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인사와 복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의로움
누군가의 잘못을 분명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도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거짓말할 수 있습니다. 탐욕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욕심에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뜻을 가르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뜻대로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2장은 바로 이 모순을 파고듭니다.
바울은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모습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던 독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든 변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판단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죄목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자신의 판단을 증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독자를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서는 자신이 속한 민족도, 가지고 있는 율법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올바른 지식도 자신을 보호하는 특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가장 깊은 곳에서 문제 삼는 것은 율법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율법이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일까요?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판결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대화의 상대로 세웁니다.
로마의 여러 신자에게 편지를 쓰던 바울이 갑자기 한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두루새김은 「여러분」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한 사람을 부르는 2인칭 단수 표현이 쓰입니다.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상대를 세워 놓고 질문을 던지며 주장을 펼치는, 고대의 대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남을 판단하는 바로 그 일로 자신에게도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여러분도 같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 · 두루새김
왜 남을 판단하는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일이 될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옳고 그름에 따라 분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은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도둑질한다면, 그는 그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정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순간 자신이 적용해야 할 기준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자신도 같은 일을 하는 여러분, 여러분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로마서 2:3 · 두루새김
여기에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증거로 착각하는 잘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아는 능력과 옳은 것을 행하는 삶은 같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2:2). 사람이 내리는 판단은 겉모습이나 제한된 정보에 의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실제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달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차이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질문은 「여러분도 죄인이지 않습니까?」라는 도덕적 비난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바울은 그 질문을 통해 판단하는 사람의 발밑에 놓인 안전한 자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잘못 이해한 사람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심판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선하게 대해 주시고, 참아 주시며,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을 업신여깁니까?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셔서 여러분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서 2:4 · 두루새김
바울이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자신도 잘못을 저지르는데, 지금까지 별다른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게 대해 주심, 참아 주심, 오래 기다려 주심이라는 세 표현은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저버린 뒤에도,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쉽게 화내지 않으시는 분으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 말씀은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도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도록 주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방향을 바꾸도록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시간을 전혀 다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와 올바른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자신이 받을 분노를 쌓고 있습니다.로마서 2:5 · 두루새김
「쌓고 있습니다」(θησαυρίζω)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무언가를 모아 두거나 쌓아 둔다는 뜻으로, 보물을 쌓아 두는 행위를 표현할 때도 쓰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분노에 적용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누리면서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향한 분노를 쌓아 갈 수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시간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오래 참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거부하는 인간에게는 심판을 향해 쌓아 가는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선하심과 분노 사이를 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회개로 이끄시려는 분인데, 인간이 그분의 선하심을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무서움은 하나님이 선하게 대해 주지 않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받으면서도 그 선하심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판단하시는가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 갚으실 것입니다.로마서 2: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62:12와 잠언 24:12에 나타나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두 종류의 삶으로 펼쳐 보입니다. 한쪽에는 참고 견디며 선한 일을 계속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썩지 않는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이기심에 따라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분노와 노여움이 있습니다.
바울은 두 사람을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과 악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만 구별하지 않고, 그 행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까지 말합니다. 인간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대조는 곧바로 민족의 구분을 넘어갑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난과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유대 사람이 먼저이고, 그리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유대 사람이 먼저이고, 그리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로마서 2:9–10 · 두루새김
앞서 바울은 복음이 유대 사람에게 먼저, 또 그리스 사람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선언했습니다(1:16). 그런데 여기서는 같은 순서를 심판에 적용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지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는 특권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고, 이방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없었던 일처럼 취급하지 않지만, 그 차이가 하나님의 판단을 불공정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가르침은 책임과도 연결됩니다.
신명기 10:17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의 일부였던 이 말씀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바울은 이제 율법을 받은 사람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일까?
바울은 로마서 1:16–17에서 믿음과 구원을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한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위에 따른 구원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바울이 하나님의 올바른 심판에 관한 원칙을 제시할 뿐, 뒤이어 인간의 죄가 드러나므로 누구도 자신의 행위만으로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보고, 이 단락을 인간에게 필요한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논증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믿음은 순종과 선한 삶으로 나타나므로 마지막 심판에서도 그 삶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행위는 은혜를 얻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이루어 낸 삶의 열매입니다.
두 읽기 모두 바울의 다른 진술들과 연결하려 하지만, 2장 자체가 그 관계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정적인 이야기로만 돌려 버리는 것도, 바울이 행위만으로 구원받는 별도의 길을 제시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단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실제 삶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듣는 사람과 율법을 행하는 사람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라는 원칙을 율법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고, 율법 아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로마서 2:12 · 두루새김
여기서 율법은 특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시편 147:19–20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규정들을 야곱에게 알리셨으며, 다른 민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선물이 자동으로 의로운 신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3 · 두루새김
사도행전 15:21이 말하듯, 모세의 율법은 오래전부터 각 도시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읽혔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어떤 규정을 한 번 들어 본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을 정기적으로 접하고 그것을 자기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도, 배운다는 사실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도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예상 밖의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율법을 행한다면
율법이 없는 이방 사람들도 본성에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 자신이 율법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4 · 두루새김
모세의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 마음에 적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를 증언합니다. 또 그들의 생각은 서로 맞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따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 두둔하기도 합니다.로마서 2:15 · 두루새김
이 표현에는 법정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외부에서 율법을 읽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인간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평가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모든 이방 사람의 마음에 모세의 율법 전체가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도 율법 자체와 「율법의 일」이 구별되어, 마음에 적혀 있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옳고 그름을 알고 반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이 이방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 신자들일까요? 어느 해석이든 확실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는가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논의를 인간의 양심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숨겨진 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로마서 2:16 · 두루새김
왜 심판이 복음의 일부일까요?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용서와 구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올바르게 판단하신다는 사실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복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숨겨진 일들도 다룹니다.
이 사실은 곧 이어지는 바울의 논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4–15절의 이방 사람을 두고 첫 번째 해석은 바울이 일반적인 이방 사람들의 양심을 설명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없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심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본성에 따라」라는 표현과 따지고 두둔하는 양심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설명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자기 마음에 적혀 있음」이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신 예레미야 31:33의 새 언약 약속과 연결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자연법과 새 언약의 언어를 함께 고려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눈먼 이들의 길잡이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이제 바울은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라고 합시다. 자신을 유대 사람이라고 부르며,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율법에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더 나은지 가려냅니다. 또 자신이 눈먼 사람들의 길잡이이며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담긴 지식과 진리를 갖추고,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바로잡는 이이며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로마서 2:17–20 · 두루새김
긴 조건문이 모두 끝난 뒤에야 바울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전하면서 스스로 도둑질합니까?로마서 2:21 · 두루새김
바울은 상대방의 자부심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6과 49:6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명을 받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그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제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르치려는 열망 자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확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말씀 아래 서지 않는 모순입니다. 바울은 상대방이 가진 지식과 책임을 차례로 늘어놓다가, 단 한 번의 질문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사람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다른 사람의 길잡이가 되려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습니까?
어둠에 있는 사람의 빛이 되려는 여러분은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남을 가르치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바울의 질문이 날카로운 것은 상대가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그 율법을 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누구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17절의 상대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전통적인 읽기는 바울이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유대교 교사를 가상의 상대로 세웠다고 봅니다. 반면 2장 전체에서 같은 가상의 상대에게 계속 말하고 있다는 점과, 원문이 유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표현한 점을 근거로, 유대교 관습과 할례를 받아들여 스스로 유대 사람의 지위를 주장하는 이방 사람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누구를 상대로 하는 말인지에 따라 바울의 비판이 유대교 내부의 자기 성찰인지, 유대 사람의 지위를 잘못 주장하는 이방 사람을 향한 경고인지 달라집니다.
다만 어느 읽기를 따르든 이 본문을 당시 유대 사람 전체가 위선적이었다는 역사적 증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논증을 위해 특정한 인물을 세워 질문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유대 사람입니다. 본문이 겨누는 것은 어떤 민족이 도덕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안다는 주장과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입니다.
「우상을 역겨워하면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21–22절의 세 질문 가운데 처음 두 질문, 도둑질과 간음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상 숭배를 싫어하는 것과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어떤 관계일까요?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ἱεροσυλέω)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성소나 신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신성한 것을 침해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문맥에서는 우상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면서 이방 신전과 관련된 재물을 탐하거나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역사적 사건인지, 실제 도둑질인지, 더 넓은 종교적 모독인지는 확실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마저 자기 의로움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모순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로마서 2:2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2:5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이 억압을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고, 에스겔 36:20–23에서도 이스라엘이 민족들 가운데 흩어졌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다. 바울은 그 예언서의 언어를 적용해,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어기는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받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비판은 개인의 위선을 넘어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사명의 문제가 됩니다.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증언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판단하려 할 때, 우리의 행동은 그분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는 이제 사람에게 보이는 가장 분명한 종교적 표지 가운데 하나인 할례를 이야기합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된다면
사실 여러분이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율법을 어긴다면, 할례를 받았어도 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로마서 2:25 · 두루새김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 사람에게 할례는 개인적 종교 선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몸에 남는 흔적입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몸에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지가 갖는 언약의 의미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 표지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표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언약에 대한 순종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반대의 경우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들을 지킨다면, 그도 할례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않겠습니까?로마서 2:26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해 주던 가장 분명한 몸의 표지의 의미를 뒤집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판단하실 때 겉으로 나타나는 몸의 표지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27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태어난 몸 그대로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기록된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도 율법을 어기는 여러분을 판단할 것입니다.로마서 2:27 · 두루새김
율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율법을 받은 사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기준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이방 사람이 누구인지는 14–15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되어,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이방 신자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 원칙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가정적 사례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할례받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한다거나, 할례받은 사람 모두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특권이 차지하는 위치가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할례에 관해 가장 근본적인 설명을 꺼냅니다.
마음의 할례 — 사람이 해야 할 일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가
겉모습만으로 유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겉으로 몸에 받은 할례가 참된 할례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속으로 유대 사람인 사람이 참된 유대 사람입니다. 참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며,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받는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로마서 2:28–29 · 두루새김
로마서 2장의 결론은 뜻밖에도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겉으로 드러나는 유대 사람의 신분과 속으로 유대 사람인 사람의 정체성, 몸에 받은 할례와 마음에 받는 할례를 구별합니다. 이 말은 종교적 의식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교훈일까요? 그보다 깊은 구약성경의 배경이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이미 모세가 말했던 것입니다
신명기 10:16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고집을 부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몸의 할례를 폐지하는 명령이 아니라, 몸에 언약의 표지를 지닌 백성이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0:6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주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과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하지만, 30장에서는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할례를 행하십니다.
인간에게 요구된 변화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예언자들에게서 발전합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고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시고, 에스겔 36:26–27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며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하나님의 규정들을 따라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심판을 경험한 뒤에도 백성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자들의 전통에 서서 마음의 할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더욱 진실하게 다스리라는 도덕적 권면으로만 이해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칩니다.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29절의 원문은 문자 그대로 옮기면 「영(πνεῦμα) 안에서, 문자 안에서가 아니라」입니다. 여기서 「영」을 성령으로 볼지, 문자에 대비되는 영적인 차원으로 볼지 견해가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성령을 뜻한다고 읽어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로 옮겼는데, 로마서 뒤쪽과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 성령께서 신자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일이 중요한 주제로 나타난다는 점이 이 읽기의 근거입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까지 이 구절이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밖에 기록된 율법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구별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지만, 그 뜻을 아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과 예언자들이 오래전부터 말해 온 약속을 다시 꺼냅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의 숨겨진 일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했습니다(2:16). 그러나 그가 선포하는 복음은 심판 앞에 서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한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아직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부 설명되지 않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마음의 변화를 향해 논증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유대 사람입니까
「속으로 유대 사람인 사람이 참된 유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혈통으로 유대 사람인 이들의 존재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효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구절이 유대 사람의 정체성을 예수님과 성령을 중심으로 새롭게 규정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민족적 정체성 자체를 다시 정의하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유대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예언자적 비판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바울이 유대 사람의 정체성 전체를 간단하게 없애기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의 기준을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에서 마음의 변화로 옮겨 놓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칭찬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칭찬
29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바울은 갑자기 「칭찬」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2:11), 숨겨진 일들까지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십니다(2:16).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받는 인정과 하나님에게서 받는 인정은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을 존경하고, 뛰어난 선생이라고 칭찬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표지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라는 심리적 조언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의로움을 무엇으로 입증하려 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율법을 지녔다는 사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분이나 역할은 하나님의 판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결론이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를 버리고 마음속으로만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칭찬」에는 언어적 연결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창세기 29:35에서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이번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며 붙인 이름으로, 찬양 또는 감사의 표현과 관련됩니다. 유대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이 이름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이 뜻을 의도적으로 활용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유대 사람에 관한 논증을 「칭찬」이라는 말로 끝맺는 것은 의미 있는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실패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인간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거들, 곧 남을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 아직 심판받지 않았다는 사실,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할례라는 언약의 표지를 하나씩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처음에는 인간을 회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음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충분한 율법 지식을 얻고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식과 의지, 종교적 표지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른 삶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로마서 2장이 그 해결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필요한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로마서 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가지 할례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표지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흔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닌 사람도 자신의 겉모습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남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내리는 판결이나 칭찬이 아니라,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이루어진 일을 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