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믿다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을까요?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일까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까지 따랐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를 받았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전혀 다른 장면을 찾아갑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약속된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에게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 순간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짧은 문장을 로마서 4장 전체의 중심에 놓고,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를 세심하게 살핍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보다도 오래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아직 이루어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하나님의 약속이 왜 은혜에 근거해야 하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로마서 3장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길을 선포했다면, 4장은 그 길이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 안에 이미 놓여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장의 끝에 이르면 독자는 한 가지를 더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강한 확신을 지닌 사람이었는가가 아닙니다.
그가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아브라함
그렇다면 핏줄로 이어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었다고 해야 합니까?로마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을 불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의 후손에게 땅과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에게 아브라함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묻습니다.
「핏줄로」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문법적으로 조금 열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핏줄로 이어진 우리 조상이라는 말일 수도 있고,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묻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읽으면 질문 자체가 아브라함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을 문제 삼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핏줄과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한 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로마서 4:2 · 두루새김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성경을 인용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다」라고 합니다.로마서 4:3 · 두루새김
창세기 15:6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큰 복을 주신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그 복을 이어받을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고, 그의 후손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특별히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일상적인 경제 활동의 말로 그 차이를 설명합니다.
일한 사람에게 주는 대가는 은혜로 주는 선물이 아니라 마땅히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겨집니다.로마서 4:4 · 두루새김
고용주는 노동자가 일한 만큼 대가를 지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돈은 고용주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서 주는 선물이 아니라 노동자가 받을 몫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이 이와 같다면, 인간은 자신이 이루어 낸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로움을 요구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은 인간이 이룬 것에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분이 됩니다.
바울은 이와 다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로마서 4:5 · 두루새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를 옳다고 선언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내세울 수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의로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새로운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할 수 없다면,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랑함으로써 같은 자리에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또 하나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일을 하지 않고도」라고 말할 때, 그는 게으름을 칭찬하거나 믿는 사람이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 근거가 인간이 한 일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은 강조점에 따라 두 가지로 읽힙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일의 대가와 은혜의 대비를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선물 사이의 구별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창세기 15:1에 이미 등장하는 상급과 후손의 약속까지 고려하면서, 이 설명이 아브라함의 세계적인 가족을 세우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읽고, 5절의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이방 죄인들이 언약 공동체에 들어오는 일과 연결합니다. 어느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과 여러 민족을 포함하는 언약의 가족 가운데 무엇이 더 강조되는지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곧이어 아브라함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그의 관심은 한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는가에 머물지 않고, 그렇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아브라함이 누구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나아갑니다.
다윗에게는 다른 장부가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다윗을 등장시킵니다.
이처럼 다윗도 하나님께서 행위와 별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복을 말합니다.로마서 4:6 · 두루새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인정되었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복은 주님께서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용서받고 죄가 덮인 사람들은 복이 있다.」로마서 4:7 · 두루새김
「주님께서 죄의 책임을 결코 묻지 않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로마서 4: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32:1–2에서 왔습니다. 시편 32편은 죄를 감추던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 용서를 경험한 일을 노래합니다. 시편의 뒤쪽까지 읽으면 죄를 숨기는 동안 겪었던 고통과, 죄를 고백한 뒤의 기쁨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윗이 말하는 복은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지만 용서받은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여기서 로마서 4장에서 되풀이되는 그리스어 낱말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가 드러납니다. 계산하다, 셈에 넣다, 어떤 것으로 여기거나 인정한다는 뜻의 낱말로, 두루새김은 문맥에 따라 「여겨집니다」, 「인정됩니다」, 「책임을 … 묻지 않으시는」 등으로 옮깁니다.
바울은 이 낱말로 서로 다른 세 상황을 설명합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주는 대가는 마땅히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겨집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같은 계산의 말이지만, 첫 번째는 마땅히 지급해야 할 몫을 계산하는 일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됩니다.
8절의 「죄의 책임을 결코 묻지 않으시는」은 하나님이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32편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셔서, 그 죄가 더 이상 그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의로움이 인간이 이루어 낸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이 죄의 용서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윗이 노래한 이 복은 누구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요?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질까요? 바울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면 이런 복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만 있습니까,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4:9 · 두루새김
바울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창세기의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를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의로 인정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뒤였습니까, 받기 전이었습니까? 받은 뒤가 아니라 받기 전이었습니다.로마서 4:10 · 두루새김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의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례에 관한 명령은 창세기 17장에서 등장합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일이 먼저였고, 할례를 받은 일이 나중이었습니다.
이 순서는 우연한 역사적 정보가 아닙니다.
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면, 할례를 받기 전의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할례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뒤에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할례는 그가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인해 주는 도장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받지 않은 채 믿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도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4:11 · 두루새김
표징은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 표시이고, 도장은 이미 주어진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도록 만들어 준 원인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인해 주는 표시였습니다. 창세기 17:11에서도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불립니다. 바울은 그 본래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 창세기 15장의 사건과 연결하여 그 순서를 설명합니다.
할례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든 첫 번째 조건이 아니라면, 할례받지 않은 사람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부류의 자녀가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고 믿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할례받은 사람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4:12 · 두루새김
할례받은 사람도 단지 할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걸었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 사람이 유대 사람을 대신하여 아브라함의 유일한 후손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할례받지 않은 믿는 사람과 할례받고 믿는 사람이 함께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같은 핏줄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와 같은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핏줄은 선택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은 서로 다른 민족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족에게 주어진 약속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바울은 이제 땅과 그것을 물려받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가나안 땅의 약속이 세상의 상속으로 넓어지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이 되리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난 의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서 4:13 · 두루새김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2:7, 13:14–17, 15:18, 17:8). 그런데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이 된다는 문장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왜 약속의 범위를 세상으로 넓혀 말할까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땅에 관한 약속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가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창세기 17:4–5에서는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에는 처음부터 한 민족과 한 지역을 넘어서는 방향이 들어 있었고, 바울은 이 약속을 예수님의 복음과 여러 민족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읽습니다.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약속의 땅이 온 세상으로 넓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아브라함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는 견해,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새로운 창조를 물려받는 것으로 읽는 관점이 있습니다. 어느 의미를 강조할지는 논쟁이 있지만, 바울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가나안 땅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약속이 모세의 율법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면, 그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도 그에 따라 제한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약속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지닌 여러 민족도 그 약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율법을 근거로 약속된 것을 물려받는 것이라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4:14 · 두루새김
약속과 율법에 따른 의무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였고, 그 당시 그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면,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온전히 순종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앞서 바울이 설명한 인간의 죄를 고려하면, 그러한 근거 위에서 약속은 굳게 설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율법을 어기는 일도 없습니다.로마서 4:15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도 죄 아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어기는 일」은 정해진 명령이나 규칙을 넘어서는 위반을 뜻합니다. 명령이 주어지면 그 명령을 어기는 행동도 분명해지므로, 율법은 인간의 잘못을 구체적인 위반으로 드러내며 그에 따른 책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율법을 지키는 능력에 달려 있다면, 그 약속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 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왜 믿음이어야 약속이 굳게 서는가
그러므로 약속을 물려받는 것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는 약속이 은혜로 주어져 모든 후손에게 확실히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후손들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후손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로마서 4:16 · 두루새김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 결과 약속이 확실히 보장됩니다.
바울은 믿음이 율법보다 쉽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인간이 이루어 낸 것을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굳게 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확실성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완벽한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응답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열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한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약속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말씀과 어울려야 합니다. 바울은 성경이 이미 아브라함을 어떻게 불렀는지 보여 줍니다.
아직 약속된 아들이 없는데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 부르시는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세웠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로마서 4:17 · 두루새김
바울은 창세기 17:5를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의 이름은 본래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라는 뜻이 담긴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사라에게서 아직 약속된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능력에서 찾습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것만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직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인간은 대개 이미 주어진 가능성 안에서 미래를 계획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능력과 자원이 있는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미래는 아브라함이 가진 가능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이라는 표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의 창조 사건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후손과 여러 민족을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 안에서 부르신다는 뜻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입니다.로마서 4:18 · 두루새김
인간적인 가능성을 기준으로 보면 희망을 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조건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희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현실에 근거가 보이지 않더라도, 약속하신 분을 신뢰하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의 희망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낙관적으로 평가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의 몸과 사라의 자궁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현실과 가장 날카롭게 부딪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100살쯤 되어, 자기 몸도 사라의 자궁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로마서 4:19 · 두루새김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라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기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런 현실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현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현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웃지 않았는가
창세기 17:17에서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백 살 된 사람에게 아들이 태어날 수 있는지, 아흔 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18절에서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기까지 하고, 창세기 16장에서는 사라가 아들을 얻지 못하자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으려 했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믿지 못해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힘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도 있으시다고 온전히 확신했습니다.로마서 4:20–21 · 두루새김
이 둘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한 해석은 아브라함의 웃음을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놀라워한 기쁨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의심과 불확실성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바울은 그의 모든 반응을 빠짐없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그의 믿음을 신학적으로 조명한다고 봅니다. 웃음을 단순한 기쁨으로만 설명하면 창세기 17:18의 간청까지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설명을 근거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 의심이나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는 순종과 함께 두려움과 불확실성도 보여 주고, 바울은 그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두 본문의 목적이 서로 다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의심이라는 감정이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최종적인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20–21절에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약속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신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한계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셨습니다.로마서 4:22 · 두루새김
처음 등장했던 창세기 15:6의 문장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 미래를 이루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막연히 잘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종교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살펴보았습니다」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거나 깊이 생각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일부 필사본에는 부정어가 들어 있어 아브라함이 자신의 몸을 살펴보지 않았다고 읽힙니다. 그러나 주요한 비평 본문은 부정어가 없는 읽기를 채택하며, 그에 따르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현실을 분명히 살펴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믿음을 현실을 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느냐, 현실을 알면서도 신뢰하는 것으로 이해하느냐를 바꿉니다.
아브라함을 위해 기록된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 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의로 인정되었다」는 기록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믿음이 의로 인정될 것입니다.로마서 4:23–24 · 두루새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는 과거의 위대한 인물에 관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도 관련됩니다. 다만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으니 우리도 무엇이든 강하게 믿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두 믿음의 대상은 같은 하나님이지만, 그분이 이루신 일을 바라보는 위치는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반면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건에 근거합니다.
아브라함의 몸과 사라의 자궁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표현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자녀를 낳을 인간적인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이 두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나타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에 관한 선언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과 연결합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분
예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려고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로마서 4:25 · 두루새김
앞부분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뒷부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우리」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별개의 사건으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두 사건은 함께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이룹니다.
「넘겨지셨습니다」라는 말의 의미
「넘겨지셨습니다」는 넘겨주다, 내주다, 인도하다는 뜻의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시고, 재판과 처형을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4:25에서는 넘겨주신 분이 문장에 직접 나타나지 않아, 이 구절 하나만으로 누가 예수님을 넘겨주었는지를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로마서 8:32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셨다고 말하므로, 4:25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배경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 죽음을 우리와 무관한 비극으로 제시하지 않고, 「우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만으로 문장이 끝나지 않습니다.
왜 부활이 의롭게 됨과 연결되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옳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확인하는 데만 쓰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속합니다.
원문에서는 죽음과 부활 모두에 같은 전치사 구조가 쓰이는데, 이 구조는 문맥에 따라 이유를 나타내기도 하고 목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죽음으로 이루어진 일을 확인하고 드러낸다는 읽기와, 부활 자체가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에 꼭 필요하다는 읽기 등으로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뒷부분을 「인정하시려고」라고 옮겨 목적을 드러냅니다. 이 해석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문법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과 연결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행동까지 포함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의 고통을 많은 사람의 죄와 연결하며, 죄 때문에 넘겨지는 종의 모습은 로마서 4:25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바울이 여기서 이사야 53장의 특정 문장을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므로, 두 본문의 관련성은 말과 주제의 공통점에 근거하여 살펴야 합니다. 부활과 의롭게 됨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활이 그 성취를 확인하거나 공개적으로 드러낸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해석은 부활 자체가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사건이라고 강조하며, 이 경우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이지만 하나의 구원 사건을 이룹니다. 이 전치사 구조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의로움과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의 연결 속에서 설명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가
로마서 4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바울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믿었기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약속을 받았기에 그 약속은 율법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를 자기 능력으로 이룰 수 없었기에 그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달려 있었고,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몸을 바라보면서도 믿었기에 바울은 그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는 중심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고 순종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그 행동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어 낸 대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에 인정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야 하는 모든 책임을 짊어진 사람처럼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연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은혜와 신실하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한 번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자기 몸을 살펴봅니다. 이제 백 살쯤 되었습니다. 사라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기를 지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그의 눈앞에는 아직 그 약속을 이룰 만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것은 자신의 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으시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바울은 그분에 관한 한 문장으로 로마서 4장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려고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