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첫 환상

등잔대들 한가운데에 서 계신 분

요한계시록을 펼치는 독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합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재앙은 언제 시작되는지, 짐승은 누구인지, 마지막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가장 먼저 보여 주는 것은 미래의 재앙도, 세상을 지배하는 짐승도 아닙니다.

일곱 등잔대 한가운데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뜻밖인 것은 그분이 자신을 소개하시는 방식입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눈은 불꽃 같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옵니다. 그토록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나는 죽었지만, 보아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자로 등장하시는 역설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이 책은 세상의 마지막을 알아맞히도록 주어진 암호문이 아닙니다. 지금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이 첫 장은 독자의 눈을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요?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미래를 알려 주기 전에, 계시를 듣는 사람을 부르다

요한계시록 1:1–3 본문 →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 계시는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자기 노예들에게 보이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준 것이고, 그는 자기 천사를 보내어 그것을 자기 노예 요한에게 표로 알려 주었습니다.요한계시록 1:1 · 본디새김

‘계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가려진 것을 드러내거나 덮개를 벗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아포칼립스’라는 말은 흔히 세계의 종말이나 대재앙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낱말 자체가 재앙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인가 가려져 있었고, 이제 그것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1절은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하므로 미래에 관한 내용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계시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계시를 주셨다고 설명하므로 첫 번째 의미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 그리스도 자신이 계시의 중심에 계시다는 사실도 분명해집니다.

계시를 주시는 분과 계시를 통해 드러나시는 분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보내 요한에게 알리시며,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그 증언은 교회에 전달됩니다. 이처럼 전달 과정을 첫 문장에 밝히면서, 요한은 자신이 스스로 알아낸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계시는 인간의 관찰과 추측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표로 알려 주었습니다」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원문의 동사는 알리거나 나타내었다는 뜻이고, 이 낱말만으로 반드시 상징을 사용했다는 뜻이 확정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펼쳐질 환상에서 등잔대, 별, 짐승, 어린양 같은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표로」라는 번역은 이 책의 전달 방식을 잘 드러내는 해석적 선택입니다.

상징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모든 이미지에 임의의 숨은 뜻을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때로 자신이 사용한 상징을 직접 풀이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등잔대와 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시를 받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요구될까요? 3절이 대답합니다.

이 예언의 말을 소리 내어 읽는 사람과, 그 말을 듣고 그 안에 적힌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3 · 본디새김

읽는 사람은 단수이고, 듣는 사람들은 복수입니다. 한 사람이 두루마리를 소리 내어 읽고, 여러 사람이 함께 듣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당시 문서를 공동체 앞에서 낭독하는 관습과 잘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한 지식을 지닌 소수의 해석자만 읽도록 만들어진 책이 아닙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듣도록 보내진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듣고, 지키는 데 있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을 기억한다는 뜻을 넘어 그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따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독자에게 지적인 호기심 이상의 반응을 요구합니다. 이 계시가 참되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요한은 자신과 동시대 교회들에게 이 말씀이 긴급하다고 전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수천 년 뒤의 사건을 가리키는 암호로만 바꾸면 원래 독자들에게 주어진 긴박함이 사라집니다. 동시에 이 문장만으로 모든 환상의 사건이 언제 완성될지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가까운 때에 대한 선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책 전체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요한은 교회가 이 말씀에 응답하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요한계시록 1:4–6 본문 →

4절에서 처음으로 수신자가 등장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대체로 현재 튀르키예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일곱 교회 역시 실제 도시들에 존재했던 공동체입니다. 로마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아시아 지역의 삶을 강하게 규정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교회들에게 요한은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그 은혜와 평화는 세 대상을 통해 선언됩니다. 「지금 있고 전에 있었으며 오는 이」, 보좌 앞의 「일곱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호칭이 특이합니다. 보통 영원하신 하나님을 설명할 때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미래에 관해 단순히 ‘있을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는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오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이름, 특히 그리스어 구약에 등장하는 ‘있는 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서 「일곱 영」이라는 낯선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나타낸 상징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수가 완전함을 나타내는 방식과 연결되고, 뒤의 5:6에서는 어린양의 일곱 눈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섬기는 일곱 천상적 존재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천상의 보좌를 둘러싼 존재들이 등장하는 묵시문학의 배경을 고려한 것입니다. 본문이 「일곱 영」이라고만 말하므로, 이 자리에서 둘 중 하나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다음 예수 그리스도께 세 가지 호칭이 주어지고, 요한의 문장은 찬양으로 바뀝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며 죽은 이들 가운데 맏이이며 땅의 왕들의 지배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기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분께 — 그분은 우리를 나라로, 자기 하나님이자 아버지를 위한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 그분에게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아멘.요한계시록 1:5–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실한 증인이시고, 그다음 죽은 이들 가운데 맏이이시며, 땅의 왕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호칭들은 서로 분리된 직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언과 죽음, 부활과 통치가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여기에서 시편 89편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노래하면서 왕을 높은 지위에 세우고 땅의 왕들 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말하고(시편 89:27), 신실한 증인이라는 표현도 씁니다(89:37). 요한계시록은 다윗 왕조를 둘러싼 이런 왕권의 언어를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왕들을 정복하신 전쟁의 승리자로 먼저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신실한 증인으로 소개되십니다. 뒤에서 어린양의 죽음이 승리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를 이해하게 하는 첫 단서입니다.

원문에서 ‘사랑하시고(ἀγαπάω)’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태이고, ‘풀어 주신(λύω)’은 이루어진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과거의 한 사건에만 머물지 않지만, 죄에서 풀어 주시는 일에는 이미 이루어진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피」입니다.

이 해방의 결과는 개인이 죄에서 벗어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6과 명확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그 언약의 소명을,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공동체에 적용합니다.

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단순히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을 섬기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의 작은 교회들은 제국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집단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이미 나라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힘을 빌려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논쟁이 있지만, 고대 교회 전승은 대체로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를 가리키고, 더 이른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4절의 하나님 호칭은 요한계시록의 그리스어에서 문법적으로 기대되는 격 변화 없이 나타나는데, 이를 저자의 독특한 그리스어 사용으로 보기도 하고 신적 호칭을 의도적으로 고정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5절의 ‘풀어 주신’이라는 표현은 사본에 따라 ‘씻어 주신’으로도 전해집니다. 전자는 죄를 속박처럼, 후자는 죄를 더러움처럼 이해하게 합니다. 두 이미지 모두 성경에 존재하지만, 더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의미가 전면에 놓입니다.

찔리신 분이 구름과 함께 오시다

요한계시록 1:7–8 본문 →

이제 시선이 일곱 교회에서 온 땅으로 넓어집니다.

보십시오, 그가 구름과 함께 옵니다. 모든 눈이, 그를 찌른 자들까지도 그를 볼 것이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두고 가슴을 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멘.요한계시록 1:7 · 본디새김

이 짧은 선언에는 구약의 두 장면이 겹쳐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 7:13–14입니다. 다니엘은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봅니다. 그는 옛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나아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습니다. 다니엘 7장 전체에서는 짐승들로 묘사된 제국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지만, 결국 하늘의 심판을 통해 그 권세가 끝나고 영원한 통치가 세워집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구름의 이미지를 가져와 모든 사람이 그분을 보게 될 미래의 나타남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스가랴 12:10–14입니다. 스가랴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찔린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애곡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은혜와 간구의 영이 부어지는 문맥에 놓여 있으므로, 그 애곡은 단순한 공포 이상으로 자신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겪는 깊은 슬픔의 성격을 지닙니다.

요한은 다니엘의 구름과 스가랴의 찔린 이를 한 인물에게 모읍니다.

온 땅에 나타나시는 지배자는 한때 사람들에게 찔리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모든 족속이 가슴을 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 회개와 애도의 반응입니다. 스가랴의 문맥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을 맞닥뜨리고 슬퍼하는 반응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뒤에서 보여 주는 심판의 장면들이 이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본문은 모든 사람의 슬픔이 어느 한쪽으로만 나타난다고 명시하지 않으므로, 애곡하는 모든 사람이 회개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모두 심판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운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의 나타남 앞에서 누구도 무관심한 구경꾼으로 남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알파이고 오메가다.」 주 하나님, 지금 있고 전에 있었으며 오는 이, 전능한 이가 이렇게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8 · 본디새김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시작과 끝을 아우르시는 분이라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문면상 「주 하나님」입니다. 바로 앞에서 구름과 함께 오시는 예수님에 관해 말했으므로 이 발언까지 자동으로 예수님의 직접 발화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선언은 앞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이름 「지금 있고 전에 있었으며 오는 이」를 다시 반복합니다.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혼란스럽든 그 역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장이 보여 주는 희망은 상황이 반드시 곧 나아진다는 낙관이 아니라, 역사가 하나님 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믿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장의 원래 움직임을 보면, 구름을 탄 인물은 땅으로 내려오기보다 하늘의 옛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에서는 왕권을 받는 장면이 중심이고, 요한계시록은 그 왕권 환상을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새로운 장면에서 다시 사용합니다.

환난 속에 있는 형제가 듣는 소리

요한계시록 1:9–11 본문 →

이제 요한 자신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나 요한은 여러분의 형제이고,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견딤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라고 하는 섬에 있게 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1:9 · 본디새김

요한은 자신이 특별한 환상을 보는 예언자라고 먼저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교회와 함께 참여하는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참여하는 것은 환난과 나라와 견딤입니다. 환난은 고난과 압박을 가리키고,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며, 견딤은 그 현실 속에서 신실함을 지속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환난이 끝난 뒤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환난과 나라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 선언한 대로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을 나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환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환난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환난 가운데 어떻게 견디는가가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요한은 밧모에 있는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상황은 유배로 이해되어 왔지만, 9절 자체는 그가 어떤 법적 절차로 그곳에 보내졌는지, 누가 명령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요한이 자신의 밧모 체류를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의 증언에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주의 날」에 「영 안에」 있게 됩니다. 「영 안에」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경험의 방식까지 알려 주지 않지만, 요한이 평소의 감각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환상적 경험에 들어섰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요한이 처음 경험하는 것은 보는 일이 아닙니다.

듣는 일입니다.

그의 뒤에서 나팔 같은 큰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말했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에 보내라.」요한계시록 1:11 · 본디새김

계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경험에 그치지 않고, 기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 됩니다. 요한이 아무리 놀라운 하늘의 환상을 보더라도, 그 환상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실제 공동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던 이레의 첫날, 곧 일요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예언서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과 연결하여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전자를 더 자연스럽게 허용하지만, 10절 자체가 어느 날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소리를 보려고 돌아섰을 때

요한계시록 1:12–16 본문 →

그래서 나에게 말하던 그 소리를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나는 금 등잔대 일곱을 보았고,요한계시록 1:12 · 본디새김

소리는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소리를 보려고 돌아섰다고 말합니다. 한국어 번역에서 생긴 어색함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도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한이 보는 것은 소리가 아닙니다.

금 등잔대 일곱입니다.

그 등잔대들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서 계십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찾으려고 돌아섰다가, 먼저 등잔대들을 보고 그 한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발견합니다. 나중에 20절은 일곱 등잔대가 일곱 교회라고 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이 환상이 처음으로 보여 주는 예수님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먼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보좌가 아닙니다.

교회들 한가운데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거나 화려한지,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그 공동체들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이 하나씩 묘사됩니다. 먼저 발까지 내려오는 옷과 가슴의 금띠가 보입니다. 길게 내려오는 옷과 금띠는 존귀한 지위와 권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눈처럼 희었고, 그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1:14 · 본디새김

다니엘 7:9에서는 ‘옛적부터 계신 이’의 옷이 눈처럼 희고,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습니다. 반면 다니엘 7:13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그분 앞으로 나아와 나라와 권세를 받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두 인물은 구별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머리털이 바로 「옛적부터 계신 이」의 머리털처럼 묘사됩니다.

다니엘에서 구별되어 있던 두 인물의 특징이 여기서는 한 인물에게 겹쳐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외모가 흰 머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속했던 영광의 이미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에 참여하시는 분임을 환상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달구어진 금속처럼 빛나며, 목소리는 많은 물의 소리 같습니다. 많은 물의 소리는 에스겔 43:2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음성에 비유한 그 표현이 이제 등잔대들 가운데 서 계신 그리스도께 사용됩니다.

불꽃 같은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심판의 이미지를, 많은 물의 소리는 압도적인 권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신체 부분을 특정한 능력이나 사건 하나에만 기계적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이 묘사하는 전체 모습은 사람이 일상적인 감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룩한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는 오른손에 별 일곱을 쥐고 있었고, 그의 입에서는 양쪽에 날이 선 날카로운 큰 칼이 나오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해가 그 힘으로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요한계시록 1:16 · 본디새김

일반적인 칼은 손으로 휘두릅니다. 그런데 이 칼은 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단순한 물리적 무기라기보다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의 힘을 표현한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49:2에서도 하나님의 종은 자기 입이 날카로운 칼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종은 여호와야훼의 말씀과 사명을 맡은 인물입니다. 나중에 2:16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입의 칼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이 책 자체도 칼을 그리스도의 심판하시는 말씀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신실한 증인」이라는 호칭이 새로운 깊이를 얻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계시다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자체가 사람과 공동체를 판단하는 권위를 지닙니다.

머리에서 발로, 목소리에서 손과 입으로 옮겨 가던 묘사는 마침내 해처럼 빛나는 얼굴에 도달합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옷과 금띠를 제사장적 복장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고, 왕의 위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이 복장만으로 어느 한 직무를 단독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쓰러진 요한에게

요한계시록 1:17–18 본문 →

나는 그를 보았을 때 죽은 사람처럼 그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가 자기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요한계시록 1:17 · 본디새김

그가 본 것은 자신의 감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다니엘도 놀라운 환상 앞에서 힘이 빠지고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지고(다니엘 10:8–9), 에스겔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에스겔 1:28). 요한의 반응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보였던 반응과 닮아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이제 쓰러진 요한에게 닿습니다. 환상의 이미지들을 실제 신체 동작처럼 조합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장면에서 동일한 오른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일곱 별을 쥘 만큼 권위 있는 손이 두려움에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분은 압도적인 영광으로 사람을 쓰러뜨리실 만큼 크신 분이지만, 쓰러진 사람에게 직접 손을 얹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근거를 직접 밝히십니다.

「살아 있는 이다. 나는 죽었지만, 보아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요한계시록 1:18 · 본디새김

17절의 「처음이며 마지막」은 8절에서 하나님이 선언하신 알파와 오메가를 떠올리게 하고, 이사야 44:6과 48:12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유일한 신성을 선언하실 때 사용하신 언어와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분이 「나는 죽었지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이 인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죽음과 무관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죽음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음을 겪으셨고, 지금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위를 지니고 계십니다. 앞으로 5장에서 죽임당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시면서 하늘의 찬양을 받으시는 어린양에게서 이 사실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죽음을 피해 얻으신 승리가 아니라, 죽음을 지나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열쇠는 어떤 장소를 열고 닫는 권한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사야 22:22에서도 열쇠는 권한을 맡기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하데스(ᾅδης)는 그리스어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를 후대에 형성된 지옥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죽음의 영역조차 그분의 권위 밖에 있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9절에서 요한은 자신이 환난과 견딤에 함께 참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교회들은 실제로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든 고난을 곧 제거하겠다는 약속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너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조차 나의 권위 밖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죽음을 겪고도 살아 계시며 죽음의 열쇠를 지니신 분이 친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쓰라고 명령하시는가

요한계시록 1:19–20 본문 →

요한이 쓰러진 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명령은 다시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것과 이 뒤에 일어나려 하는 것을 써라.」요한계시록 1:19 · 본디새김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쓰러졌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요한은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아는 것이 기록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구절은 종종 요한계시록 전체의 목차처럼 이해됩니다. 「네가 본 것」은 1장, 「지금 있는 것」은 2–3장의 교회들, 「이 뒤에 일어나려 하는 것」은 4장 이후의 환상이라는 식입니다. 세 항목의 병렬은 실제로 가능한 읽기이고, 이 번역도 그런 구조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뒤의 두 항목을 앞의 「네가 본 것」에 대한 설명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세 항목으로 구분하더라도, 그것이 이후 모든 환상이 발생하는 역사적 순서를 기계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같은 주제를 여러 환상에서 반복하거나 다른 관점으로 다시 보여 주므로, 기록 명령을 하나의 엄격한 미래 사건 시간표로 바꾸는 일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상징을 풀이해 주십니다.

「네가 본 내 오른손 위의 별 일곱의 비밀과 금 등잔대 일곱에 관해서는 이러하다. 별 일곱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등잔대 일곱은 일곱 교회다.」요한계시록 1:20 · 본디새김

요한이 본 일곱 금 등잔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독자가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것을 교회라고 설명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등잔대는 빛 자체를 만들어 내는 존재라기보다 빛을 밝히도록 놓인 기구입니다. 이 이미지는 성전 재건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강조하는 스가랴 4장의 등잔대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스가랴의 한 등잔대와 요한계시록의 일곱 등잔대가 정확히 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되, 일곱 등잔대를 일곱 교회라고 새롭게 풀이합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천사’에 해당하는 앙겔로스(ἄγγελος)는 천상적 존재뿐 아니라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맡은 천사, 교회의 지도자나 전달자, 교회가 지닌 하늘에서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느 견해를 택하든 이 환상에서 별들과 등잔대가 그리스도께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별들은 그분의 오른손에 있습니다.

등잔대들은 그분의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밖에서 멀리 떨어진 관찰자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들 가운데 서 계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뒤이어 전해지는 말씀을 보면 교회마다 상황이 다릅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고, 어떤 교회는 심각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드러나기 전에, 먼저 모든 등잔대가 그리스도의 환상 안에 등장합니다.

교회들의 상태가 평가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위치가 먼저 제시된 것입니다.

교회에 관한 판단의 출발점은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아닙니다. 그들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그분이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계시록에서 ‘천사’라는 낱말이 일반적으로 천상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은 교회를 맡은 천사라는 첫 번째 견해의 근거가 됩니다. 반면 다음 장부터 편지가 각 교회의 천사에게 보내지면서도 실제로는 교회 전체를 향해 말씀한다는 점은 다른 해석들을 검토하게 합니다.

등잔대들 사이에서 시작되는 계시

요한계시록 1:1–20 본문 →

요한계시록 1장은 세상의 미래를 향해 열린 책의 시작이지만, 독자가 짐승이나 재앙이나 심판을 만나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게 합니다. 피로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 죽음을 겪으셨지만 살아 계시며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지니신 분, 「땅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분입니다. 이 환상은 교회의 정체성을 교회 자신의 규모나 능력에서 찾지 않고, 교회들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그렇다고 이 첫 장이 교회의 환난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여전히 밧모에 있고, 여전히 환난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이며, 일곱 교회도 여전히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변한 것은 그 현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요한이 돌아서기 전에도 등잔대들 한가운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섰을 때 비로소 교회들 사이에 서 계신 분을 봅니다. 그분의 영광 앞에서 죽은 사람처럼 쓰러지지만, 곧 자기 몸에 닿는 손을 느낍니다.

그 손은 일곱 별을 쥐고 계신 오른손입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