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끝인사

복음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로마서는 성경에서 가장 치밀한 신학적 논증을 담은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죄와 심판, 믿음과 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율법과 은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거룩한 영의 역사,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구원을 논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 편지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뜻밖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뵈뵈, 브리스가, 아굴라, 에배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사람들의 이름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과 함께 일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혔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을 열어 교회를 맞아들였고, 어떤 사람은 이름밖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름을 남겼을까요?

단순히 예의를 갖춘 인사라면 몇 사람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예수님 안에서 어떤 사람인지까지 이야기합니다.

앞에서 바울이 설명한 복음은 추상적인 사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은 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누군가의 수고로 공동체가 유지되며, 누군가의 용기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따뜻한 인사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갑자기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권하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사탄을 신자들의 발아래 두고 부수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던 편지가 어째서 사탄의 패배를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갈까요?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로마서 16장의 인사와 경고와 마지막 축복이 서로 무관한 이야기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16장 본문 읽기 →

바울이 가장 먼저 소개한 사람

로마서 16:1–2 본문 →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먼저 한 여성을 소개합니다.

우리 자매 뵈뵈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또한 겐그레아 교회를 섬기는 이입니다.로마서 16:1 · 본디새김

뵈뵈는 로마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의 항구 지역이며, 뵈뵈는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사람으로 자주 이해됩니다. 다만 본문은 뵈뵈가 직접 편지를 운반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섬기는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입니다. 섬기는 사람이나 일꾼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교회에서 특정한 직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뵈뵈가 후대에 제도화된 집사직과 정확히 같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교회와 관련하여 인정받는 섬김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주 안에서 성도답게 그를 맞아들이고, 그가 무슨 일로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면 곁에 서 주기를 바랍니다. 그 자신이 여러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도 돌보아 준 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2 · 본디새김

‘돌보아 준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로스타티스(προστάτις)입니다. 단순한 심부름이나 보조적인 도움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며, 보호하고 지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원을 제공하거나 후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뵈뵈가 경제적 자원을 제공하는 후원자였다는 해석도 있고, 여행자에게 숙소와 보호를 제공하고 필요한 일을 도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식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상당한 책임을 감당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요청에는 관계의 역전이 있습니다.

뵈뵈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곁에 서 주었던 사람이고, 바울 자신도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뵈뵈가 다른 지역으로 가자,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에게 그 사람의 곁에 서 달라고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호하던 사람도 낯선 곳에서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섬기는 관계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나누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도는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당한 사역의 한편에는 뵈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은 위대한 사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도에게 도움을 주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겐그레아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로마서를 작성했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재구성과도 잘 맞는 장소이며, 사도행전 18:18에서도 바울이 겐그레아를 거쳐 항해를 떠납니다. 뵈뵈가 편지를 전달했다는 해석은 바울이 16장 첫머리에서 그를 특별히 추천하고 로마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도록 요청한다는 데 근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8에서 예수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섬기는 이가 되셨다고 말할 때에도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삶

로마서 16:3–13 본문 →

3절부터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전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을 내놓았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의 교회가 모두 그들에게 감사합니다.로마서 16:3–4 · 본디새김

사도행전 18:2–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나 함께 지내며 일했습니다. 브리스가는 사도행전의 브리스길라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후 그들은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동했고, 사도행전 18:26에서는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목숨을 위해 자기 목을 내놓은 일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그를 보호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사도행전의 어느 사건과 일치하는지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한 일이 어떻게 여러 교회의 감사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바울을 보호함으로써 그의 복음 사역이 계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위해 위험을 감당했고, 그 결과 많은 교회가 그들의 섬김에 빚을 졌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눈에 띄는 사역자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곁에서 생명을 걸고 도왔던 사람들도 그 역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해 주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드려진 첫 열매입니다.로마서 16:5 · 본디새김

교회는 반드시 독립적인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집이 모임의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은 두 사람의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다른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집을 열어 준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빌려주는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함께 모이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고, 공동체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임을 어떻게 운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그 집에 모이는 교회를 별도로 기억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만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에배네도에서 버시까지 — 바울이 기억하는 것

이어지는 이름들을 살펴보면 바울이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기억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에배네도를 부르는 ‘첫 열매’는 수확의 시작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울에게 에배네도는 단순히 오래전에 알았던 신자가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이 열매 맺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6 · 본디새김

마리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 바울을 언제 만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많이 수고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표현은 뒤에서도 반복됩니다.

주 안에서 수고하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했습니다.로마서 16:12 · 본디새김

‘수고하다’는 힘들게 일하고 애쓴다는 뜻으로, 단순히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실제로 감당한 노동과 노력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은 밝혀지지 않지만, 그 수고 자체가 바울이 그들을 기억하고 칭찬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가치를 설명할 때 언제나 직책이나 지위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역자이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며, 어떤 사람은 수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견딘 사람입니다.

특히 이 장에는 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등 여성들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성들을 단순한 신앙 공동체의 주변 인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섬기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로 기억됩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 사도들 가운데 알려진 사람들

나와 한 겨레이고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가운데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이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들입니다.로마서 16:7 · 본디새김

‘한 겨레’는 반드시 가까운 혈족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9:3에서도 자신의 동족을 가리킬 때 관련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는 유대인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쟁점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표현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는 두 가지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두 사람이 사도들의 무리에 속하며 그 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사도들에게 잘 알려지고 존중받았지만 반드시 사도들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은 각각 문법적 근거를 가지고 논의되어 왔으며, 이 구절만으로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도적 직무를 수행했는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해석을 택하든 바울이 전하는 사실은 작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었으며, 사도들의 세계에서 알려진 사람들이었고, 신앙 때문에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경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사람들, 자신과 함께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로마 교회 앞에 내놓습니다.

루포의 어머니, 그리고 바울의 어머니

주 안에서 뽑힌 루포와 그의 어머니이자 나의 어머니인 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13 · 본디새김

루포의 어머니가 어떻게 바울의 어머니이기도 할까요? 바울이 그 여성의 친아들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읽으면, 그가 바울에게 어머니처럼 돌봄을 베풀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여성의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언제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에는 그가 받았던 깊은 돌봄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본문이 직접적인 인용 관계는 아니지만, 16장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맺어진 가족 관계가 아주 소박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자녀처럼 돌보았고, 그 돌봄을 받은 사람은 그 여성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한 여성의 돌봄이 바울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16:19에서도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합니다. 유니아라는 이름에도 논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대 사본의 이름 표기에는 오늘날처럼 강세가 표시되지 않았으므로 여성 이름 ‘유니아’와 남성 이름 ‘유니아스’의 가능성이 논의되었습니다. 다만 역사적인 이름 사용 자료에서는 여성 이름으로 읽는 해석에 강한 근거가 있습니다. 7절의 두 해석 가운데 후자를 지지하는 해석도 있고, 그리스어 자료를 검토하여 전자를 옹호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로마의 교회는 하나의 장소에 모였을까

로마서 16:14–16 본문 →

바울은 단순히 개인들의 이름만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아리스도불로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10 · 본디새김
나와 한 겨레인 헤로디온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나깃수의 집안에 속하고 주 안에 있는 이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11 · 본디새김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14 · 본디새김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서 16: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가 등장했습니다. 여기서는 여러 집안과 특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께 있는 신자들의 무리가 나타납니다. 이 표현들이 각각 독립적인 가정 교회를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신자들이 여러 관계와 모임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아리스도불로의 집안’과 ‘나깃수의 집안’은 반드시 아리스도불로나 나깃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 ‘집안’은 혈연 가족뿐 아니라 그 집에 속한 노예와 해방노예, 여러 의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나깃수의 집안에 대해서 ‘주 안에 있는 이들’이라고 범위를 구분하는데, 이것은 그 집안 전체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하지 않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세계가 함께 나타납니다. 일부 이름은 당시 노예나 해방노예에게도 사용되던 이름들입니다. 각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이름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로마의 교회는 하나의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이 반복은 지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가 실제로 로마의 신자들 앞에서 읽힌다고 생각해 보면 다르게 들립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립니다. 그다음 사람의 이름이 불립니다. 어떤 집안의 신자들이, 또 다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바울은 각 사람의 모든 차이를 설명하거나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안에서 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로마서 16:16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이 사람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저 사람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서로 문안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바울의 문안을 전달받는 사람들이 서로 문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당시에 친밀함과 환대를 표현하는 인사 행위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문화적 형태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집에 모이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가족처럼 맞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7에서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그대로 서로 받아들이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그 말이 로마의 신자들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인사로 나타납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가 자신과 함께 예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이름들이 로마 교회의 수신자들과 무관한 별도 집단이라고 단정하는 해석을 비판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20과 데살로니가전서 5:26 등에서도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같은 권면을 합니다.

서로 받아들이라던 바울은 왜 어떤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할까

로마서 16:17–20 본문 →

16절까지 이어지던 따뜻한 분위기는 17절에서 갑자기 바뀝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그 가르침을 거슬러 분열을 일으키고 올무를 놓는 이들을 주의하여 살피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로마서 16:17 · 본디새김

바울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약함을 감당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을까요?

바울이 앞서 다루었던 문제는 같은 예수님을 섬기는 신자들 사이에서 음식이나 날의 중요성을 서로 다르게 판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경계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자들이 이미 배운 가르침을 거슬러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다름 자체가 아닙니다. 그 다름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공동체를 갈라놓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 이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 노예 노릇 하지 않고 자기 배에 노예 노릇 하며, 듣기 좋은 말과 아첨으로 순진한 이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18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이 누구를 섬기는가를 문제 삼습니다. 여기서 ‘배’를 문자 그대로 음식에 대한 욕구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섬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듣기 좋은 말과 아첨으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바울은 앞서 로마의 신자들에게 서로를 기쁘게 하라고 권했지만, 그 목적은 상대방을 세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좋은 말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됩니다.

이 경고의 대상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쉽게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지, 배운 가르침에 충실한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넘어지게 하고 있는지입니다.

악에 물들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렇게 권하는 것은 여러분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을 두고 기뻐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선한 것에는 지혜롭고 악한 것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6:19 · 본디새김

로마서 1:8에서 바울은 로마 신자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불신해서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들이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악한 것에는 지혜로워지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물들지 않는(ἀκέραιο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본래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 순수하고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악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악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악에 참여하거나 그것에 물들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도, 모든 말을 아무런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과 무너뜨리는 것을 분별하면서도, 스스로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사탄을 부수신다

평화의 하나님이 곧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두고 부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로마서 16:20 · 본디새김

앞에서는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배후에 있는 영적 대적, 사탄의 패배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모든 의견 충돌을 사탄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속이고 분열시키는 악을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사소한 문제로만 보지도 않습니다.

사탄을 부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부서지는 자리는 신자들의 발아래입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지만, 신자들과 무관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가 그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은 ‘전쟁의 하나님’이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사탄을 부수신다고 말합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어떻게 누군가를 부수시는 분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악과 속임수와 분열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보다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시는 올바른 관계가 보존되고 회복되는 것이며, 그 평화를 무너뜨리는 악이 결국 패배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경고와 약속은 하나의 방향을 향합니다. 공동체를 갈라놓는 속임수를 경계하되, 최종적인 승리를 자신들의 힘이나 판단에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곧바로 은혜를 축복합니다. 신자들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자기들의 순수함이나 강한 의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을 분별하는 일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악을 이기고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역시 은혜가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올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을 뜻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19에서도 바울은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17절의 경고가 로마 교회 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20절에서는 창세기 3:15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야훼는 뱀과 여자, 그리고 그들의 후손 사이에 적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말씀에는 머리와 발꿈치를 치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로마서 16:20은 창세기 3:15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두 본문의 표현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두 본문 사이에는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대조하며(로마서 5:12–21),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와 죽음의 지배에 맞서 예수님을 통해 의와 생명의 통치가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만이 아니라, 받아쓴 사람까지

로마서 16:21–23 본문 →

이제 바울은 「나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한 겨레인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의 문안을 전합니다. 앞에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면, 이제는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이 로마의 신자들에게 문안을 보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쓴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로마서 16:2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를 바울이 쓴 편지로 읽었습니다. 실제로 편지의 내용과 논증은 바울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기록하는 과정에는 더디오라는 다른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그는 편지의 수신자도 아니고, 편지의 저자로 소개되는 사도도 아닙니다. 그런데 편지 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고, 바울은 그 인사가 편지에 포함되도록 허용했습니다.

바울이 설명한 복음은 편지를 받아쓰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문안은 다른 사람들의 문안과 함께 편지에 기록됩니다.

나와 교회 전체를 손님으로 맞아 주는 가이오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도시의 재정을 맡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로마서 16:23 · 본디새김

가이오가 어느 정도의 공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의 표현에서 그는 많은 사람에게 환대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을 돌보아 준 뵈뵈와 바울과 교회를 손님으로 맞아 주는 가이오는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지만, 자신의 것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가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바울은 에라스도는 도시의 재정을 맡은 사회적 직무로, 구아도는 ‘형제’라는 호칭으로 소개합니다. 이 둘이 정확히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울은 그들을 모두 문안을 보내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합니다.

동역자, 함께 갇혔던 사람, 집을 열어 준 사람, 수고한 사람, 도시의 재정을 맡은 사람, 편지를 기록한 사람. 바울은 이 사람들을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 복음의 중심에 있는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4–8에서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고, 그 지체들이 모두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로마서 16장에서는 그 다양한 지체들이 실제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해야만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면서 그 몸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에는 편지를 작성할 때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초안을 맡겨 기록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22절에서 직접 확인되지만, 더디오가 모든 문장을 바울의 구술 그대로 기록했는지, 작성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맡았는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에라스도의 정확한 행정적 지위나 고린도에서 발견된 동명의 비문 속 인물과의 동일성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왜 이렇게 끝나는가

로마서 16:24 본문 →

로마서는 다음 축복으로 끝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로마서 16:24 · 본디새김

이 해설이 따르는 본문 형태를 따라 읽으면 로마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장엄한 송영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축복에는 한 단어가 특별히 중요합니다.

‘모두’입니다.

바울은 긴 편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도 설명했습니다. 그 은혜는 율법을 가진 사람만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특정한 민족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모두’는 단순한 관용적 표현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람들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습니다.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었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있습니다. 많이 수고한 마리아와 버시가 있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루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리스도불로와 나깃수의 집안에 속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곁에는 디모데와 가이오와 더디오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과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들 모두에게 구하는 것은 같은 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많은 현대 성경에서는 이 뒤에 16:25–27의 송영이 이어지지만, 이 해설이 따르는 본문은 16:24에서 로마서를 마무리합니다. 로마서의 결말에는 잘 알려진 본문 전승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본에 따라 송영이 16장 끝에 놓이기도 하고, 다른 위치에 놓이거나 생략되기도 하며, 16:24 자체도 주요 사본들 사이에서 유무가 갈립니다. 그러므로 어느 형태가 바울이 처음 작성한 편지의 정확한 결말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해설이 채택한 형태는 번역 노트와 일치합니다.

로마서가 남긴 마지막 모습

로마서 16:1–24 본문 →

로마서 16장의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설명한 복음이 실제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며, 혈연을 넘어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분열과 속임수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그 경고마저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평화에 대한 소망 안에서 주어집니다.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던 편지가 사탄의 패배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 사이에 이루신 관계를 무너뜨리는 악을 하나님의 평화가 끝내 이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편지의 마지막에 남긴 것은 자신의 업적을 정리한 목록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이제 편지를 받아쓴 더디오가 마지막 문장을 기록합니다. 그 앞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습니다. 오래전에 만난 사람, 함께 위험을 겪었던 사람, 자신을 돌보아 준 사람, 집을 열어 준 사람,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이름 뒤에 바울의 마지막 축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이 놓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