더는 예언자가 없고, 저희 가운데 언제까지일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시편 74:9 · 본디새김
여기서 4절과 9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4절에서는 원수들이 자신들의 표징을 세웠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표징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표징’이라는 말이 정반대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원수들의 표징은 성소 한가운데 뚜렷하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표징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원수들의 승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알려 주는 징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절망은 여기서 더욱 깊어집니다. 눈앞에 폐허가 있다는 것도 괴롭지만, 그 폐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알려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괴롭습니다.
‘더는 예언자가 없다’는 말 역시 그러한 절망을 나타냅니다. 이를 그 시대 이스라엘 전체에 예언 활동이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확정적인 역사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공동체가 현재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해석해 주고, 하나님께서 언제 개입하실지 알려 줄 예언적 말씀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10절에서는 기도가 한 가지 질문으로 모입니다.
하나님, 적이 언제까지 조롱하겠습니까? 원수가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업신여기겠습니까?시편 74:10 · 본디새김
시인은 원수들의 조롱을 자신의 수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성소의 파괴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질문이 더 날카로워집니다.
왜 당신의 손과 오른손을 거두고 계십니까? 당신의 품속에서 꺼내어 끝장내 주십시오.시편 74:11 · 본디새김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과 오른손은 그분께서 능력을 행사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은 원수를 부수는 능력으로 찬양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그 손이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손이 아직 품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소 파괴 앞에서 시인이 겪는 가장 깊은 신학적 어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력하시다면 절망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신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시인은 더욱 괴롭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마지막 명령에서 정확히 무엇을 끝장내 달라는 것인지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상 원수들의 폭력과 모욕을 끝내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폐허 한가운데서 '그러나 하나님은 제 왕이십니다'라고 말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로부터 제 왕이시며, 땅 한가운데서 구원의 일들을 이루십니다.시편 74:12 · 본디새김
12절은 시편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말은 상황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소는 여전히 폐허이고, 원수들의 조롱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다른 사실을 기억합니다.
앞에서는 공동체를 대신하여 ‘저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제 왕’이라는 개인적인 고백이 등장합니다. 공동체 전체의 재앙 속에서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시인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를 만한 외적인 증거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파괴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자신들의 표징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런 표징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현재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시인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현재의 고통과 마주 세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땅 한가운데서 구원의 일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현재에도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성품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 눈앞의 재앙이 해결되었다고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다음 절들에서 창조와 구원의 기억으로 펼쳐집니다.
바다를 가르시고 바다 괴물의 머리를 부수신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바다를 가르셨고, 물 위에서 바다 괴물들의 머리들을 부수셨습니다.시편 74:1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출애굽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은 바다 앞에 갇혔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건널 수 없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이 지나갈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바다 괴물들의 머리를 부수는 장면은 출애굽기의 서술보다 더 신화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14절에서는 리워야단이 등장합니다.
당신은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짓부수시고, 그것을 광야 짐승 무리에게 먹이로 주셨습니다.시편 74:14 · 본디새김
리워야단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 등장하는 바다의 거대한 존재입니다. 욥기 41장에서는 인간이 제압할 수 없는 두려운 생물로 묘사되며, 시편 104:26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다의 생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27:1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대한 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바다와 혼돈의 세력을 신적인 전쟁의 이미지로 묘사하던 문학적 세계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편 74편을 고대 신화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바다와 리워야단이 하나님과 대등한 권세를 가진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혼돈의 세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실제 출애굽의 사건으로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창조 때 혼돈을 제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 것으로 읽어야 할까요? 두 방향이 모두 가능합니다. 바다를 가르는 표현과 뒤이어 샘과 강을 다스리는 모습은 출애굽과 광야의 구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바다 괴물과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혼돈의 힘을 제압하시고 세계의 질서를 세우시는 창조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편 74편에서도 창조의 능력과 출애굽의 구원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는 하나의 시적 흐름 안에서 사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워야단이 먹이로 주어지는 장면에서는 바다의 거대한 존재가 완전히 무력해져 먹이로 주어졌다는 이미지가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도 끝내 자신의 힘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물에 관한 이미지가 계속되지만 방향이 달라집니다.
당신은 샘과 급류를 터뜨리셨고, 당신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셨습니다.시편 74:15 · 본디새김
물을 나오게도 하시고, 물을 사라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광야에서 물을 공급하신 일(출애굽기 17:6; 민수기 20:11)과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일(여호수아 3:14–17)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이 없을 때에는 물을 공급하시고, 물이 길을 막을 때에는 그 물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관한 진술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살아갈 길이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다는 구원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억은 지금 불탄 성소 앞에서 드리는 기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시인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실 수 있다면, 원수들이 무너뜨린 성소 앞에서도 무력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실 수 있다면, 지금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도 그분의 권세 밖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과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그렇게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지금은 움직이지 않으시는지, 그분께 다시 묻기 위해 기억을 꺼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여기서 쉬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간절한 간구의 근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1:9–10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을 부수시고 바다를 마르게 하셨다는 기억이, 구원받은 백성이 지나갈 길을 내셨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리워야단을 이집트 왕이나 특정한 역사적 군대와 일대일로 동일시할 근거는 이 구절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14절에서 리워야단이 광야 짐승 무리의 먹이가 되는 장면도 난해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광야에 사는 짐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광야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짐승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성소는 무너졌지만 낮과 밤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다
시인은 이제 물에서 하늘과 땅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낮도 당신의 것이며 밤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빛을 내는 것과 해를 마련하셨습니다.시편 74:16 · 본디새김
낮과 밤은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세계의 기본적인 질서입니다. 시인은 그 질서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땅의 모든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여름과 겨울, 당신이 그것들을 만드셨습니다.시편 74:17 · 본디새김
땅의 경계는 공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여름과 겨울은 시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다스리실 뿐 아니라, 세계가 유지되는 기본적인 질서를 마련하신 분이십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장식들을 부수고, 불을 놓고, 자신들의 표징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성소 안에서 자기들의 권세를 드러냈다는 사실만 보면, 마치 하나님의 통치가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마련하시고 땅의 경계를 세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원수들은 성소를 파괴할 수 있었지만 낮과 밤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처하는 장소를 더럽혔지만, 세계 전체를 자신들의 뜻대로 다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소의 파괴가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성소의 상실을 누구보다 깊이 슬퍼합니다. 그러나 성소가 파괴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끝났다는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고백만으로 시인의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 백성이 겪는 폭력을 끝내지 않으십니까? 시인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빛을 내는 것’은 히브리어 마오르(מָאוֹר)로, 빛을 비추는 광원을 가리킵니다. 해와 함께 사용되므로 달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은 그 광원을 명시적으로 달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18절에서 시인은 다시 현재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여호와야훼여,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원수가 당신을 조롱했고, 어리석은 백성이 당신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다.시편 74:18 · 본디새김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옛날에 얻으시고 속량하신 회중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원수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구합니다.
시인은 공동체가 당하는 고난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얻으시고 거처를 두셨기 때문에, 그 백성을 짓밟고 성소를 더럽히는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공동체가 겪는 재앙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문제로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19절에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당신의 멧비둘기 목숨을 들짐승에게 넘겨주지 마십시오. 당신의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를 영원히 잊지 마십시오.시편 74:1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바다 괴물과 리워야단, 창조 세계의 장엄한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멧비둘기를 등장시킵니다. 멧비둘기는 거대한 맹수와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강한 발톱이나 이빨로 자신을 지키는 짐승과도 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런 작은 새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파괴되었고, 원수들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말씀도 들리지 않고, 재앙이 언제 끝날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 괴물의 머리들을 부수실 만큼 강력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시인이 지금 구해 달라고 요청하는 존재는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작은 멧비둘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고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도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들을 ‘당신의’ 멧비둘기, ‘당신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킬 힘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 소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합니다. 성소가 불탄 뒤에도 공동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에 마지막 희망을 겁니다.
조금 더 깊이
‘들짐승’과 ‘공동체’로 옮겨진 자리에 모두 하야트라는 형태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들짐승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른 하나는 가난한 이들의 살아 있는 무리나 공동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의 연결은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확정해 주지는 않지만, 멧비둘기를 위협하는 존재와 보호받아야 할 공동체를 한 절 안에서 긴밀하게 묶어 놓습니다.
언약을 살펴 주십시오 — 어두운 곳에는 폭력이 가득합니다
20절에서 시인은 매우 짧고 강한 요청을 드립니다.
언약을 살펴 주십시오. 땅의 어두운 곳들이 폭력의 거처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시편 74:20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단순히 오래전에 맺은 약속을 떠올려 달라는 요청보다 적극적입니다. 언약의 관계를 다시 주목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행동해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어떤 언약을 특별히 가리키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소유됨을 회상했던 앞부분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언약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온과 하나님의 거처가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는 다윗 왕조 및 시온에 관한 약속들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절의 언약을 단 하나의 특정한 언약 문서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 전체를 근거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성소가 파괴된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땅의 어두운 곳들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폭력이 가득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햇빛이 없는 지역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이나 억압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마련하셨다고 고백했던 시인이, 이제는 땅의 어두운 곳들이 폭력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시라면, 그 땅의 어두운 곳도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간구가 됩니다.
21절에서는 그 폭력 아래 있는 사람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짓눌린 이가 수치를 당한 채 돌아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이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74:21 · 본디새김
시인이 바라보는 회복의 모습이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는 단지 성소가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수치를 당한 채 돌아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하여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소가 회복된다는 것은 단지 예배의 외형이 되돌아오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짓눌린 사람을 보호하시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편 74편은 성소의 파괴를 애통해하지만, 성소의 재건 자체를 최종적인 결말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고통받는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간구합니다.
시인이 바라는 회복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만 다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언약을 살펴 주십시오’의 히브리어 하베트 라브리트는 언약을 바라보거나 주목하라는 명령형 표현입니다.
하나님, 일어나 당신 자신의 송사를 다투어 주십시오
시편은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한번 강력한 요청을 드립니다.
하나님, 일어나 당신의 송사를 다투어 주십시오. 어리석은 자에게서 온종일 받으시는 모욕을 기억해 주십시오.시편 74:22 · 본디새김
‘송사’는 다툼이나 소송, 법적인 분쟁과 관련된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송사를 맡아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송사를 직접 다투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스스로 변호하시고, 그분의 이름을 모욕하는 세력에 맞서 행동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원수들은 성소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을 더럽혔습니다. 자신들의 표징을 세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시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논리는 단순히 자기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해 달라는 요청과 다릅니다. 그는 원수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모욕이기도 하다고 호소합니다.
앞서 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품속에 거두신 손을 꺼내시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셔야 한다는 간구가 시편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을 적대하는 자들의 소리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맞서 일어나는 자들의 소란이 끊임없이 올라옵니다.시편 74:23 · 본디새김
4절에서 원수들은 하나님의 모임 장소 한가운데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도 원수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의 소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소가 재건되었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이미 찬양을 시작했다는 장면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대신 시인은 원수들의 소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통 속에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희망이 없는 노래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인이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끝에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보호자를 찾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신과는 다른 종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아직 볼 수 없어도, 그분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시인은 그 믿음을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탄식의 기도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무너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시편 74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기억’이라는 말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오래전에 얻으신 회중과 시온산을 기억해 달라고 구합니다. 18절과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받는 조롱과 모욕을 기억해 달라고 하고, 마지막 23절에서는 원수들의 소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기억하는 주체는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시인 자신도 바다를 가르신 일,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신 일, 낮과 밤을 마련하시고 땅의 경계를 세우신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볼 수 없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무엇을 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의 문제를 덮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문제를 더욱 절실한 기도로 바꾸는 일입니다.
시편 74편은 그래서 단순한 절망의 노래가 아닙니다. 기억하는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에서 공동체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소는 무너졌고 예언자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표징은 보이지 않고, 원수들의 표징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일어나 당신의 송사를 다투어 주십시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미 일어나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아직 일어나시기를 구합니다.
그 기도 앞에는 여전히 무너진 성소가 있고, 그 안에는 원수들이 남긴 파괴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폐허에서 들리는 소리는 원수들의 함성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해 달라고 부르짖는 백성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시편 74편은 하나님의 집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그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