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3장 ·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
예수님께서 교회에서 보시는 것
어떤 교회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습니다. 거짓 사도들을 가려냈고, 악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견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교회는 가난하고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감옥에 갇힐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의 가난을 아시면서도 부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교회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임당하는 일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싸우겠다고 경고하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점점 자라고 있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가르침이 용납되고 있었습니다.
이 네 교회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장은 그 질문에 단순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 얼마나 쉽게 한쪽 면만 보는지를 드러냅니다.
네 교회 모두에게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 … 알고 있다.」
이것이 이 장을 읽는 출발점입니다.
요한이 앞 장에서 본 예수님께서는 일곱 금 등잔대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등잔대들 사이를 거니시며 각 교회의 실제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칭찬과 책망, 경고와 약속이 모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 편지들을 읽는 일은 교회를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을 배우는 일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시는지 발견하는 일입니다.
에베소 — 진리를 지켰지만 사랑을 버린 교회
무엇이 부족했기에 회개해야 하는가
에베소에 보내는 말씀은 뜻밖에도 긴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네 행위와 네 수고와 네 견딤을 알고 있다. 네가 악한 자들을 참아 줄 수 없다는 것도, 사도라고 자칭하지만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해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낸 것도 알고 있다.」요한계시록 2:2 · 본디새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지치지 않았습니다(3절). 한동안 열심을 내다가 포기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압박 속에서도 신실함을 지켜 온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문장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그러나 너를 두고 내가 가진 것이 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요한계시록 2:4 · 본디새김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해 왔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첫사랑을 잃었다’는 표현을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뜨거운 감정이 식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런 뜻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본문의 표현은 감정이 저절로 식었다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을 보면 이 사랑이 단순한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의 행위를 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고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 네가 회개하지 않는다면.」요한계시록 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처음의 감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처음의 행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행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여전히 많은 행위가 있었지만, 그 행위 가운데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신앙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잃었다는 견해가 있고, 교회 구성원들 사이의 사랑, 특히 형제자매를 향한 실천적 사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둘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본문이 어느 하나만을 명시적으로 지정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단서는 사랑의 회복이 「처음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관해 교회가 그릇된 가르침과 싸우는 일에 집중하면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본래의 삶을 소홀히 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과 잘 어울리는 해석이지만, 당시 실제로 어떤 사랑의 행위가 사라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의 분별력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거짓 사도들을 가려낸 것은 분명히 칭찬받는 일이고, 6절에서는 니골라 사람들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도 인정하십니다. 문제는 거짓을 가려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잘해 내는 동안 사랑을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잘못된 것을 거부할 줄 알았지만, 그것만으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옳은 것을 지키는 일이 옳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등잔대가 옮겨질 수 있다는 경고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의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다음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의 행위를 해야 합니다. 돌아섰다는 사실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가고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십니다.
앞 장에서 등잔대는 교회라고 풀이되었습니다. 따라서 등잔대를 옮긴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교회로 서 있는 자리를 잃는다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이것이 건물의 파괴나 공동체의 즉각적인 소멸 같은 특정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로서의 지위와 존재가 예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에베소는 외부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등잔대를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를 받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경고를 받습니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 공동체를 잘 지켰더라도, 내부에서 사랑이 사라진 상태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정작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그러나 에베소에 주어진 말씀은 경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영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에서 먹게 해 주겠다.」요한계시록 2:7 · 본디새김
여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모든 교회에 반복됩니다. ‘이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편지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의 경우에는 사랑을 버린 상태에서 돌이켜 처음의 행위를 회복하는 일이 승리와 연결됩니다.
그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뒤에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창세기 3:22–24). 생명나무는 처음부터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생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나무를 다시 등장시킵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생명나무는 새 예루살렘의 생명과 치유를 보여 주는 이미지가 됩니다(22:2).
에베소 교회는 자신의 노력과 견딤에 대해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많이 수고한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사람에게 생명나무를 약속하십니다.
교회가 생명을 얻는 근거는 자기 활동의 양이나 성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공동체라면 진리를 지키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머나 — 가난하지만 부유한 교회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가난
서머나에 보내는 말씀은 에베소와 분위기가 다릅니다.
에베소는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책망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머나에는 책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평안한 처지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네 교회 가운데 가장 직접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마주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처음이며 마지막인 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요한계시록 2:8 · 본디새김
이 소개는 앞으로 들려주실 말씀과 정확하게 맞물립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형편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환난과 네 가난을 알고 있다 — 그러나 너는 부유하다. 그리고 자기를 유대 사람이라 하지만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인 자들에게서 오는 모독도 알고 있다.」요한계시록 2:9 · 본디새김
가난하지만 부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서 가난은 단순히 겸손한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서머나 교회가 실제로 가난한 처지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가난이 재산 몰수나 직업상의 불이익 때문에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환난과 가난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신앙적 압박이 무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가난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가난을 알고 있다」고 먼저 말씀하신 다음, 「그러나 너는 부유하다」고 하십니다.
두 현실을 동시에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난해도 마음만 부자이면 괜찮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가난을 가볍게 여기거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가난이 이 공동체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에베소와 서머나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유함을 지녔습니다.
본문은 그 부유함을 재산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요구되는 신실함과 연결해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 세상이 측정할 수 없는 부유함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회당」이라는 어려운 표현
9절은 「자기를 유대 사람이라 하지만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인 자들에게서 오는 모독」도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자에게는 불편하고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유대인 전체를 비난하는 데 잘못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본문이 가리키는 대상은 모든 유대 사람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특정 집단입니다.
그런데 그 집단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제 유대인 공동체였는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둘러싸고 다투던 다른 집단이었는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경계가 아직 형성되어 가던 시대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유대교 전체에 대한 선언으로 확대하거나, 당시 모든 유대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회당」이라는 강한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그들을 고발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편지는 서머나의 특정 집단이 행하는 모독을 그 대적 행위와 연결하여 평가합니다.
이것은 치열한 종교적 갈등 속에서 사용된 강한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고, 그 모독이 어떻게 감금이나 박해와 연결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피해를 입는 서머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 알고 있다.」
그들의 가난도, 환난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모독도 예수님께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하라는 약속이 아니다
「네가 받게 될 고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마귀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지려 한다. 너희가 시험받게 하려는 것이고,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죽기까지 신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관을 주겠다.」요한계시록 2:1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고난을 알고 계신다면, 그 고난을 막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이 올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환난의 기간인 「열흘」이 문자 그대로의 기간인지 제한된 시험의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고난이 현실이며, 동시에 끝없는 권세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죽기까지 신실하여라」는 명령은 더욱 무겁습니다. 이 문장은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그보다 날카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신실함을 지키는 대가가 죽음이더라도 신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단순히 명예로운 화관이 아니라 「생명의 관」입니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승리의 상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은 죽음을 면하는 방식으로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승리로 선언됩니다.
「귀 있는 사람은 영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죽음에게서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요한계시록 2:11 · 본디새김
‘둘째 죽음’은 여기서 충분히 풀이되지 않지만, 나중에 요한계시록 20:14에서 최종 심판과 연결되어 다시 나타납니다. 이 약속은 신실한 사람이 육체적으로 결코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죽기까지 신실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첫 번째 죽음과,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시는 둘째 죽음이 구별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희망은 죽음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는 약속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에베소에서는 회개하여 사랑을 회복하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서머나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신실함을 지키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승리는 언제나 같은 외형을 갖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서머나는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 두드러진 도시였고, 기원후 26년에 티베리우스 황제 관련 신전의 건립지로 선정된 곳입니다. 이러한 환경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겪었을 종교적·사회적 압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제재를 받았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열흘」은 다니엘 1:12–15의 열흘 시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 왕이 제공한 음식 대신 다른 음식을 먹겠다고 요청하며 열흘 동안 시험받게 해 달라고 청했고, 그 시험은 이방 제국의 환경 속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장면의 주제는 통하지만, 다니엘의 열흘이 요한계시록의 열흘을 반드시 상징적인 기간으로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박해의 날짜를 계산할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열흘을 역사 속 열 차례의 박해나 특정한 열 개의 사건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해석은 이 구절만으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또 ‘관’으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운동 경기의 승리자나 명예로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화관을 가리킬 수 있고, 왕이 쓰는 통치의 관에도 쓰이는 표현입니다.
버가모 — 밖의 적에게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죽임당한 증인을 기억하시는 분
버가모에 보내는 말씀은 칼의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양쪽에 날이 선 날카로운 큰 칼을 가진 이가 이렇게 말한다.」요한계시록 2:12 · 본디새김
앞의 두 교회에서처럼 이 소개도 편지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버가모는 강력한 종교적·정치적 권력이 존재하던 도시였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버가모가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보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여러 견해가 있어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은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위협하는 강력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다.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잡고 있고, 나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나의 증인이며 나의 신실한 사람인 안디바가 사탄이 사는 그곳, 곧 너희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그 날들에도 그랬다.」요한계시록 2:13 · 본디새김
안디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본문 밖에서 그의 생애를 확실하게 복원할 자료는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였는지, 어떤 일을 하다가 죽임당했는지,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나의 증인이며 나의 신실한 사람」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앞 장의 예수님 소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증인」이라고 불리셨습니다(1:5). 그리고 이제 안디바에게도 같은 증언과 신실함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다 죽임당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버가모의 권력자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임당했는지보다, 누구에게 속한 증인으로 살았는지가 이 환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믿음을 붙잡으면서 다른 가르침도 붙잡다
「그러나 너를 두고 내가 가진 것이 몇 가지 있다. 네게는 그곳에 발람의 가르침을 굳게 잡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으라고 가르쳤다 —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고 음행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계시록 2:14 · 본디새김
13절에서는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발람의 가르침을 「굳게 잡고」 있다고 하십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대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가모의 문제입니다. 외부의 압박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과 양립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발람은 누구일까요? 민수기 22–24장에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을 부릅니다. 그러나 발람은 원하는 대로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이 이야기만 보면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었던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우상 숭배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수기 31:16은 이 사건을 발람의 조언과 연결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직접 저주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리는 데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연결을 가져와 버가모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는 일과 음행입니다.
이 표현을 단순한 음식 규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도시에서는 종교 행사와 공동체의 식사, 사회적 관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신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이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제의적 참여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시장의 음식이 자동으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음식 자체의 문제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문제를 구별합니다.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상 숭배 및 음행과 연결되어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손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음행 역시 실제 성적 부도덕을 가리킬 수도 있고, 구약 예언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우상 숭배의 은유를 함께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의미가 함께 작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버가모에서 어떤 구체적인 행위가 벌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니골라 사람들의 가르침도 언급됩니다. 에베소에서는 그들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칭찬받았는데, 버가모에는 그 가르침을 붙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골라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집단이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르침이 나란히 놓인다는 점에서, 교회가 주변의 우상 숭배 문화와 타협하도록 만드는 문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해를 견뎌 낸 공동체라고 해서 유혹까지 이겨 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용기와 일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실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자동으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끝까지 충성하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조금씩 다른 주인을 섬기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칼을 가지신 분이 싸우시는 상대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큰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경고하십니다.
16절은 먼저 교회 전체를 향해 「회개하여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책임은 공동체에 요구되지만, 싸움의 대상은 그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붙잡은 사람들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 가르침을 방치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면서도, 모든 구성원을 똑같이 정죄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무기는 「내 입의 큰 칼」입니다. 버가모의 권력자들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참된 상태를 드러내고 판단하는 권위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칼은 안디바를 죽인 자들에게 곧장 보복하겠다는 선언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릇된 가르침을 고집하는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교회를 위협하는 권력뿐 아니라, 안에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르침도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
버가모에 주어진 약속은 세 가지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귀 있는 사람은 영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만나에서 얼마를 주겠고, 흰 돌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다.」요한계시록 2:17 · 본디새김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양식입니다(출애굽기 16장). 그런데 이 만나는 「감추어진」 만나입니다. 이를 만나 보관이나 성소의 물건을 감추었다는 전승의 배경에서 이해하려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이 어느 특정한 전승을 직접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더 분명한 것은 버가모 편지 안에서 드러나는 대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자신이 주시는 만나를 약속하십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무엇에 참여하고 누구에게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종교문화에 참여해야 사회적으로 더 안전하거나 유리하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양식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위한 양식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다음은 흰 돌입니다. 이 돌은 요한계시록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대 재판에서 무죄를 표시하는 흰 돌이었다는 견해가 있고,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표나 특별한 권리를 나타내는 물건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를 증명하는 징표로 이해하는 견해 역시 제시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도 이 구절의 모든 특징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특히 돌 위에 새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과 그 이름을 받는 사람만 안다는 조건까지 하나의 관습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흰 돌의 정확한 용도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 돌이 예수님께서 이기는 사람에게 직접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이 받는 사람 자신의 새로운 이름인지, 예수님의 이름과 관련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새 이름이 특별한 관계와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내는 성경의 여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리는 사건처럼 이름은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과 새로운 소명을 나타냅니다(창세기 17:5; 32:28).
버가모의 약속에서는 그 이름을 받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해집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신비한 비밀 지식으로 바꾸어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이름은 주변 사회가 부여하는 평가나 지위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안디바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신실한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기는 사람에게 다른 누구도 완전히 알 수 없는 새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를 위협하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그에게 이름을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조금 더 깊이
버가모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이 기원전 29년경 건립되어, 아시아 속주의 황제 숭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탄의 보좌」는 버가모의 거대한 제우스 제단을 가리킨다는 견해, 황제 숭배의 중심지라는 사실과 연결하는 해석,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와 연결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지만, 어느 하나를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증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본래 어떤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을 뜻하며, 이 낱말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말이 발전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실제로 죽임당한 증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감추어진 만나와 관련해서는, 출애굽기 16:32–34에 만나를 보관하여 후대가 하나님의 공급을 기억하도록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제2마카베오기 2:4–8에는 예레미야가 언약궤와 관련된 성소의 물건을 감추었다는 전승이 등장합니다.
두아디라 — 사랑은 자라고 있지만 무엇을 용납하고 있는가
에베소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
두아디라에 보내는 말씀을 읽으면 에베소 교회가 다시 떠오릅니다.
그런데 모습이 정반대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수고와 견딤이 칭찬받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견딤이 칭찬받습니다. 더구나 처음보다 나중의 행위가 많아졌습니다.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견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요한계시록 2:19 · 본디새김
에베소가 잃어버린 사랑을 두아디라는 가지고 있고, 에베소가 회복해야 할 행위는 두아디라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에베소보다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곧이어 나오는 책망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를 두고 내가 가진 것이 있다. 네가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그냥 둔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자기를 예언자라 하면서 내 노예들을 가르치고 헤매게 하여 음행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게 한다.」요한계시록 2:20 · 본디새김
에베소는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버렸습니다.
두아디라는 사랑과 섬김이 자라고 있지만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두 교회는 서로 반대편에서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랑 없이 진리를 지킬 수 있는가? 반대로 진리를 훼손하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본문은 두 가지 모두를 경계합니다. 에베소에게는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시고, 두아디라에게는 잘못된 가르침을 그냥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분별력은 서로 대체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에는 둘 다 필요합니다.
왜 하필 이세벨인가
두아디라에 대한 말씀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라.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놋쇠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요한계시록 2:18 · 본디새김
이 소개는 앞 장의 환상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특별히 등장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시편 2편의 왕권 약속을 준비합니다. 시편 2:7에서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2:8–9에서는 민족들을 다스릴 권세를 약속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시작과 끝은 서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끝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권위를 이기는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사이에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자입니다.
‘이세벨’이 실제 이름인지, 그 여자의 행동을 구약의 이세벨에 빗대어 붙인 상징적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하필 이세벨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지는 열왕기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6:31–33에서 이세벨은 바알을 섬기고 그를 위해 제단을 세운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로 등장하며,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인물로도 나타납니다(열왕기상 18:4).
그런데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언자를 핍박하던 옛 이세벨과 예언자임을 자처하는 두아디라의 여인이 서로 겹쳐집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그가 여자라는 사실이 아닙니다. 신약에는 여성 예언자들도 등장합니다(사도행전 21:9). 이 구절이 책망하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영적 권위와 실제 가르침 사이의 충돌입니다.
버가모에서 보았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서는 그 문제가 한 사람의 예언자적 권위와 더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두아디라는 여러 직업 조합이 활발했던 상공업 도시였고, 이 조합들은 경제적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종교적 기능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가르침을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위해 종교적 타협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충분히 검토할 만한 역사적 설명이지만, 본문은 실제로 어떤 직업 조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세벨이 어떤 이유로 그러한 행위를 허용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당시의 경제적 압박을 배경으로 고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문제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들을 예수님께 충성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그냥 두고 있었습니다.
회개할 시간을 주셨으나
20절까지의 책망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곧바로 심판하실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집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 음행에서 돌이켜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요한계시록 2:21 · 본디새김
여기에서 본문의 시간 표현이 중요합니다. 「시간을 주었지만」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리키고,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는 현재도 계속되는 거절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주셨지만, 그 여자는 그 시간을 회개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심판과 인내를 서로 반대되는 성품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예수님의 인내와 심판은 한 장면 안에 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알고 계셨지만,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회개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잘못이 용납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돌이킬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가 잘못을 그냥 두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승인하신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 일을 모르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콩팥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
이어서 매우 가혹하게 느껴지는 심판의 선언이 나옵니다. 그 여자를 병상에 던지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사람들을 큰 환난에 던지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죽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실제로 죽음이라는 심각한 심판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이를 단순히 영적인 불편함이나 관계의 어려움 정도로 바꾸면 본문의 날카로움이 사라집니다. 동시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여자의 자녀들」이 친자녀이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든, 이 선언을 현실의 특정인에게 물리적인 처벌을 가해도 된다는 허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주체는 예수님이시며, 본문은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 선언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죽이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가 내가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 이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 각 사람에게 너희 행위대로 주겠다.」요한계시록 2:23 · 본디새김
「콩팥과 마음」이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낯설게 들립니다. 왜 하필 콩팥일까요?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신체 표현에서는 콩팥이 사람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나타내기도 했고, 마음 역시 생각과 의지, 인격의 중심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콩팥과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까지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에는 구약의 반향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내면을 시험하며 각자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요한계시록 2:23은 그 언어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 연결은 18절의 불꽃 같은 눈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 눈은 단순히 무서운 눈이 아닙니다.
사람이 숨기려는 것까지 꿰뚫어 보는 눈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자라는 공동체였지만, 그 안에는 잘못된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성장도 알고 계셨고, 감추어진 잘못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모든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똑같이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각 사람에게」 행위대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공동체 전체를 평가하시면서도 각 사람의 책임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위선과 악을 숨기려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억울함을 겪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수고 역시 감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는다」
23절까지 이어지는 엄중한 경고 뒤에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 곧 이 가르침을 가지지 않은 이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는다.」요한계시록 2:24 · 본디새김
두아디라 교회 안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른 것은 아니며, 그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신실함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더 많은 일이나 특별한 수행을 명령하실 것 같지만, 오히려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요구하시지만, 신실하게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부담을 더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표현을 두고는, 당시 어떤 사람들이 특별한 영적 지식이나 깊은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고 예수님께서 그 주장을 비판적으로 뒤집어 그렇게 부르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깊은 것’이라고 불렀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비밀 지식을 가르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본문에서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것을 아는 듯 행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복잡한 비밀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갈 때까지 굳게 잡아라.」요한계시록 2:25 · 본디새김
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을 찾아 나서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버가모에서는 무엇을 붙잡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굳게 잡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의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 속한 것을 계속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같은 ‘붙잡음’이라도 대상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됩니다.
자기 행위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로
마지막 약속에는 이 장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기고 끝까지 내 행위를 지키는 사람, 나는 그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겠다.」요한계시록 2:26 · 본디새김
여기까지 교회들에게 반복적으로 등장한 말은 「네 행위」였습니다. 두아디라에서도 19절에 「네 행위」가 반복되고, 22절에서는 「그 여자의 행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약속에서는 표현이 바뀝니다.
「내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행위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사랑과 섬김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무엇을 명령하셨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행위들을 가리키는지 목록으로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명령과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는 삶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사람」이라는 표현도 더 분명해집니다. 계시록의 승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경쟁이 아닙니다. 끝까지 예수님께 충성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위가 약속됩니다.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약속의 배경은 시편 2편입니다.
쇠 지팡이와 질그릇
시편 2편에서는 땅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시고, 그 왕을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며 민족들을 유산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시편 2:6–8). 요한계시록은 이 왕권의 언어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런데 27절의 번역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몰 것이고, 그들은 질그릇처럼 부서질 것이다.」요한계시록 2:27 · 본디새김
시편 2:9의 히브리어 본문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부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목자 노릇을 하다」(ποιμαίνω)라는 뜻의 동사를 사용하고, 요한계시록도 그 계열의 표현을 따릅니다. 그래서 「그들을 몰 것이고」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특이한 결합이 있습니다. 목자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가 나오는데, 지팡이는 쇠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 아래에서 민족들은 질그릇처럼 부서집니다.
목자의 통치와 깨뜨리는 심판이 한 장면에 겹쳐져 있습니다.
이 이미지를 단순히 부드러운 돌봄으로만 이해하면 쇠 지팡이와 부서지는 질그릇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무자비한 폭력으로만 이해하면 목자의 동사가 선택된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시편 2편의 문맥에서 이 이미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통치가 거역하는 권세들을 굴복시키는 강력한 권위라는 뜻을 지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 권위는 예수님께만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권위를 이기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신실한 교회가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사상이 나타납니다.
다만 그 참여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과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지금 교회가 물리적 폭력으로 민족들을 지배해도 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권위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 신자들이 스스로 쟁취하라고 요구받는 힘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권위를 약속받는 대상은 끝까지 예수님의 행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통치권만을 주장하는 것은 이 약속의 조건과 어긋납니다.
새벽 별을 주겠다
두아디라에 보내는 마지막 약속은 뜻밖에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끝납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권위를 받은 것처럼 그에게도 주겠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새벽 별을 주겠다.」요한계시록 2: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쇠 지팡이와 부서지는 질그릇,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위와 심판의 힘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새벽 별이 등장합니다.
새벽 별은 해가 뜨기 전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금성을 이렇게 부릅니다. 고대 세계에서도 새벽에 나타나는 밝은 별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가까워지는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새벽 별은 무엇일까요? 해석은 여럿입니다. 승리와 왕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24:17에서는 야곱에게서 별이 나온다는 예언이 등장하고, 그 문맥에서 별과 홀은 왕권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또 다른 중요한 단서는 요한계시록 자체에 있습니다. 22:16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밝은 새벽 별이라고 부르십니다. 따라서 2:28의 약속을 예수님 자신을 받는 일, 또는 예수님의 영광과 통치에 참여하는 일로 이해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구절 자체만으로 새벽 별의 모든 의미가 정해지지는 않지만, 뒤에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새벽 별이라고 밝히신다는 사실은 이 약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두아디라 편지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교회의 숨겨진 잘못을 드러내시고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는 데서,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시고 끝까지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와 새벽 별을 약속하시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한 편지 안에 엄중한 심판과 따뜻한 격려가 나란히 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그 잘못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의 신실함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편지는 네 편지에 똑같이 반복되는 권고로 닫힙니다.
「귀 있는 사람은 영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요한계시록 2:29 · 본디새김
편지는 각 교회의 천사에게 보내지지만, 마지막 권고는 언제나 복수의 「교회들」을 향합니다. 에베소에 주어진 말씀도 에베소만, 서머나에 주어진 말씀도 서머나만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각 교회는 다른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까지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곱 편지가 단순히 일곱 지역에 보내진 개별적인 통보문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들어야 할 예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른 공동체를 평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아디라의 고고학적 비문에는 구리 세공업자, 가죽 가공업자, 염색업자, 직물업자 등의 조합이 나타나며, 그러한 환경에서는 직업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과 이방 신들을 섬기는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2–23절의 「병상」은 질병과 고통을 나타낸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간음이라는 앞의 표현과 연결된 역설적 이미지라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그 여자의 자녀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본문 자체가 친자녀인지 추종자인지를 직접 풀이하지는 않습니다. 또 두아디라에 이르러 편지의 순서에 작은 변화가 나타납니다. 앞의 세 편지에서는 들으라는 권고 뒤에 이기는 사람의 약속이 놓였지만, 두아디라에서는 약속이 먼저 나오고 마지막에 들으라는 권고가 놓이며, 이 배열은 3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이것이 일곱 편지를 셋과 넷으로 구분하는 문학적 특징이라는 점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구분 자체가 특정한 역사 시대나 사건의 순서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네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의 기준
네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모두 읽고 나면, 각 교회의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칭찬받는 교회에도 심각한 책망이 주어지고, 고난받는 교회에는 오히려 책망 없이 격려가 주어집니다. 이들을 단순히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로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교회를 대하시는 방식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하는 곳에는 회개하라고, 죽음의 위협을 겪는 곳에는 두려워하지 말고 신실하라고,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는 곳에는 그 가르침에서 돌아서라고, 이미 신실하게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교회를 똑같은 기준표로 단순하게 채점하지 않으시고, 각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아시며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잘하고 있는지는 활동이 많아지는 것으로도, 가르침이 정확한 것으로도, 사랑의 실천이나 공동체의 성장으로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모두 중요한 기준이지만, 이 장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고 보여 줍니다. 교회를 평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네 편지에서 반복되는 「내가」라는 말이 그 권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할 시간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과 승리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며, 책망은 공동체를 포기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경고 속에는 여전히 회개의 길이 열려 있고, 신실함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두아디라의 신실한 사람들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대단한 비밀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권력을 쟁취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갈 때까지 굳게 잡아라」는 말씀대로, 이미 받은 것을 붙잡고 끝까지 예수님께 충성하면 됩니다.
두아디라의 교회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의 유혹도, 잘못된 가르침도, 사회적 압박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공동체의 신실한 사람들에게 쇠 지팡이의 권위뿐 아니라 「새벽 별」을 약속하십니다.
아직 밤이 지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약속 속에는 이미 새벽의 빛이 담겨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