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7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구름에 가려진 왕좌와 땅에 뿌려진 빛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라는 명령 바로 다음에 땅이 몸부림치고 산들이 녹아내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시편 97편은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 땅아, 즐거워하여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은 번개를 보고 몸부림치며, 산들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밀랍처럼 녹아내립니다. 왕의 다스림을 기뻐하라는 초청이 왜 이렇게 두려운 광경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시편 96편이 의롭고 신실한 왕의 오심을 온 세상의 환호로 그렸다면, 시편 97편은 그 왕이 나타나실 때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무너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장면이 있습니다. 불과 번개가 세상을 뒤흔든 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빛이 뿌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 주는 빛은 순식간에 세계를 밝히는 번개로 나타나지만,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빛은 씨앗처럼 뿌려져 있습니다.

이 두 빛 사이에 시편 97편의 중요한 메시지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악이 의지하던 것들을 무너뜨리는 능력인 동시에,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빛과 기쁨을 마련하는 다스림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97편 본문 읽기 →

왕좌는 어둠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토대는 분명하다

시편 97:1–2 본문 →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린다. 땅아, 즐거워하여라. 수많은 해안 땅아, 기뻐하여라.시편 97:1 · 본디새김

시편은 설명 없이 왕권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먼저 주어지고, 그 사실에 대한 응답으로 땅과 해안 지역들이 기뻐하도록 초청받습니다.

「수많은 해안 땅」(⁨אִי⁩)이라는 표현은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시야에 넣습니다. 이 낱말은 섬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해안 지역을 포함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이사야 42장 4절과 10~12절에서도 해안 지역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고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시편 97편 역시 하나님의 왕권을 한 지역의 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먼 바다 너머의 지역들까지 기뻐해야 하는 왕권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구름과 짙은 어둠이 그의 둘레에 있고, 의와 공의가 그의 왕좌의 토대다.시편 97:2 · 본디새김

기쁨으로 시작한 시에 뜻밖에도 어둠이 등장합니다. 이 구름과 어둠은 하나님이 악하거나 불의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짙은 구름과 어둠은 오히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면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산에는 불과 구름과 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신명기 4:11). 출애굽기 20장 21절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짙은 어둠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그분의 임재와 함께 나타납니다.

이런 장면에서 어둠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들여다보거나 그분의 영광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관찰하고 분석하여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의와 공의」라는 두 표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의」는 올바름을, 「공의」는 그 올바름이 판단과 질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왕좌가 얼마나 화려한지, 그분의 궁정이 얼마나 넓은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왕좌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를 말합니다.

왕좌의 토대는 의와 공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분의 통치를 떠받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름과 짙은 어둠은 그분의 둘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의와 공의는 그분의 왕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있지만, 그분의 성품이 도덕적으로 불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89편 14절도 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왕좌의 토대라고 선언합니다. 그곳에서는 인애와 신실함이 하나님의 앞에 있다고 덧붙입니다.

시편 97편은 이 왕좌를 이제 움직이는 장면으로 바꿉니다. 그분의 통치가 추상적인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에 나타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산들이 녹아내리다

시편 97:3–6 본문 →

불이 그의 앞에서 나아가며, 둘레에 있는 그의 적들을 불태운다. 그의 번개들이 세계를 비추었다. 땅은 보고 몸부림쳤다.시편 97:3–4 · 본디새김

왕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은 군대나 전령이 아니라 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을 자연현상의 언어로 그리는 시적 묘사입니다. 번개와 불, 땅의 떨림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났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19:16~19).

여기서 「그의 적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어느 특정 민족이나 집단에 곧바로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의 관심은 여호와야훼의 통치에 맞서는 세력이 그분 앞에서 버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4절에서는 땅이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땅에 실제 눈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땅을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하여,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이때 땅이 보이는 반응은 환호가 아니라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존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경험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어서 시인은 더욱 강렬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 앞에서, 온 땅의 주 앞에서 산들이 밀랍처럼 녹았다.시편 97:5 · 본디새김

산은 고대 세계에서나 오늘날에나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인간이 세운 건축물은 무너질 수 있지만, 산은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산들이 녹아내린다고 말합니다.

밀랍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열 앞에서는 쉽게 무른 상태가 됩니다. 시인은 사람이 견고하다고 여기는 산도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밀랍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실제로 모든 산이 어느 날 물리적으로 녹아내린다는 예고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의 중심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인간이 절대적으로 견고하다고 생각하던 것들도 그 견고함을 잃습니다.

여기서 2절과 5절을 함께 보면 대조가 나타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왕좌가 의와 공의 위에 서 있습니다. 5절에서는 산들이 그분 앞에서 녹아내립니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산은 녹아내리지만, 하나님의 왕좌를 떠받치는 의와 공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 두 장면을 직접 대조한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 안에서 왕좌의 토대와 녹아내리는 산을 나란히 읽으면, 무엇이 참으로 견고한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힘과 크기, 오래된 역사나 굳어진 질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보여 주는 궁극적인 견고함은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7편의 왕의 출현은 단지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이 그의 의를 알렸고,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시편 97:6 · 본디새김

번개가 세계를 비추는 장면은 이제 하나님의 의가 알려지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의 힘을 알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를 알렸다고 합니다.

앞에서 본 불과 번개, 녹아내리는 산들은 하나님의 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의입니다. 모든 민족이 보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강한 빛이나 놀라운 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그 영광은 의와 공의를 토대로 다스리시는 왕의 영광입니다.

힘이 강하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힘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힘은 때로 사람들을 두렵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행사하는 분이 의로우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 준 뒤 그분의 의를 선포함으로써, 왜 이 왕의 다스림이 기쁨의 근거가 되는지 밝혀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산들이 녹아내리는 장면은 미가 1장 3~4절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가 내려오실 때 산들이 그분 아래서 녹아내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피조 세계의 견고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그분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같은 왕의 나타나심, 서로 다른 반응

시편 97:7–9 본문 →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새긴 형상을 섬기며 헛된 우상들을 자랑하는 모든 이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모든 신들아, 그에게 몸을 굽혀라.시편 97:7 · 본디새김

여기서 수치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무엇을 자랑하는지에 주목합니다. 「헛된 우상들」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날카로운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광이라고 여겼던 대상이 정작 참된 영광 앞에서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 형상은 보호와 힘, 번영의 근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땅의 주이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드러나면, 그들이 의지하던 대상의 무력함도 드러납니다.

본문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치는 단지 외부에서 벌을 받아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랑하던 것이 실상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날 때 생기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모든 신들아, 그에게 몸을 굽혀라」라는 명령은 이러한 역전을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은 문맥에 따라 하나님, 신들, 또는 신적 존재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는 바로 앞의 우상 숭배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민족들이 신으로 섬기는 존재들까지 여호와야훼 앞에 복종하라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의 핵심은 신으로 불리는 어떤 존재도 여호와야훼와 대등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전혀 다른 반응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판결들 때문에 시온이 듣고 기뻐했으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했습니다.시편 97:8 · 본디새김

우상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지만, 시온은 기뻐합니다.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적 이름입니다. 「유다의 딸들」은 유다의 성읍들이나 그 주민들을 가리키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을 실제 여성들의 기쁨까지 배제하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온이 무엇을 듣고 기뻐하는가입니다. 시온은 적들의 파멸 자체를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만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판결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앞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의를 알리고 모든 민족이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제 시온은 그분의 판결들을 듣습니다.

세계가 본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는 기쁜 소식으로 들려옵니다.

이것은 앞선 두 장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상들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분의 의로운 판결을 기다리는 백성에게 기쁨을 줍니다.

시온의 기쁨을 곧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무조건적인 승리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기뻐하는 근거는 여호와야훼의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와 공의로 다스리신다면, 그 기준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아모스 5장 21~24절이 보여 주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시온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신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참으로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8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고백은 9절에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이이며, 모든 신보다 훨씬 높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97:9 · 본디새김

시온은 자신의 위대함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지하는 왕이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가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사실은 단지 그분이 다른 모든 신보다 강하시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시의 흐름에서 그분은 어느 민족이나 우상이 자랑하는 힘에도 종속되지 않으시며, 모든 민족을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온의 기쁨은 이 왕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통치가 온 땅에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이 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비로소 그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모든 신들아, 그에게 몸을 굽혀라」를 「그의 모든 천사들아, 그에게 경배하여라」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다른 읽기 전통을 보여 주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 신들이라는 표현을 지워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시인이 여러 신들의 독립적인 실재를 인정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미워하는가

시편 97:10 본문 →

여호와야훼를 사랑하는 이들아, 악을 미워하여라. 그는 자기에게 신실한 이들의 목숨을 지키며, 악인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낸다.시편 97:10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미움을 언제나 반대되는 감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두 태도는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의와 공의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와 공의를 거스르는 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이 미워하시는 악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을 미워하여라」라고 말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라는 명령을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벗어납니다. 이 시에서 미워해야 할 것은 악이며, 그 기준은 자신의 감정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먼저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돌아보게 합니다. 불의가 나에게 이익이 될 때에도 그것을 악으로 볼 수 있습니까? 거짓이 나를 보호해 줄 때에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을 내가 손해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시편의 명령은 인간의 도덕적 우월감을 강화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 앞에서 자신의 삶을 살피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명령만 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알려 줍니다.

여기서 「목숨」은 문맥에서 사람의 생명과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반드시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신실한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며, 악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자기에게 신실한 이들」은 단지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고난이나 죽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자체에도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고통받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부르짖는 노래들이 있습니다. 시편 44편과 88편이 그 예입니다.

시편 97편의 약속은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악인의 힘이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보다 궁극적으로 크지 않다는 신뢰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신뢰는 다음 절의 독특한 비유로 이어집니다.

번개는 순식간에 비추지만, 빛은 씨앗처럼 뿌려져 있다

시편 97:11 본문 →

의로운 이를 위해 빛이 뿌려져 있고, 마음이 곧은 이들을 위해 기쁨이 뿌려져 있다.시편 97:11 · 본디새김

시편 97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친다고 말하거나 빛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빛이 「뿌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씨를 뿌린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으로, 뿌려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이 독특한 비유를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여기에는 본문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의로운 이를 위해 빛이 떠올랐다」는 뜻으로 옮깁니다. 어느 읽기가 최초의 표현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른 히브리어 본문의 비유를 그대로 읽으면, 시편 안에서 연결이 드러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번개는 세계를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갑작스럽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세계는 그 빛을 보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빛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번개가 아니라 씨앗입니다.

씨앗은 땅에 뿌려진 순간부터 완성된 열매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은 이미 어떤 일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를 따라 읽으면 시인이 왜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빛을 이렇게 표현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번개와 불로 자기 위엄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빛과 기쁨은 언제나 번개처럼 즉각적이고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뿌려진 씨앗처럼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물론 11절 자체가 의로운 사람이 반드시 일정 기간을 기다린 뒤 복을 받는다는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뿌려져 있다」는 비유는 아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아직 환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과, 그 빛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악인의 손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앞 절의 고백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눈앞의 현실에서는 악이 강해 보이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빛이 뿌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의로운 이」와 「마음이 곧은 이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의로움은 단지 겉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마음이 곧다는 표현은 사람이 내적으로도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인정하는 삶은 외적인 행동과 내적인 태도가 분리되지 않는 삶입니다.

여기서 빛과 기쁨도 서로 병행합니다. 시편에서 빛은 종종 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합니다. 시편 27편 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인의 빛과 구원이십니다. 따라서 11절의 빛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깨닫는 지적인 밝음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호의를 경험하는 삶을 폭넓게 나타내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그들에게 다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사본 전승에서도 빛이 떠오르거나 비춘다는 읽기와 연결되는 차이가 알려져 있습니다. 「빛이 떠올랐다」고 읽으면 어둠 뒤에 빛이 나타나는 장면이 강조됩니다. 반면 「빛이 뿌려져 있다」고 읽으면 빛이 씨앗처럼 마련되어 있다는 독특한 이미지가 생깁니다.

다시 기뻐하라는 초청

시편 97:12 본문 →

의로운 이들아,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여라.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여라.시편 97:12 · 본디새김

시편은 기쁨으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의 기쁨은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땅과 해안 지역들이 왕의 통치를 기뻐하도록 초청받았습니다. 12절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도록 초청받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구름과 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 번개가 치고 산들이 녹아내렸습니다. 우상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했고, 시온은 하나님의 판결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악을 미워하라는 명령과 생명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의 기쁨은 이 모든 것을 지나 도달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단지 「기뻐하여라」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여라」라고 합니다. 기쁨의 근거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는 자기 삶에 고통이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이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호와야훼가 어떤 왕이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 제케르(⁨זֵכֶר⁩) 코드쇼(⁨קֹדֶשׁ⁩)는 문자적으로 「그의 거룩함의 기억」 또는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시편 30편 4절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기억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에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라고 읽으면 표현의 여지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을 초월하는 성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97편은 그것을 추상적인 속성으로만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불과 번개를 동반하는 위엄 속에서 나타났고, 의와 공의에 기초한 왕권에서 드러났으며, 악인들의 손에서 자기 백성의 생명을 지키시는 행동으로도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거룩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멀리 계신 신비로운 존재를 막연히 생각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왕이신지를 다시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할 때, 사람은 눈앞의 상황만을 기준으로 그분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분의 통치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왕좌의 토대가 의와 공의라는 사실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에게 감사는 기쁨의 또 다른 표현이 됩니다.

시편 97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시편 97:1–12 본문 →

시편 97편은 하나님의 왕권을 크게 두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하나는 그분의 통치 앞에서 무너지는 것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지켜지고 마련되는 것들입니다.

악을 대적하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의 의가 악에 맞서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에게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분이 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다스림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빛과 기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편 97편은 하나님의 보호와 그분의 공의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왕좌가 의와 공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분이 베푸시는 보호와 구원도 믿을 만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구름과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왕좌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고 산들은 녹아내렸습니다.

그러나 시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불길이나 무너지는 산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 뿌려진 빛입니다.

온 세계를 뒤흔드는 번개를 가지신 분이, 자기에게 신실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빛을 씨앗처럼 뿌려 두셨습니다.

그 빛이 아직 눈부시게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시인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초청합니다.

구름은 여전히 그분의 둘레에 있지만, 왕좌의 토대는 의와 공의입니다. 그리고 그 왕의 다스림 아래,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빛과 기쁨이 뿌려져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