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6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심판하러 오시는 왕과 노래하는 숲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소식은 두려운 소식일까, 기쁜 소식일까?

시편 96편은 뜻밖의 장면으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즐거워하며, 바다가 우렁차게 울고, 들판과 숲의 나무들까지 환호합니다. 이 모든 기쁨의 이유는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그가 오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심판을 기쁨의 반대편에 놓습니다. 심판은 죄를 드러내고 벌을 내리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심판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 까닭은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또 그분이 어떻게 심판하시는지에 있습니다.

시편 96편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노래가 아닙니다. 세상이 어떤 왕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노래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96편 본문 읽기 →

온 땅을 향해 시작되는 새로운 노래

시편 96:1–3 본문 →

시편은 세 번의 초청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에게 새 노래를 불러라. 온 땅아, 여호와야훼에게 노래하여라. 여호와야훼에게 노래하고 그의 이름을 찬미하여라. 날마다 그의 구원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여라.시편 96:1–2 · 본디새김

시인은 처음부터 「온 땅아」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데, 정작 그 노래를 부르라는 초청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시편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온 세상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노래」는 반드시 이전에 없던 곡이나 새로운 가사를 뜻하지 않습니다. 시편 98편 1절에서도 새 노래의 이유는 여호와야훼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2장 10절에서는 새 노래의 초청이 땅끝과 바다와 여러 지역으로 뻗어 나갑니다.

새 노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새롭게 일어나는 응답입니다.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이라도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새롭게 깨달으면,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 또한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곧바로 노래에서 선포로 나아갑니다.

「기쁜 소식으로 전하여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거나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라는 말보다 적극적입니다. 누군가에게 반가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시인은 구원을 한 번 전하라고 하지 않고 「날마다」 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에 한 번 있었으므로 기억해야 할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삶에서도 계속 이야기되어야 할 소식입니다.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다스림은 매일 선포할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첫 세 절에는 세 가지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노래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며, 3절의 말처럼 「나라들 가운데 그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참된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질문이 따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야훼를 왜 다른 모든 민족도 찬양해야 하는가?

조금 더 깊이

「기쁜 소식으로 전하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세루입니다. 시편 96편과 거의 같은 노래가 역대상 16장 23~33절에 등장합니다. 역대상 16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도록 한 장면을 전합니다. 다만 두 본문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시편 96편에는 첫머리의 「새 노래」라는 초청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의롭고 신실한 심판을 더 자세히 말합니다. 역대상에서는 일부 표현과 순서도 다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차이만으로 어느 본문이 먼저 작성되었는지, 시편 96편 전체가 다윗의 언약궤 운반 당시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예배 한가운데서 불리던 노래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 장면(마가복음 1:14~15)은 하나님의 왕권을 기쁜 소식으로 알린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시편 96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된다는 공통된 주제에 따른 연결입니다.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창조주

시편 96:4–6 본문 →

여호와야훼는 위대하고 크게 찬양받을 만하며, 그는 모든 신보다 더 경외받을 만하기 때문이다.시편 96:4 · 본디새김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 민족과 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과 그 신들이 보호한다고 믿는 도시나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든 민족이 찬양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당연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모든 신보다 경외받으실 만하다고 선언하며, 다음 절에서 비교의 기준을 바꿉니다.

민족들의 모든 신은 헛된 우상들이지만, 여호와야훼는 하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시편 96:5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 「신들」을 뜻하는 말은 엘로헤이(⁨אֱלֹהִים⁩)이고, 「헛된 우상들」은 엘릴림(⁨אֱלִיל⁩)입니다. 두 말은 소리가 닮아 있습니다. 시인은 이 유사성을 통해 민족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무가치한 존재로 낮춥니다. 「헛된 우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경쟁하는 신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돌리는 신적 영광이 실상은 헛되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는 무엇 때문에 다르신가?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더 많이 승리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하늘을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의 논리가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의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살아가는 세계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44장 9~20절의 우상 비판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나무를 가져다가 일부로는 불을 피우고 다른 일부로는 신상을 만든다면, 그 신상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큰 존재일 수 없습니다. 시편 96편은 이와 반대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창조주라는 사실만으로 그분의 통치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그분 앞에 있는 것들을 보여 줍니다.

위엄과 영화가 그의 앞에 있고, 힘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다.시편 96:6 · 본디새김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궁정을 묘사하듯 말합니다. 왕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속성들이 여호와야훼의 임재를 둘러쌉니다.

힘은 다른 대상을 굴복시키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힘은 위엄과 영화,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분의 통치는 단순히 힘이 세기 때문에 인정받는 지배가 아니라 영광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다스림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성소가 등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역이 성소 안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 절에서 하늘 전체를 그분이 만드셨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을 가두는 장소가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예배자가 만나고 경배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민족들이 예배의 자리로 초청받다

시편 96:7–9 본문 →

여호와야훼에게 돌려라, 민족들의 씨족들아. 여호와야훼에게 영광과 힘을 돌려라. 여호와야훼에게 그의 이름에 걸맞은 영광을 돌려라. 예물을 들고 그의 뜰들로 들어가라.시편 96:7–8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노래하여라」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돌려라」가 세 번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시편의 두 부분을 연결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널리 전하도록 했고, 이제는 그 소식을 들은 민족들이 직접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초청합니다.

시편 29편 1~2절에도 여호와야훼께 영광과 힘을 돌리고 거룩한 아름다움 가운데 경배하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시편 29편은 「신들의 아들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천상의 존재들을 부르지만, 시편 96편은 「민족들의 씨족들」을 부릅니다. 이 표현들이 정확히 어떤 문학적 선후관계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두 시편을 나란히 읽을 때 나타나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하늘에 속한 존재들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민족도 창조주의 영광을 인정하도록 부름받습니다.

「민족들의 씨족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몇몇 거대한 왕국만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혈연과 공동체와 지역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부족한 영광을 인간이 보태 드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여호와야훼는 이미 위대하십니다. 예배는 그분에게 원래 속한 영광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어지는 명령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여호와야훼에게 그의 이름에 걸맞은 영광을 돌려라. 예물을 들고 그의 뜰들로 들어가라. 거룩한 아름다움 가운데 여호와야훼에게 몸을 굽혀라. 온 땅아, 그의 앞에서 떨어라.시편 96:8–9 · 본디새김

앞에서는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 민족들이 예물을 들고 하나님의 뜰로 들어오는 모습을 그립니다. 민족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의 영광을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초청받습니다.

물론 이 시의 표현만으로 당시 성소 출입에 관한 구체적인 제도나 모든 외국인의 실제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그리는 것은 온 세상이 여호와야훼께 경배하는 보편적인 예배의 전망입니다.

「거룩한 아름다움 가운데」라는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도 있고, 경배자가 거룩한 예복을 갖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 시편 29편 2절 역시 이 문제를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예배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몸을 굽히고 그분을 경외합니다.

시편은 여기서 다시 「온 땅아」라고 부릅니다. 1절에서 온 땅은 노래하도록 초청받았습니다. 9절에서 온 땅은 여호와야훼 앞에 떨도록 초청받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같은 예배 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감정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을 안다는 것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이유를 발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분으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온 땅이 경외해야 하는 이 왕은 실제로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조금 더 깊이

민족들을 향한 이 초청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도 어울립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시편 96편은 그 약속을 직접 해설하는 본문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구약의 큰 전망과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

시편 96:10 본문 →

나라들 가운데 말하여라.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 참으로 세계는 굳게 서 있으며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민족들을 공평하게 판결할 것이다.」시편 96:10 · 본디새김

이 한 절은 시편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앞부분의 초점이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가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분의 왕권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오는가로 옮겨 갑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왕권을 새로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통치가 참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세계가 굳게 섭니다.

이것은 지구가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세계가 창조주의 통치 아래 굳게 세워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신들의 변덕이나 인간 통치자들의 힘에 궁극적으로 맡겨져 있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민족들을 공평하게 판결하십니다.

고대 왕에게는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재판과 정의를 세울 책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언제나 공정하게 재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유리한 판결을 얻고, 힘없는 사람의 억울함이 외면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세계가 굳게 서 있는 까닭은 힘센 왕이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평하게 판결하시는 왕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없다면 질서라는 이름 아래 불의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통치는 세계를 붙드시면서도 그 안에 있는 민족들을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 이 점에서 여호와야훼의 왕권은 단순히 가장 강한 통치자의 권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권위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해야 하는가?

그분의 심판이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기쁨을 사람에게만 맡겨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여호와야훼 말라크는 「여호와야훼가 왕이 되었다」 또는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는 완료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문장이 반드시 하나님이 이전에는 왕이 아니셨다가 어느 시점에 새로 왕위에 오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 93편 2절은 하나님의 왕좌가 옛날부터 굳게 서 있고 하나님이 영원부터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96편은 시편 93~99편에 걸쳐 두드러지는 여호와야훼의 왕권이라는 주제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시편 93편은 여호와야훼의 영원한 왕권과 세상의 견고함을 선포합니다. 시편 95편은 백성이 창조주이며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야훼 앞에 경배하도록 초청하면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뒤를 잇는 시편 96편에서는 초청의 범위가 더욱 뚜렷하게 넓어집니다. 시편 97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왕권을 기뻐하는 땅과 해안 지역들이 등장하고, 시편 98편에서는 강과 산들이 하나님 앞에서 환호합니다. 이러한 왕권 이해는 시편 72편과도 통합니다. 그 시편은 이상적인 왕이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위해 정의를 베풀고 압제자를 꺾기를 기도합니다(시편 72:2~4, 12~14). 시편 96편에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왕, 곧 온 세계를 만드신 여호와야훼가 민족들을 공평하게 판결하신다고 선언합니다.

바다와 들판과 숲이 환호하다

시편 96:11–13 본문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을 가득 채운 것들은 우렁차게 울려라.시편 96:11 · 본디새김

시편의 무대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노래하고, 여러 민족이 영광을 돌리고, 왕의 통치를 선포했습니다. 시인은 이제 세계를 구성하는 영역들을 차례로 불러냅니다. 시편 앞부분에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로 여호와야훼의 왕권을 설명했다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창조 세계 전체가 왕의 오심에 응답합니다.

구약의 시적 표현에서 바다는 때로 혼돈과 위협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시편 93편 3~4절에서도 큰물은 소리를 높이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물소리보다 더 위대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바다가 내는 소리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기쁨의 표현이 됩니다.

파도가 우렁차게 울리는 장면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 소리를 해석하는 시인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 바다의 거친 소리마저 환호가 됩니다.

들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기뻐 뛰어라. 그때 숲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 외칠 것이다. 그가 오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의로 심판하고, 민족들을 그의 신실함으로 심판할 것이다.시편 96:12–13 · 본디새김

시인은 자연을 의인화합니다. 시인은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한다는 사실을 시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나무는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바다는 왕을 선출하지 않습니다. 들판은 재판정에 나아가 판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 사회의 정치와 재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온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올바른 다스림은 창조 세계 전체에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모든 기쁨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가 오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시의 앞부분에서 세 번씩 반복되던 찬양과 경배의 명령은 이제 왕의 오심을 알리는 반복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왕으로 다스리시는 여호와야훼가 세계를 판결하러 나타나실 것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통치가 단지 하늘에 있는 왕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를 담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두 표현을 나란히 놓습니다. 「의」와 「신실함」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판결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악을 선이라 부르거나 불의를 정의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함」은 하나님의 믿을 만하심과 변함없는 성실함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재판은 때로 편견에 휘둘리고, 권력에 굴복하며, 약속을 저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의로우며 신실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이 기대하는 심판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형벌을 내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세상을 올바르게 다루시는 일입니다. 악과 불의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진실하고 공평한 기준으로 민족들을 판결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시인은 온 땅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판결은 불의한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심판은 기쁜 소식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는 공평한 판결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에게 아무런 판결도 내려지지 않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시편 96편이 기뻐하는 것은 심판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마침내 의롭고 신실한 왕이 세상을 판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숲의 나무들이 환호하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판이 기뻐 뛰고 나무들이 노래하는 것을 자연물이 문자 그대로 인간의 감정을 가진다는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사야 55장 12절에서 산과 언덕이 노래하고 들의 나무들이 손뼉을 치는 장면과 통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자연 세계의 환호로 표현합니다. 「오신다」는 표현이 반드시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시점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실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에무나토이며, 이 표현을 「진실함」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신뢰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리신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왕을 기뻐하는가

시편 96:1–13 본문 →

시편 96편은 독자에게 찬양하라고 요청하지만, 찬양의 감정부터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며, 그분의 영광은 어느 한 민족의 경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에게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며, 세상을 의롭고 신실하게 판결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승리를 곧 하나님의 승리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졌을 때에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96편의 기쁜 소식은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을 공평하게 판결하시는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한다는 것은 내 편이 언제나 옳다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나 자신도 그분의 의로운 판결 앞에 서기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내가 속한 곳과 내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끝까지 찬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통치를 기다리는 노래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새 노래를 부릅니다. 이어 여러 민족이 그분의 영광을 인정하고, 온 땅이 그분 앞에서 몸을 굽힙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인간의 목소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 바다가 소리를 높이고 들판이 뛰놀며 숲의 나무들이 노래에 합류합니다.

그 광대한 환호의 한가운데에는 세계를 심판하러 오시는 왕이 계십니다.

시인은 그분의 오심을 두 번 알립니다. 「그가 오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숲의 모든 나무가 그분 앞에서 기뻐 외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