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가

로마서 3장에는 뜻밖에도 하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묻다가, 시편을 인용해 「주님께서는 … 재판을 받으실 때 이기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하나님 자신이 피고석에 서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믿을 만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셨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리고 주장을 펼쳐 가면서 법정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19절에서는 온 세상의 입이 막힙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4절에 이르면 바로 그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일까요? 반대로 하나님이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면, 누가 그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3장은 이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의로움을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옳지 않게 살아온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바울이 제시하는 대답의 중심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113장 본문 읽기 →

인간이 신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로마서 3:1–4 본문 →

그렇다면 유대 사람에게는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할례를 받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로마서 3:1 · 두루새김

바울은 앞 장에서 펼친 주장에 대해 생겨날 만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유대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모든 면에서 유익이 큽니다. 우선,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 · 두루새김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규칙이나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원문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말씀이나 신탁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맡았다」(πιστεύω)는 말에는 받아 보존하고 책임 있게 다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소유할 권리가 아니라,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라지겠습니까?로마서 3:3 · 두루새김

「믿지 않았다면」(ἀπιστέω)에 담긴 원어는 문맥에 따라 신실하지 못함을 뜻할 수 있고, 「신실하심」(πίστις)에 해당하는 말은 믿음과 신실함을 모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질문에는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서로 마주 놓여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며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쟁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하신 말씀으로 옳으시다고 인정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이기실 것입니다.」로마서 3:4 · 두루새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한 부정을 나타낼 때 반복해서 쓰는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의 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

바울이 인용한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시편입니다. 표제는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맺은 뒤 나단의 책망을 받은 사건과 연결합니다(사무엘하 11–12장). 다윗은 죄를 감추거나 하나님의 판단이 지나치다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심판하셔도 그 판결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바울은 그 고백으로 하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을 그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도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닌지 따집니다. 그러나 다윗의 죄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신실하지 못했던 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실제 문제이고, 바울은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이유는 인간이 신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들으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선명해진다면, 인간의 죄도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편 51:4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의로우시다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바울이 따르는 표현은 하나님이 판단받으시거나 다투시는 상황으로 읽힐 수 있고, 두루새김은 그 가운데 「재판을 받으실 때」라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나쁜 일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죄를 지어도 되는가

로마서 3:5–8 본문 →

그런데 우리가 옳지 않게 행동한 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옳지 않으시다는 말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의 생각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로마서 3:5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앞선 주장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어떤 사람의 거짓말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정직함이 더욱 선명해졌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사람이 칭찬받아야 할까요? 정직함이 드러났다는 사실이 거짓말 자체를 올바른 행동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는 사실과, 그 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로마서 3:6 · 두루새김

인간의 잘못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면, 하나님이 잘못을 심판하실 근거가 사라집니다. 바울은 마침내 그 논리를 노골적인 문장으로 드러냅니다.

그런 식이라면 「좋은 일이 생기도록 악한 일을 하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며 우리를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판받는 것은 마땅합니다.로마서 3:8 · 두루새김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그의 복음을 왜곡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보다 크다고 말하면, 죄를 더 지을수록 은혜가 더 크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정당화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지만, 죄를 선하다고 선언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를 죄로 판단하시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직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처한 상황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입에서 시작하여 발과 눈까지 — 죄 아래 놓인 인간

로마서 3:9–18 본문 →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더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이미 고발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9 · 두루새김

2절에서는 유대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유익이 크다고 했는데, 9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특권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모두 죄를 한 번 이상 지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죄는 개별적인 잘못들을 더한 것 이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처럼 묘사됩니다. 바울은 이 진단을 여러 성경 구절을 이어 붙여 입증합니다.

서로 다른 성경 구절이 하나의 인간을 그린다

먼저 인간의 내적인 상태가 나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서 3:10 · 두루새김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11절)에 이어 입과 말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그들은 혀로 남을 속이곤 했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로마서 3:13 · 두루새김

그리고 발과 길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발은 피를 흘리게 하는 일에 빠르다.」로마서 3:15 · 두루새김

마지막에는 눈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로마서 3:18 · 두루새김

생각,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인간이 죄를 짓는 모습을 몸 전체의 움직임을 따라가듯 묘사합니다.

특히 말에 관한 표현이 모여 있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로 남을 속이며,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은 저주와 독한 말로 가득합니다.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를 넘어, 마음에서 나온 악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발은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발은 피를 흘리게 하는 일에 빠르고, 그 길에는 파괴와 비참함이 있으며,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9장에서 온 것으로, 본래 이사야가 이스라엘 사회에 퍼진 불의와 폭력을 고발하던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내부의 불의를 고발하던 예언자의 말을 이제 모든 인간을 향한 주장에 포함합니다.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의 죄를 판단하려고 성경을 들면, 그 성경은 먼저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던 말씀이 자기 자신에게도 들려오는 것입니다.

정말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일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인간이 어떤 순간에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원래 인용된 시편 14편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이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시편 14:5). 그 시편만 떼어 읽으면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대조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인간이 가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심리학적 판단이 아닙니다.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죄의 모습과 정도는 다르지만, 그 차이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공동의 현실을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그 현실의 마지막 모습이 18절의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입니다. 이것은 인용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벌이 무서워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판단 앞에 자신을 두는 태도입니다. 그 태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당화합니다.

바울이 보여 주는 죄는 나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삶 전체가 방향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18절의 인용문은 하나의 시편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시편 14:1–3과 53:1–3, 시편 5:9, 140:3, 10:7, 이사야 59:7–8, 시편 36:1 등의 표현을 이어 하나의 주장을 세우는 인용 방식입니다.

율법이 마침내 모든 입을 막는다

로마서 3:19–20 본문 →

그런데 우리는 율법이 하는 모든 말이 율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의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3:19 · 두루새김

속임수와 저주로 가득했던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입이 이제 막힙니다.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입을 막고」는 법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던 사람이 증거 앞에서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된 모습입니다. 율법은 먼저 율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에게 말하므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경으로 이방 사람만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유대 사람도 특권을 근거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방 사람도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0 · 두루새김

율법이 잘못된 가르침이기 때문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죄인이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울은 현재 체중을 알려 주지만, 저울에 올라섰다는 사실만으로 몸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율법도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지만, 율법을 소유하거나 듣는 것 자체가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약에서 율법은 진단 도구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살아갈 길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선물을 무가치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의로운 판정을 얻으려는 인간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한 읽기는 율법에 대한 순종 전체로 보고, 인간의 순종을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할례와 음식 규정처럼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하는 실천을 강조하며, 뒤이어 나오는 할례와 이방 사람의 구원 문제를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두 관점 가운데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가 핵심 문제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그 율법을 받은 사람도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입이 막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편지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이제는」 —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로마서 3:21–22 본문 →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합니다.로마서 3:21 · 두루새김

이 짧은 문장은 로마서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제안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인간에게 더 노력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주장의 새로운 단계를 열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드러난 새로운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언젠가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드러났다고 선언합니다.

율법과 별개인데 율법이 증언한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별개로」 드러났는데,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율법과 별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경과 관계없는 새로운 종교적 발명품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움은 하나님의 옛 약속을 폐기하는 새로움이 아니라, 약속하신 일이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났다는 새로움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증인으로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로마서 3:22 · 두루새김

원문은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구조입니다. 한쪽은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읽습니다. 바로 뒤에 「믿는 모든 사람에게」가 나오고, 28절에서도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말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다른 쪽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으로 읽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근거라는 것이며, 원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믿는 모든 사람」을 구별해서 말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두 읽기는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믿음이 각각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달리 설명합니다.

두루새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읽기를 따랐지만, 문법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분리되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의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른다는 것은 본문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즉시 이 복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밝힙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 모두가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로마서 3:23–24 본문 →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해, 은혜로 사람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로마서 3:23–24 · 두루새김

이 두 구절은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 때문에 그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와 연결되는 읽기입니다. 다른 해석은 마지막 때에 받도록 되어 있는 영광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강조합니다. 로마서 뒤쪽에서 신자들이 장차 받을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점과 연결됩니다. 3:23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 잘못 몇 가지보다 깊은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이르지 못했고, 그 문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예상 밖의 선언이 나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은 율법을 지킨 공로에 대한 품삯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값없이 주어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속량은 고대 세계에서 값을 치르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과 연결되는 말이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원하셨고, 출애굽기 6:6은 하나님이 그들을 속량하시겠다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속량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했던 바울은 이제 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속량은 법정에서 무죄라는 말을 듣는 장면만이 아니라,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사건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바울은 여기서 속량의 대가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3절의 모든 사람과 24절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이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믿음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최종적인 구원을 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에서 차별이 없듯이, 은혜를 받는 길에서도 민족에 따른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면 질문이 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 죄를 모른 척하시는 걸까요? 바울은 그 답을 설명하기 위해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속죄의 자리 —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만나는 곳

로마서 3:25–26 본문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속죄의 자리로 내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는 속죄를 믿음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시며 전에 지은 죄들을 벌하지 않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하셨습니다.로마서 3:25 · 두루새김

예수님의 피, 믿음, 속죄, 하나님의 의, 전에 지은 죄, 하나님의 참고 기다리심이 한 구절 안에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면서,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 두 사실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까요? 바울은 그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언약궤 위에 놓인 덮개

「속죄의 자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입니다. 이 낱말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언약궤 위에 놓인 덮개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25:17–22에 따르면 순금으로 만든 이 덮개 양쪽에는 그룹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위한 피를 뿌립니다. 이 의식은 백성의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성소를 깨끗하게 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속죄의 자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 죄를 깨끗하게 씻음,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바로 이 낱말을 사용합니다.

이 낱말은 언약궤의 덮개 곧 속죄가 이루어지는 자리, 죄를 씻는 수단이나 속죄 제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소로 읽기가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전의 배경, 죄를 없애는 속죄, 하나님의 드러나심 가운데 무엇이 앞에 서는지가 달라집니다. 이 논쟁에서 하나의 견해가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본문이 특정한 속죄 이론의 모든 세부 사항을 가르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중심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를 다루시며, 바로 그 사건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가

레위기 17:11은 생명이 피에 있으며, 하나님이 피를 제단에서 속죄하도록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피를 말할 때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피는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한 물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바울은 그 죽음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에 지은 죄들을 그냥 지나가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아시면서도 전에 지은 죄들을 「참고 기다리시며 … 벌하지 않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재판장이 범죄를 알면서 이유 없이 눈감아 준다면 그의 공정함에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의로운 재판장이신 걸까요?

하나님은 죄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셔서 지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속죄의 자리로 내세우심으로써, 죄를 다루시면서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죄인을 향한 자비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의롭게 하시는 분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셔서, 자신이 의로우시며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임을 보이려 하셨습니다.로마서 3:26 · 두루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는 사실을 포기하면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모든 죄인을 구원 없이 버리시는 분으로만 나타나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면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의롭다고 인정하시는」은 이 문맥에서 법정의 판결과 관련된 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의로운 지위에 두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했으므로, 이것은 죄인이 처음부터 무죄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속량을 통해 죄인의 지위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이 판결이 실제 삶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로마서에서 더 다루어집니다.

인간이 신실하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과 의로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진 예시가 아니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로마서 3:27–28 본문 →

그렇다면 자랑할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자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떤 법이 자랑을 막았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로마서 3:27 · 두루새김

율법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할례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도덕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속량에 있다면, 이런 자랑은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자랑은 교만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무엇에 근거하여 주장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 별개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8 · 두루새김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선한 행동의 가치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27절의 「믿음의 법」은 조금 낯선 표현입니다. 원문에서 「율법」(νόμος)과 「법」은 같은 낱말이며, 이 낱말은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원칙이나 규범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법」은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방식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려 했는데, 그 자랑을 막는 것도 하나의 법, 곧 믿음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세울 새로운 공로를 쌓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구원의 길도 민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가

로마서 3:29–30 본문 →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로마서 3:29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근본적입니다.

신명기 6:4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을 많은 신을 섬기는 민족들과 구별하는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고백에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한 분이시라면, 그분은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할례받은 사람을 믿음에 근거해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도 그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로마서 3:30 · 두루새김

바울은 두 집단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할례라는 언약의 표지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두 개의 독립적인 길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를 버려야 이방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이스라엘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방 사람 역시 그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선언은 개인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 앞에 함께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믿음은 율법을 없애는가, 굳게 세우는가

로마서 3:31 본문 →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로 만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로마서 3:31 · 두루새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아무도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별개로 드러났다고 하면서도, 율법과 예언자들이 그 의를 증언한다고 밝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이스라엘의 성경과 끊어진 길이 아니라, 율법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는 4장에서 아브라함과 할례의 관계를 통해 더 밝혀집니다.

3장의 처음과 끝에는 같은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3절은 몇 사람이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라지겠습니까?」 묻고, 31절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로 만듭니까?」 묻습니다. 두루새김은 서로 다른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곳 모두 효력을 없앤다는 뜻의 같은 동사 카타르게오(καταργέω)가 쓰입니다.

그리고 두 질문에 대한 대답도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하나님의 목적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의롭게 되는 사람의 입에서는 무엇이 사라지는가

로마서 3:1–31 본문 →

로마서 3장에는 두 종류의 입이 등장합니다. 19절에서는 율법 앞에서 모든 입이 막히고, 27절에서는 자랑이 설 자리를 잃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어서 입이 막힌 자리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여기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바로 그 일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시라는 것과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그래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인정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하나님이 재판받으시는 듯한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됩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입이 막히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말은 인간의 유죄 선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해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입이 막힌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