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8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백성은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바다를 가르셨으며, 광야에서 물과 음식을 주셨다는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시편 78편은 바로 그 익숙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뜻밖에도 「수수께끼」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수수께끼라는 것일까요? 시인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건을 밝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건들 속에서 쉽게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드러내려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끊임없이 구원하셨지만, 백성은 끊임없이 그분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먹이시고 인도하셨지만, 백성은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판을 받으면 하나님을 찾았지만, 위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백성의 불신실함만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러나 그는 자비로워 죄악을 덮어 주고 멸하지 않았다」(38절)고 고백합니다. 시편은 이 고백에 도달한 뒤에도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도 거역했고, 하나님이 거하시던 실로마저 버려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한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양 떼를 돌보던 다윗을 불러 자신의 백성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시편 78편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왜 그토록 쉽게 하나님을 잊는가 하는 질문이면서, 그런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백성을 계속 이끌어 가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앞선 시편 77편은 고난 속에 있던 한 사람이 출애굽을 기억하며 끝났습니다. 시편 78편은 그 기억을 공동체 전체의 과제로 확장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에서 나아가, 다음 세대가 그 일을 잊지 않도록 역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978편 본문 읽기 →

왜 이미 알려진 역사를 수수께끼라고 부르는가

시편 78:1–8 본문 →

아삽의 마스길. 내 백성아, 내 가르침에 귀 기울여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너희 귀를 기울여라.시편 78:1 · 본디새김

시편은 예배의 찬양보다 지혜 교사의 가르침에 가까운 말로 시작합니다.

「귀 기울여라」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시인이 전하려는 것은 단순히 들으면 끝나는 정보가 아닙니다. 주의를 기울여 듣고,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나는 비유로 입을 열고, 옛적부터 내려온 수수께끼들을 쏟아 내겠다.시편 78:2 · 본디새김

「비유」(⁨מָשָׁל⁩)에 해당하는 말은 비유뿐 아니라 잠언, 교훈적인 말, 비교를 통해 지혜를 전달하는 표현에도 사용됩니다. 「수수께끼들」은 곧바로 뜻이 드러나지 않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들어서 알게 된 것,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시편 78:3 · 본디새김

수수께끼는 사건을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알고 있어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다는 이야기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건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역사를 단순히 시간순으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사건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백성이 보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 목적은 4–8절에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숨기지 않겠다. 뒤에 올 세대에게 여호와야훼의 찬양받을 일들과 그의 위력, 그가 행한 놀라운 일들을 들려주겠다.시편 78:4 · 본디새김

그런데 뒤이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뿐 아니라 조상들의 거역도 감추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조상들이 위대한 민족이었다는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으며, 조상들이 그분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함께 알려 주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집안이나 민족의 역사를 후손에게 전할 때 성공과 영광을 강조하고 싶어 합니다. 잘못과 실패는 축소하거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은 정반대입니다. 조상들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후손들이 자기 조상들을 경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하나님이 행한 일들을 잊지 않으며, 그의 명령들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다.시편 78:7 · 본디새김

시인은 세 가지를 연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분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분리된 종교적 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면, 그분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분을 신뢰하지 않고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 기억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머릿속에 보존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억한 사실을 현재의 판단과 행동에 반영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시인은 후손들에게 단순히 출애굽 사건을 암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조상들처럼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거역한 세대, 마음을 굳게 세우지 않고 그 영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던 세대였다.시편 78:8 · 본디새김

문제는 조상들에게 종교적인 감정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확고하게 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을 때도 있었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신실함을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이제 그 모습을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보여 주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표제의 「마스길」은 지혜나 통찰과 관련된 시편의 명칭으로 이해되지만, 정확한 음악적·문학적 기능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신약에서 마태복음 13:35은 시편 78:2의 비유에 관한 표현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 비유와 수수께끼는 이스라엘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가르침입니다. 후대의 인용은 그 역할을 예수의 비유 말씀과 연결하여 읽는 것입니다.

활을 가졌지만 돌아선 에브라임

시편 78:9–16 본문 →

에브라임의 자손들은 활로 무장한 사수들이었지만, 전투의 날에 돌아섰다.시편 78:9 · 본디새김

출애굽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한 독자에게는 뜻밖의 구절입니다.

어느 전투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전투의 장소나 적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특정 역사적 패배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사건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에브라임의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활을 가졌다는 사실과 전투에서 돌아섰다는 사실의 대조입니다. 그들은 싸울 능력을 갖추었지만 정작 싸워야 할 때 물러났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어서 그 이유를 영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걷기를 거부했다.시편 78:10 · 본디새김

문제는 무기가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됩니다. 57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속이는 활처럼 뒤틀렸다」고 말하고, 67절에서는 하나님이 에브라임 지파를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등장한 에브라임과 활의 이미지가 뒤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9절은 단순히 지나간 전투를 설명하는 구절이라기보다, 시편 전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미리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불신실함의 핵심은 11절에서 드러납니다.

그가 행한 일들을 잊었고, 그가 그들에게 보여 준 놀라운 일들을 잊었다.시편 78:11 · 본디새김

「잊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를 단순히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보았던 하나님의 행적을 잊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들이 무엇을 잊었는지 보여 줍니다. 이집트의 소안 들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갈라진 바다, 낮의 구름과 밤의 불빛, 광야의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입니다.

광야에서 바위들을 쪼개고, 깊은 물처럼 풍성하게 마시게 했다.시편 78:15 · 본디새김

바다가 길을 막으면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십니다. 방향을 알 수 없으면 구름과 불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마실 물이 없으면 바위에서 물을 내십니다.

각 상황에서 부족한 것은 다릅니다. 길이 없고, 방향이 없고,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특히 바위에서 나온 물을 「깊은 물처럼」, 「강들처럼」 묘사하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나온 물이 마치 깊은 바다나 큰 강과 같은 풍성함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이 놀라운 반전을 가져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 이름이자 그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지파의 이름입니다. 여호수아 18:1에 따르면 성막은 에브라임 지역에 속한 실로에 세워졌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이었던 실로가 버려지고 유다의 시온이 선택되는 과정은 시편 마지막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위에서 물을 보고도 상을 차릴 수 있는지 묻다

시편 78:17–31 본문 →

그런데도 그들은 그에게 더욱 죄를 지었고, 메마른 땅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를 거역했다.시편 78:17 · 본디새김

「그런데도」라는 말이 앞의 모든 구원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물이 없던 곳에서 물을 마셨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오히려 더욱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상을 차릴 수 있을까?」시편 78:19 · 본디새김

그들은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호소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시편이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필요를 어떤 태도로 하나님께 제기하는가에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그 태도가 드러납니다.

「보아라, 그가 바위를 치자 물이 흘러나왔고, 시냇물들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빵도 줄 수 있을까? 자기 백성을 위해 고기를 마련할까?」시편 78:20 · 본디새김

이들은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잊어버림」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듭니다. 물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빵과 고기를 주실 수 있다는 신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시편 78:22 · 본디새김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반응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굶주린 백성에게 음식을 공급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 위에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했고,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었다.시편 78:24 · 본디새김

백성은 광야에서 상을 차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어 그들에게 곡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땅에서 찾지 못한 음식을 하나님은 하늘에서 공급하십니다.

여기서 만나가 「하늘의 곡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음식의 양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음식이 인간의 통상적인 생산 능력을 넘어 하나님의 공급에서 왔음을 강조합니다.

25절에서는 그것을 「힘센 이들의 빵」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강한 자들을 천사와 같은 하늘의 존재들로 이해할 수도 있고, 특별히 귀한 음식이라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놀라운 양식을 배부르게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람을 움직여 수많은 새를 가져오셨습니다.

먼지처럼 많은 고기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날개 달린 새들을 그들 위에 비처럼 내려 주었다.시편 78:27 · 본디새김

먼지와 바다의 모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시인은 만나와 새를 모두 「비처럼」 내려 주셨다고 묘사합니다. 광야에는 비가 귀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이 쏟아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풍성함은 곧 두려운 장면으로 바뀝니다.

그들이 자기 욕망에서 아직 떠나지 않았고, 음식이 여전히 그들의 입에 있을 때,시편 78:30 · 본디새김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치솟았다. 그는 그들 가운데 살진 자들을 죽였고,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쓰러뜨렸다.시편 78:31 · 본디새김

음식이 아직 입에 있을 때 심판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이 그 요구의 모든 측면을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은 음식을 공급하셨지만,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자기 욕망을 좇은 태도에 대해서는 심판하셨습니다. 시편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심판의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들의 배는 채워졌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시인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백성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힘센 이들의 빵」의 히브리어 레헴 압비림은 문자적으로 「강한 자들의 빵」에 가깝고, 칠십인역은 천사들의 빵으로 옮깁니다. 30–31절은 민수기 11:31–34에 기록된 메추라기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곳에서도 백성은 고기를 탐했고, 고기를 먹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습니다. 시편 78편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와 민수기 11장의 고기 이야기를 한데 묶어 보여 줍니다. 사건을 엄격한 시간순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과 백성의 불신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기억하셨다

시편 78:32–39 본문 →

이 모든 일을 겪고도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었고, 그의 놀라운 일들을 믿지 않았다.시편 78:32 · 본디새김

구원을 경험했을 때에도 믿지 않았고, 심판을 경험한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각한 결과를 경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백성은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그들을 죽일 때면 그들은 그를 찾았고,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시편 78:34 · 본디새김

이 장면만 보면 회개가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이 자신들의 바위이자 구속자이심을 기억했습니다(35절).

그러나 시인은 곧바로 그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 그를 속였고, 혀로 그에게 거짓말했다.시편 78:36 · 본디새김
그들의 마음은 그를 향해 굳게 서 있지 않았고, 그들은 그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다.시편 78:37 · 본디새김

8절에서 조상들은 마음을 굳게 세우지 않았던 세대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이제 역사 속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그 말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 그분과의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은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위기 속의 회개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은 이 백성의 구체적인 불신실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진실하게 돌아가려는 마음을 혼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의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그러나」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워 죄악을 덮어 주고 멸하지 않았다. 거듭 자기 분노를 돌이켰고, 자기 격분을 모두 일으키지는 않았다.시편 78:3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백성의 겉모습과 실제 마음이 대조되었습니다. 이제는 백성의 불신실함과 하나님의 자비가 대조됩니다.

백성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셨습니다.

백성이 충분히 변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분이 자비로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이 「거듭」 자신의 분노를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백성의 반복적인 거역에 하나님의 반복적인 자비가 대응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이미 여러 차례 실제 심판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셨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 구절에 나타납니다.

그는 그들이 육체임을 기억했다. 가 버리면 돌아오지 않는 바람임을 기억했다.시편 78:39 · 본디새김

백성은 하나님의 행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셨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몸이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는 존재인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 앎이 하나님의 긍휼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심판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죄악을 덮어 주고」로 옮긴 히브리어 키페르는 죄를 속하거나 제거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일과 관련되는 동사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죄악을 그냥 없는 일로 여기셨다는 뜻보다, 죄악이 있음에도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무게가 놓입니다.

역사를 다시 들려주는 이유 — 잊어버린 것은 기적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였다

시편 78:40–55 본문 →

그들은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그를 거역했던가. 황무지에서 얼마나 자주 그를 슬프게 했던가.시편 78:40 · 본디새김

시인은 광야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미 바다와 구름, 바위와 만나, 메추라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왜 같은 시대를 두 번 이야기할까요? 첫 번째 회고에서는 백성이 광야에서 필요를 요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모습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 회고에서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더 길게 들려줍니다.

앞에서는 백성의 요구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중심입니다.

그들은 그의 손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적에게서 되찾은 날을 기억하지 않았다.시편 78:42 · 본디새김

여기서 「그의 손」은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신 능력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백성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집트의 강물이 피로 변했습니다. 벌레와 개구리, 메뚜기와 우박이 이집트의 삶을 뒤흔들었습니다. 가축이 피해를 입었고, 마침내 맏이들이 죽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시인은 재앙의 목록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역사 연대기 작성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집트의 힘을 어떻게 무너뜨리셨는지를 보여 주려 합니다.

그는 자기 분노가 갈 길을 닦았다.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 주지 않았고, 그들의 생명을 역병에 넘겨주었다.시편 78:50 · 본디새김

「자기 분노가 갈 길을 닦았다」는 표현은 심판의 진행을 길을 만드는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폭발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심판을 실제 역사 속에서 시행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편은 이집트의 재앙을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압하는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 아래 있던 백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심판받는 이집트 사람들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맏이들의 죽음을 포함한 이 이야기는 무거운 심판의 기록입니다. 시인은 그 사건을 가볍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끌어 냈고, 광야에서 가축 떼처럼 몰고 갔다.시편 78:52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목자처럼 묘사합니다.

이집트의 강과 들판을 뒤흔드신 분이 자기 백성에게는 목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유를 얻은 강한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내신 양 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따라 안전하게 나아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안전하게 이끌어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가 그들의 원수들을 덮었다.시편 78:53 · 본디새김

같은 바다가 한쪽에는 구원의 길이 되었고, 다른 쪽에는 심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약속의 땅에 이르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거룩한 땅으로 이끄시고, 민족들을 몰아내시어 이스라엘 지파들이 거주하게 하셨습니다(78:54–55).

「그의 오른손이 얻은 이 산」이라는 표현에서 산은 가나안의 산지 또는 시온을 향한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뒤에서 시온의 선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때문에, 이미 시온을 향해 시선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땅을 얻는 과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소유를 주셨다는 구약의 역사 서술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오늘날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허가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이 시편의 논지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이 그 땅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소유물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시고, 구원하시고, 거주하게 하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그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시인은 광야에서의 실패가 다시 반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재앙들은 출애굽기 7–12장에 기록된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다만 시편은 출애굽기의 모든 재앙을 빠짐없이 열거하거나 동일한 순서로 배열하지 않습니다. 「하실 메뚜기」와 「메뚜기」처럼 농작물을 파괴하는 해충의 표현을 나란히 사용하고, 「하나말」처럼 정확한 종류를 확정하기 어려운 재앙의 표현도 보존합니다. 49절의 「해를 끼치는 전령들의 무리」도 같은 심판의 장면에 속합니다. 여기서 「전령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독립적인 악의 세력이나 후대의 악마 개념을 뜻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편 78:56–64 본문 →

그러나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했으며, 그의 증언들을 지키지 않았다.시편 78:56 · 본디새김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했습니다. 이제는 땅을 얻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신실한 삶을 보장하지는 못했습니다.

자기 조상들처럼 물러서서 배신했고, 속이는 활처럼 뒤틀렸다.시편 78:57 · 본디새김

9절에서 에브라임의 자손들은 활로 무장했지만 전투의 날에 돌아섰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속이는 활」에 비유됩니다.

활은 정확한 방향으로 화살을 보내야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뒤틀린 활은 쏘는 사람이 기대한 방향으로 화살을 보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도 그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습니다.

겉으로는 활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믿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그 이름에 합당한 신실함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실함은 특히 예배의 문제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산당들로 그를 노하게 했고, 그들의 새긴 우상들로 그를 질투하게 했다.시편 78:58 · 본디새김

이제 문제는 광야의 음식이 아닙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동입니다.

「질투하게 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불안하거나 경쟁심 많은 존재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관계에서 요구되는 배타적인 신실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와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규칙을 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그 결과를 매우 엄중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듣고 격노했으며, 이스라엘을 철저히 버렸다.시편 78:59 · 본디새김
그는 실로의 거처를 버렸다. 사람들 가운데 세운 천막을 버렸다.시편 78:60 · 본디새김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 성막을 세운 곳입니다(여호수아 18:1).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시인은 성소가 단순히 외적의 공격으로 무너졌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실로를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처가 있다는 사실이 그곳의 모든 행동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아닙니다.

이 장면은 사무엘상 4장의 언약궤 탈취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했고, 언약궤는 빼앗겼으며,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사무엘상 4:10–11).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승리를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78편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자기의 힘이 사로잡혀 가게 내주었고, 자기의 영광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시편 78:61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힘」과 「영광」은 언약궤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사로잡혔다고 해서 하나님 자신이 적에게 사로잡히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가운데 그 상징물을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공동체 전체가 겪은 비극을 보여 줍니다. 젊은이들이 죽었고, 처녀들에게는 혼인 축하 노래가 들리지 않았으며, 제사장들이 칼에 쓰러졌고, 과부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그 백성의 제사장들은 칼에 쓰러졌고, 그 백성의 과부들은 울지 않았다.시편 78:64 · 본디새김

과부들이 울지 않았다는 말은 슬퍼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기보다, 재난이 너무 심각하여 정상적인 애도의 자리마저 무너진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왜 울지 않았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피해를 단순히 사망자의 수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미래가 사라지고, 결혼의 기쁨이 사라지고, 예배를 섬기던 제사장들이 쓰러지며, 슬픔을 표현할 일상적인 질서까지 무너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양 떼를 안전하게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양 떼는 칼에 넘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인은 그 질문에 추상적인 설명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역사의 다음 장면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언약궤 사건과 실로 성소의 물리적인 파괴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4장은 언약궤가 빼앗긴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때 실로의 모든 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 78편도 실로를 버리셨다고 말할 뿐, 건물 파괴의 정확한 경위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실로를 버리신 하나님이 시온을 선택하시다

시편 78:65–69 본문 →

주가 잠자던 이처럼 깨어났다. 포도주 기운에 소리치는 용사처럼 깨어났다.시편 78:65 · 본디새김

하나님이 실제로 술에 취해 잠들어 계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오래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이 강력하게 행동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깨어나셨다는 말은 앞서 백성이 겪은 패배와 고통이 하나님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자기 적들을 물리치십니다.

그는 요셉의 천막을 버렸고, 에브라임 지파를 선택하지 않았다.시편 78:67 · 본디새김
유다 지파를 선택했고, 자기가 사랑한 시온산을 선택했다.시편 78:68 · 본디새김

이제 시편의 첫머리에 등장했던 에브라임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처음에 에브라임은 활을 들고도 전투에서 돌아선 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유다를 선택하십니다.

여기서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을 에브라임 지파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영원히 제외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이스라엘의 중심 성소와 지도권이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역에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의 시온으로 향합니다.

시인은 시온이 다른 산보다 지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인간의 눈에 가장 강력한 요새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근거를 인간의 우월성에서 찾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이야기는 앞선 심판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로를 버리셨습니다. 그곳은 한때 하나님이 거처를 두셨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시온 역시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이유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7:12–15에서는 실로에 일어난 일이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백성의 신실함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 성소를 높은 하늘처럼 지었고, 자기가 영원히 기초를 놓은 땅처럼 지었다.시편 78:69 · 본디새김

시인은 성소의 물리적 크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질서의 견고함과 위엄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성소만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소를 선택하신 뒤, 그곳에서 자신의 백성을 돌볼 사람도 선택하십니다.

왜 이 긴 역사는 다윗이라는 목자로 끝나는가

시편 78:70–72 본문 →

자기 종 다윗을 선택하여, 양 우리들에서 그를 데려왔다.시편 78:70 · 본디새김

시편은 출애굽에서 시작해 광야와 약속의 땅, 실로의 비극과 시온의 선택까지 이야기를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은 왕궁에 앉은 강력한 통치자가 아닙니다.

시인은 다윗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나 왕권을 확립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래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목자였습니다.

젖 먹이는 암양들을 뒤따르던 그를 데려와, 자기 백성 야곱을, 자기 소유 이스라엘을 돌보게 했다.시편 78:71 · 본디새김

다윗은 단지 양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새끼를 돌보아야 하는 암양들까지 살피던 목자로 묘사됩니다.

어린 양을 품은 암양들은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 속도와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 대상입니다. 이 표현은 다윗의 이전 역할이 단순히 힘을 행사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들을 돌보는 일이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52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제 71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시어 자신의 백성을 돌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자신이 목자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그 목자의 일을 맡습니다.

이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참된 목자이시며, 다윗은 그분이 맡기신 백성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왕권도 자기 소유를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지도자는 백성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돌보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다윗의 통치를 두 가지 표현으로 요약합니다.

다윗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았고, 슬기로운 두 손으로 그들을 이끌었다.시편 78:72 · 본디새김

「온전한 마음」은 마음의 온전함이나 성실함을, 「슬기로운 두 손」은 손의 분별력과 능숙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측면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로 백성을 대하는지와 연결됩니다. 손은 실제로 어떻게 인도하고 판단하며 일을 수행하는지와 연결됩니다.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백성을 잘 이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능숙한 통치 기술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백성을 향해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시편은 좋은 지도자를 강한 손을 가진 사람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마음과 슬기로운 손을 함께 가진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시편의 첫 부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8절에서 조상들은 마음을 굳게 세우지 않았던 세대였습니다. 37절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굳게 서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윗은 온전한 마음으로 백성을 돌봅니다.

백성의 역사에서 계속 드러났던 마음의 문제와, 마지막에 등장하는 목자의 온전한 마음이 대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는 활을 든 에브라임이 전투의 날에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다윗은 슬기로운 손으로 백성을 이끕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힘을 과시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신실하게 돌보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근거로 다윗이 평생 죄를 짓지 않았거나 언제나 완전한 왕이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11–12장은 다윗의 심각한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시편 78편의 마지막은 다윗 생애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평가라기보다, 하나님이 그를 어떤 역할로 세우셨으며 그가 어떤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편 자체가 이미 훌륭한 출발이나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신실함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선택 역시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한 마음」은 히브리어 톰 레바보, 「슬기로운 두 손」은 테부노트 카파브입니다. 사무엘상 16:11–13에서도 다윗은 양을 돌보던 자리에서 불려 나와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시편 78편은 그 선택의 의미를 목양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이 역사를 이끄는 것은 인간의 변화인가, 하나님의 자비인가

시편 78:1–72 본문 →

시편 78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성의 행동은 놀랄 만큼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행동에는 계속 새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백성의 역사는 그들 자신의 신실함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반복하여 행동하셨기 때문에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의 불신실함을 가볍게 여기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이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을 여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더 많은 기적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다와 구름, 바위와 만나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명령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줄 신실한 돌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기적의 목록으로 끝나지 않고 목자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시편은 다윗의 선택으로 끝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의 왕들이 어떠했는지, 백성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는 이 시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시작에서는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에서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가 등장합니다. 처음에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행적을 전해 줄 사람이었고, 마지막에 등장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사람이었습니다.

둘은 서로 떨어진 역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게 하는 일과, 그분의 백성을 신실하게 돌보는 일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양 우리 곁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젖 먹이는 암양들을 뒤따르며 양 떼를 돌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불러 자신의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돌보아야 할 백성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다를 건넌 뒤에도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늘의 양식을 먹은 뒤에도 거역했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에도 언약을 저버렸던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런 백성을 하나님은 다시 목자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의 마음과 손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았고, 슬기로운 두 손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긴 역사의 끝에 남은 것은 승리를 자랑하는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과 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