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인사와 복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의로움

누군가의 잘못을 분명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도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거짓말할 수 있습니다. 탐욕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욕심에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뜻을 가르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뜻대로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2장은 바로 이 모순을 파고듭니다.

바울은 앞에서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던 독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부터 독자를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서는 자신이 속한 민족도, 소유한 율법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올바른 지식도 자신을 보호하는 특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가장 깊은 곳에서 문제 삼는 것은 율법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율법이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2장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인간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판결

로마서 2:1–3 본문 →

바울은 「판단하는 사람이여」라고 부르면서 한 사람을 대화의 상대로 세웁니다.

로마의 여러 신자에게 편지를 쓰던 바울이 갑자기 한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2인칭 단수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상대를 세워 놓고 질문을 던지며 논증을 전개하는 고대의 대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흔히 디아트리베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대가 남을 판단하는 그 일로 그대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그대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 · 본디새김

왜 남을 판단하는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일이 될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옳고 그름에 따라 분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판단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죄목을 제시하지 않고, 그 사람 자신의 판단을 증거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은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도둑질한다면, 그는 그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정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순간 자신이 적용해야 할 기준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리라고 헤아리는 것입니까?로마서 2: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인간이 흔히 저지르는 판단의 오류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증거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아는 능력과 옳은 것을 행하는 삶은 같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를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2:2). 사람이 내리는 판단은 외적인 모습이나 제한된 정보에 의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실제 진실에 부합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차이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그대도 죄인이지 않습니까?」라는 도덕적 비난이 아닙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바울은 그 질문을 통해 판단하는 사람의 발밑에 놓인 안전한 자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잘못 이해한 사람

로마서 2:4–5 본문 →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심판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애를 이야기합니다.

아니면 그대는 하나님의 자애가 그대를 회개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분의 자애와 너그러이 봐주심과 오래 참으심이 지닌 넉넉함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로마서 2:4 · 본디새김

바울이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자신도 잘못을 저지르는데, 지금까지 별다른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그런 생각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 너그러이 봐주심, 오래 참으심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저버린 뒤에도, 여호와야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도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도록 주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방향을 바꾸도록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시간을 전혀 다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그대 자신에게 쌓고 있습니다.로마서 2:5 · 본디새김

「쌓고 있습니다」(θησαυρίζω)로 옮긴 말은 무언가를 모아 두거나 축적한다는 뜻으로, 보물을 쌓아 두는 행위를 표현할 때도 사용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진노에 적용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자애가 지닌 넉넉함이, 5절에서는 인간이 쌓는 진노가 등장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오래 참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거부하는 인간에게는 심판을 향해 쌓아 가는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회개로 이끄시려는 분인데, 인간은 그분의 자애를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로 오해합니다.

심판의 무서움은 하나님이 자애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애를 받으면서도 그 자애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판단하시는가

로마서 2:6–11 본문 →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이 한 일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서 2: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62:12와 잠언 24:12에 나타나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두 종류의 삶으로 펼쳐 보입니다. 한쪽에는 참고 견디며 선한 일을 계속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이기심 때문에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진노와 노여움이 있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단지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과 악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 구별하지 않고, 그 행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까지 말합니다. 인간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대조는 곧바로 민족의 구분을 넘어갑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환난과 곤경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그리스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영광과 존귀와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유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그리스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로마서 2:9–10 · 본디새김

앞서 바울은 복음이 유대 사람에게 먼저, 또 그리스 사람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선언했습니다(1:16). 그런데 여기서는 같은 순서를 심판에 적용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지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는 특권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공정하심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출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고, 이방 민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없었던 일처럼 취급하지 않지만, 그 차이가 하나님의 판단을 불공정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 계시는 책임과도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7은 여호와야훼가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그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의 일부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율법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율법을 받은 사람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일까?

바울은 로마서 1:16–17에서 믿음과 구원을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행한 일대로 갚으시며, 선한 일을 계속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율법을 행하는 이들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위에 따른 구원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요한 해석들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관한 원칙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율법을 완전히 행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받겠지만, 뒤이어 인간의 죄가 드러나므로 누구도 자신의 행위만으로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이 단락을 인간에게 필요한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논증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 구절을 단순한 가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믿음은 순종과 선한 삶으로 나타나므로 마지막 심판에서도 그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행위가 은혜를 얻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어 낸 삶의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두 읽기 모두 바울의 다른 진술들과 연결하려 하지만, 2장 자체가 그 관계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정적인 이야기로만 돌려 버리는 것도, 바울이 행위만으로 구원받는 독립적인 길을 제시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단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실제 삶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듣는 사람과 율법을 행하는 사람

로마서 2:12–16 본문 →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라는 원칙을 율법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법 없이 죄지은 이들은 누구나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고, 율법 아래서 죄지은 이들은 누구나 율법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로마서 2:12 · 본디새김

여기서 율법은 특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시편 147:19–20은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말씀과 규례를 야곱에게 알리셨으며, 다른 민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자동으로 의로운 신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듣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이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3 · 본디새김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는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배우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사도행전 15:21에서도 모세의 율법이 오래전부터 각 도시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읽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듣는 이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정기적으로 접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공동체가 소유한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도, 배운다는 사실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는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율법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예상 밖의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율법을 행한다면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본성에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때에는, 율법을 가지지 않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율법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4 · 본디새김

모세의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양심이 함께 증언하고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로마서 2:15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법정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외부에서 율법을 읽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인간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평가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모든 이방 사람의 마음에 모세의 율법 전체가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도 율법 자체와 「율법의 일」(ἔργον)을 구별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마음에 적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인식과 반응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이 이방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 신자들일까요?

첫 번째 해석은 바울이 일반적인 이방 사람들의 양심을 설명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없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심이 있으므로,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본성에 따라」라는 표현과, 서로 고발하거나 변호하는 양심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설명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는 「마음에 적혀 있다」는 표현이,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신 예레미야 31:33의 새 언약과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자연법과 새 언약의 언어를 함께 고려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든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율법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는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논의를 인간의 양심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내 복음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숨은 일을 심판하시는 날에 말입니다.로마서 2:16 · 본디새김

왜 심판이 복음의 일부일까요?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용서와 구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의롭게 판단하신다는 사실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복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숨은 일도 심판하십니다.

눈먼 이들의 길잡이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로마서 2:17–24 본문 →

이제 바울은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 나갑니다.

그런데 만일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 불리며 율법에 기대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분의 뜻을 알고 율법에서 가르침을 받아 무엇이 나은지 가려내며, 그리고 그대 자신이 눈먼 이들의 길잡이요 어둠에 있는 이들의 빛이며, 어리석은 이들의 훈육자요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며 율법 안에 앎과 진리의 모양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면 —로마서 2:17–20 · 본디새김

이 긴 조건문이 끝난 뒤에야 바울은 질문을 던집니다.

남을 가르치는 그대가 그대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그대가 도둑질합니까?로마서 2:21 · 본디새김

바울은 상대방의 자부심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르치려는 열망 자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확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말씀 아래 서지 않는 모순입니다. 바울은 상대방이 가진 지식과 책임을 차례로 열거하다가, 단 한 번의 질문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사람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다른 사람의 길잡이가 되려는 그대는 자기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습니까?

어둠에 있는 사람의 빛이 되려는 그대는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남을 가르치는 그대가 그대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바울이 사용하는 질문의 날카로움은 상대가 율법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그 율법을 돌려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누구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17절의 「유대 사람이라 불리는」 상대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전통적인 읽기는 바울이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유대교 교사를 가상의 상대로 세웠다고 봅니다. 반면 이 인물이 유대교 관습과 할례를 받아들여 스스로 유대 사람의 지위를 주장하는 이방 사람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으며, 2장 전체에서 동일한 가상의 상대에게 계속 말하고 있다는 점과 「유대 사람이라 불리며」라는 표현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누구를 상대로 하는 말인지에 따라 바울의 비판이 유대교 내부의 자기 성찰인지, 유대인의 지위를 잘못 주장하는 이방 사람을 향한 경고인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느 읽기를 따르든 이 본문을 당시 유대인 전체가 위선적이었다는 역사적 증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논증을 위해 특정한 인물을 세워 질문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유대 사람입니다. 본문이 직접 겨누는 것은 민족의 도덕적 열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안다는 주장과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입니다.

「우상을 역겨워하는 그대가 신전을 약탈합니까?」

21–22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도둑질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간음합니까? 우상을 역겨워하면서 신전을 약탈합니까?

세 번째 질문은 조금 낯섭니다. 바울은 우상 숭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마저 자기 의로움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상을 혐오한다고 해서 탐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모순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2:2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2:5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는 상황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모독받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에스겔 36:20–23에서도 이스라엘이 민족들 가운데 흩어졌을 때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더럽혀진 상황이 설명됩니다. 바울은 그 예언서의 언어를 적용하여,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받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 인용을 통해 바울의 비판은 개인의 위선이라는 문제를 넘어갑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아는 사람이 율법을 어기는 모습은 그들이 전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증언까지 손상시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판단하려 할 때, 우리의 행동은 그분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는 이제 사람에게 보이는 가장 분명한 종교적 표지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할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2:6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 본문의 본래 문맥은 여호와야훼의 종과 이스라엘의 사명에 관한 것이며, 바울이 19절에서 그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제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22절의 「신전을 약탈하다」는 성소나 신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신성한 것을 침해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맥에서는 우상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면서 이방 신전과 관련된 재물을 탐하거나 신성모독적인 일을 저지르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실제 신전 절도를 말하는지, 더 넓은 종교적 모독을 말하는지는 확실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된다면

로마서 2:25–27 본문 →

그대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이롭기는 하지만, 그대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면 그대의 할례는 할례받지 않은 것과 다름없게 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25 · 본디새김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 사람에게 할례는 단순한 개인적 종교 선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몸에 남는 흔적입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할례의 신체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지가 갖는 언약적 의미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 표지가 그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할례가 이롭기는 하지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표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언약에 대한 순종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의로운 규정들을 지키면, 그가 할례받지 않은 것이 할례로 헤아려지지 않겠습니까?로마서 2:26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해 주던 가장 분명한 신체적 표지의 의미를 뒤집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실 때 겉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표지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7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할례받지 않은 채 율법을 다 이루는 이가, 율법의 문자와 할례를 지니고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판단할 것입니다.로마서 2:27 · 본디새김

율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율법을 받은 사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기준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이방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14–15절의 이방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된 논쟁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이방 신자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 원칙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가정적 사례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모든 할례받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한다거나, 할례받은 사람 모두를 정죄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할례에 관해 가장 근본적인 설명을 꺼냅니다.

마음의 할례 — 사람이 해야 할 일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가

로마서 2:28–29 본문 →

겉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 아니고, 겉으로 살에 받은 할례가 할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속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고,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며, 영으로 하는 것이지 율법의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가 받는 칭찬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로마서 2:28–29 · 본디새김

로마서 2장의 결론은 뜻밖에도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교훈일까요? 그보다 깊은 구약성경의 배경이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이미 모세가 말했던 것입니다

신명기 10:16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몸에 행하는 할례를 폐지하는 명령이 아니라, 몸에 언약의 표지를 지닌 백성이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0:6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주체가 달라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마음과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마음과 목숨을 다해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된 변화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에서도 발전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고 자신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6:26–27에서는 하나님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의 본래 문맥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심판을 경험한 뒤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자적 전통에 서서 마음의 할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단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더욱 진실하게 다스리라는 도덕적 권면으로만 이해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그 새로운 마음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영으로 하는 것이지 율법의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영」을 성령으로 볼 것인지, 문자에 대비되는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할 것인지 견해가 갈립니다. 성령을 뜻한다고 읽으면 에스겔 36장의 새 영과 하나님의 영에 관한 약속이 특히 중요해집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와 로마서의 뒤쪽에서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일이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므로, 이 읽기는 충분한 근거를 갖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까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외적으로 기록된 율법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문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지만, 그 뜻을 아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율법과 예언자들이 오래전부터 말해 온 약속을 다시 꺼냅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의 숨은 일을 심판하신다고 말했습니다(2:16). 그러나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의 복음은 인간이 죄를 드러내는 심판 앞에 서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한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아직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부 설명되지 않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마음의 변화를 향해 논증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유대 사람입니까

바울이 「속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혈통적 유대인의 존재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효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구절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예수님과 성령을 중심으로 새롭게 규정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민족적 정체성 자체를 다시 정의하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유대인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예언자적 비판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논쟁은 율법과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의 지위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 전체를 간단하게 폐기하기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의 기준을 외적인 표지에서 마음의 변화로 옮겨 놓습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칭찬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칭찬

로마서 2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바울은 「그런 이가 받는 칭찬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칭찬」이라는 말을 꺼낸 것입니다. 사람에게 유대 사람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2:11), 사람들의 숨은 일까지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십니다(2:16).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받는 인정과 하나님에게서 받는 인정은 반드시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을 존경하고, 뛰어난 선생이라고 칭찬하고, 외적인 종교적 표지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라는 심리적 조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의로움을 무엇으로 입증하려 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결론은 모든 외적인 표지를 버리고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창세기 29:35에 나타나는 찬양 또는 감사의 표현과 관련됩니다.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이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고 말하며 유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유대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유다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이 어원을 의도적으로 활용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유대 사람에 관한 논증을 「칭찬」이라는 말로 끝맺는 것은 의미 있는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실패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2:1–29 본문 →

바울은 이 장에서 인간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거들을 하나씩 검토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 지금까지 심판받지 않았다는 사실,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몸에 새겨진 할례 —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이 놓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애와 오래 참으심으로 인간을 회개에 이끄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음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분의 심판은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자애는 그 진실 앞에서 사람이 돌아설 길을 열어 줍니다.

바울은 인간이 충분한 율법 지식을 얻고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식과 의지, 종교적 표지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문제 삼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보다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일입니다. 로마서 2장이 그 해결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필요한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변화를 바울은 「마음의 할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가지 할례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표지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흔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마침내 남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내리는 판결이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이루어진 일을 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