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가

로마서 3장에는 뜻밖에도 하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불신실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묻다가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서 의롭게 되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이기시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하나님 자신이 피고석에 서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믿을 만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셨습니까? 인간의 불의가 드러났다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은 이 질문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리고 논증이 진행되면서 법정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19절에서는 온 세상의 입이 막힙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4절에 이르면 바로 그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불의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반대로 하나님이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면, 누가 그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의를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불의한 사람을 의롭게 하실 수 있습니까?

바울이 제시하는 대답의 중심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113장 본문 읽기 →

인간이 신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로마서 3:1–4 본문 →

그러면 유대 사람에게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로마서 3:1 · 본디새김

바울은 앞 장의 논증에서 생겨날 만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편파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유대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모든 면에서 이로움이 큽니다. 우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 · 본디새김

그들이 받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규칙이나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고 처분할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고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몇몇 사람이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믿지 않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없애 버리겠습니까?로마서 3:3 · 본디새김

바울의 질문에는 인간의 불신실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서로 마주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도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저버리십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도리어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쟁이라 하십시오. 「주께서 주의 말씀에서 의롭게 되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이기시려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3:4 · 본디새김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한 부정을 나타낼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시편 51편을 인용합니다.

다윗의 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시편입니다. 표제는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맺은 뒤 나단의 책망을 받은 사건과 연결합니다(사무엘하 11–12장). 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거나 하나님의 판단이 지나치다고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심판하셔도 그 판결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바울은 그 고백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처사가 옳았는지 질문하고, 그분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닌지 따집니다. 바울은 그 질문 앞에서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죄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불신실함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실제 문제이고, 바울은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이유는 인간이 신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성품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들으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의 불신실함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선명해진다면, 인간의 죄도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은 그 질문까지 직접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말씀」에 해당하는 원문의 로기아(λόγιον)는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말씀이나 신탁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맡았다」에는 어떤 것을 받아 보존하고 책임 있게 다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절의 「믿지 않음」에 해당하는 아피스티아(ἀπιστία)는 문맥에 따라 믿지 않음뿐 아니라 신실하지 못함을 뜻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해당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믿음과 신실함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4절의 인용에서, 히브리어 시편 51:4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의로우시다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바울이 따르는 표현은 하나님이 판단받으시거나 다투시는 상황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가운데 「재판을 받으실 때」라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나쁜 일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죄를 지어도 되는가

로마서 3:5–8 본문 →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입증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설마 불의하시겠습니까? 사람의 방식대로 말합니다.로마서 3: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앞선 논증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는데, 그 거짓말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정직함이 더욱 선명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고 거짓말한 사람이 정직함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으므로 칭찬받아야 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이 거짓말 자체를 올바른 행동으로 바꾸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는 사실과, 그 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가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로마서 3:6 · 본디새김

인간의 불의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면, 하나님이 불의를 심판하실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문제의 논리를 노골적인 문장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을 받는 대로, 또 어떤 이들이 우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대로 — 「좋은 것이 오도록 나쁜 일을 하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비방하는 자들이 받는 심판은 마땅합니다.로마서 3:8 · 본디새김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복음을 이런 식으로 왜곡한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보다 크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죄를 더 지을수록 은혜가 더욱 크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지만, 죄를 선하다고 선언하시지는 않습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말은 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를 죄로 판단하시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직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처한 상황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입에서 시작하여 발과 눈까지 — 죄 아래 놓인 인간

로마서 3:9–18 본문 →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더 낫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앞에서 이미 고발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9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유대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큰 이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전혀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구절에서 바울이 묻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유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이로움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방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더 의로운 위치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특권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모두에게 「모두 죄 아래 있다」는 진단을 내립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죄를 한 번 이상 지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죄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죄를 개별적인 잘못들의 총합 이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처럼 바라보게 합니다.

서로 다른 성경 구절이 하나의 인간을 그린다

10–18절의 인용문은 하나의 시편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시편 14:1–3과 53:1–3, 시편 5:9, 140:3, 10:7, 이사야 59:7–8, 시편 36:1 등의 표현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택한 구절들의 순서를 따라가면 하나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먼저 인간의 내적인 상태가 나옵니다.

「의로운 이는 없다. 하나도 없다」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3:10 · 본디새김

「깨닫는 이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이도 없다.」 이어서 입과 말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들은 자기 혀로 속임수를 쓰곤 했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로마서 3:13 · 본디새김

그리고 발과 길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발은 피를 흘리게 하는 데 빠르다.」로마서 3:15 · 본디새김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다.」로마서 3:17 · 본디새김

마지막에는 눈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로마서 3:18 · 본디새김

인간의 생각,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인간이 죄를 짓는 모습을 마치 몸 전체의 움직임을 따라가듯 묘사합니다.

특히 말에 관한 표현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는 속임수를 쓰며, 입술 아래에는 독이 있고, 입은 저주와 독한 말로 가득합니다. 말은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악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발이 등장합니다. 발은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발은 피를 흘리게 하는 데 빠르고, 그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59장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폭력을 고발하며, 그들이 정의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내부의 불의를 고발하던 예언자의 말을 이제 모든 인간을 향한 논증에 포함합니다.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의 죄를 판단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려 한다면, 그 성경은 먼저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던 말씀이 자기 자신에게도 들려오는 것입니다.

정말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일까?

「의로운 이는 없다. 하나도 없다」는 말이 인간은 어떤 순간에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원래 인용된 시편 14편은 하나님을 부정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시편 14:5). 그 시편만 떼어 읽으면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대조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시편을 다른 성경 구절들과 연결하고, 앞서 전개한 논증의 결론으로 사용합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이 가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심리학적 판단이 아닙니다.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죄의 모습과 정도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폭력을 행사하고, 어떤 사람은 속이고, 어떤 사람은 탐욕에 빠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차이들이 죄 아래 있다는 공동의 현실을 없애 주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현실의 마지막 모습인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인용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벌이 무서워서 행동을 조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판단과 뜻 앞에 자신을 두는 태도입니다. 그 태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여 주는 죄의 모습은 그래서 단순히 나쁜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삶 전체가 방향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율법이 마침내 모든 입을 막는다

로마서 3:19–20 본문 →

그런데 우리는 율법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율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입이 막히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벌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3:19 · 본디새김

속임수와 저주로 가득했던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입이 이제 막힙니다.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무죄를 주장하던 사람이 증거 앞에서 더 이상 항변할 수 없게 된 법정의 모습입니다. 앞에서 인용된 시편과 예언서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고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경을 가지고 이방 사람만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유대 사람도 자신의 특권을 근거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방 사람도 죄와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역할을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육을 지닌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됩니다.로마서 3:20 · 본디새김

율법이 잘못된 가르침이기 때문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죄인이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울에 올라서면 현재 체중을 알 수 있지만, 저울에 올라섰다는 사실만으로 몸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율법도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지만, 율법을 소유하거나 듣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비유가 율법의 기능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이 살아갈 길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선물을 무가치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의로운 판정을 얻으려는 인간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갈립니다. 한 읽기는 이것을 율법에 대한 순종 전체로 보고, 인간의 순종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할례와 음식 규정처럼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하는 실천들을 강조하며, 뒤이어 등장하는 할례와 이방 사람의 구원 문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두 관점을 단순히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에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실천들이 포함되며, 동시에 바울의 논증은 그런 표지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가 핵심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바울의 율법 이해와 유대교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고려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그 율법을 받은 사람도 죄 아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입이 막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편지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런데 이제는」 —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로마서 3:21–22 본문 →

그런데 이제는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하고 있습니다.로마서 3:21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로마서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제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인간에게 더욱 노력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며 논증의 방향을 바꾸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의가 언젠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났다고 선언합니다.

율법과 별개인데 율법이 증언한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별개로」 드러났지만,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관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율법과 별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로운 종교적 발명품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움은 하나님의 옛 약속을 폐기하는 새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났다는 새로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성경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성경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 믿는 모든 이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2 · 본디새김

원문의 디아 피스테오스 이에수 크리스투는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구조이고, 「예수 그리스도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읽기가 갈립니다.

한쪽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읽습니다. 바로 뒤에 「믿는 모든 이에게」라는 표현이 나오고, 바울이 28절에서도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쪽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읽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근거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믿는 모든 이」를 구별해서 말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두 읽기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방식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믿음이 각각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달리 설명합니다. 문법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분리되어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그 의가 「믿는 모든 이」에게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와 인간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는가는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즉시 이 복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밝힙니다.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이제는」에 해당하는 원문은 뉘니 데(νυνί)입니다. 이 「이제」는 논증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 주는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드러난 새로운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드러났습니다」(φανερό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 지금도 그 의미와 결과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두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 모두가 값없이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3–24 본문 →

모두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됩니다.로마서 3:23–24 · 본디새김

이 두 구절은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23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한 바로 그 사람들이 24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두 문장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마주 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해석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그 영광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와 연결되는 읽기입니다. 다른 해석은 인간이 받도록 되어 있는 종말론적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강조합니다. 로마서 뒤쪽에서 바울이 신자들이 장차 받을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점과 연결됩니다.

두 관점 모두 로마서 전체의 문맥에서 검토할 수 있지만, 3:23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바울은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 실패 몇 가지보다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이르지 못했고, 그 문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예상 밖의 선언이 나옵니다.

의롭게 되는 일은 인간이 율법을 지킨 공로에 대한 임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값없이 주어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값을 치르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나, 대가를 통해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원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출애굽기 6:6은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속량하시겠다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속량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말했던 바울은 이제 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속량」은 법정에서 무죄라는 말을 듣는 장면만이 아니라,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사건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어떤 특정한 존재에게 몸값이 지불되었다는 상세한 거래 구조까지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속량의 대가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또 바울이 「그 모두가」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믿음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최종적인 구원을 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 22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이」에게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바울이 강조하는 보편성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에서 구별이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에서도 민족적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면 질문이 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모른 척하시는 걸까요? 바울은 그 답을 설명하기 위해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속량」에 해당하는 원문의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는 구속이나 해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죄의 자리 —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만나는 곳

로마서 3:25–26 본문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피로 믿음을 통한 속죄의 자리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그러이 봐주시는 가운데 전에 지은 죄들을 그냥 지나가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5 · 본디새김

예수님의 피, 믿음, 속죄, 하나님의 의, 이전에 지은 죄, 하나님의 너그러이 봐주심이 한 문장 안에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면서,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두 사실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까요?

바울은 그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언약궤 위에 놓인 덮개

「속죄의 자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입니다. 이 낱말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언약궤 위에 놓인 덮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25:17–22에 따르면 언약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덮개가 놓여 있었고, 그 양쪽에는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곳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위한 피를 뿌리는 의식이 설명됩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속죄의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 죄의 정결,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바로 이 낱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처리하시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일이 이제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을 두고 해석은 언약궤의 덮개 곧 속죄가 이루어지는 자리, 죄를 속하는 수단 또는 속죄 제물,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자리로 갈립니다. 이 논쟁에서 하나의 견해가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특정한 속죄 이론의 모든 세부 사항을 가르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중심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를 다루시며, 바로 그 사건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인간의 선행이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와 연결합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가

레위기 17:11에서는 생명이 피에 있으며, 하나님이 피를 제단에서 속죄하도록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할 때에도 예수님의 죽음이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단순히 제의적 절차를 수행하기 위한 물질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바울은 그 죽음이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이 필요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전에 지은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전에 지은 죄들을 그냥 지나가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전에 지은 죄들을 당장 모두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너그러이 봐주심과 연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재판장이 범죄를 알면서 아무 이유 없이 눈감아 준다면 그의 공정함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그냥 지나가신다면, 그분은 정말 의로운 재판장이신 걸까요?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답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셔서 지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속죄의 자리로 세우심으로써, 죄를 다루시면서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죄인을 향한 자비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두 사실이 함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의롭게 하시는 분이다

곧 지금 이때에 그분의 의를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이니, 그분 자신이 의로우시면서 예수의 믿음에 근거한 이를 의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로마서 3:2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고,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며, 사람을 의롭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을 포기하면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모든 죄인을 구원 없이 버리시는 분으로만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면서 의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의 중심에 놓인 선언입니다.

「의롭게 한다」는 말은 이 문맥에서 법정의 판결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거나 의로운 지위에 두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23절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은 죄인이 처음부터 무죄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속량을 통해 죄인의 지위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이 판결과 인간의 실제 삶의 변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로마서에서 더 다루어질 주제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의로운 판결의 근거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진 예시가 아니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힐라스테리온의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언약궤의 덮개, 곧 속죄가 이루어지는 자리로 이해하는 해석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성전 의식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습니다. 죄를 속하는 수단 또는 속죄 제물로 이해하는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제거하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다루는 속죄 사건이라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속죄의 자리가 죄의 정결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소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해석은 성전과 속죄의 의미를 함께 살피면서 이 자리의 계시적 기능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의롭게 한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입니다.

이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로마서 3:27–28 본문 →

여기까지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배제되었습니다. 어떤 법을 통해서입니까? 행위의 법을 통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을 통해서입니다.로마서 3:27 · 본디새김

율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할례받은 사람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속량에 있기 때문에, 이런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 자랑은 지나친 자신감이나 교만한 감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무엇에 근거하여 주장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헤아리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8 · 본디새김

이것은 인간의 선한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선한 행위의 가치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의 「믿음의 법」은 조금 낯선 표현입니다. 원문에서 「율법」과 「법」은 같은 낱말 노모스(νόμος)인데, 이 낱말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킬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원칙이나 규범을 뜻하기도 합니다. 27절의 「행위의 법」과 「믿음의 법」에서 법은 모세의 율법이나 원리로 읽힙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방식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근거로 자신을 입증하는 방식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려 했는데, 바울은 그 자랑을 배제하는 것도 하나의 법, 곧 믿음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내세울 새로운 공로를 쌓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이 자랑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의롭게 되는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구원의 길도 민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가

로마서 3:29–30 본문 →

아니면 하나님이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로마서 3:29 · 본디새김

유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은 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명기 6:4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그 고백은 많은 신을 섬기는 민족들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신앙적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고백에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한 분이시라면, 그분은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민족적 표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참으로 한 분이시다면, 그분이 할례받은 이를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게 하시고 할례받지 않은 이를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로마서 3:30 · 본디새김

바울은 두 집단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할례라는 언약의 표지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두 개의 독립적인 길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믿음을 통해 두 집단 모두를 의롭게 하십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를 버려야 이방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이스라엘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방 사람 역시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린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누구나 환영받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윤리적 주장보다 구체적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새롭게 드러냅니다. 이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선언은 서로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 앞에서 함께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믿음은 율법을 없애는가, 굳게 세우는가

로마서 3:31 본문 →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통해 율법을 없애 버립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로마서 3:31 · 본디새김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하고,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별개로 드러났다고 말하면서도,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은 이스라엘의 성경과 단절된 길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드러내지만, 율법의 행위 자체가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길이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해할지는 로마서의 뒤이은 논증에서 더 밝혀지며, 특히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건과 할례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3장 안에서도 믿음은 율법과 무관한 새로운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절과 31절에는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불신실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없애 버리겠습니까?」라고 물었고, 31절에서는 믿음이 율법을 「없애 버립니까?」라고 묻습니다. 두 곳의 동사는 무효로 만들거나 효력을 없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 질문에 대한 대답도 같습니다.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하나님은 인간의 불신실함 때문에 자신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하나님의 목적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의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3절과 31절에 쓰인 그리스어 동사는 카타르게오입니다.

의롭게 되는 사람의 입에서는 무엇이 사라지는가

로마서 3:1–31 본문 →

로마서 3장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입이 등장합니다. 19절에서는 모든 입이 막힙니다. 누구도 율법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자랑이 배제됩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사람도 다시 입을 열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가볍게 여기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랑할 수 없게 된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의를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불의한 사람을 의롭게 하실 수 있는가. 바울의 대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면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고, 이 두 역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로마서 3장의 복음은 죄인이 벌을 면할 수 있다는 소식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바로 그 일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드러내셨다는 소식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하나님이 재판받으시는 듯한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입이 막히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말은 인간의 유죄에 관한 선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해 죄인을 값없이 의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입이 막힌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