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인사와 복음
인간은 무엇을 하나님과 바꾸었는가
로마서 1장은 뜻밖의 순서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죄를 먼저 설명하고 복음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내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짚는 인간의 문제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감사하지 않았고,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로마서 1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잇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꾸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썩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것들을 본뜬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은 이 바꿈이 인간의 생각과 욕망, 몸과 인간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차례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바꾸었을까요?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로마서 1장은 단순히 죄의 목록을 나열하는 장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를 잃어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차근차근 밝히는 글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한 사람에 관한 소식이다
바울의 편지는 자기소개로 시작합니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따로 세우셨습니다.로마서 1:1 · 두루새김
고대의 편지는 보통 보내는 사람을 먼저 밝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름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무슨 일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함께 말합니다.
당시 노예는 법적으로 독립된 사람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주인의 소유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는 말을 자신에게 적용한 것은 예수님께 자신이 속해 있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고대의 강제적 노예 제도와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모든 면에서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기 전에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사도라는 직분 역시 자신이 얻어 낸 지위가 아니라 받은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고, 그의 권위는 자신을 보내신 분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맡은 일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복음의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언자들을 통해 거룩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지셨습니다. 이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서 1:2–4 · 두루새김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기 전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일에 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 약속의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아들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등장한 종교적 스승이 아니십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표현은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의 왕위를 굳게 세우겠다고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약속은 본래 다윗 왕조가 이어지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후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위대한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약속된 왕의 계보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지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을 문법적 가능성이 일부 있지만, 본문의 첫머리는 이미 복음의 대상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능력을 지니신」이라는 말에 무게를 두어, 부활 이후 새로운 권위와 다스리는 지위에 들어가신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부활이 새로운 지위를 주는 사건인지, 이미 지니신 신분을 드러내는 사건인지를 두고 강조점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를 따르든,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밝히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도덕 규칙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행동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믿음의 순종이라는 낯선 표현
우리는 그분을 통해 은혜를 받고 사도의 일을 맡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모든 민족 가운데 사람들이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5 · 두루새김
원문은 믿음과 순종을 묶어 「믿음의 순종」이라고 표현합니다. 먼저 믿고 그다음에 순종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 자체가 순종의 한 형태일까요? 이 표현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인 16:26에도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믿음과 순종을 서로 분리된 두 가지 종교적 의무처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소식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믿음은 바울이 전하려는 복음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먼저 갖추어야 하는 조건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의 일을 받은 것부터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먼저 있고, 그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뒤따릅니다.
이 믿음의 순종은 「모든 민족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윗에게 약속된 왕의 복음이 이제 다윗의 후손만을 위한 소식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의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 역시 그 민족들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1:6). 한 사람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곧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넘어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세워지셨습니다」로 옮긴 원문의 호리스텐토스는 「정해진, 세워진」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 문맥에서는 「선포되신」 또는 「드러나신」이라는 번역도 사용됩니다. 「세워지셨다」에 가깝게 읽으면 부활이 새로운 지위를 주는 사건이 되고, 「선포되셨다」에 가깝게 읽으면 이미 지니신 신분을 나타내는 사건이 됩니다. 또 「거룩함의 영」이 성령을 가리키는지, 예수님 자신의 거룩한 영적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지에도 견해가 갈립니다. 5절의 「믿음의 순종」(휘파코엔 피스테오스)은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순종, 또는 복음을 믿는 행위 자체를 순종으로 이해하는 읽기로 갈립니다.
사도도 격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복음과 사도의 일을 소개한 바울은 이제 로마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는 아직 만나지 못한 이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8). 여기서 「온 세상」은 통계적 진술이라기보다, 그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졌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국의 중심 도시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읽다 보면 뜻밖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내가 여러분을 몹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여러분과 나누어 여러분을 굳게 세우고 싶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1 · 두루새김
다시 말해,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을 통해 함께 격려받고 싶다는 말입니다.로마서 1:12 · 두루새김
11절에서 주려던 사람이 12절에서는 받으려는 사람이 됩니다.
이 변화는 겸손해 보이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라고 해도 다른 신자들의 믿음에서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사도라는 직분 때문에 구별된 일을 맡았지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다고 밝히며, 그곳에서도 열매를 거두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1:13). 이 열매를 새롭게 믿게 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바로 앞에서 서로 격려하는 일을 이야기했으므로 이미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믿음의 성장까지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어가 아닌 말을 쓰는 사람에게나, 지혜로운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빚진 사람입니다.로마서 1:14 · 두루새김
「그리스어가 아닌 말을 쓰는 사람」은 그리스어를 쓰는 문화권에서 자신들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던 표현입니다. 오늘날의 「야만인」이라는 도덕적 비난으로 곧장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빚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생긴 빚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 복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에 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미 신자들이 있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1:15). 바울에게 복음은 한 번 듣고 졸업하는 기초 지식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사람들의 삶도 계속해서 복음에 의해 빚어지고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
이제 편지의 논증을 이끄는 핵심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그렇게 바라는 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 사람에게, 또 그리스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로마서 1:16 · 두루새김
왜 바울은 굳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고린도전서 1:23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시며 이방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 방식 가운데 하나였고,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선포하는 것은 당시의 권력과 명예에 대한 생각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능력은 사람들을 감탄시키는 웅장한 힘이나 정치적 지배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그 구원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먼저 유대 사람에게」라는 순서를 지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을 통해 왔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버리고 전혀 다른 계획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먼저라는 사실은 다른 민족을 밀어내는 특권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까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로마서 1:17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의」를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가 포함될 수 있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서 드러나며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옵니다. 이 표현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판결, 언약을 충실히 지켜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의로운 성품과 구원하시는 일이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읽기로 갈립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 행동 자체로 볼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인정해 주시는 의로운 지위로 볼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생각 속의 성질로만 소개되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순간 하박국의 말을 인용합니다. 하박국 2:4는 악인이 잘되고 정의가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던 예언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교만과 의로운 사람의 믿음, 곧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대조하셨습니다.
그 문맥에서 믿음은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약속이 아직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복음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인간은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 구원에 참여합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함께 향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히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의」를 판결로 읽는 해석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데, 언약에 대한 충실함으로 읽는 해석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데 무게를 둡니다. 이 견해들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또 「믿음으로」가 의로운 사람의 신분을 꾸미는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꾸미는지는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으며, 「믿음에서 믿음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근거한다는 뜻인지, 믿음이 퍼지고 성장한다는 뜻인지 논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도 드러난다
사실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로부터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온갖 태도와 옳지 않은 행동을 향한 분노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옳지 않은 행동으로 진리를 억누릅니다.로마서 1:18 · 두루새김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원문은 두 구절에서 같은 동사 「드러난다」(ἀποκαλύπτω)를 사용하며, 두루새김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와 「드러납니다」로 이 연결이 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분노를 서로 관련된 현실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과 충돌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논증에서 분노는 화가 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악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인간이 진리를 거스르고 서로를 해치는 일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실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억누른다는 말은 진리를 모른다는 말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억누른다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 있거나 다가왔지만,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영향력을 막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지어진 때부터 그분께서 만드신 것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1:20 · 두루새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통해 알려진다는 역설입니다. 시편 19:1이 하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면, 바울은 같은 주제를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다룹니다. 다만 바울은 만드신 세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복음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관한 앎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 앎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은 헛되게 되었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로마서 1:21 · 두루새김
바울은 인간의 문제를 먼저 잘못된 철학이나 도덕적 결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감사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습니다.
감사는 자신이 받은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 아니며, 자신의 생명과 삶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의를 지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무너지자 인간의 생각도 달라집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주장하면서 어리석어졌습니다(1:22).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알고 무엇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인간은 만드신 세상을 연구해 놀라운 지식을 얻으면서도, 그 세상을 지으신 분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대상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썩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과 새와 네발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을 본뜬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23 · 두루새김
창세기 1:26–27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다른 만드신 것들을 돌보고 다스리는 책임을 맡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방향이 뒤집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이제 만들어진 것들을 본뜬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우상 숭배는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물질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자체가 아닙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좋은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을 만드신 분 대신 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버린 뒤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4:15–18은 이스라엘이 남자나 여자, 짐승이나 새,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로마서 1:23의 목록과 매우 가까운 주제적 연결입니다. 시편 106:20에도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과 바꾸었다는 말씀이 나와, 바울의 「바꾸었습니다」와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넘겨주셨다
이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 대신 만들어진 것을 섬긴 결과를 설명합니다. 같은 표현이 세 번 반복됩니다.
· 24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음속 욕망에 따라 더러운 삶에 넘겨주셨습니다.」
· 26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끄러운 욕망에 넘겨주셨습니다.」
· 28절: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릇된 생각에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넘겨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대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거나 즉각적인 재앙이 일어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여 주는 심판은 다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려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선택한 방향으로 가도록 넘겨주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셨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분으로 분명히 밝히면서도, 인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거부와 하나님의 심판이 함께 작용합니다.
순서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고,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속 욕망에 따라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리자 인간이 자신의 몸과 욕망을 대하는 방식에도 뒤틀림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만드신 분 대신 만들어진 것을 받들고 섬겼습니다. 만드신 그분은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로마서 1:25 · 두루새김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의 자리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내용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찬양합니다. 인간이 만드신 분을 버리고 만들어진 것을 섬기는 모습을 설명하는 한복판에서, 자신은 그 만드신 분을 찬양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않은 영광을 바울은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를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이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본성을 거스르는 성관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26–27절은 오늘날에도 해석과 적용을 둘러싸고 깊은 논쟁이 있는 본문입니다.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내용과 그로부터 넓혀 나가는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27절은 남자와 남자가 성적 행위를 하는 모습을 분명히 묘사합니다. 26절은 여자들이 자연스러운 관계를 다른 관계로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를 27절만큼 분명히 밝히지는 않습니다. 26절을 여성 사이의 성관계로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27절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로」가 여성과 남성의 일을 나란히 보여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성과 남성 사이의 통상적이지 않은 성행위로 보는 해석도 있는데, 고대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표현이 반드시 성별이 같은 상대와의 관계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더 중요한 논쟁은 「자연스러운 관계」와 「자연에 어긋나는 관계」에서 말하는 본성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이를 창세기의 창조 질서와 연결하며, 본문의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 표현과 23절의 만드신 세상에 관한 묘사를 근거로 듭니다. 다른 해석들은 바울이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욕망과 지배 관계, 성적 착취 또는 우상 숭배와 연결된 관행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강조하며, 고대의 성에 관한 생각을 오늘날의 성적 지향이나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와 곧바로 같다고 보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본문에는 「서로를 향한 욕망」이 나타나므로, 본문을 오직 착취적 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한정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당시 특정한 성적 행위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과, 그 평가를 오늘날의 모든 성적 정체성 및 관계에 어느 범위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 자체를 별도의 개념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27절의 「마땅한 대가」가 무엇인지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으며, 이것을 특정한 질병이나 사건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독립적인 성윤리 규정집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라고 말한 그가, 여기서도 자연스러운 관계를 다른 관계로 「바꾸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바꿈의 언어가 이어집니다. 그 평가를 전체 논증과 분리하여 특정한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독립적인 구절로 사용하면, 바울이 실제로 쌓아 가는 논증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는 인간의 성적 행동을 언급한 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인간의 생각과 사회적 관계 전체로 논의를 넓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일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릇된 생각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1:28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시험하여 인정하다」와 「인정받지 못한, 부적합한」이라는 서로 연결된 말이 맞물리는데, 두루새김은 이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은」(δοκιμάζω)과 「그릇된 생각」(ἀδόκιμος)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일지, 무엇을 버릴지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의 결과는 자신의 판단 능력 자체가 뒤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을 거부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죄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관계의 붕괴다
마지막 단락에 이르면 바울은 여러 가지 악행을 나열합니다.
옳지 않은 일과 악한 짓, 욕심과 남을 해치려는 마음, 시기와 살인, 다툼과 속임, 수군거림과 헐뜯음, 잘난 체하는 일과 허풍,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일까지 이어집니다. 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 옆에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행동들이 놓여 있습니다.
수군거림과 헐뜯음이 있습니다. 잘난 체하는 일과 허풍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이 목록은 앞에 나온 우상 숭배와 무관한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의 관계가 뒤바뀌자,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나타납니다. 다만 우상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목록의 모든 악행을 저지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폭넓게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악의 모습을 함께 제시합니다.
목록의 끝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정이 없고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놓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가 무너집니다. 정이 없으면 마땅히 돌보아야 할 사람에게도 마음을 닫고,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돕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목록의 마지막 절은 한층 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옳다고 여깁니다.로마서 1:32 · 두루새김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잘못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뒤 부끄러워하고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은 한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관계로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서로의 악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찬양할 것인가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를 향해 이 말을 하고 있을까?
로마서 1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독자는 쉽게 바울과 같은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특히 유대교적 전통에 익숙한 독자라면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을 잇는 이런 설명이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의 이방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대 사람들과 자신을 그 심판 바깥에 세우려는 것일까요? 1장만 읽으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2장 첫머리에서 바울은 갑자기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향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어떤 집단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길게 설명한다고 해서, 독자가 자동으로 그 죄를 판단하는 안전한 자리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지혜서 13–15장은 만들어진 세상을 보고도 만드신 분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상 숭배의 위험을 길게 설명하며, 14장에서는 우상 숭배와 각종 도덕적 타락이 연결되기도 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이러한 유대교적 우상 비판 전통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지혜서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보다, 관련된 생각과 말하는 방식의 전통을 활용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작된 감사의 편지
이제 로마서 1장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앞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대조가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8 · 두루새김
21절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의 편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아직 만나지 못한 로마 신자들의 믿음을 두고 감사합니다.
두 종류의 인간관계도 서로 마주 놓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과 「서로의 믿음을 통해 함께 격려받고」 싶어 합니다(1:12).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는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옳다고」 여깁니다(1:32). 한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악이 서로 옳다고 인정할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꾼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감사였고, 그와 함께 서로를 바르게 대하는 관계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바울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없다면, 바울의 긴 설명은 절망적인 진단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노를 설명하기 전에 이미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는 길이 여러 번 막혔어도 로마의 신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그들을 직접 만나지 못해도 그들의 믿음 때문에 기뻐합니다.
로마서 1장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다는 고발로 깊어집니다. 그러나 그 장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그 고발보다 먼저 들리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울의 목소리입니다.
그는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길은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이미 로마의 신자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